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9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들 축일(대한성공회 설립 기념일)
창세 28:10-17 / 묵시 12:7-12 / 요한 1:47-51
천사에 대한 재인식
영국의 시인 존 밀턴(John Milton)이 1667년에 발표한 장편 서사시《실낙원(Paradise Lost)》은 14세기 이태리 작가 단테(Dante)가 쓴 《신곡(Divina Commedia)》과 함께 대표적인 기독교 대서사시입니다. ‘잃어버린 낙원’이란 뜻인 《실낙원》은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왜 낙원을 상실했는지에 대하여 유대교와 기독교 전승에 있는 자료들과 작가의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써 내려간 역작입니다. 이 책 전반부에는 태초에 천상계에 있는 천사들 중에서 루시퍼(Lucifer)로 대표되는 일군의 천사들이 하느님께 대적했고, 이에 미카엘을 비롯한 천사들과 벌인 큰 전쟁을 장황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천상의 싸움에서 패하고 지옥으로 추락하여 사탄(Satan)이 된 루시퍼가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던 하느님의 사랑하는 피조물인 인간을 유혹하고 타락시켜 하느님께 복수하는 장면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문학에 관심있고 중세와 근대 서구 기독교인들의 세계관을 알고 싶으신 분들에게 저는 《실낙원》을 추천 드리고 싶습니다. 특별히, 이 책은 성경에선 간간히 등장하지만 신학이란 학문에서는 별로 다루지 않는 주제, 그러면서도 대중적인 신앙에서는 오랫동안 회자되고 있는 천사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오늘날까지도 영화, 게임, 노래 등 대중문화와 여러 예술작품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천사(天使) 혹은 천신(天神)으로 번역되는 Angel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나 신화 등에서도 존재합니다. 그들은 보통 신의 사자(使者)들로서 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거나, 인간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자들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야곱이 형 에사오를 피해 도망가는 길에 피곤해져서 잠을 잤는데, 꿈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층계를 보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여기서 천사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매개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천사의 역할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였고,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정교해지고 복잡해졌습니다. 그러면서 다양한 천사들의 위계가 생기고, 각 위계에 해당하는 역할들이 부여되었습니다. 이처럼 당시 유럽사람들이 성경에 등장한 천사들 로부터 여러가지 형태의 천사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점차 여러 신들이 등장하는 그리스신화와 유사하게 변질되어갔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우리는 천사의 계급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많은 천사들이 있고 또 서로 다른 역할을 맡는다는 사실만을 성경을 통해 짐작할 뿐이다."라고 하면서,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지나친 신심행위들을 경고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에서는 3대 천사를 언급하고 있는데, 모두 성경에 등장하는 존재들입니다. 그 중 미카엘(Michael)은 오늘 제2독서 묵시록에 등장합니다. 미카엘 대천사는 《실낙원》이란 책에서 태초에 천상에서 사탄과 싸웠던 것처럼 마지막 날에도 하늘에서 악마와 큰 전쟁을 벌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환시 중에 이 장면을 보고, 지상에서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이 사실은 천상 즉 초자연 세계에서도 벌어지는 커다란 영적전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선이 악을 이길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누가 하느님과 같으랴?’라는 뜻을 지닌 미카엘은 하느님의 절대성과 진리 그리고 주님의 나라를 수호하는 상징입니다. 미카엘은 ‘빛을 가져오는 자’라는 뜻을 지닌 루시퍼와 ‘왕’이란 뜻을 지닌 사탄과 항상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 빛이시며 참 된 왕이신 하느님과 함께 할 때만이 피조물은 자신다워질 수 있으며 창조질서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창조주에게서 떨어져 나와서 자기 스스로가 빛이요, 왕이라고 하는 순간 서로가 빛이요, 왕이라고 주장하는 무질서 속으로 빠져들게 되어 서로 아귀다툼에 휘말려 들게 됩니다. 결국 인간은 태초에 사탄, 즉 루시퍼가 걸었던 그러한 파멸의 길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미카엘 대천사는 그 비극을 막기위해 악과 싸우는 역할을 맡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느님은 강하시다’라는 뜻을 지닌 가브리엘(Gabriel)은 하느님의 계시를 전하는 메신저 역할로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루가 복음에서 즈가리야에게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고, 성모 마리아께 예수님의 탄생을 알린 것입니다. 가브리엘을 통해 하느님은 인간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간에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강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며 희망의 선물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고쳐 주신다’라는 뜻을 지닌 라파엘(Raphael)은 치유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선 예수님께서 베짜타 연못에 있는 병자를 치유해주시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연못에 대하여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요한5:4)”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님의 천사가 바로 라파엘 천사입니다. 구약성경에선 토비트서에서 맹인이 된 토비트를 고쳐줄 때 라파엘 천사가 등장합니다.
이상과 같이 성경과 그리스도교 전통에 등장하는 천사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에서 천사들은 어떠한 의미인가요? 먼저, 천사는 하느님의 특징을 부분적으로 드러내는 걸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하느님을 완전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때와 장소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당신의 모습 중 어떤 특정한 측면을 천사를 통해 드러내십니다. 종교학에서는 이것을 ‘현현(顯現 epiphany)’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천사들을 통하여 하느님은 ‘이런 분이시구나’, ‘저런 분이시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컨대, 라파엘 천사를 통해 치유하시는 하느님을,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어려움 속에서 희망의 소식을 알려주시는 하느님을, 미카엘 천사를 통해 악에 굴복하지 않고 진리와 정의를 위해 싸우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이처럼 천사는 하느님의 다양한 속성을 인간에게 전하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 상징들이 가리키는 최종지점은 하느님입니다. 이제 그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 되셨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하느님은 천사들처럼 부분적으로 당신을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당신을 계시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앞으로는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50-51)”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하느님은 야곱이 꿈에서 봤던 것처럼 꿈이나 천사와 같은 그런 간접적 차원이 아닌 역사(歷史) 안에서 역사(役事)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생하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행적을 읽고, 기도하고, 그 몸과 피를 영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세상에 드러냅니다. 달리 말하면 천사는 더 이상 저 멀리 천상에 계신 하느님과 이 지상에 살고 있는 인간을 이어주는 역할에서, 인간이 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제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 증거하는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교회와 교회의 지체를 이루고 있는 우리들은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 아픈 이들에게 위로와 회복을 주는 라파엘 천사, 그리고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진리와 선함을 지키는 미카엘 천사가 되어야 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 축일인 오늘은 대한성공회 설립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134년 전 오늘이 고요한주교(Bp. Charles William Corfe)께서 5명의 사제들과 의사 랜디스(Eli Barr Landis, 한국명: 남득시)와 함께 인천에 첫 발을 내디딘 날입니다. 그 날이 바로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 축일입니다. 그래서 매년 대한성공회는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 축일에 대한성공회 설립도 함께 기념합니다. 특별히, 저는 성 미카엘 축일을 맞아 우리 신학교를 위해서 언급하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성공회대학교는 예전에 천신신학교 혹은 미카엘 신학원이라고 불렸습니다. 미카엘이 모든 천사들 중에서 으뜸가는 천사였기 때문에 천신(天神)이라고 해서 두 가지 명칭을 모두 사용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왜 미카엘 신학원이라고 했는지 그 연원에 대해서 아시는 분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신학교가 강화성당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다들 아실 것입니다. 1914년 강화성당 부지에 첫 신학교를 세울 때 명칭은 ‘강화수도원’이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영국선교사들은 장차 신학생들이 지적훈련뿐만 아니라 수도사들처럼 영적으로도 잘 훈련된 좋은 성직자들이 되길 바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강화수도원 채플이름이 ‘미카엘 채플’이었습니다. 마치 미카엘 천사가 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진리와 교회를 지키는 수호자들이 되길 희망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의 심장이라고 하는 신학교는 미카엘 천사와 같은 성직자들이 육성되고, 그런 ‘미카엘들’이 각 교회로 파송되어 교회를 수호하는 자들이 되길 희망합니다.
오늘 대한성공회 설립기념일을 맞아 우리 교회와 우리 교회의 미래세대가 자라나는 신학교가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들처럼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증언자들이 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달하는 천사들의 사명을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모든 천사들의 주인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