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돌아갈 수 없다' 죽음을 각오한 원전 작업 도쿄전력 직원이 증언
"쾅!" 지난해 3월 12일 오후 도쿄 전력 후쿠시마 제 1원전. 면진중요동 2 층의 비상 대책 본부에 있던 홍보반장 겐시 아키히로씨(49)의 몸이 치받는 것 같은 충격으로 의자에서 떠올랐다.
대책 본부에 창문은 없다. "여진은?" 무엇이 일어 났는지 모르겠다. 면진중요동에서 남동쪽 300 미터의 1호기에서 수소 폭발이 일어나고 있었다. 구내 방사선량이 급증했다.
"2,3 호기도 폭발이 일어날수 있다. 폭발 방지수단을 강구하라." 원탁의 바로 옆에 앉아있던 요시다 마사오 소장(당시)이 마이크를 잡고 소리쳤다. 2,3 호기도 원자로 격납 용기 내의 압력이 상승했다. "살아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현장의 모두가 죽음을 각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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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차례로 폭발하는 원자로 건물, 대피하는 근로자. 원전 사고 발생 후 5 일간 악화 일로를 걸었다.상황이 더욱 심각화되는 것을 막으려 원전에 머물렀던 도쿄전력 직원 2명이 1년 전을 회고하면서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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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에는 3호기가, 15일 새벽에는 4호기의 건물이 폭발했다. 요시다가 다시 마이크를 잡는다.
"각 담당 책임자는 남을 사람을 모집해 달라"
도쿄전력은 15일 오전 근로자 약 650명을 대피시켰다. 원전에 남은 것은 나중에 해외 언론에서 "후쿠시마 피프티즈"라고 불리게 되는 대략 70명. 겐시씨도 그 안에 있었다.
겐시씨는 "방사성 물질이 확산되어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일본이 끝장날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해 남았다. 자신들은 최악의 사태를 막기위한 '결사대'인 것이다라고.
뇌리에 도쿄에 남은 처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사고발생 이후 아직 연락을 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말라"고 한마디만이라도 전하고 싶다. 대책본부 앞 복도에 나가서 휴대 전화로 집으로 전화를 했지만 연결되지 않는다. 문득 주위를 보니 동료들이 울면서 전화를 했다.
한편 도쿄전력의 기술계 관리직의 남성직원(46)은 3월 14일부터 소방차에서 퍼 올린 해수를 압력용기에 쏟아 붓는 작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주수작업에 함께 참여할 사람은 없는가." (주수)작업은 도쿄전력의 자위 소방대가 맏고 있었다. 잇따른 수소폭발, 대량 피폭의 공포. 현장에 나오기를 주저하는 대원이 몇 명이나 있었고, 일손이 부족해져 지원자가 모집되었다.
3호기가 폭발한 직후인 14일 오후, 방호복에 몸을 감싸고 건물의 바다쪽으로 향했다. 해일로 널부러진 자동차와 설비, 폭발로 비산한 큰 파편이 있었고, 자동차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험한 길을 도보로 나아갔다.
잔해 사이를 소방차 호스가 뱀처럼 기고 있었다. 호스에서 누수는 없는가, 소방차는 쓸수 있는가? 혼자서 걸어가며 확인한다. 3호기 근처에 와보니 큰 건물 위에서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2시간 미만의 순찰이 겨우 끝날 무렵 선량계의 알람이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런 짧은 시간에 40밀리 시버트 이상의 피폭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4호기가 폭발한 15일 이후 순찰에서는 2호기 건물의 벽에 나있는 구멍으로부터 계속 나오는 연기가 걱정이 되었다. 건물 근처에 있을 때 2호기가 폭발한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이거 않되겠네. 살아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남성직원은 사고 발생 며칠 동안 거의 자지 않고 작업했다. 3월 하순까지 주입 작업에 종사했지만, 누적 선량이 100밀리 시버트를 초과하여 현장에서 제외됐다. 당시의 광경은 지금도 현실에서 일어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사이타마현의 자택에서 건물 폭발을 전하는 텔레비전 영상을 보고 있었던 유치원생인 장남이 "아, 아버지 죽어버렸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3월 하순이 되어 아내에게서 들었다.
(교토 통신 2012/03/13 )
인용출처 : http://blog.goo.ne.jp/jpnx05/e/def5f4d5f47692005e786afd902338d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