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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닭이 우는 행운을 열어,
고마님과 함께.... .
동초 조재훈 선생님의 <백제가요의 연구(1971)>와 관련(부분), 산유화가와 정읍사, 서동의 노래에 대한 참고자료를 먼저 올려 봅니다. 어쩌다 생각이 나걸랑 살펴보심을... . 각론은 차츰 올리오리다.
의견이 있으시면 ... ? 건강과 웃음을 성원하며... .
갑내 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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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현(求禮縣)에 사는 사람의 딸로 고운 자태에 얼굴도 예쁜 여자가 지리산에 살고 있었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아내의 도리를 다하였다. 백제왕이 그가 아름답다는 이야기 를 듣고, 그녀를 궁녀로 데려가려 하므로 그녀는 이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결코 죽어도 따라가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다.[求禮縣人之女有姿色居智異山家貧盡婦道百濟王聞其美欲 內之女作是歌誓死不從].
이 작품의 주제는 아마도 정렬부인(貞烈夫人)의 지조가(志操歌)인 듯하다. 이병기(李秉岐)교수와 도수희(都守熙)박사는 이 작품을「지리산곡(智異山曲)」또는 「지이산가(智異山歌)」라고 하며, 『삼국사기』「열전」“도미(都彌)”조에 보이는 도미처(都彌妻)와 연결시켜 논의하고 있다. 李秉岐·白鐵,『國文學全史』, 新丘文化社, 1982.
도수희,『백제의 언어와 문학』, 주류성, 2004.
이상의 5편은 모두 입말로 노래되던 것이 어느 때에 사라지고 말았는지? 아니면, 지금도 민요로 전하여 오는데, 다만 우리들이 모르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정읍」 한 편만이라도 조선시대까지 전하여 와서 훈민정음으로 채집되어 남아 있게 된 것은 백제시대 국문학을 위하여 다행한 일이다.
6. 3. 1. 6. 산유화(山有花)
이 작품은 『문헌통고(文獻通考)』「예문고(藝文考)」“가곡류(歌曲類)”에 다음과 같이 이름만 전하는데, 같은 제목의 민요는 3-4종이 전하고 있으나, 바로 동일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있다.
산유화가(山有花歌) 한 편은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노래이다. 소리의 가락이 매우 슬퍼 서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와 짝인 듯하다.”고 하였다.[山有花歌一篇男女相悅之辭音調悽捥 如伴侶玉樹云]
라고 하여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노래이나, 그 소리 가락은 매우 슬프다면, 이는 이별가이었거나, 아니면, 세월이 너무 빨리 흘러 남녀간의 달콤한 애정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아쉬움이 슬펐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를 임동권(任東權)박사의 『한국민요집(韓國民謠集)』에서 「산유화요(山有花謠)」의 일부를 소개하여 견주어 본다.
산유화혜 산유화혜/ 저 꽃 피어 농사일 시작하여/ 저 꽃 지도록 필역하세.
후렴 얼럴럴 상사뒤/ 어여디여 상사뒤.
산유화혜 산유화야/ 저 꽃 피어/ 번화함을 자랑마라/ 구십 소광 잠깐 간다.
후렴 얼럴럴 상사뒤/ 어여디여 상사뒤.
취령봉에 달뜨고 / 사비강에 달진다./ 저 달 떠서 들에 나와/ 저 달 저서 집에 돌아간다. 후렴 얼럴럴 상사뒤/ 어여디여 상사뒤.
농사짓는 일이 바쁘건마는/ 부모처자 구제하니/ 뉘 손을 기다릴까?
후렴 얼럴럴 상사뒤/ 어여디여 상사뒤.
부소산이 높이 있고,/ 구룡포 깊어 있다./ 부소산도 평지되고/ 구룡포도 평원되니/세상일 뉘가 알까?
후렴 얼럴럴 상사뒤/ 어여디여 상사뒤.( 산유화요 1. 전문, 경상도 지방)
임동권박사의 『한국민요집(韓國民謠集)』에 있는 「산유화요」2·3·4는 「산유화요」1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르지만, 모두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辭)”는 아니다. 任東權,『韓國民謠集』, 東國文化社, 4294.
그러니까 남녀상열의 노래에 가까운 다른 「산유화」가 있었던 같으나,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여기서 “저 꽃 피어/ 번화함을 자랑마라.”라고 한 것이나, “취령봉에 달뜨고/ 사비강에 달진다.”라고 한 노랫말에서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시 근처에서 불리었던 노래임이 분명하다. 이에 관하여 조재훈박사가 “아마도 백제시대에는 꽃이 상징하는바 사랑을 담은 남녀화답식의 집단요로 불리웠다가 백제가 망하면서 남녀상열의 정이 망국의 한으로 바뀌고 시간이 감에 따라 새 국가의 체재 속에 동화하여 당시의 주업인 농업에 밀착해서 농요로 전해왔을 것이다.”라고 한 추론은 매우 그럴사하게 풀이된다. 조재훈,「백제가요의 연구」,『백제문화』5, 공주사대 백제문화연구소, 1971.
6. 3. 2. 백제의 온빈글노래 마통노래[서동요(薯童謠)]
이제까지 이 노래는 신라노래로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필자는 이 작품을 백제의 온빈글노래로 다룬다. 이 작품은 『삼국유사』권 2, 「기이(紀異)」제2, “무왕(武王)”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는데 그 배경담과 함께 전문을 소개한다. 무왕(武王)에 관하여 “옛 책에 무강(武康)이라 함은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는 원주가 있 다.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다. 어머니가 과부(寡婦)로 서울[京師] 『東國輿地勝覽』에서는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全羅北道益山市)라고 함.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면서 못에 있는 용과 오가다가 이 무왕을 낳았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마통[薯童]이었다. 사람의 몸과 마음씀씀이 헤아릴 수 없이 컸었다. 평소에 마를 캐어 팔 아서 먹고 살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마통은 신라의 진평왕(眞平王)의 셋 째 공주인 선화(善花, 혹은 善化라고도 함, 원주)가 아름답고 예쁘기가 으뜸이라는 소문 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 필자 주)서울[경주,필자 주)로 왔다. 마를 가지고, 마을의 여 러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니, 아이들이 그를 가까이 따랐다. 이에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 들을 꾀어 그 노래를 큰 소리로 부르게 하였으니, 그 노랫말은 이러하였다.
善化公主主隱 선화 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 남 그으기 어러두고
薯童房乙夜矣 마통방을 밤에
卯乙抱遣去如 몰 안고 가다.
(의역)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어러두고
마통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갔다.
이 아이들의 노래가 서울 안에 가득하여 궁궐 안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온 벼슬아치 들이 더할 수 없이 심하게 간하여 공주를 멀리 귀양 보내게 되었다. 공주가 떠나려 할 때 에 왕후께서 순금 한 말[斗]을 주어 보냈다. 공주가 귀양가는 길에 마통이 나와서 절을 하 고, “모시고 가겠습니다.”하니, 공주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짝이 된 것이 미더워 기뻤다. 인하여 따라가기로 하였다. 남 몰래 부부가 된 뒤에 마통의 이름을 알고, 어린이들의 노래가 맞음을 믿고, 함께 백제(百濟)로 갔다. 어머니가 주신 금을 내어놓으며 앞으로 살아갈 계획을 세우자고 하니, 마통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이 무엇하는 물 건이오?”하니, 공주는 “이것이 황금인데, 100년은 부자로 살 수 있을 것이오.”하니, 마통이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왔는데, 그곳에는 진흙덩이처럼 쌓여 있었소.”하였다. 공주는 그 소리를 듣고 크게 놀라며 “이것은 천하에 더없는 보배요. 당신이 이제 금이 있 는 곳을 알았으니, 이 보배를 부모님이 계시는 궁전으로 보냄이 어떻겠소?”하였다. 마통이 “그럽시다.”하고는 금을 모으니, 산언덕처럼 쌓였다. 용화산(龍華山) 사자사(獅子寺)의 지명 법사(知命法師)가 계시는 곳을 찾아가 인사드리고, 금을 실어갈 방법을 문의하였다. 스님 은 “내가 시의 힘으로 옮겨 줄 것이니, 금이나 가져와라.”하매, 공주는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스님 앞에 가져다 놓았다.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에 신라 궁중으로 실어다 놓았 다. 진평왕(眞平王)이 그 신통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기를 심히 하여 항상 글 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마통이 이로 인하여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 삼존이 못에서 나타는지 라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하였다. 부인이 왕께 여쭙기를, “반드시 여기에 큰 절을 짓는 것이 진정으로 바라는 바입니다.”하니, 왕이 허락하시고, 지명법사를 찾아뵙고, 못 메울 일 을 물으시니, 신통력으로 하룻밤에 산을 허물어서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이에 미륵 삼존상을 그리어 법상(法像)으로 하여 대웅전과 탑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짓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라고 간판을 달았다.(국사에는 왕흥사라 하였음, 원주) 진평왕은 온갖 장인들을 보내어 도왔다. 지금도 그 절이 있다.(삼국사에는 법왕의 아들이라 하고, 여 기서는 혼자 사는 여자의 아들이라 하니 알 수 없음, “第三十武王名璋母寡居築室於京師南池邊池龍交通而生小名薯童器量難測常掘薯蕷賣爲活業國人因以爲 名聞新羅眞平王第三公主善花(一作善化)美艶無雙剃髮來京師以薯蕷餉閭里群童群童親附之乃作謠誘羣童 而唱之云(노래 중략)童謠滿京達 於宮禁百官極諫竄流公主於遠方將行王后以純金一斗贈行公主將至竄所 薯童出拜途中將欲侍衛而行公主雖不識其從來偶爾信悅因此隨行潛通焉然後知薯童名乃信童謠之驗同至百 濟出王后所贈金將謀計活薯童大笑曰此何物也主曰此是黃金可致百年之富薯童曰吾自小掘薯之地委積如泥 土主聞大驚曰此是天下至寶君今知金之所在則此寶輸送父母宮殿何如薯童曰可於是聚金積如丘陵詣龍華山 師子寺知命法師所問輸金之計師曰吾以神力可輸將金來矣主作書幷金置於師子前師以神力一夜輸置新羅宮 中眞平王異其神變尊敬尤甚常馳書問安否薯童由此得人心卽王位一日王與夫人欲幸師子寺至龍華山下大池 邊彌勒三尊出現池中留駕致敬夫人謂王曰須創大伽藍於此地固所願也王許之詣知命所問塡池事以神力一夜 頹山塡池爲平地乃法像彌勒三會殿塔廊廡各三所創之額曰彌勒寺(國史云王興寺)眞平王遣百工助之至今存 其寺(三國史云是法王之子而此傳之獨女之子未詳)“
이 「마통노래」는 위에서 보듯이 미륵사 창건 이야기에 삽입된 하나의 짧은 삽입가요임을 알 수가 있다. 이「마통노래」가 들어있는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緣起說話)는 아래와 같은 12개항의 단락으로 그 내용이 짜이어 있다.
첫째, 백제 30대 무왕(武王)의 이름과 출생 이야기.
둘째, 무왕은 어려서 이름이 마통인 이유.
셋째, 마통이 이 노래를 짓게 된 동기와 노랫말.
넷째,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꾀어 부부가 되어 백제로 옴.
다섯째, 황금을 주워 모음.
여섯째, 지명법사의 신통력으로 신라 진평왕께 황금을 보냄.
일곱째, 마통이 인심을 얻어 왕이 됨.
여덟째, 지명법사가 있는 용화산 밑 큰 못에서 미륵불 삼존상이 솟아 나옴.
아홉째, 선화공주가 그곳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힘.
열째, 지명법사의 신통력으로 못을 하룻밤에 메우고 미륵사를 세움.
열한째, 진평왕이 온갖 장인들을 보내어 도와줌.
열두째, 그 미륵사는 고려 충렬왕 때까지도 있었음.
이 12개항의 내용들을 『삼국사기』의 역사기록과 견주어 이 노래가 지어진 때를 추정하여 보기로 한다.
첫째, 무왕은 백제의 30대 임금인가? 단제 기원 2567(234)년 구수왕(仇首王)이 승하하자 그의 장자인 사반(沙伴)이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리어 삼촌인 고이(古尒)가 바로 이어 즉위하여 왕이 되었는데, 이 사반왕까지를 치면 30대왕이 맞다.
둘째, 출생 이야기에서 무왕은 지룡(池龍)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과부라는 사실 이외에 그의 신분은 천민이라는 것 이외에는 알 수가 없으나, 『삼국사기』에는 무왕에 관하여 “이름은 장(璋)이요, 법왕(法王:재위 2932. 599)의 아들로 미남형에 기골이 장대하고, 의지와 기개가 웅호하며 걸출하였다. 법왕이 즉위한 이듬해에 승하하매 아들로 대를 이어 즉위하였다.(하략)” “名璋法王之子風儀英偉志氣豪傑法王卽位翌年薨子嗣位(하략)”.
고 되어 있으니, 아무래도 사리로 보아서는 『삼국유사』의 이야기가 황당하다고 하겠다. 그것은 『삼국유사』의 무왕의 아버지 지룡(池龍)이 『삼국사기』의 법왕이기 때문이다. 이를 『삼국사기』의 기록에 맞추어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풀이한다면, 마통은 법왕의 정비(正妃)가 아닌 다른 여인의 몸을 통하여 사생아로 태어난 왕자로서 권력의 암투에서 죽임의 위협을 피하여 마통으로 숨어 살다가 당시의 백제와 신라의 국제 관계 『삼국사기』권 27, 「백제본기」제5 “위덕왕(威德王: 재위 2887-2930, 554-597)”조의 8(2894, 561) 년과 24(2910, 577)년에 신라와 백제가 싸워 두 번 다 백제가 패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로 볼 때에 신라와의 화친을 위한 정략결혼을 꾀하고, 마통이 마[薯蕷]장수로 변장하고 신라의 수도 경주(慶州)에 잠입하여 이른바 「마통노래」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여 계략이 성공되어 백제로 귀국하니, 마통의 영특함을 돋보이려는 차원에서 당시로서는 밝히기 어려운 아버지의 비밀을 지룡으로 상징하여 마통의 비범함을 은유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 마통이 「마통노래」를 짓게 된 동기는 당시 신라 진평왕(眞平王: 재위 2912-2964, 579-631)의 셋째 딸 선화(善化)공주가 예쁘고 아리땁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함에 있는 것으로 일연스님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뒤에 숨어 있는 깊은 의도는 신라와의 화친과 자기 신분의 정당화에 있었을 것이다. 또 아이들이 부른 노래의 노랫말은 구중궁궐 속의 선화공주가 마통방과 바람이 나서 정을 통하였다는 요조숙녀(窈窕淑女)에게는 치명적인 누명을 씌운 내용이었다.
넷째, 무왕은 자기의 목적대로,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꾀어 부부가 되어 백제로 돌아왔는데, 그때 이들 두 사람의 나이는 얼마쯤이었으며, 이 「마통노래」는 언제 지어졌는가가 궁금하다. 필자는 지어진 연대를 선화공주 15세 때인 2931(598)년을 넘지 아니할 것이며, 무왕의 나이는 25세를 넘지 아니할 것이니, 그 지어진 연대는 진평왕 20(2931, 598)년이며, 백제 혜왕(惠王:재위 2931, 598)1년이고, 무왕의 출생은 2921(573)년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평왕은 진흥왕(眞興王: 재위 2873-2908, 540-575)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로,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8)의 뒤를 이어 단제 기원 2912(579)년에 왕위에 올라 2964(631)년까지 나라를 다스리었다. 진흥왕의 장손으로 진흥왕이 승하한 2908(575)년에 진평왕은 나이가 어려 삼촌인 진지왕이 대신 즉위하여 3년 만에 승하하매 즉위하였으니, 그 당시 진평왕은 10 대 소년이었을 것이다. 또 그는 딸만 셋이 있었는데, 맏이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6)이고, 둘째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2935-2994, 602-661 :재위 2987-2994, 654-661)의 어머니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고, 셋째가 선화공주(善化公主)이다. 여기서 진평왕이 어수(御壽) 18세(2912, 579)에 등극하고, 그 해에 선덕여왕을 낳고, 20세(2914, 581)에 천명부인을 낳고, 22세(2916, 583)에 선화공주를 낳았다고 가정할 경우, 선덕여왕은 2912-2979(579-646)년으로 67세를 살았으며, 천명부인 은 2914-?(581-?)년이 되니, 그의 나이 26세에 태종무열왕을 낳았다는 것이 된다. 선화공주는 2916-?(583-?)년이 된다. 이를 백제 무왕과 연계시켜 보면, 무왕은 2933(600)년에 등극하여 2974(641) 년에 승하한 것으로 되어 있는『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를 경우, 무왕이 등극할 때에 부인 선화공주 는 나이가 겨우 17세가 된다. 또 일명 왕흥사(王興寺)라는 미륵사(彌勒寺) 창건이 법왕 2(2933, 600) 년 봄 정월로 되어 있는 것까지를 겸하여 생각하면, 「마통노래」가 지어진 연대는 선화공주 15세 때인 2931(598)년을 넘지 아니할 것이며, 무왕의 나이는 25세를 넘지 아니할 것이니, 그의 출생년은 위덕왕 20(2906, 573)년경으로 추정된다.
다섯째, 마통과 선화공주가 황금을 주워 모은 것은 마통의 나이 25세경이고, 선화공주의 나이 15세경이라고 보인다.
여섯째, 지명법사의 신통력으로 신라 진평왕께 황금을 보낸 일은 『삼국사기』에는 보이지 아니한다.
일곱째, 마통이 인심을 얻어 왕이 된 것은 『삼국사기』에는 법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즉위하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왕위에 오르기 전에 왕흥사(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덟째, 지명법사가 있는 용화산 밑 큰 못에서 미륵불 삼존상이 솟아 나온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는 없다.
아홉째, 선화공주가 그곳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힌 것과 열째, 지명법사의 신통력으로 못을 하룻밤에 메우고 미륵사를 세웠다는 것은 설화적이다.
열한째, 진평왕이 온갖 장인들을 보내어 도와주었다는 기록은 신라의 진평왕이 백제의 무왕을 사위로 인정하여 화평을 유지하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 열두째, 그 미륵사는 고려 충렬왕 때까지도 있었다고 일연스님은 증언하고 있으나, 지금은 많이 퇴락하여 그 터에 탑 일부가 남아 있는 것을 문화재청에서 재건하고자 계획하고 있다.
6. 3. 3. 정읍사(井邑詞)
이 노래는 춤과 더불어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나라의 잔치에 정재(呈才)로 연주되었기 때문에 그 노랫말이 조선 성종(成宗) 때에 이루어진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실리어 전한다. 그 전문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원문을 옮겨 적으면서 필자가 오늘날의 쓰기로 고쳤음을 밝히어 둔다.
전강(前腔) 달아 높이곰 돋아서
어기야 멀리곰 비치오시라.
어기야 어강조리.
소엽(小葉) 아으 다롱디리.
후강(後腔) 전(全)저재 너러신고요.
어기야 진 데를 디디올세라.
어기야 어강조리.
과편(過篇) 어느이다. 놓고시라.
김선조(金善調) 어기야 내 가는데 저무실세라.
어기야 어강조리.
소엽(小葉) 아으 다롱디리.
이 작품에 관하여는 백제 노래인가? 고려 노래인가? 하는 소속의 문제에 대한 논쟁이 있는가 하면, 조선시대 시조(時調)의 원형이라는 설과 아니라는 설의 대립도 치열한 상태에 있다. 이 노래가 백제노래라는 이들은 『고려사』「악지」나 『악학궤범』의 기록에 따른 것이고, 고려노래라고 하는 이는 지헌영(池憲英)교수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이혼(李混)과 그 아들 이이(李異)의 작이라고 주장한 데에서 비롯된다. 池憲英,「井邑詞硏究」,『亞細亞硏究』7호,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6?.
그 이유는 위에 보인 작품은 남녀상열지사가 아닌데 비하여 조선 『중종실록(中宗實錄)』에서 궁중가악(宮中歌樂)으로 알려진 「정읍사(井邑詞)」는 음사(淫詞)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혼 부자가 무고(舞鼓)를 제작하였다는 기록을 찾아 증명하려 노력하였으나, 학계에서는 따르지 아니한다. 또 이 작품의 형태는 매 2구에 조흥음(助興音)이 붙어나가는 분절형(分節形)이다. 이를 조흥음을 모두 빼고 다시 정리하여 적어 보면,
달아 높이곰 돋아서
멀리곰 비치오시라.
전(全)저재 너러신고요.
진 데를 디디올세라.
어느이다. 놓고시라.
내 가는데 저무실세라.
과 같이 된다. 이를 근거로 지헌영교수는 신라시대 “삼구육명사뇌(三句六名詞腦)”와 “단사뇌(短詞腦)”의 존재와 “삼장육구단가(三章六句短歌)”와 “「정읍사(井邑詞)」의 성립연대(충렬왕대 전후)와의 사이에 있는 600년의 공백을 보전하기 위하여” “단가의 발생은 중고기(진성왕-충렬왕)에 있다.”고 하였다. 앞주의 같은 책 같은 글.
그러나 이도 역시 잘못된 생각이다. 그 이유는 현재 우리 시가문학의 발전 양상은 “온빈글노래(三句六名)→가곡(5장 7구형)→시조(3장 6구)”로 발달되어왔기 때문에 “온빈글노래(3구 6명)→시조(3장 6구)”로 바로 발달 연결되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 된다.
이 작품의 내용을 감상하는데, 문제가 되는 것은 “전(全) 저재”냐? “후강전(後腔全) 저재”냐?의 논란이다. 이병기(李秉岐)교수는 “후강전(後腔全) 저재”로 읽어야 한다고 하였는가 하면 李秉岐·白鐵,『國文學全史』, 新丘文化社, 1982.
, 최정여(崔正如)교수는 “전(全) 저재”를 “온 저자[市]”로 풀이하여 기존의 “전주(全州)”로 감상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필자는 이 작품을 아래와 같이 감상한다. 조흥사(助興詞)는 모두 줄이고, 요어(要語)들만으로 풀이한다.
달아! 높이높이 돋아서
멀리멀리 비쳐 주셔요.
온 저자를 도시는가요? 진 데를 디디시겠네요.
어디에 놓고 파시죠? 내 가는데 날 저무시겠어요.
이것은 가곡(歌曲) 형태로 옮겨 본 것이다. 여기서 “내 가는데”는 “시냇물을 건너는데 해가 저서 어두워질 것 같다.”로 풀이된다. 다만 현재로서는 이 작품의 지은이와 그 지어진 연대를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6. 3. 4. 백제의 이야기 문학
6. 3. 4. 1. 백제의 건국 이야기
김부식(金富軾)공의 『삼국사기』권 23, 「백제본기」제1 “시조”조에는 백제의 건국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백제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의 아버지가 추모(鄒牟)이니,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 다.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더니, 부여왕은 아들은 없고 오직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만나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둘째딸을 시집 보내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부여왕이 돌아가매 주몽이 그 왕위를 이어받고, 두 아들을 낳았다. 맏이는 비류(沸流)요, 둘째는 온조(溫祚)이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월군 여 자에게 장가가 두 아들을 낳았다고 함, 원주)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염려하고,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 黎)등 열 명의 신하되려는 사람을 데리고 남쪽으로 떠나니, 백성되려는 이들이 많이 따라 왔다.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곳을 살펴보고, 비류는 바닷가에서 살고 싶다고 하였다. 10명의 신하될 사람들이 간하여 이르기를, “생각하옵건대, 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는 한수(漢水)가 띠처럼 둘려 있고, 동으로는 높은 바위산이 버티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판이 바라보이고, 서쪽으로는 넓은 바다가 막고 있으니, 그 천험(天險)과 지리(地利)야말로 얻기 어려운 형세이니, 이곳에 도읍을 정함이 마땅하지 아 니하겠습니까?.”하였으나, 비류가 듣지 아니하고, 따라온 백성될 사람들을 나누어 미추홀 (彌鄒忽)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될 사람들에게 각각 벼슬을 주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니 이때는 전한 성제(成帝) 홍가(鴻嘉) 3(2316, 서력 전 18)년이었다.(중략) 처음 위례로 올 때에 백성될 사람들이 즐 거운 마음으로 따라왔다 하여 백제(百濟)로 나라 이름을 고쳐 불렀다. 그 세계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扶餘)에서 나온 까닭으로 그 성을 부여씨(扶餘氏)라고 하였다.(하략) “百濟始祖溫祚王其父鄒牟或云朱蒙自北扶餘逃難至卒本扶餘扶餘王無子只有三女子見朱蒙知非常人以第 二女妻之未幾扶餘王薨朱蒙嗣位生二子長曰沸流次曰溫祚(或云朱蒙到卒本娶越郡女生二子)及朱蒙在北 扶餘所生子來爲太子沸流溫祚恐爲太子所不容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百姓從之者多遂至漢山登負兒嶽望 可居之地沸流欲居於海濱十臣諫曰惟此河南之地北帶漢水東據高嶽南望沃澤西阻大海其天險地利難得之勢 作都於斯不亦宜乎沸流不聽分其民歸彌鄒忽以居之溫祚都河南慰禮城以十臣爲補翼國號十濟是前漢成帝鴻 嘉三年也(중략)後以來百姓樂從改號百濟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故以扶餘爲氏(하략).”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수도(首都)로서의 역사가 600년이 아니라 2000년이라는 사실을 일깨움 받게 된다. 이를 다시 말하면, 지금의 우리 서울은 조선(朝鮮)의 도읍 이전에 백제(百濟)가 지금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에 도읍한 사실이 명확하기 때문에 서울의 역사는 2000년이라고 하여야 옳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 3. 4. 2. 삼성(三姓) 이야기
이 이야기는 지금의 제주도(濟州道)에서 전하는 성씨들의 기원설화인데, 이 글의 서술상 편의를 위하여 백제 문학 속에 편입시켜 다루기로 한다. 이 이야기는 현전 『고려사』권 57, 「지(志)」 제 11, “지리(地理), 탐라(耽羅)”조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탐라현(耽羅縣)은 전라도 남해(全羅道南海) 가운데에 있다. 그에 관하여 고기(古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태초에 사람과 물건이 없을 때에 세 사람의 신인(神人)이 땅에서 솟구쳐 나왔다.(그 주 산의 북쪽 기슭에 굴이 있는데, ‘모흥(毛興)’이라는 땅이 바로 그곳이다. 원주) 맏이는 양을 나(良乙那)라 하고, 둘째는 고을나(高乙那)라 하며, 셋째는 부을나(夫乙那)라고 하였다. 세 사람은 거칠고 궁벽한 곳에서 사냥을 하여 얻은 고기로 식량을 삼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살았다.
하루는 자주색 칠을 한 봉하여진 나무상자가 동쪽 바닷가로 떠왔다. 세 사람이 가서 그 상자를 열어 보니, 그 나무상자 안에는 또 돌함이 있고, 붉은 띠에 자줏빛 옷을 입은 한 사람의 사자도 따라 왔다. 그 돌상자를 열어보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과 여러 필의 망아지와 송아지와 오곡의 씨들도 나왔다. 이어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국 사신입니다. 우리 왕이 이 세 따님을 낳으시고, 이르시기를,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 산 에 신의 아들 세 사람이 내려와서 앞으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데, 배우자가 없다.’고 하 신 뒤 신에게 명하시어 세 따님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이제부터 당신들은 결혼하여 왕업 을 이루도록 하십시오.”하고는 갑자기 구름을 타고 가버리었다.
세 사람은 나이 순서대로 아내를 맞이하여 샘물이 좋고, 땅이 기름진 곳으로 가서 활 을 쏘아 살 곳을 정하니, 양을나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都)라 하고, 고을나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都)라 하고, 부을나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 하였다. 비로소 오곡을 씨 뿌리어 농사짓고,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니, 날로 재산이 늘고, 자손이 번창하게 되었다. (하략). “耽羅縣在全羅道南海中其古記云大初無人物三神人從地聳出(其主山北麓有穴曰毛興是其地也)長曰良乙 那次曰高乙那三曰夫乙那三人遊獵荒僻皮衣肉食一日見紫泥封藏木函浮至于東海濱就而開之函內又有石函 有一紅帶紫衣使者隨來開石函出現靑衣處女三及諸駒犢五穀種乃曰我是日本國使也吾王生此三女云西海中 嶽降神子三人將欲開國而無配匹於是命臣侍三女以來爾宜作配以成大業使者忽乘雲而去三人以年次分娶之 泉甘土肥處射矢卜地良乙那所居曰第一都高乙那所居曰第二都夫乙那所居曰第三都始播五穀且牧駒犢日就 富庶(하략).”
이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권151, 「지리지」 “제주목”조와 『동국여지승람』권 제38, 「제주목」조에도 실려서 전하여 오고 있다. 여기에서는 땅에서 솟구쳐 올라온 신인(神人)이 오늘날의 제주 양씨(梁氏)와 제주 고씨(高氏) 및 제주 부씨(夫氏)의 조상이 된 것을 알 수가 있다.
6. 3. 4. 3. 도미처(都彌妻) 이야기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권 , 「열전」제8에 실려 있다. 그 전문은 아래와 같다.
백제사람 도미(都彌)의 아내는 그의 성계(姓系)를 알지 못한다. 도미는 비록 오두막 집의 가난한 백성이었으나, 자못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는 아름답고 도 고왔다. 게다가 절행이 있어서 당시의 사람들에게 칭송이 자자하였다. 개루왕(蓋婁王) 이 그 소문을 듣고, 도미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무릇 부인의 덕은 비록 정조가 깨끗함을 첫째로 치나, 만약 사람이 없는 어둡고 으슥한 곳에서 교묘한 말로 유혹하면, 마음이 움 직이지 아니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하시었다. 도미는 대답하기를, “사람의 정은 참 으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 아내라면 비록 죽을 지라도 두 마음을 가지 지는 아니할 것입니다.”하였다. 왕은 그를 시험하고 싶어서 도미를 일을 주어 머물게 하 고, 한 사람의 가까운 신하를 시켜서 거짓 왕의 복색과 말을 타고 밤에 그 집에 가서 먼 저 사람을 시켜 임금님이 오신 것을 알리고, 그 부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네가 좋다는 말을 들은지 오래이어서 네 남편 도미와 내기를 하여 너를 얻게 되었으니, 내일 너를 데 려다가 궁인(宮人)을 삼겠다. 네 몸은 이후로는 나의 것이다.”하고 마침내 몸을 더럽히려 하였다. 도미의 아내는 말하기를, “나랏님께서는 망녕된 말씀을 아니하시니, 제가 감히 따 르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대왕께서 먼저 방에 드시오소서. 저는 옷을 갈아입고 나아 가겠습니다.”하고 물러와 한 계집종을 잘 꾸며서 들여보냈다. 왕이 뒤에 속은 것을 알고 크게 성을 내어 일부러 도미에게 죄를 씌워 그의 두 눈알을 빼버리고, 사람을 시켜 그를 잡아다 작은 배를 태워 강물에 띄웠다. 드디어 그 아내를 잡아다가 억지로 욕보이려 하 매, 도미의 아내가 말하기를, “이제 남편을 잃고, 외로운 홑몸이 되어 자력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는 터에 하물며 임금님을 모실 수 있는데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지금은 달거 리로 온몸이 땀에 젖어 더러우니, 바라옵건대, 다른 날 목욕재계하온 후에 오도록 기다려 주오소서.”하였다. 왕은 믿고 허락하시었다. 도미의 아내는 갑자기 도망하여 강구(江口)에 이르니, 건널 수가 없었다.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니, 문득 작은 배 한 척이 물결을 따라 나타나 그 배를 타고, 천성도(泉城島)에 이르러 아직 죽지 아니하고 풀뿌리를 캐먹으면서 살고 있는 남편을 만나 마침내 같은 배를 타고, 고구려의 마늘뫼[蒜山] 아래에 이르렀다. 고구려 사람들이 그들을 불쌍히 생각하였다. 옷과 먹을 것을 빌어서 구차한 삶을 살며 떠돌다가 마침내 생애를 마치었다. “百濟人都彌妻失其姓系都彌雖編戶小民而頗知義理其妻美麗亦有節行爲時人所稱蓋婁王聞之召都彌與語 曰凡婦人之德雖以貞潔爲先若在幽昏無人之處誘之以巧言則不動心者鮮矣乎對曰人之情固不可測也而若臣 之妻者雖死無貳者也王欲試之留都彌以事使一近臣假王衣服馬從夜抵其家使人先報王來謂其婦曰我久聞爾 好與都彌博得之來日入爾爲宮人自此後爾身吾所有也遂將亂之婦曰國王無妄語吾敢不順請大王先入室吾更 衣乃進退而粧飾一婢子薦之王後知見欺大怒誣都彌以罪臛其兩眸子使人牽出之置小船泛之河上遂引其婦强 欲淫之婦曰今良人已失單獨一身不能自持況爲王御豈敢相違今以月經渾身汗穢請俟他日薰浴而後來王信許 之婦便逃至江口不能渡呼天慟哭忽見孤舟隨波而至乘至泉城島遇其夫未死掘草根以喫遂與同舟至高句麗蒜 山之下高句麗人哀之丐以衣食遂苟活終於羈旅.”
고 한 이 이야기에서 당시 백제인들의 남녀의 정조관념(貞操觀念)을 엿볼 수가 있다. 예나 이제나 남녀간의 깨끗한 정조 유지는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꼭 지켜야 할 윤리(倫理)이기에 사회 자체도 그만큼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6. 3. 5. 백제의 한문학(漢文學)
백제(百濟)의 한문학은 김부식(金富軾)공의 『삼국사기』권 , 「백제본기」“근초고왕” 30(2708, 375)년조를 보면, “백제는 개국 이래로 문자와 기사(記事)가 없었는데, 근초고왕에 이르러 박사 고흥(高興)에 의하여 『서기(書記)』가 이루어졌다.” “(전략) 百濟開國已來未有以文字記事至王得博士高興始有書記.”
고 하였고, 일본의 나라(奈良)에 있는 이시야마신궁(石山神宮)에서 보배로 간수하고 있는 백제의 칠지도(七支刀)라는 칼에 새겨져 있는 명문(銘文)에 “태화(太和) 4(근초고왕 14, 2702, 369)년 5월 16일 병오(丙午)”라는 연기(年紀)가 있는 것으로 볼 때에 백제의 한문학은 결코 고구려와 신라보다 그렇게 뒤떨어지지는 아니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 일본의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는,
왕인(王仁)은 백제나라 사람이다.(중략) 여러 경전(經典)에 달통하였다.(중략) 응신(應神) 15(2617, 284)년에 백제의 구소왕(久素王, 仇首王: 재위 2547-2567, 214-234)이 아직기(阿直 岐)라는 삶을 보내어 왔다. 때에 아직기는 경전을 읽을 수 있어서 황자 토도아랑자(菟道雅 郞子)의 스승이 되었다.(중략) 사신을 백제에 보내어 왕인을 모셔 오니, 이듬해 2월에 왕인 은 『천자문(千字文)』을 갖고 왔으며, 『효경(孝經)』과 『논어(論語)』를 가져다 황자 토 도아랑자에게 주고 그의 스승이 되었다. 여러 전적을 익히게 하여 통달하지 아니한 것 없 었다. 이에 왜국에 유교(儒敎)가 비로소 행하여졌다. 왕인은 「파진가(波津歌)」를 지어 읊 어서 인덕(仁德)과 보조(寶祚)를 축하하매 그를 “가부(歌父)”라고 일컬었다. “王仁百濟國人(중략)通于諸典(중략)應神十五年百濟王久素王遣阿直岐者來時阿直岐能讀經皇子菟道雅 郞子師之(중략)遣使於百濟徵王仁翌年二月仁持千字文來朝以孝經論語授皇子菟道雅郞子皇子以爲師習諸 典籍莫不通達於是儒敎始行於本朝仁且詠波津歌祝仁德寶祚謂之歌父”.(최강현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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