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산 산길따라 걸어보자 땅끝까지!
- 미황사~도솔암~땅끝전망대 15km 종주산행 -
1만 불상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도솔암 기암괴석의 모습. 능선에 서면 탁 트인 해남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추억을 회상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도시들이 있다. 그곳에서 만들어진 기억은 대개 너무나 강렬해서, ‘잊고 싶지 않다!’
혹은 ‘잊을 수가 없다!’라는 공통점이 있다. 해남에 대한 기억은 대체로 이와 비슷하다. 해남에 관한 것이면 가능하면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어 흘끔흘끔 바라보고 싶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내 입가엔 항상 미소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달마산, 달마고도
해남의 첫 기억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막 가을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그때 나는 지금의 아내와 함께
버스를 타고 무작정 해남으로 여행 왔다. 오래된 노포 중국집에서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웠고,
1시간마다 1대 다니는 군내버스를 타고 해남 이곳저곳을 열심히 돌아다녔다.
미황사의 홍매화.
미황사에서 지내는 개 ‘아미’가 따스한 봄빛 받으며 낮잠을 자고 있다.
히치하이킹을 하려고 스케치북도 미리 준비해 갔다. 거기에 ‘도솔암’이라는 글자를 커다랗게 적어두고, 끝없는 시골길을
무작정 걸었다. 여러 사람의 따스한 도움을 받아 계획했던 도솔암을 올랐고, 땅끝마을까지 도착했다. 땅끝탑에서는
갯바위에 부딪히는 잔잔한 파도와 이따금 들려오는 숲의 소리를 들으며 노을을 봤다. 숙소로 돌아왔을 땐,
온몸에서 땀 냄새가 났다. 무척 힘들었던 여행이었지만, 그때의 사진을 보면 미소가 지어진다.
해남에서 흘린 소중한 땀방울들은 시간이 지나 ‘추억’이란 이름으로 굳어졌고, 이내 ‘지독한 애틋함’이 되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다. 아득히 먼, 그래서 더욱 애틋한 해남. 나는 그곳으로의 산행을 앞두고 며칠 전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시라도 빨리, 이왕이면 오래 머물고 싶었다. 함께 가기로 한 성균관대 산악부 출신 박기완씨와 한양대 산악부 출신
김도희양에게도 근사한 해남 여행을 선사하고 싶었다. (두 사람 모두 처음 가는 해남에 기분이 들뜬다고 했다)
일요일 새벽, 우리는 서울 삼각지역에서 출발했다. 미황사까지 꼬박 6시간 넘게 걸렸다.
달마고도는 오르내림이 적어 힘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길
산행의 시작점은 미황사다. 달마산達摩山(489m) 서쪽 아래에 위치한 이 절은 꽤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692년에 제작된 ‘미황사 사적비’에 따르면 미황사는 신라시대 749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수백 년에 걸쳐 흥망성쇠를 거듭한 미황사는 오늘날 전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유명 사찰이 됐다.
2001~2021년 미황사 주지로 부임했던 금강 스님의 노력 덕분이었다.
금강 스님은 달마산의 훼손을 막고, ‘자연 친화적인 길’을 만들기 위해 중장비 없이, 삽, 호미, 곡괭이만으로 옛길을
다듬는 달마고도 조성을 기획했다. 말뚝, 철심, 밧줄 같은 등산로의 흔한 구조물은 모두 배제했다. 2017년 11월,
마침내 달마고도가 문을 열었다. 달마산 7부 능선을 따라 미황사의 옛 12개 암자 터를 걷는 한국형 순례길의 시작이었다.
산행을 시작하기 전, 먼저 미황사를 한 바퀴 둘러봤다. 아쉽게도 미황사 대웅보전은 해체 복원 공사를 위해 지어진 가건물에
둘러싸여 있었다. 2022년부터 시작된 공사는 2024년 6월이면 끝난다고 했다.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달마산 암봉을
거느린 대웅전을 볼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곧 발걸음을 돌려 달마고도 4코스로 들어섰다.
달마고도 표지석.
“달마고도에는 총거리 17.74km의 4가지 코스가 있대요. 1코스 ‘출가의 길’, 2코스 ‘수행의 길’, 3코스 ‘고행의 길’,
그리고 4코스 ‘해탈의 길’까지요. 오늘 우리는 4코스를 걷는다고 했죠? 방향을 보니 해탈의 길을 거슬러 걷는 셈이네요.
아직 수행도, 고행도 겪지 못했는데 벌써 해탈의 과정을 되짚어본다니…하하! 어찌 됐든 재밌을 것 같아요!”
신나게 이야기를 늘어놓은 도희씨는 다람쥐처럼 숲길로 재빠르게 나아갔다. 초반부는 대체로 평탄한 길이었다.
나무 데크 하나 깔려 있지 않아, 자연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선 기분이었다. 달마고도는 남도 특유의 난대림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동백나무와 굴참나무, 시누대가 자라는 숲을 지나면 삼나무, 편백나무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고, 그 사이로 소나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얼마쯤 걷자 거대한 너덜지대가 나타났다. 산행을 하기 전까지는 ‘400m대 산의 너덜이 커봐야 얼마나 크겠어?’라고
생각했었는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너덜은 상상 이상의 크기였다. 숲과 숲 사이를 가로막는 거대한 강 같기도 했다.
우리는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기완씨는 이곳을 보고 “설악산 귀때기청봉 못지않게 멋진 풍경이네요!”라며 조용히
주머니에서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그는 웬만한 풍경이 아니면 산행할 때 사진을 찍지 않는다)
달마산 너덜은 흰빛을 띠는 규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달마고도 4코스에서 만난 커다란 너덜지대.
땅끝에서 안녕
달마산 대부분의 돌은 규암硅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규암은 약간 흰빛을 띤다. 말하자면 달마산은 산 전체가 희다고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바위들이 부서지고 쪼개져서 너덜을 이루고 있다. 규암에는 철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
그래서 표면에 녹이 슬기도 한다. 울긋불긋한 표면이 주근깨 같기도 했고, 황금빛 이끼처럼 보이기도 했다.
흰 배경에 군데군데 주황색 점을 찍은 거대한 바위! 나는 이것이 꽤 멋져 보였다.
봄기운 가득 머금은 햇빛을 피해 숲속으로 몸을 피했다. 이후로도 호젓하게 달마산 자락을 즐길 수 있는 편한 흙길이 이어졌다.
한 30분쯤 걸었을까? 지금까지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선물처럼 등장했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삼나무 군락지!
여기에 들어가면 몸과 마음이 시원하게 정화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숲으로 들어서니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기완씨는 눈을 감고 고개를 내밀어 숲 냄새를 킁킁 맡기도 했다.
“진짜 공기가 좀 다른 것 같아요. 맑은 공기가 코를 타고 들어와 목구멍을 거쳐 온몸의 내장을 간지럽히는 것 같달까요?
부상 때문에 한동안 산에 오질 못했는데, 가슴이 뻥 뚫리네요!”
사계절 내내 푸릇푸릇함을 간직하고 있는 달마고도 삼나무숲.
잠시 후 그는 쉼터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리는 한동안 이곳에서 쉬었다. 다시 옷을 툭툭 털고 도솔암으로 향했다.
도솔암까지 가는 길은 굉장한 비탈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20분쯤 땅만 보고 걸었다. 이윽고 하늘이 밝아졌고,
능선을 넘나드는 선선한 바람과 함께 제비집을 닮은 벼랑 위의 작은 암자, 도솔암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도솔암은 내 기억 속 모습과는 약간 달랐다. 예전보다 훨씬 깨끗하고, 단정해진 것 같았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 하자, 함께 간 양수열 선배가 말했다.
“도솔암도 미황사처럼 전부 해체해서 복원했대. 조금만 일찍 왔으면, 이것도 못 볼 뻔했어.”
추억 속 도솔암은 조금 달라졌지만, 이곳에서 보는 풍경은 여전히 대단했다. 1만 불상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달마산
기암괴석은 날카로운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마치 도솔암을 지키는 창을 든 무사 같아 보였다. 암자 옆 갈라진
바위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해남의 푸른 바다가 잔잔히 찰랑이고 있었다. 우리는 이 멋진 곳에서 한동안 한적하게 시간을 보냈다.
바위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자 숨겨져 있던 도솔암이 나타났다.
벼랑 위 작은 암자, 도솔암. 마치 제비집을 닮은 모양새다.
“우리 이대로 쭉 능선으로 가죠! 공식적인 코스는 삼나무숲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어차피 두 길 모두 몰고리재에서 만나요.
여기 제가 아는 전망 포인트가 몇 곳 있어요! 기왕이면 달마산을 조금 더 즐겨볼까요?”
모두 순순히 내 제안에 따라줬다. 결국 도솔암 주차장을 거쳐 몰고리재까지 가는 코스로 계획을 약간 변경했다.
몰고리재로 가는 임도에선 앞으로 걸어야 할 능선이 한눈에 보였다. 기완씨가 말했다.
“저기가 땅끝기맥 마지막 능선이군요. 생각보다 오르내림이 꽤 심해 보이네요? 저 먼 능선 끝엔 뭐가 있을까요?
땅끝에서 일몰을 보면 좋을 텐데….”
달마산 동쪽으로 펼쳐진 풍경
땅끝 어스름한 황혼
또 다른 인증지점인 몰고리재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턴 달마고도가 아닌 땅끝천년숲옛길과 남파랑길 90코스에만 해당하는
길이었다. 이미 우리는 해탈의 길을 지나왔는데, 이제서야 진정한 해탈의 길로 들어선 기분도 들었다. 갈 길이
태산이었다. 중천에 떠있던 태양은 어느덧 불그스름한 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예상대로 마지막 땅끝기맥은 다소 거칠었다. 잔잔한 오르내림이 끝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기맥길이었음에도 등산로는
선명했다. 잡목이 거의 없었고, 정비도 잘되어 있었다. 다만, 조망이 트이는 구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덕분에 한 발 한 발 걷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
취재했던 3월의 해남은 아직 초록빛이 만연하지 않았다. 그래도 충분히 멋졌다.
산길에서 만난 매화 위로 일몰 빛이 물들고 있다.
묵언수행의 길이었다. 이따금 나무 사이로 붉은 노을빛이 새어 들어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조용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봤다.
조망이 트이는 곳에선 좌우로 벌겋게 달아오르는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 완도 방향의 백일도와 흑일도는 빛을 받아 더욱
선명해졌고, 진도와 양도, 어룡도는 역광 때문에 희미한 실루엣으로 점차 자취를 감췄다.
길 위의 풍경들을 즐기며 정신없이 걸었다. 어느덧 망집봉을 지나 사자봉 땅끝전망대에 섰다. 태양은 이미 수평선 아래로
자취를 감췄다. 빛을 받아 등산로를 반짝반짝 빛내던 것들도 모두 아스라이 사라졌다. 이제는 오늘의 땅끝과 작별할 시간.
땅거미 진 어스름한 황혼을 보니 세상의 윤곽이 흐려지고, 처음 보는 신비한 존재를 만날 것만 같은 오묘한 예감이 들었다.
- 월간 '산' 에서 가져 온 기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