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선 사도요한 신부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2열왕기 24,8-17 마태오 7,21-29
주님! 주님!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 모두에게
당신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주님! 주님! 하며 당신을 찾기만 한다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기도를 할 때,
예수님께서 게세마니 동산에서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 39)”
하고 기도하신 모습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어려운 처지나 간절한 바람이 있을 때,
자신의 개인적인 원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묻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래서 표현으로는 “아버지,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바람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주님! 저는 다른 것은 잘 모릅니다.
제가 단지 원하는 것은 '당신 뜻대로 마시고 제 뜻대로 해주이소!'
이번에도 제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제부터는 기도고 뭐고 다 그만 둘랍니더
(기도든 신앙생활이든 모두 그만 둘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하느님께 협박성 거래를 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는
실천적 행동도 없이 말로만 믿음의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내 이름으로 마귀를 좋고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했다고 할지 모르나
나에 대한 믿음도 가르침에 따르는 행동도 없는 너희는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나의 뜻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비바람과 폭풍우가 쳐도 안전한 반석위에 집을 짓는 현명하고 슬기로운 사람이지만,
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비바람이 치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에
당신에 대해서 배워서 알고 있다거나, 당신의 이름으로 불렀고, 기적을 행한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매일의 생활 속에서 당신의 뜻을 얼마나 실천했는지?
그리고 자신과 가족들 안에서, 이웃 형제들과 직장동료들 안에서,
세상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행을 했느냐가
구원의 열쇠라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본질이신 사랑을 찾고 실천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이 싫어하는 일들을 한 가지라도 내가 먼저 실천하는 행동을 보여 드릴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나의 귀한 아이들아! 너의 그 모습을 통하여 나의 사랑이 드러났으니
너희에게 멋진 선물이 내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아멘
부산교구 김명선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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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철 신부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2열왕기 24,8-17 마태오 7,21-29
내 뜻대로 되기를 얼마나 많이 기도했던가?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지 말아라.” 서울대교구 성소지에 실린 주님의 기도에 관한 내용 중의 일부다.
내 뜻대로 되기를 얼마나 많이 기도했던가?
신학생 때 이런 일이 있었다.
하루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중에 ‘만약에 아버지의 뜻이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날부터 한 달간 나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신부가 너무나 되고 싶었고, 신학교에서 나온다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죽어도 신부가 되어야 한다고 한 달간 하느님께 울부짖었다.
그렇게 한 달간 버티다가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교수 신부님이나 주교님이 ‘자네의 길은 이 길이 아니네’ 하고 말씀해 주신다면
기꺼이 그 길을 가겠다고 하느님께 말씀드리면서, 그렇지만 ‘지금은 신학교에 있으니
지금 당신의 뜻은 신부가 되는 것이라고 알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만을 행하고자 할 때 얼마나 큰 자유를 느끼게 되는지 모른다.
사실 그때까지 나를 쫓아내지는 않을까 하며 얼마나 교수 신부님들의 눈치를 보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고백을 하고 난 후, 신부님들 앞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신부님들의 도움을 받아 사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었고, 그래서 더 자유로워졌다.
일상생활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뜻보다는 내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정말로 ‘하느님 아버지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겠다.
서울대교구 서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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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영 그레고리오 신부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2열왕기 24,8-17 마태오 7,21-29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평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이 누구인가를 잘 알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부였고 농부였고 병자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양과 이리, 가시나무와 포도, 엉겅퀴와 무화과와 같은 비유로 들어 말하면
그들은 잘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이 배운 학식 있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식인도 철학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소위 특별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이미 사라져버린 그 유별난 무엇인가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는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겸허함이며 신뢰감입니다.
농부가 벌판에 씨를 뿌립니다. 그 씨앗들은 자라날 것이고 적절한 계절이 오면 반드시
싹이 틀 것이라는 것을 농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씨앗들은 반드시 싹을 틔웁니다.
농부는 기다리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적절한 계절이 오면 씨앗은 싹이 트고 열매를 맺습니다.
거기에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무에게는 속임수라는 것이 없습니다. 나무로부터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무장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산에게는 속임수라는 것이 없습니다. 산은 정치가도 아니고 범죄자도 아닙니다. 산이나 바다로
갈때면 우리가 기쁨을 느끼는 것도 바로 이때문입니다. 그 기쁨은 어느곳으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산으로부터 올까요, 바다로부터 올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장을 해제시켜도 되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게 때문에 오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한 그루 나무에게로 걸어갈 때 문득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그것은 그 나무로 부터 오는
느낌이 아니라 우리 내부로부터 옵니다. 나무와 더불어 있으면 우리는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없고 마음편하게 한가로이 노닐 수가 있습니다. 꽃은 갑자기 우리를 습격하거나 나무는
도둑이 될 수 없으며 우리로부터 어떤것도 훔쳐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산에 갈때나 바다로 갈때나 숲으로 갈때나 나무와 함께 있을때나
우리는 경계심을 버리고 무장을 해제합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는 보다 깊은 신뢰가 있습니다. 공업화나 기계화, 기술발전이
진전되지 않은 나라일수록 더욱 많은 대자연과 함께 살아가며 따라서
더 깊이 신뢰하는 마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술발전이 없는 사회, 과학이 없는 시대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분은 전 생애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
소박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겸허함과 믿음이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은 그토록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인류의 행복에 조금의 기여도 하지 못한것
같습니다. 오히려 행복은 줄어들었습니다. 기계장치로 해낼 수 있는 일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우리는 더욱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덜 필요해질수록 우리는 점점 자신이 하찮고
보잘 것 없으며 무의미한 존재인 것으로 느끼게 됩니다.
머지않아 컴퓨터가 우리를 대신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전혀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릴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은 끊임없이 무의미함을 느낍니다.
아무도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아이들까지 우리를 필요로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부가, 복지단체가 그들을 보살펴 줄 것입니다. 우리의 늙은 부모들조차도 이제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설 좋은 양로원들이 있어서 그들을 편안하게 모실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나 자신만 상대방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 또한 나를 필요로 합니다. 내가 없다면 상대방도, 상대방이 없다면 나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되어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이 점점 메말라가며 믿음이 점점 사라져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연과 더불어사는 깊은 믿음의 차원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구대교구 이상영 그레고리오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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