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보산 사건의 발발과 사건 개요
(1) 일제가 만보산 사건을 일으키게 된 뒷 배경
- 지난 글에서 사건의 상황적 배경을 밝혔듯이 만보산 사건은 간도의 영유권을 두고 중국과 일본의 대립구도 속에서 벌어지게 된 사건이다. 하지만 결코 이 사건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일본에 의해서 조작이 된 것이다. 일본이 사건을 조작하게 된 배경은 이러하다. 원래 간도 지방은 우리 민족의 무장운동이 활발하게 전개 된 곳이다. 20년대에 존재하던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는 민족유일당 운동의 일원으로 3부통합운동을 실시하지만 결국 결렬된다. 결국 삼부가 혁신의회와 국민부로 나뉘는데 혁신의회는 나중에 한국독립당이 되고(1930) 그 산하에 한국독립군을 둔다. 또한 국민부는 조선혁명당(1929)으로 바뀌면서 조선혁명군을 그 산하에 둔다. 주목할 점은 이 두개의 군이 바로 중국군과 합작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한국과 중국의 연대 항일 무장 투쟁을 두려워 하던 일본은 둘을 이간시키려는 계책을 모색하고 그 해법의 일환으로 실행 된 것이 바로 만보산 사건이다.
(2) 만보산 사건의 발발
- 1931년 7월 2일 만보산 사건은 이러한 상황적 배경과 일제의 음모속에서 발생하였다. 발생의 원인은 중국인 학영덕이 장농도전공사(長農稻田公司)의 명의로 길림성 장춘현 이통하 동쪽 삼성보 관황둔 일대의 중국인 지주 소한림등 12호의 토지 500상을 10년 기간으로 조지계약을 체결한 후, 다시 이 땅으로 조선인 농민 이승훈 등 9명과 전조계약(땅을 빌리는 계약)을 체결한 데서 발생하였다. 땅을 빌린 조선인 농민들이 개간지를 수전으로 만들기
위해 수로를 파자 중국인 지주들은 수로가 자신들의 토지에 손상을 준다고 주장하며 수로공사를 즉시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인 농민들이 일본 경찰의 호위하에 계속 수로공사를 진행하자 7월1일과 2일 수백명의 중국인이 수로를 파괴했으며, 이에 일본경찰은 그들에게 사격을 가했으나 큰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 비록 커다란 유혈사태를 부를뻔한 일촉측발의 상황이었지만 조선인과 중국인 양측 모두 커다란 피해는 입지 않았다. 하지만 대륙침략을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 관동군에서는 이 사건을 이용하기로 하고 장춘영사관에 지령을 내려 큰 피해를 입은 것처럼 조선에 허위보도하도록 하였다.
조선일보의 장춘지국장 김이삼 기자(그는 나중에 이 사건을 계기로 암살을 당하였다.)는 일본의 꾐에 빠져서 만보산 현지에 가보지도 않은 채 본사로 허위보도를 전송하였다. 보도에 신중을 기했던 동아일보와는 달리 조선 일보는 이를 7월 2일 석간과 3일 조간 호외에 (1)'대치한 일, 중관헌 1시간여 교전, 중국기마대 600명 출동, 긴박한 동포안위)' '철퇴요구 거절, 기관총대 증파'라고 기사를 실었다. 이로 인하여 한국내에서는 중국이 배척사건이 일어나게 되었고 재만조선인들은 이에 대한 보복조치를 두려워 하며 몸을 떨고 있었다.
(3)사건의 수습
- 만보산 사건 이후로 어지럽혀진 만주의 인심을 달래기 위해서 국내에서는 재만동포위문단이 파견되었다. 한편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서 만보산사건토구회가 조직이 되었다. 동북지방의 독립운동가인 윤복영, 최동오등은 사건 후 길림에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 국내외에 이를 알렸다. 진상조사 결과 토지에 대한 계약은 존재하였지만 그것이 아직 중국관청의 허가를 받지 못하였고, 수로공사도 중국인의 양해없이 이루어졌던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장춘의 경찰서장이 김이삼에게 허위보도를 제공한 것을 밝혀냇으며 이에 그들은 [경고전중국동포]라는 선언서를 배부함으로써 중국인들에게 일본의 음모를 밝히고, 재만조선인들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또한 그들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사장을 만나 만보산사건의 진상을 설명하고 국내에서의 화교습격을 중지해주는데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사건에 있어서 수습을 책임져야할 조선총독부는 한국내 중국인 배척사건을 오히려 조장시켰는데, 후에 피해를 입은 중국인들을 귀국시킴으로써 재만동포들에 대한 보복을 부추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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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사진
(2)중국인들의 수로 파괴
(3)김이삼 기자가 피살된 동아여관 터
(4)재만동포위문단
(5)만보산사건토구회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