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봉출이가 갑자기 생각났다.
봉출이 집은 동네와 떨어진 곳에 납작 엎드린 두 칸 짜리 오두막으로
우리들의 본부였다.
봉출이가 명색 주인이라서 우리가 푸대접 받을 일이 거의 없었다.
홀아비인 봉출이 아버지는 어쩌다 나타났지만 낮잠을 잘 잤다.
먹대멩이를 고와 먹어야 낫는다는 병을 지녔다고 어른들은 슬슬 피했다.
폐병쟁이였나보다.우리도 꺼림직했으나 달리 갈 데가 없었다.
또 굼턱집을 감돌아야 할 빌미는 많았다.
그 중의 하나는 봉출이가 팽이를 많이 가졌기 때문이다.
봉출이 아버지는 목수였고 구렁이를 회 쳐 먹는 짓 말고는 그런 걸 만들어
아들의 사기를 높이는 게 취미였다 .
우리는 봉출이한테서 팽이 한 개 얻을 속셈으로 봉출이가 시키는 일은 기를 쓰고 했다.
포구나무에 걸린 연을 때는 모험도 마다 안했고
덤벙에 빠진 신짝도 건져주고 하눌타리도 따 바쳤다.
봉출이 어머니는 본 적이 없다.
봉자가 엄마 노릇을 대신 했다.
지게도 지고 신작로 딲는 부역 일에도 수건을 쓰고 나와 어른들과 어울렸다.
구장은 봉자도 어른 몫을 쳐주었다.
봉자는 눈밑에 팥알 만한 검은 사마귀가 있었다.
유식하게 말하면 대단히 매혹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육이오가 끝나자마자 타동 청년과 결혼을 했다.
봉출이 매형 되는 군인은 다리를 살짝 절었는데 일등중사라 했다.
일등이라서 굉장히 높은 줄 알았는데 권총은 차고 있지 않아 좀 시퍼 보였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호각 소리를 내는 기술은 고단자였다.
몇 년 뒤 일등중사는 강원도 묵호에서 오징어 도매점을 크게 한다며 봉출이도 데리고 갔다.
그런 후 그들은 60년이 지나가도 옛동네에는 코 끄트머리도 보이지 않았다.
굼턱집도 새마을 운동할 적 날아갔다.
내가 가끔 찾는 고향 길에서 거기를 지날 적 마다 눈이 쏠렸다.
봉자가 마당에서 봉출이 옷의 이를 잡다가
채질 하듯 옷을 마구 털어대던 광경이 떠올랐다.
해운대 재래시장통에 <봉자 이모네 실비집>이란 막걸리집이 있다 .
우리집 쪽인 대림아파트로 가는 버스는 거기를 지나간다.
건설노동자들로 붐비고 눈썹을 그린 여주인은 파전을 지지느라 눈도 깜작 안한다.
60여 년 전 봉자보다 복스럽지도 않다.
그런데도 이름이 같은 <봉자>라서 신경이 쓰였다.
이 참에 여사장 박봉자씨가 청소년육성기금을 내놓았다는
미담기사가 해운대구신문에 났다.
그래서 매상 좀 올려 주려고 생탁 한 병 할까보다 싶다가도
그냥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