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아름다운 사랑에 붙이는 ‘로맨스’라는 단어를 이들은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자. 기획사의 몇몇 매니저와 프로듀서들은 그들에게 잘 보이려는 여배우들과 갖는 성관계를 ‘로맨스’라고 부른다. 한쪽이 가진 권력을 무기로 일방적으로 갖는 성관계에 ‘로맨스’라는 단어를 붙이는 몇몇 매니저들의 기만에 의해 배우가 되려 했던 여고생 P양의 꿈은 좌절됐다.
가정환경이 어려워 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무리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연예인이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부모님을 졸라 응시했다. 우선 입학만 하면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등록금은 스스로 충당할 것이라며 큰소리쳤던 터였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연예인이라는 직업에 갖는 환상도 있었지만 연예인만 되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등록금은 생각보다 만만찮았다. 연극 공연을 한번 하거나 부전공 과목을 따라가기 위해 실제 드는 비용은 대학교 등록금과 맞먹는 액수였다. 결국 1학년 1학기때 부모님이 내 주신 첫 등록금이 내가 3학년 동안 낸 등록금의 전부였다. 선생님이 납부 재촉을 할 때마다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고, 부모님이 원망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부모님으로부터 거의 용돈을 받을 수 없어 옷을 사기 위해 돈이라도 훔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교복을 입고 있는 학교에서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주말에 친구들을 만날 때면 이만저만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유명 브랜드로 쫙 빼 입고 나오는 친구들에게 번번이 기가 죽었다. 이 애들은 귀신같이 진품을 알아봤다.
브랜드 제품은 비싸서 못 사고 ‘짜가’를 입고 나갔다가 웃음거리가 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럴수록 빨리 연예계에 데뷔해 꼭 뜨고 말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온갖 오디션을 다 찾아다녔다. 압구정동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소위 ‘길거리 캐스팅’을 하는 매니저들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그들을 통해 기획사에 사진과 프로필을 등록하면 오디션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오디션에 합격해서 얻는 수익은 기획사와 8:2로 나눠 가졌다. 우선 오디션에 대한 정보가 급했으므로 대여섯개의 기획사에 프로필을 등록했다. 그리고 주말마다 기획사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따라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몇개의 오디션에 합격해 여성 잡지의 뷰티 모델을 하거나 청소년드라마에 단역으로 출연할 수 있었다. 수입은 없었지만 배우가 되는 과정이라고 믿으며 줄기차게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그러던 중 3학년이 되자 학교에서는 밀린 등록금을 내라며 독촉했다. 부모님께 부탁해 보았지만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러다 주말에 기분도 전환할 겸 친구들과 갔던 나이트클럽에서 중국의 재벌 2세라고 소개한 20대 후반의 중국남자를 만났다.
그는 만날 때마다 용돈을 하라며 수십만원씩 주었고, 돈이 궁했던 나는 종종 그를 만나 잠자리를 같이했다. 그는 중국에서 큰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사업차 한달에 한번 꼴로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만날 때마다 개인 통역관을 대동할 만큼 부자였다. 물론 나의 등록금을 해결해 주었을 뿐 아니라 현금으로 수백만원을 주면서 하고 싶은 것 다 하라고 했다. 그 돈으로 눈과 코의 성형수술을 하고 유명 브랜드 옷을 사 입었다.
그는 마치 요술램프에서 나온 지니처럼 나의 소원을 다 들어주었다. 그러던 중 그는 고등학교 3학년인 나에게 졸업하자마자 함께 중국으로 가자고 했다. 덜컥 겁이 났다. 그와 중국으로 가면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토록 되고 싶었던 연예인의 꿈은 접어야 했다.
그가 중국으로 간 사이 얼른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학교도 졸업해 간신히 그와 연락을 끊을 수 있었다. 아직도 그를 만났던 나이트클럽은 겁이 나 가지 못한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할 성적도 되지 않았고 등록금을 대줄 사람도 없었던 나는 대학 입학을 포기하고 더욱 오디션에 매달렸다.
그러던 중 뮤직비디오에 나올 여주인공을 뽑는 오디션에서 유명 여배우 김모씨의 매니저를 만났다. 나는 이미 수많은 오디션을 통해 웬만한 매니저들과 눈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는데 그 매니저는 한번 찾아오라며 명함을 건넸다. 다음날 전화를 걸어 찾아간다고 했더니 매니저는 날짜와 시간을 정해 주며 그때 찾아오라고 했다. 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매니저가 말한 시간에 기획사를 찾았다.
그런데 찾아간 기획사 사무실에는 매니저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매니저는 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나랑 한번 자면 기획사와 계약하게 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러 기획사가 비는 날과 시간을 골라 찾아오게 한 것이었다. 이 기획사는 나 같은 배우 지망생들이 계약하기를 꿈꾸는 기획사였다. 많은 스타급 주연배우를 소속 배우로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소위 ‘뜰 만한’ 지망생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용히 ‘알았다’고 대답했다. 빈 사무실에서 옷도 채 벗지 않은 채 순식간에 성관계를 가졌다. 치욕스러움에 몸을 떨었지만 며칠후 계약과 관련해 전화하겠다는 그의 말에 눈물을 닦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연락은 없었다. 그에게 전화를 했지만 차일피일 계약을 미룰 뿐이었다.
속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획사로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창피당하고 싶냐”면서 오히려 역정을 냈다.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이 기획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다른 오디션을 보러 갈 때마다 몇몇 매니저들이 똑같은 제의를 하면서 접근했고 나는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매니저들 사이에 유명 탤런트 김모씨의 매니저와 ‘로맨스’를 한 아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던 것이었다. 그중 한명이라도 도움을 줄 만한 매니저를 만난다면 그것으로 된다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10여명의 매니저들과 성관계를 가졌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다. 오히려 매니저들 사이에서 원하면 무조건 OK인 지망생으로 낙인찍혔고 더 이상 성관계를 요구하는 매니저들도 없어졌다. 결국 매니저들 사이의 소문 때문에 오디션조차 보지 못’하게 됐고 나를 원하는 기획사는 하나도 없었다. 변변한 작품에 한번 출연도 못해보고 나의 배우에 대한 꿈은 사라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