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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30. 묵상글 (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 안 고쳐주시는 선의에 대한 믿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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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30.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안 고쳐주시는 선의에 대한 믿음
복음을 보면 믿음의 수준을 보여주는 여러 청원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악령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주님께 치유를 청하는 겁니다.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가 자기의 치유를 청하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즉시 압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가 악령 들린 아이의 아비보다
믿음의 수준이 훨씬 더 높다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께 ‘하실 수 있다면’이란 말이, 말이 됩니까?
이것은 돌팔이 의사에게도 할 말이 아니고,
의사 특히 명의에게는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지요.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없이 무엇 하러
의사에게 오고 어찌 치유를 청한다는 말입니까?
고칠 수 없다면 의사가 아니고 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의사에게 가서 물을 것이 아니라
가기 전에 그 의사에 대해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확신이 선 뒤에 가 청해야 합니다.
능력의 하느님과 가능성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믿음의 가장 초보이자 기초입니다.
이 믿음의 기초 위에 우리가 지녀야 할 믿음이
사랑과 선의의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오늘 나병 환자는 능력의 주님께 대한 믿음은 확고한 상태에서 왔고,
제 생각에 주님의 사랑과 선의에 대한 믿음도 확고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은 어떤 뜻입니까?
주님께 선의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 아닌가요?
다시 말해서 주님의 선의에 대한 확신은 아직 없는 것 아닌가요?
제 생각에 선의에 대한 확신은 있습니다.
다만 선의의 내용이 뭔지 모를 뿐입니다.
고쳐 주시는 것도 좋은 뜻이고 사랑이며
안 고쳐 주시는 것도 좋은 뜻이고 사랑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쳐 주시는 것만 사랑과 선의라고 믿지는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안 고쳐 주시는 주님의 선의에 대해
알지는 못하더라도 믿음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안 고쳐 주시는 주님의 선의가
고쳐 주시는 선의보다 더 큰 선의라고 믿는 겁니다.
다만 그것이 왜 더 큰 선의인지 지금은 알 수 없고,
미래 언젠가는 주님께서 왜 그러셨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그런 체험을 많이 하였습니다.
왜 안 들어주셨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된 주님의 더 큰 선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 생각에 주님의 사랑과 선의에 대한
더 높은 수준의 믿음과 청원은 내가 원하는 호의를
밝히거나 요구치 않고 그저 주님 자비에 맡기는 것입니다.
복음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렇게 청하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고 뭘 원하는지 주님께서 되물으시면 그때
내가 원하는 호의를 말씀드려도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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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30.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치유를 통해 예언자 ‘엘리사의 활동’을 완성함으로써(2열왕 5,1-27), 당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십니다.
나병환자는 <레위기>(13,45-46)에 따르면,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윗수염을 가림으로써 자기가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드러내야 했고,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도 없었으며,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도 없었습니다(민수 5,2-4).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자기에게 접근해 오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레위 13,45)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약의 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의 한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받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때문에 오히려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복음>은 이 처럼, 규정을 제시하기보다 사랑과 호의를 제시합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이는 주님의 치유의 능력을 믿으며, 그 능력의 행사는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있음을 인정하고, 오로지 주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한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당신의 원의에 순명하겠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마치 겟세마니에서의 예수님께서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신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라고 하신 것처럼, 나병환자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 뜻에 순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한다면’ 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당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지요? 자신의 바람을 하느님께 원하고 있는지요? 아니면 하느님의 바람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혼자를 만지셨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를 만지거나 접촉하면 부정을 타게 됩니다(레위 14,46).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구원의 힘을 드러내며, 그분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결한 나병환자를 직접 접촉하심으로써 그에게 사랑을 베푸십니다. 나병환자를 접촉하시지만 부정을 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부정을 피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져 깨끗하게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규정보다도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더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리하여, 당신께서는 불결함에 더럽혀지지 않는 “거룩하신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곧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십니다. 당신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호렙산의 불꽃 속에서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탈출 3,2), 아기를 낳으면서도 동정성을 잃지 않은 성모님처럼, 불결한 이를 만지면서도 불결해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결한 이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참으로, 당신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오 사랑이신 우리 주님 구원자이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 8,3)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죄인이기에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소서.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제게서 이루소서.
오, 주님! 당신이 원하신 것을 제가 원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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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30.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어떤 나병환자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어 깨끗이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병의 원인이 무조건 환자 자신의 죄나 부모의 죄로 말미암은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병자나 불구자는 그 자체로 죄인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이들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나병환자는 격리되어 지내야 했습니다. 가족은 물론 사회에서도 소외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치의 병이고 전염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록도, 안양 나자로 마을, 경북 칠곡 등에 따로 모여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외면했습니다. 병보다 사회로부터의 고립됨이 더 큰 아픔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시면서 고쳐주셨습니다. 보통 사람이면 감염의 위험 때문에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결핵이 한참, 창궐할 때 ‘폐병’이라고 해서 그의 곁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서서 환자들에게 치유의 손길을 내밀어 고쳐주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을 거두어 준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종교적 단죄에서 그리고 사회적 소외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덕분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방법은 고통 중에 있는 그 사람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를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할 일도 생각합니다. 능력의 주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셨는데 그 바탕에는 나병환자의 믿음이 한몫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에 예수님께서“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응답하시며 고쳐주셨으니 나병환자는 자신의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린 것입니다. 믿고 구할 때 주님께서는 그 간절한 청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외적인 나병을 치유 받아야 하지만 우리 영혼의 치유가 선행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꼬이면 그것이 겉으로 드러납니다. 드러난 병보다 마음의 병이 더 무서운 것이고 그래서 그 병을 깨끗이 치유 받아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쌓여만 가는 교만함과 나태함, 이기적인 습성들을 인정함으로써 새로 태어나야 하겠습니다. ‘하고자 하시면 낫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우리의 큰 기쁨이기를 바랍니다. ‘보통 의원은 병의 증세를 보고 그것을 다스리지만, 명의는 병의 뿌리를 다스린다.’고 합니다. 뿌리를 다스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으니 주님의 자비로 죄의 용서를 받고 마음의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은 용서하시는 데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죄의식으로 말미암은 병은 죄의식을 없애서 고쳐야 하고, 잘못된 생활습성 때문에 생긴 병은 그것을 바로잡아서 고칠 일’(이현주)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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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30.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김구 선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외모가 반듯한 것보다는 몸이 건강한 것이 좋다. 몸이 건강한 것보다는 덕이 있는 것이 좋다.” 우리는 살면서 반듯한 외모와 건강한 몸에 더 관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런 것들은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기에 그런 것들이 성공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도 균형 잡힌 몸매를 보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강인한 체력을 보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 온유한 사람, 덕이 있는 사람을 보고 부러워한 적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험난한 세상을 살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젊어 보이려고 머리를 까맣게 염색하기도 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여전히 하루 3시간 정도는 걷고 있습니다. 하지만 덕을 쌓는 데는 소홀한 면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아라.”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참된 자아를 발견하면서 시작됩니다.
삼국지에는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고사가 있습니다. 유비가 제갈량을 모시기 위해서 3번이나 제갈량의 집을 찾아간 것을 뜻합니다. 유비에게는 강건한 무장이 있었습니다. 관우, 장비, 조운은 당대 최고의 무장이었습니다. 무장과 함께 작은 싸움에서는 능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략과 전략이 필요한 큰 싸움에서는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싸움을 이끌 지략과 전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천하를 다스릴 큰 싸움을 논할 전략가가 없었습니다. 유비는 제갈량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와 함께라면 작은 싸움은 물론 큰 싸움도 이길 것 같았습니다. 그와 함께라면 능히 천하를 건 싸움에도 나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기에 수모를 감수하고, 자존심을 버리고 3번이나 제갈량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늦은 가을에 찾아갔고, 추운 겨울에 찾아갔지만 만날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따뜻한 봄에 찾아갔고, 제갈량은 유비를 받아들였습니다. 솥단지가 3개의 발이 있어서 균형을 잡듯이 유비가 제갈량을 얻으면서 드디어 삼국지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유비는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사람의 체력이 아니라 사람의 지혜를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나병환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나병환자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나병환자는 자포자기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였습니다.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만 보았습니다. 나병 때문에 영혼까지 병들고 말았습니다. 어떤 나병환자는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이 나병환자가 된 것은 부모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온 나병환자는 스스로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죄나 자신의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갈망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나병환자는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외모는 깨끗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외모와 건강만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깨끗하고 건강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허물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의 내면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부로 외면하는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100세가 되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사악을 주셨습니다. 많은 땅과 자손을 축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을 찾아가서 자신의 갈망을 이야기했던 나병환자처럼 우리들 또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혼을 치유해 주시도록 주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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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30.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
-치유와 위로, 구원-
오늘은 6월 예수 성심 성월 끝날이자 내일은 7월의 시작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늘 새로운 시작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죽음 역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것입니다. 어제부터 장마가 시작된 듯 어제는 온종일 비가왔고 오늘 밤도 계속되는 비에 불암산 계곡 물흐르는 소리가 선명합니다.
늘 생각하는 바이지만 하늘 비가 있던 없던, 늘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삶이면 좋겠습니다. 본기도 말마디처럼 한결같이,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삶입니다. 봉헌함에서 나온 봉투에 씌어진 글귀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수도원의 햇살, 바람, 새소리 담긴 매실 한 자루 가져다가 매실청 담궜습니다. 감사합니다.”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모든 수도자들을 위해 봉헌합니다. 짧은 피정 기간 동안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보고, 반성하였습니다. 항상 현세에서 나를 향한, 안으로 향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수도자들의 생활을 통해 밖으로 향하는 기도와 지향을 배웠습니다.”
다음 자매는 1990년대 초반 20대 나이에 성소자로 수도원을 찾아 저에게 면담했던 지금은 52세 자매의 고백입니다. 거의 30년만에 수도원을 찾았던 것입니다.
“20대, 푸르른 날들에는 수도성소를,
30대, 짙푸른 날들에는 아버지와의 갑작스러운 이별, 7년 기다리며 기도로 만난 아이, 그리고 14개월후 남편과의 갑작스런 사별,
40대 주님께서 맡겨주신 아이 양육에 온힘을 쏟았고,
52세, 아이를 같이 양육해주신 친정 어머니가 요셉 대축일 입원하셨다가 짧은 투병 생활하시고 부활 대축일 선종, 하나뿐인 아들은 2월2일 왜관수도원에 입회하였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리며 이 시간들 머물수 있게 해주신 요셉수도원에 감사드립니다. 돌고 돌아 다시 찾은 이곳에 주님처럼 계셔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명실공히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했던 자매들이요, 주님을 찾듯 늘 거기 그 자리 세상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요셉 정주 수도원의 역할이 뚜렷이 부각됩니다. 하느님을 찾는 순례 여정중인 이들에게는 빛나는 이정표가 되고, 수도원 존재자체가 끊임없는 환대를 통한 복음 선포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수도원이 세상의 중심이듯이 예수님이 중심이 됩니다. 세상의 중심이신 예수님을 찾아, 예수님의 위로와 평화, 치유를 찾아 끊임없이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의 중심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특히 아픈 분들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끝나고 이제부터 본격적 삶의 현장에서 치유와 구원활동이 전개됩니다.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란 불가의 말도 있듯이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치유와 구원활동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따르니 말 그대로 세상의 중심이 되신 분위기입니다.
마태복음 8장은 온통 예수님의 육신의 치유활동에 관한 일화들입니다. 사실 복음은 거의가 치유하시고 먹이신 몸과 관련된 기적들입니다. 정신건강, 영혼건강을 말하지만 육신이 무너지면 정신도 감당하기 힘듭니다. 어제 평생 처음 몸살 감기로 앓다보니 인간의 육신이 얼마나 허약한지, 왜 예수님이 치유활동에 그렇게 온힘을 쏟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병원에 가면 온 세상 사람들이 환자처럼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은 첫 치유 기적으로 나병환자가 그 대상입니다. 나병환자의 선택이 참으로 정확했습니다. 삶의 중심이신 예수님을 찾는 갈망이 그의 믿음의 눈을 열어 주었고 예수님을 발견케 했습니다. 나병은 당시 악성 피부병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불치의 나병을 뜻합니다. 나병환자가 주님을 만남으로 이어지는 치유과정이 감동적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해 주실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의 믿음에 대한 예수님의 즉각적 응답입니다. 치유에 앞서 필히 전제되는바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나병환자의 믿음에 응답하여 1.예수님의 연민의 마음, 2.사랑의 스킨쉽, 3.권능의 말씀이 하나가 되어 발생한 치유의 기적 은총임을 봅니다.
천형이라 불리던 나병이 주님을 만남으로 치유되니 천형天刑은 천복天福으로 바뀝니다. 주님은 공동체에서 격리, 소외되어 참 외롭게 지내던 나병환자를 치유하여 본래의 공동체 삶의 자리로 복귀시킵니다. 헛된 명성이나 인기의 중심에 서기를 원치 않으셨던 주님은 치유된 나병환자에게 함구할 것을 명하시며, 다만 사제에게 가서 깨끗해진 몸을 보이고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새삼 삶의 중심이신 예수님을 만날 때 영육의 치유와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나병이 상징하는 바 참으로 깊고 다양합니다. 육신의 나병만이 아니라 영혼의 나병도 심각하고 엄중합니다. 잘못된 이념이나 신앙으로 인해 맹목적이 되고 광신이 될 때 편견으로 굳어질 때, 백약이 무효입니다. 무지의 나병보다 더 고약한 것은 없습니다. 무지의 나병에서 기인한 육신의 나병인지도 모릅니다.
답은, 치유의 처방은 예수님뿐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로 삶의 중심이신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치유의 구원입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육신은 물로 영혼의 나병도 완전히 치유되었을 것입니다. 이래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매일의 미사가 참으로 고맙습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 서두 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아브람의 나이가 아흔아홉살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하신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없는 이가 되어라.” 하느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아흔아홉살이 되도록 흠없이 살아온 아브람에게 또 흠없이 살라 다시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없이 살아라.”
어떻게? 하느님 중심의 삶에 날로 충실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 앞에서의 삶임을 명심하며 깨어 흠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육신의 치유와 더불어 온갖 영적나병을 치유해주시며 흠없는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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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30.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 안에서 늘 선한 영과 악한 영이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순간에 선한 영을 따를 수도 있고 악한 영을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버지 하느님 앞에 겸손함으로 드러나거나 교만함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생활의 두 가지 주제는 늘 교만과 겸손으로 모입니다. 그리고 이런 교만은 자만과 이기심, 허영으로 이어지고 겸손은 감사와 찬미로 이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는 주님께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이 조금 걸립니다. 나병 환자는 많은 군중의 말을 듣고 믿음을 고백했지만, 그 믿음이 그리 깊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의 병을 고쳐 주시고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사제에게 가서 너의 몸을 보이고, 예물을 바쳐 그 증거가 되게 하여라.’
당부의 말씀은 과연 무슨 뜻일까요? 저는 주님의 당부 말씀이 완전하지 않은 나병 환자의 믿음을 보완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감사함을 드러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능력을 알 수 있도록 그래서 하느님께 감사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완전하지 않은 믿음을 보완하는 방법은 감사의 기도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하다고 고백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믿음을 더욱더 강하게 만들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만약 정말로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면 이렇게 기도해보세요.
눈뜨고 있는 모든 시간을 감사의 기도로 채워보십시오.
모든 생각과 걱정과 분심은 잠시 뒤로 두고
그 시간을 감사의 기도로 채워보십시오.
겸손이 감사를 났듯이 감사는 겸손을 빚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하나가 되어 보석 같은 믿음이 될 것입니다.
김밥 옆구리 터지다
김밥 옆구리 터지다.
분명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재료를 너무 많이 넣었거나
말 때 너무 힘줘서 말았거나
김이 부실하거나
혹은 바닥에 물이 있었거나
원인은 다양합니다.
여하튼 터졌습니다.
만약 이렇게 터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드세요. 그래도 맛납니다.
우리의 하루하루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잘 싸고 싶었는데 터졌습니다.
잘하고 싶었는데 터졌습니다.
그럼….
그건 그냥 드세요.
다음에 안 터지게 하면 되죠.
다음에 뺄 건 빼고 더할 건 더해서
안 터지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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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30.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학교 합격 소식을 받고 처음으로 교구 신학생 선배들에게 인사하는 자리가 서품식 성가 연습 때였습니다. 1월에 있는 서품식에 아직 신학교 입학도 정식으로 하지 않았지만 합격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서품식 성가 연습부터 함께 했었습니다. 성가 연습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선배들이 모여와서 이것저것 물어봅니다. 그때 한 선배님께서 “그러면 얘네는 몇 년에 서품받는 거야?”라고 하십니다. 이에 “1999년이죠.”라고 다른 선배님께서 대답하자, 또 다른 선배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1999년에 인류가 멸망한다고 했는데, 너희는 신부 되자마자 인생 끝이구나.”
당시에 노스트라다무스가 1999년에 인류가 멸망한다고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는 세계사에 기록된 큰 사건들을 계속 예언했었다면서, 인류 멸망의 예언도 맞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앞다투어 이야기했었지요. 그렇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현재 2023년을 살고 있지만, 아무리 봐도 인류가 멸망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1999년 1월에 사제서품을 받아 지금까지 신부로 잘살고 있습니다. 지구는 망하지 않았고, 저도 멀쩡합니다.
미래에 대해서는 누구나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측대로 무조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지금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레짐작으로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이 아닌, 지금 해야 할 일에 충실하면 그만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삶이 우리의 마지막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가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의 희망이신 주님께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자신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당시에 이 병에 걸린 사람은 혐오의 대상이었고, 더구나 이 병의 치유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국가적으로 어떤 단체나 격리 수용소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요. 스스로 사람이 있는 곳을 갈 때, “부정한 사람입니다.”라고 외쳐야 하는 의무만 있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에서 제외되고 사람들에게 외면 당하는 삶, 그러나 이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 희망을 둡니다.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주님께만 희망을 두고 있었기에, 자신의 병도 깨끗하게 없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의 시선만 신경 쓰고 있었다면, 주님께 말씀을 드리지도 또 주님 앞에 나아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 미래를 예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주님만 믿고 주님께 희망을 두면 됩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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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타인과 함께, 타인을 통해서 협력할 때 비로소 위대한 것이 탄생한다(생텍쥐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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