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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픈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체험’을 인정하지 않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고통이고 아픔입니다. 그러나 참된 겸손은 하나님 말씀 앞에 자기를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참된 겸손은 하나님 말씀에 어린아이와 같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체험, 자신의 입장, 자신의 견해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독자 여러분이 갖고 있는 방언에 대한 생각과 견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어 볼 때, 어떤 분들은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버리고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가 ‘나’를 포기하고 말씀을 붙잡아야 할 때입니다. 아프더라도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편집실>
전체 숲을 보지 못하면 오해가 깊어지고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방언에 대한 오해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몇 가지 성경절에만 집중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과 14장, 세 장을 하나로 묶어서 ‘은사장’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12장에서 은사의 본질에 대해서 다루었으며, 13장에서는 사랑 없는 은사의 문제점과 사랑의 가치를 강조하다가 14장에서 문제의 핵심인 고린도 교회의 방언 문제를 지적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흐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제3부 기사는 ‘은사장’에 나오는 단 하나의 성경절을 위해서 준비되었는데, 그 말씀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입니다. 오늘날 방언을 하는 개인이나 교회 모두 입을 모아서 강조하고 있는 말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의 흐름 속에서 14장 말씀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고린도지역과 교회에 대한 성경학자들의 저술은 대체적으로 일치합니다. 고린도에는 두 개의 국제 항구가 있어서 여러 항로가 교차했기 때문에 상인들과 외국인들의 왕래가 많았습니다. 고린도는 헬라인, 로마인, 수리아인, 아시아인, 이집트인, 유대인들이 섞여서 살아가는 다인종, 다문화 도시였습니다. 그런 환경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도 여러 인종이 모여들었고 그들의 가장 큰 관심이 방언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각처에서 이주한 다민족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종족의 언어들을 구사하면서 “내가 하는 언어는 성령께서 주시는 방언이다.”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고린도 지역의 거대한 신전에서 이교도들이 지절거리는 방언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살았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은 “우리도 방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큰 능력이 현저하게 나타나는 은사, 특히 방언에 매달리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은사의 정신을 잊은 채 방언 자체에 매달렸습니다. 바울은 그런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를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에서 은사의 본질과 사랑을 설명한 다음, 거기서 마련된 참된 은사의 기준을 근거로 14장에서 본격적으로 방언 문제를 집중해서 다루었습니다. ‘은사장’을 살펴보면 볼수록 우리는 그 속에서 현대 기독교회가 갖고 있는 은사 문제를 점점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속에서 우리 자신과 교회의 모습을 거울에서 보듯이 보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은사의 본질에서 떠난 고린도 교인들
방언을 마지막에 놓은 이유 : 고린도전서 12장 중반부에 여러가지 은사의 종류를 기록하면서 가장 먼저 “지혜의 말씀”을 썼고 마지막에 “방언 말함과 통역”을 기록했습니다(8~10절). 왜 그렇게 순서를 정했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과 진리’이므로 지나치게 방언에만 매달리지 말라는 뜻에서 방언을 맨 끝에 넣은 것입니다. 12장 마지막 부분에서도 그런 의도는 반복됩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전 12:28). 이어지는 성경절에서도 ‘말씀’을 가르치는 사도가 가장 먼저 나오고 방언을 마지막에 나옵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전 12:29~30). 카슨 교수는 바울이 기록한 은사의 순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가서 바울은 방언을 확연하게 평가 절하합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은사 목록에서 방언을 가장 끝에 위치시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방언이라는 은사를 너무 높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D.A. Carson, Showering the Spirit, BakerBooks, 1987, p. 36).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현대 기독교회 속에도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무덤에서 나와 현대 기독교회를 보면서 은사의 순서를 기록한다면 어떤 순서가 나올까요? 고린도전서 12장과 비슷한 순서가 나올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는 방언하는 사람만 가득하고, 어떤 교회는 귀신 쫓는 일에 집중합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 문을 여는 순간 방언 소리가 들려오고, 어떤 교회는 교회 문을 여는 순간 안수받고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왜 그런 현상이 생길까요? 특정 은사를 지나치게 높이기 때문에 그런 교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방언이 잘 터지고 병이 잘 낫는 교회라는 소문이 나면 그 교회는 대형 교회로 성장하게 됩니다. 어떤 상품이 잘 팔리면 너도 나도 그 물건을 파는 장사꾼처럼, 어떤 은사 때문에 교회가 성장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교회들이 앞을 다투어 그 뒤를 따라갑니다. 현대 기독교회에서 가장 각광 받고 있는 교회 성장법은 기복 신앙과 방언입니다. 말씀과 진리는 사라지고 은사와 이적만 난무한 현대 기독교회를 보는 것은 너무나 큰 고통입니다.
은사를 주시는 분은 성령 :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11절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은사의 본질을 설명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은사를 구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주목해야 할 성경절입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은사를 주시는 분은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은사를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에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령께서 누구에게, 무슨 은사를, 언제 주실지 결정하십니다. 그러므로 “제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가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은사는 달라고 떼를 쓴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사용하고 부리시는 것이지 우리가 성령을 사용하고 부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은사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처럼 방언과 같은 특정 은사를 사모한 나머지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은사에 매달린 결과 교회 안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바둑의 급수를 나누고 태권도 도복의 띠 색깔을 구별하듯이, 은사의 등급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누가 누구보다 더 영적인 ‘고수’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영적 열등감에 시달리고, 어떤 사람들은 영적 교만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문제 때문에 신앙이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외식과 위선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새 신자가 방언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주변에서 그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은근히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도 생깁니다. 신앙 연륜이 오래된 교인들 중에 방언이 아직 터지지 않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신앙없는 사람’으로 볼까 봐 눈치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절박한 심령으로 더욱더 열심히 매달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로부터 받아야 할 은사를 흉내 내고 연습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옆 사람이 하는 방언 소리를 흉내 내려고 애쓰게 됩니다. 지금 현대 기독교회 안에는 방언 전문 강사들이 전국 교회를 돌면서 방언을 구하는 신자들을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 모습을 지켜본다면 뭐라고 말할까요? 지금 교회 안에서 코미디가 벌어지고 있는데 처음에는 그 모습을 보고 웃지만, 나중에는 울게 됩니다. 영적 분별력이 있는 성도들은 은사와 방언 때문에 죽어 가는 교회를 보면서 탄식하고 통곡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속에 내 가족과 형제와 부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해결책 : 바울은 12절부터 16구절에 이르는 긴 비유를 통해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설명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12, 21, 26, 27).
눈이 발을 무시하고 손이 발가락을 무시하면 몸이 어떻게 될까요? 고린도 교회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문제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내가 가진 은사가 네가 가진 은사보다 더 크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마지막 절에서 “더욱 큰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라. 나는 너희에게 가장 좋은 길을 보이겠노라”(고전 12:31, 킹제임스 영어성경). 바울이 말한 “더욱 큰 은사”가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바울은 12장 마지막 절에서 “더욱 큰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한 다음에 13장 1절부터 “사랑”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만을 위해서 쓴 글이 아닙니다. 12장에 나열한 은사와 방언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기 위해서 “사랑”을 설명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은사의 본질에서 떠난 고린도 교인들
바울은 13장 1절부터 고린도 교인들이 하고 있는 방언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은사의 순서에서는 가장 끝에 있었던 방언이 문제를 일으키는 면에 있어서는 가장 먼저 지목되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마음에 사랑이 없은 사람들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하면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모습을 지적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당신들의 눈으로 볼 때는 방언이 대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사람의 방언뿐 아니라 그보다 높은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어!”라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의 의도를 무시한 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고린도전서 13장 1절을 이용해서 방언을 이렇게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방언은 천사의 말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언어이기 때문에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서점에서 방언의 중요성을 다루는 책을 살펴보십시요. 인터넷에서 방언을 강조하는 동영상을 찾아보십시요. 모두 예외 없이 고린도전서 13장 1절의 “천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의 성서적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들려오는 방언의 치명적인 결함을 바울이 계속해서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천사의 말”이라는 한마디를 가지고 무마시켜 버리고 있습니다.
첫째, 방언을 문자 그대로 “천사의 말”로 받아들이면, 그것은 본문의 의미와 전혀 다르게 됩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성경학자들은,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 나오는 “천사의 말”은 바울이 자신의 논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2절과 3절에서도 바울의 과장법은 계속됩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2~3). 이런 표현들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성경은 너무나 이상한 책이 되고 말 것입니다.
둘째, 방언이 정말 하늘에 있는 “천사의 말”이라면 천사들에게 큰 문제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장차 방언이 사라질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shall cease)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수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만일 방언이 “천사의 말”이라면, 장차 방언이 중단될 때 천사들은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장차 우리가 하늘에 가서 언어를 잃어버린 천사들을 만나서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까요? 천사들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서 배워야 하나요? 문맥을 무시하고 성경절 한마디에 붙잡혀서 말씀을 해석하면 이런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방언도 그치고”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때까지 방언은 그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 복음 전파를 위해 주신 방언은 “그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재강림하셔서 성도들을 하늘로 데려가시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주신 방언은 더 이상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되면 예언과 지식의 은사도 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가서도 영원히 사랑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서 은사 속에 사랑이 없으면 그런 은사는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은사를 질투하지 않고, 자기 은사를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사랑이 있는 진짜 은사와 사랑이 없는 가짜 은사의 가장 큰 차이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가 아닌가”입니다. 어떤 은사를 통해서 자기의 유익을 구한다면, 그 사람의 은사는 성령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오늘날 많은 사람이 “방언을 해야 오래 기도할 수 있고, 방언을 해야 마음이 뜨거워지며, 방언을 해야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방언의 이유와 목적이 모두 “나”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은 “나”를 위해서 하는 방언은 은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 하는 자면 권위 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서 “가르치는 은사”를 주시고, 환자를 치유하기 위해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시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방언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확신과 자기 경건과 자기 감정을 위한 은사는 하늘로부터 온 은사가 아니며, 사랑이 없는 은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은사에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정신이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6). 은사를 받은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고 높이기 때문에 더 밝은 빛이 왔을 때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체험을 강조하면서 말씀을 소홀히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사대”보다는 “내가 체험한 것”이 더 중요한 사람들은 신비주의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은사와 방언에 매달리면 진리 위에 체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체험 위에 진리가 있게 됩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요 14:15).
13장의 결론 : 바울은 “사랑장”을 마치면서 다시 한번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12장과 13장을 마친 다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빠져 있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다루기 위해서 14장으로 넘어갑니다. 14장으로 들어갈 때 바울은 어떤 말씀으로 시작할까요? “사랑을 구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은사와 방언의 시작과 끝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선으로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을 바라보아야 오해가 풀리고 문제가 해결됩니다.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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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방언이 천사의 말은 아니죠~!^^
방언을 자랑하려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교류하는 언어라는 의미로 이쁘게 만든 말일 뿐입니다.
입신상태에서 하는 알 수 없는 말인 방언은 성령의 은사이기는 합니다만,
열매가 없고 자기 덕만 세우는 지극히 개인적인 은사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가 이 은사를 가지고 성령받았다 하는 표시로 자랑을 하고
더 큰 능력을 가진 것처럼 소란스럽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는 것이라고 호통하시면서(고전4:20),
내가 너희들에게 갈 때 너희들의 말이 아니라 능력을 시험해 보시겠다라고도 엄포를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방언을 말할 때는
규모있고 질서있게
하라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사도 바울은 방언이 아니라 이교도들의 주문과 같이 지절거리는 말(babbling)이라고는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방언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구요!
따라서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의 형태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고린도 교회에서 행해졌던 방언도 성령의 은사로서 인정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은사가 헛되게 사용되는 것을 경계하시면서
바르게 사용할 것을 권면하시는 것이죠!
요즘도 바르지 않게 사용되는 방언 때문에 시끄러운 일이 많이 일어 납니다만,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까지 싸그리 부정하는 우는 범하지 않아야 할 것 입니다.
@crystal sea 성령의 은사는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랄랄라 방언은 성령의 은사가 아닙니다.
저의 글을 계속해서 보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천국가자 그렇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신 이의 뜻을 따라 그 뜻을 이루가 위한 은사(선물)일 뿐입니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알고 자기 공로와 힘으로 얻은 것으로 안다면 이미 부패한 은사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이 부패한 방언 은사로 시끄러워진 것처럼 말이죠~!^^
랄랄라 방언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령의 역사를 이루시는 일이라면 그것은 은사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유창한 방언을 구사한다 할지라도 자기 자랑으로 삼으면 그것은 더 이상 은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러니 비판만 일삼을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은사와 방언의 시작과 끝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선으로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을 바라보아야 오해가 풀리고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것은 비록 성령의 은사인 방언에만 국한됨이 아니라 모든 크리스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하늘에서 불을 끌어내리는 능력이 있어도...., 하나님의 심오한 비밀을 찾아내서 전하더라도.....
계명을 완전히 준수하는 자일찌라도.......
상대방을 감화시키는 말을 하는 자일찌라도........
이를 방언의 은사에만 적용시키심은 방언의 은사를 공격하기위한 단초라고 뿐이 볼 수 없습니다.
방언을 공격하기 위함도 아니도 격하시기 위함도 아닙니다.
기록된 말씀으로 성경적인 방언은 무엇이며 왜 방언을 주섰는지를 알리고자 함입니다.
님께서도 계속하여 저의 글을 읽으시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천국가자 이미 결론을 세워놓고 거기에 꿰맞추는 논리전개는 설득력이 없고 억지에 불과합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되는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님에게 깨닫는 은혜를 허락하신 하니님을 찬양합니다.
@천국가자 저는 이 글을 통해 평소 고전 14장에서 잘 이해되지 않고 조금 의아해하던 부분이 해소가 된 것 같습니다.
고전14장을 보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에 대해 사도 바울이 때로는 꾸지람도 하며
부정적인 자세를 가진 것은 분명합니다.
심지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에 대해 다음과 같은 2가지 규제원칙을 줘서 제한적으로만 시행하도록 합니다.
1. 인원 수 제한: 2-3사람까지만 허용
2. 통역이 없을 경우에는 금지
그러나 고전14:39에 나오듯이(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왜 사도 바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자체를 원천적으로 금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공청 이에 대해서는 당시 고린도의 상황을 알게 됨으로 의문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고린도는 큰 무역항이 2개나 있는 도시로 국제무역의 요충지이니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국제도시였습니다.
따라서 어느 날 예배에 매우 드문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인이 참석했을 경우,
하나님께서 그 예배시간에 그를 위해 특별히 고린도 교인 중 하나에게 그 외국인이 사용하는 언어를 방언으로 주셔서 말씀을 전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경우에 비록 그 방언을 알아듣는 사람은 없지만 그 언어를 사용하는 단 한 사람의 외국인은 그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청 그리고 그가 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랄랄랄라", "으다다다"와 같은 비언어적 변태방언이 아니라
진짜로 회중에 섞여있는 소수의 드문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인을 위한 방언인지를 검증하기 위해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한다는 제한을 걸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이런 특수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자체를 원천적으로 금하지는 않고
대신에 반드시 통역이 있도록 함으로
누군가 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말씀전파를 위해 진짜 언어로 구성된 방언인지,
비언어적인 변태방언(당시 고린도의 이방신전에 만연했던)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신 것 같습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10.26 1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