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섭 토마스 신부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2열왕기 25,1-12 마태오 8,1-4
‘저는 믿음이 약해서...’라고 말씀하시는 교우들을 자주 만납니다.
혹은 ‘신부님! 어떻게 하면 믿음이 강해질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게요~’라고 웃으며 넘길 때도 있지만 믿음을 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참 고민스러운 부분입니다.
과연 ‘믿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을까요?
무엇인가를 믿기 위해서는 우선 그 무엇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즉, 하느님을 믿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고, 공부하며, 배워야 합니다.
내가 믿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이
당신을 찾아 올 수 있도록 당신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계시’이고 성경과 성전이라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당에서 교리도 배우고 성경 말씀도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느낌이나 나에게 와 닿지 않는다면 이것 또한 큰일입니다.
즉 믿음에는 감성 혹은 체험을 통한 느낌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감정을 통해 하느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통해 이 감성은 더욱 풍성해 집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일종의 작은 광야를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이때 우리는 온 힘을 쏟아야 합니다.
즉, 나의 의지를 통해 버티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나의 이성, 감성, 의지를 온 힘으로 사용할 때 하느님께서는
‘은총’으로 우리의 믿음을 한층 더 성숙시켜 주십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믿음이란 하느님께 내어 맡기는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병의 고통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한평생 받아온 사람입니다.
가족과도 생이별을 해야 했고 사람들에게는 하느님께 징벌을 받은 이라 하여
온갖 모욕을 다 당해야만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가진 것도 없고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 그가 우리에게 아주 큰 믿음을 보여 줍니다.
배울 수도 없고, 감성도 매 말라 버렸고, 의지가지 하나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있는 힘을 다해 매달립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그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여기니 이 얼마나 크나큰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일들 속에서 좌절하고 근심합니다.
믿음은 더욱 약해지는 것 같고, 돌파구는 어디에도 없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나의 이성과 감성, 의지를 총 동원하여 최선을 다 해 봅시다.
이 때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께 내어 맡기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하루를 보냅시다.
대구대교구 김종섭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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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호 루카 신부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2열왕기 25,1-12 마태오 8,1-4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와 예수님의 대화가 인상적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과연 예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은 왜 여전히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일까요?
왜 우리 삶은 아쉽고 부족한 것이 많을까요?
그분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다 채워 주실 텐데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소원을 예수님께서 들어주시느냐, 그렇지 않으시냐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과 우리의 관계가 가까워지느냐, 그렇지 않으냐입니다.
단순히 소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 우리가 만족한다면, 그분께서는 그냥 기도를
들어주는 기계나 부적에 지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당신과 가까워지고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단순히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에
우리는 만족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분께서는 만족하지 못하십니다.
부모와 자녀들만 보아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부모가 자녀에게 생일 선물을 주고, 용돈을
주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녀 가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모른 채 선물이나
용돈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 자녀는 아직 부모님의 마음을 모르는 철없는 자식일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시라,
우리의 소원을 정화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그렇습니다. 소원을 빌고 그에 대한 응답을 바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소원을 들어주시는 바로 그분과의 관계에 더 충실합시다.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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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수 야고보 신부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2열왕기 25,1-12 마태오 8,1-4
“나병환자 한 사람이...” (마태 8,1-4)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 때에 나병 환자 한 사람이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5장에서 시작된 산상 설교를 마치신 후 이제 다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 중에 나병환자 한 사람이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마태오 복음은 5장에서 7장까지 한 묶음로 산상설교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마친 후 즉시 8장에서는 여러 병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 중에는 나병 환자, 중풍병자, 열병으로 드러누워 있는 병자 등
많은 병자들을 치유시켜 주시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왜 이런 병자들을 산상설교에 이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가?
왜냐하면 그 병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가 이런 병에서 치유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치유방법은 바로 앞에서 예수님이 산 위에서 가르쳐주신 산상설교의 내용을 사는 것이다.
진복팔단은 바로 우리가 이런 병에서 치유될 수 있는 방법이다.
진복팔단은 새로운 인생관, 가치관이다.
지금까지 살았던 인생관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법이다.
과거의 우리의 삶은 우리를 점점 병들어 가게 하는 삶이었고
결국 죽음으로 다가가게 하는 인생관이었다면 진복팔단은 지금까지 살았던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관으로서 병든 우리를 치유시켜 줄 수 있는 방법이다.
진복팔단은 더 이상 우리가 병들지 않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복팔단의 정신을 가르쳐 주면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이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고 말씀하셨고
끝으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분명 진복팔단은 정말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며
나병이나 중풍병등 모든 병들을 치유시켜 주실 수 있는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통해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대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처음에 "우리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고 하셨던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죄로 일그러진 흉칙한 모습에서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하느님 자신도 감탄하셨던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죄로 병든 우리의 모습이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고 하셨던 대로 본래의 자리와 사명으로 복권시키시는 것을 말한다.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잃어버렸던 하느님을 다시 되찾는 것이요,
잃어버렸던 행복을 되찾는 것이다. 그 방법이 바로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즉 잃었던 행복을 되찾는 방법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루하루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완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오늘 예수님께 다가온 나병 환자는 어떤 병자인가?
그 당시 나병환자란 오늘날 불치의 병에 걸린 에이즈 환자 또는 암 환자와 같은 병이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치료 방법이 없는 병으로서 오직 죽음을 기다리고 살 수 밖에 없는
아주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이다.
나병은 하느님한테 죄를 지어 그 대가로 주어진 병이기 때문에 부정한 사람이라고 공개적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몸에 다으면 부정한 사람이 되고
또 나병 자체가 전염병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금하였다.
그래서 나병 환자는 늘 가족과 친척과 이웃 사람들로부터 격리된 외딴 곳에서
홀로 살아야 했다. 몸은 썩어가서 냄새나고 형체가 뭉그러지고 떨어져 나가 보기 흉한
모습으로 변해 간다. 마치 죽은 시체의 모습이다.
즉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나병 환자라고 선포되면 "당신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오!"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죽음만을 기다리는 사람, 죽음이라는 공포에 떨고, 죽어가고 있음으로 자기 눈으로 확인되고 있는
비참한 자신의 모습 그러면서도 어떤 치유 방법이 없이 절망 속에서 외롭고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다.
오늘 날 이 나병 환자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우리도 모두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다. 언제 죽을 지 날자만 정해져 있지 않을 뿐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죽음의 병에 걸린 사람들이다.
하루 하루 우리의 삶은 죽음을 행해 가고 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이 죽음의 행진을
막지 못한다. 너도 죽을 것이고 나도 죽을 것이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이 나병에서 치유될 수는 없을까?
어떻게 하면 죽음을 향해가고 있는 이 행진을 멈추고 생명의 길로 가게 할 수 있을 까?
그 길이 바로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진복팔단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고 죽음의 행진을 멈추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이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멸망의 길에서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완덕을 추구하는 길이며 그 자세는 오늘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애원하듯이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고 애원하는 자세로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
우리보다도 더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시어 죽음에서 살리고자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오늘도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깨끗하게 되는 길이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길에서 돌아서서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인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죽음의 행진을 멈추고 생명으로 나아가는 삶이다.
산 위에서 가르쳐 주신 산상설교를 통해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알아듣는 이는 참으로 복된 이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주님, 주님! 하고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이들은 더욱 복된 이들이다.
진복팔단의 정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죽음의 병인 나병에서 치유 받는 이가 바로 오늘 우리 자신이기를 바란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야고보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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