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한미 대학·세계선수권 K행진… 메츠감독이 연락을
1998년 7월 2일 애리조나주 투산. 섭씨 43도의 폭염 때문에 한미 대학선수권 2차전을 위해 하이코베트 필드에 나온 한국 선수들은 죽을 맛이었다.
그늘 밑에서도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상황에서 경기를 해야 된다는 사실에 전부들 망연자실(?)했다.
선수들 가운데 음식이 맞지 않아 라면만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김병현(당시 성균관대 2년)은 덕아웃에 축 늘어져 있었다. 다들 뛰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예정된 경기는 시작됐고 한국이 3회말 1사 2루의 위기에 몰리자 주성로 감독은 김병현을 마운드에 불러 올렸다. 힘 한번 쓰지 못할 것 같아 보이던 김병현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무려 15개의 삼진을 잡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백 스톱 뒤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클리어 대니얼(애리조나)등 10여명의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로부터 20여일 뒤인 7월말. 이탈리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김병현은 미국을 상대로 다시 한번 3이닝 노히트노런, 쿠바와의 결승전에서는 상대 에이스인 콘트레라스(최근 미국에 망명)와 팽팽한 투수전을 펼치며 5이닝 4피안타 1실점을 기록했다.
김병현은 한 달만에 메이저리그 팀들의 눈도장을 확실히 찍어버린 것이었다. 서서히 김병현은 내심 기회가 닿는다면 자신의 야구 무대를 메이저리그로 옮겨보고 싶다는 꿈을 갖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김병현의 아버지 김연수 씨의 핸드폰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김선우를 보스턴에 입단시킨 박진원 대한야구협회 미주 지회장을 비롯해 박찬호의 에이전트 스티브 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 등등 에이전트를 하고 싶다며 매일 10여명이 김 씨를 괴롭혔다.
한 원로 야구인은 김병현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입단시킨 후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트레이드하기로 이미 양 구단과 합의해 놓았다며 자신을 에이전트로 고용만 해주면 150만 달러를 받아주겠다고 할 정도였다.
이 야구인은 김병현이 미국보다는 일본에서 더 성공할 것으로 판단, 나름대로 머리를 짜낸 것이었다. 하지만 김 씨는 아무런 결정을 하지 않고 상황만 주시하고 있었다.
기회는 머지 않아 찾아왔다. 보비 밸런타인 뉴욕 메츠 감독이 직접 만나자는 연락이 온 것이었다. 그 해 10월말이였다. 당시 밸런타인 감독은 국내 야구 꿈나무들과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인하대에서 야구 클리닉을 열고 있었다.
병역문제해결 메츠행 급물살… 느긋한 자세로 '몸값 띄우기'
1998년 11월초 인천의 한 식당에서 김병현의 아버지 김연수 씨는 보비 밸런타인 뉴욕 메츠 감독을 만났다. 밸런타인 감독은 이미 김병현을 잘 알고 있었다. 구단에서 보여준 스카우팅 리포트 뿐 아니라 직접 김병현을 눈으로 확인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몽윤 회장이 이끌고 있던 당시 대한야구협회는 그 해 2월 사상 처음으로 미국 플로리다주 코코아비치서 국가대표팀의 해외 전지 훈련을 실시한 바 있다.
이 때 대표팀은 포트세인트루시의 메츠 구장을 방문, 친선 경기를 가졌다. 물론 김병현도 등판했다. 이 때부터 밸런타인은 김병현에게 매료됐고 직접 스카우트를 위해 발벗고 나선 것이었다.
현직 메이저리그 감독의 설명을 들은 김연수 씨는 내심 아들을 메츠로 보내기로 거의 마음을 굳히고 중개인을 찾기 시작, 주성로 인하대 감독의 주선으로 서울 앰배서더 호텔 중식당에서 전영재 씨와 만나게 된다. 전영재 씨는 이미 서재응을 메츠에 입단시킨 적이 있고 밸런타인 감독과도 상당한 친분이 있던 터였다.
12월에 열린 방콕 아시안게임 드림팀의 일원으로 선발된 김병현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중국과의 준결승전에서 3_2로 앞선 4회 구원 등판, 6이닝 동안 삼진 12개를 잡아내는 퍼펙트 피칭을 선보였다.
4회부터 6회까지 8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우기도 했다. 이 대회 우승으로 김병현은 미국 진출의 최대 걸림돌인 병역 문제를 해결했다.
방콕에서 돌아온 김병현은 곧바로 전영재 씨와 에이전트 계약을 맺고 미국 진출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미 윈터미팅이 끝난 후 1주일이 지난 시점이어서 사실 메이저리그 팀들은 다음 시즌을 위한 ‘판’을 다 짜놓는 시기였다.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하지만 워낙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김병현이었고 갈 곳이 없으면 메츠 유니폼을 입으면 되기 때문에 느긋한 처지였다.
이 때부터 전영재 씨는 밸런타인 감독의 에이전트인 토니 아타나시오와 손을 잡고 김병현의 ‘몸값 띄우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메츠 몸값 175만달러까지 양보…50만달러 많은 애리조나와 계약
1999년 새해가 밝자 전영재씨는 김병현의 테이프를 30개 구단에 우편으로 발송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10여개의 구단에서 관심이 있다는 연락이 왔고 곧 바로 오퍼가 들어왔다.
10여개 구단이 내건 사이닝 보너스 규모는 100만 달러 미만에서부터 150만 달러 사이였다. 전영재씨와 토니 아타나시오가 생각했던 것 보다는 적은 액수였다.
두 사람은 10여개 팀을 상대로 전화로 또는 직접 만나 잠수함 투수 김병현의 효용가치를 직접 PR했다.
그리고 제 2차 오퍼를 받았다. 대다수 팀들의 계약금 액수가 껑충 뛰었다. 두 개 구단은 200만 달러를 제시했다. 애리조나와 시애틀 매리너스였다.
그러나 김병현이 가고 싶어했던 뉴욕 메츠는 150만 달러에서 요지부동이었다. 또 다시 두 사람은 전략회의를 열었다.
애리조나와 시애틀에게는 마지막 베팅을 요청했고, 메츠에게는 보비 밸런타인감독을 통해 두 팀의 액수를 흘려주었다. 상도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메츠의 몸값을 올리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하지만 스티브 필립스 메츠 단장이 내민 계약금은 김병현이 성균관대 진학시 받은 2억 원을 돌려주기 위한 25만 달러를 보탠 175만 달러였고 시애틀은 그대로 200만 달러, 애리조나는 225만 달러였다.
3개 팀의 액수를 받은 전영재씨는 아버지 김연수씨에게 전화로 상황을 설명했다. 김연수씨와 김병현은 가족회의 끝에 메츠 대신 애리조나를 선택했다. 결정적인 이유는 금액이 50만 달러나 차이가 났기 때문이었다.
10~20만 불 차이였다면 메츠로 가려고 했지만 50만 달러를 뿌리치기에는 너무 큰 금액(한화 약 7억 원)이었다.
225만 달러는 당시로는 엄청난 규모의 계약금이었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받은 120만 달러보다 100만 달러가 많으며 아직도 국내선수로는 최다 금액이다.
그리고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메이저리그 계약을 체결했다. 4년간 마이너리그에 있건 메이저리그에 있건 연봉은 빅리그 최저 연봉으로 한다는 것. 하지만 이 조항은 입단 해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바람에 김병현에게는 불리한 조항이 돼버렸다.
국내에서 입단식을 마친 김병현은 3월 말 곧바로 애리조나 투산으로 건너가 메이저리그 최장신 투수인 랜디 존슨과 캐치볼을 하는 것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끝)
피닉스=이석희 특파원 seri@dailysport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