하느님 백성의 역사적 역할
에즈 6,7-20; 루카 8,19-21 /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2023.9.26.; 이기우 신부
바빌론에 끌려와 유배생활을 하던 유다인들에게 귀환령을 내리고 건축물자까지 지원해 주며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키루스 임금이 허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지를 점령하고 있던 관리들은 성전 건축을 반대하는 탄원을 올려서 공사를 중지시켰습니다. 아마도 그들로서는 키루스 임금의 관대한 조치가 못마땅했던 모양이고, 성전이 다 지어지게 되면 일자리를 잃어버릴까봐 걱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70년 동안 유배살이를 하다가 뜻밖의 해방과 귀환령에 환호하던 유다인들은 그와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에 대해 놀란 귀환 유다인들은 궁리 끝에 키루스 임금의 자리를 이은 다리우스 임금에게 청하여 공사를 재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정의의 승리요, 유다인들의 승리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완공된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자부심의 상징이었습니다.
에즈라 사제를 비롯한 귀환 유다인들은 성전에서 다시 올려지는 경신례와 그 안에서 선포된 하느님의 율법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종교적으로 재건하려는 열망에 불타있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예수님 시대까지 지속되었는데, 에즈라 시대 이후 출현한 바리사이들에 의해 율법의 정신보다는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자 하는 일종의 율법주의가 성행하게 되고, 예루살렘 성전은 새로이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층으로 부상한 사제계급, 즉 사두가이가 저지르는 온갖 범죄의 온상의 소굴이 되면서 예수님께서 정화하셔야 할 복마전(伏魔展)이 되고 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병든 이들을 고쳐주고 마귀 들린 이들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면서 백성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율법의 자구(字句) 해석에 골몰하면서 백성에게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기를 강요하던 바리사이들을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대놓고 비판하시자, 맞불작전을 전개하기로 작정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두목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낸다는 악소문을 퍼뜨리게 되고 이 소문이 친척 형제들의 집에 얹혀 사시던 성모 마리아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친척 형제들과 함께 군중을 가르치고 계시던 예수님을 만류하러 찾아갔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대놓고 군중 앞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이다”(루카 8,21).
바빌론 유배 이후 이스라엘의 종교적 재건을 위해 힘쓰던 에즈라 사제 못지않게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새로이 모으려던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이나 바리사이들과 대결해야 했던 엄중한 상황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혈육보다도 더 소중했습니다. 특히 악랄하기까지 한 헛소문을 듣고 친척 형제들까지 부화뇌동(附和雷同)하여 어머니까지 모시고 쫓아오는 이 상황에 이르러서는, 비록 어머니께는 다소 죄송한 노릇이었을지라도, 귀가 얇은 친척 형제들의 소행에 동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겁니다.
교회는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참이스라엘입니다. 더욱이 한국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한 나머지 치명까지도 감내하면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바빌론 유배생활 동안 그 유배가 풀리기를 학수고대하며 하느님께 기도했던 유다인들처럼, 그리고 박해시대에 박해가 종식되고 신앙과 선교의 자유가 주어지기를 기다리며 하느님의 뜻에 충실했던 우리 신앙선조들처럼, 우리 역시 갈라진 겨레의 일치와 민족 복음화를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실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감내해야 했던 유배기간이 70년이었는데, “거룩한 주의 나라 이 땅에 펴주소서.” 하고 기도하며 우리 신앙선조들이 감내해야 했던 박해기간은 무려 백년이었습니다.
또한 유배 이후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하느님의 법에 따라 살아가기로 다짐했던 유다인들처럼, 그리고 신앙과 선교의 자유를 얻은 이후 교회의 성장에 매진했던 우리 선배 신앙인들처럼, 우리도 언젠가 하느님께서 분단의 벽을 허물어주시고 온 겨레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그 날을 앞당겨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역사는 인간의 자유와 하느님의 섭리가 함께 작용하는 시공(時空)의 장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남용해서 죄와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하느님께서는 이를 응징하신다는 역사적 교훈을 알고 있는 우리는 또한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는 역사의 진리도 알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참혹한 박해 속에서도 치명과 인내로써 우리 민족 역사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통치와 남북의 분단 그리고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무죄한 이들을 희생시킨 선조들의 죗값도 치룰 만큼 치루었습니다. 이제 우리 민족의 고난은 바닥을 치고 올라갈 일만 남았습니다. 더 이상 악화될래야 악화될 수 없을 정도로 엄중한 최근의 안보상황 역시 동 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상식에 비추어 보면, 앞으로 다가올 우리 민족의 장래는 조심스럽게 낙관할 수 있는 근거를 찾습니다. 그 어떤 세력도 다시는 이 땅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결국 역사를 하느님의 섭리대로 이끄는 변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백성들의 존재와 실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