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78)
바람둥이와 소매치기 (하)
아삼륙이 된 박거근과 이계동, 동무장사도 나날이 번창하는데…
엿장수 박거근 덕택에 산적들이 사라져 영덕 고등어 장수들은 고갯마루에 올라 만세를 불렀다. 어느 날부터인가 황장재 고갯마루에 박거근과 개똥이가 움막을 짓고 터를 잡았다. 고등어 장수들의 가슴이 철렁했지만 아삼륙 두사람은 통행세를 받는 게 아니라 고등어를 흥정해서 사들였다. 고등어 장수들도 여간 편한 게 아니었다. 챗거리까지 가면 좀더 좋은 값을 받지만, 주막에서 먹고 자야 하고 술 한잔 걸치다 보면 색줏집까지 갈 수도 있다. 황장재에서 고등어를 넘기고 나면 아직도 해가 중천에 있어 당일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개똥아!” 어느 날 박거근이 개똥이를 불렀지만 그는 두손을 허리춤에 모으고 도끼눈을 치뜬 채 말했다. “아재, 내 이름은 개똥이가 아니고 계동이요, 이계동! 개씨부랄놈들이 남의 이름을….”
그러자 박거근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계자 동자 이계동, 그 좋은 이름을 두고….”
박거근과 이계동은 나이는 그렇게 벌어져도 딱 붙어 지내는 동업자로 장사를 잘했다. 사들인 고등어를 챗거리로 가져가 소금간을 해 안동장으로 넘겼다. 박거근은 거처도 주막집 구석방에서 계동이네 건넛방으로 옮겼다. 장사를 마치고 호롱불 아래서 이마를 맞대고 치부책과 전대를 맞춰볼 때면 계동이 홀어미가 밤참을 들고 왔다.
계동이 장사를 시작하고는 제 어미 밭 매는 걸 한사코 말리고 박가분과 동백기름을 사다드리고 집에 오는 날은 푸줏간에서 고기를 사들고 왔다. 계동이 나이 열다섯이 되니, 지난 세월 동지섣달 기나긴 밤 흐느껴 울고 꽃 피고 새 우는 춘삼월 짝을 짓는 나비 한쌍을 보고도 한숨을 토하던 어미를 헤아릴 수 있게 됐다. 유복자 아들의 가슴이 찢어졌다.
새까맣던 서른셋 계동 어미가 호미를 놓고 고기를 먹으니 새 얼굴이 됐다. 시시때때로 술병을 들고 개울 건너 계동이 아버지 묘소를 찾던 어미 발걸음이 끊겼다. 어느 날 계동이 놓아드렸던 디딤돌 징검다리를 몰래 제 손으로 헐어 없앴기 때문이다. 매파가 들락거렸지만 계동 어미는 펄쩍 뛰었다.
어느 날 술 한잔 걸치고 집에 갔을 때 어미가“계동아, 나 손자 안고 싶다”고 하자 계동은 “어매, 나는 동생 하나 갖는 게 소원일시더.”
무슨 소린지 몰라 멍하게 있던 어미가 “야가 시방 무슨 소릴 하는 것이고!” 꿱 고함을 지르더니 “네 아버지 산소 가는 길 개울에 디딤돌이나 놔다오. 어떤 놈들이 주춧돌로 쓰려고 빼간 게 틀림없지. 그 비에 떠내려갔을 리가 없다”고 했다.
계동이도 이제 거근이 아재와 주막을 출입하는 나이가 됐다. 안동장에 간고등어를 넘기고 온 아재가 말했다.“오늘 안동장 포목점에서 한산 세모시를 봤네, 그려. 고향 사람 만난 듯이 반가워 한참 쓰다듬었네. 그런데 무섭게 비싸게 받더구먼.” 마주 앉았던 계동이가 아재 입을 막았다.
이튿날 새벽 안동포 다섯필씩 단봇짐으로 둘러맨 두사람은 안동 나루터에서 첫 배를 탔다. 상주 낙동 나루터에서 내려 서쪽으로 걸어가다가 해가 저물면 주막에서 자고 날이 새면 또 걸었다. “나는 고향에 가면 감옥으로 들어가야 혀.” 아재의 끝없는 걱정에 계동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걱정 놓으시요”라며 안심시켰다.
아흐레 만에 금강변 입점에 닿아 아재는 나루터 주막에 머물고 계동이 혼자 안동포 열필을 지고 나룻배로 금강을 건너 한산으로 들어갔다. 계동이 한산 주막집에 단봇짐을 풀어놓고 주모로부터 박거근 아재 전력을 미주알고주알 다 들었다.
이튿날 계동이가 당나귀 두마리를 이끌고 도강해 아재가 묵는 주막에 나타나 “아재, 이제 걱정 끝났소. 사또가 바뀌었소” 하니 아재 얼굴이 확 펴졌다.
두사람은 당나귀를 타고 밤낮없이 안동으로 향했다. 안동에서 우마(牛馬) 열마리를 구해 안동포를 닥치는 대로 사서 싣고 한산으로 향했다. 한산에서 안동포 한필을 한산 세모시 세필과 맞교환을 하고 안동에 와서는 한산 세모시 한필을 안동포 두필과 맞교환했다. 서너차례 안동과 한산을 오갔다가 오니 떼부자가 됐다. 두사람이 기생집에 들어갔는데 아재는 한사코 옆에 기생이 앉는 걸 거부했다. 밑천이 다 드러난 아재가 새삼 점잔 빼는 게 의아했다.
그날 밤 계동이는 잠이 오지 않았다. ‘어매가 요즘 나하고 눈 마주치는 걸 피하고, 내가 사다드렸던 업가분과 동백기름을 뚜껑도 안 열더니 요즘 바르기 시작했고, 집에서도 장에 갈 때나 입던 좋은 옷을 입고….’
“이눔의 시키!”
계동이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가 처마 밑에서 시퍼런 낫을 빼들고 건넛방 문을 콰당 열고 들어갔다. 아재가 상반신을 일으켰다. 낫을 쳐들었던 계동이 그대로 굳어 있더니 낫을 내려놓고 “아부지~.” 큰 절을 올리고 머리를 방바닥에 박은 채 흐느꼈다. “계동아. 그 낫 처마 밑에 걸어놨다가 내가 옛버릇 못 고쳐 네 엄마를 눈물 흘리게 하면 그때, 내 목을 쳐라.” 술상을 차려와 부자(父子)간에 새벽닭이 울도록 술을 퍼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