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해밀턴 쇼 이야기
서울 녹번동 은평평화공원(恩平平和公園)에 군복 차림의 동상이 있다.
6·25 전쟁 첫 해인 1950년 9월 22일, 서울 수복 작전 때 녹번리 전투에서
29세로 전사한 미국 해군 대위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서위렴; 1922~1950)를 기리는 조형 물이다.
동상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의 한국 선교사 윌리엄 얼 쇼의 외아들로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미국 웨슬리언 대학교(Wesleyan University)를 졸업하고
2차 세계 대전 중 해군 소위로 노르망디(Normandy) 상륙작전에 참전했다.
1947년 한국으로 돌아와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며 한국 해안 경비대 창설에 기여했다.
제대 후, 하버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 6·25 전쟁이 터지자 젊은 부인과 두 아들을 처가에
맡기고 재입대 했다.
이때 그는 부모와 주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조국에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히 공부만 하고 있겠는가.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를 해도 늦지 않다.”
유창한 한국어로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장군을 보좌하며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한 뒤, 그는 해병대로 보직을 바꿔 서울 탈환에 나섰다가 인민 군 매복 조의 습격을 받아 전사
했다.
그의 숭고한 사랑에 감명 받은 미국 감리교인들은 아버지 윌리엄 얼 쇼가 공동 창립한 대전 감리교
신학교(현 목원대)에 ‘윌리엄 해밀턴 쇼 기념 교회’를 건립했다.
그의 부인은 남편 잃은 슬픔 속에서도 하버드대 박사 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와, 이화여대 교수와
세브란스 병원 자원봉사자로 평생을 바쳤다.
아들과 며느리도 하버드대에서 한국사로 박사 학위를 받고 내한해 장학 사업과 한·미 학술 교류에
힘썼다.
은평평화공원 그의 동상 옆에는 기념비도 있다.
연세대 총장을 지낸 백낙준(白樂濬; 1895~1985) 전 문교부 장관 등 60여 명이
‘키가 크고 평양 말씨를 쓰던 벽안의 친구’를 위해 1956년 녹번 삼거리에 세웠다가 이곳으로
옮겨온 비석이다.
비석 받침대에는 제자이자 친구인 해군사관학교 2기생들의 헌사가 새겨져 있다.
그와 한국 친구들의 특별했던 우정은 국가 간 우방과 동맹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한국을 위해 목숨보다 더 큰 사랑을 바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매년 6월 6일과 9월 22일
이곳을 찾는다.
금년 현충일에도 그의 동상 앞에 오래 고개를 숙이고 눈물 짓는 사람들이 있었다.
눈물이 납니다.
자기가 태어난 나라 코리아를 자기 조국이라고 생각하며,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
“내 조국에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히 공부하고 있겠는가.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를 해도 늦지 않다.”고 하며 부인과 아들을 처가에 맡기고,
자원 입대해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애국 충정을 높이
기립니다.
-고성현의 ‘비목’
https://youtu.be/WCjHnSciw74
<우리나라를 조국이라 부르며 대대 손손 헌신하신
벽안의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님을 그리며 이 글을 옮깁니다.>
<받은 글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