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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고난의 원인/ 욥기 23:1-17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2024. 06. 09 비전교회] 고난의 원인 / 욥기 23장 1-17절/ 마경훈 목사" (youtube.com)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시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제가 존경하는 강문호목사님은 1995년 8월 11일을 잊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은 사모님이 직장암 수술을 한 날입니다. 목사님이 부흥회 다녀오니 사모님이 직장암이라는 진단서를 보여주었습니다. 진단서에 빨간 글씨로 ‘O and C’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open and close 열었다가 닫는 환자랍니다. 이미 임파선에도 전이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기절할 뻔하였습니다. 8월 11일로 수술 날자가 잡혔습니다. 목사님은 8월 10일부터의 감림산 기도원 집회가 있어서 기도원으로 가셨습니다. 수술 전날 밤에 목사님은 산으로 올라가셔서 바위에 앉아 밤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기적을 주옵소서!”
아침에 목사님이 이옥란 원장님에게 9시에 사모님이 직장암 수술에 들어간다고 말하자 원장님은 깜짝 놀라면서 전화로 30분을 기도해주셨습니다. 원장님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보지 않아도 원장님의 모습이 상상이 됩니다. 제가 거의 20년을 해마다 감림산 기도원 강사로 갔기 때문에 원장님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사는 한 시간이면 수술이 끝난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열었다가 그냥 닫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술은 7시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진에 큰 암덩이라가 있었는데 막상 열어보니 조그만 종기로 변해 있었습니다. 종기는 도려네고 바로 닫아도 되는 데, 주변의 장기를 다 검사하느라고 그렇게 오래 걸렸던 것입니다.
놀라운 응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그렇게 극적으로 역사하시지는 않습니다. 어떤 때는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조용기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하셨고 집회 현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침받았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심장병으로 설교 중에 까무러칠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환자들을 치료하실 때마다 조목사님은 “하나님! 저는요. 하나님 저도 치료해주세요”라고 기도했으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욥은 욥기 23장에서 답답한 자기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당하고 있는 고난이 너무나 큰데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욥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욥은 신앙이 좋았고 자녀가 10명이었는데 자녀들도 착하고 믿음이 좋았습니다. 경제적인 복도 크게 받았습니다. 당시 유목민 생활은 가축의 수요가 그 사람의 재산의 정도를 보여줍니다. 욥의 가축의 수는 엄청났습니다. 양이 7천 마리였고, 낙타가 3천 마리였으며, 소가 천 마리요. 나귀는 5백 마리였으며 부리는 종도 많았습니다. 그는 재벌이었습니다. 그런데 욥의 인생에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악한 자들이 욥의 소와 나귀를 약탈해갔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습니다. 또 악한 자들이 낙타를 약탈해 갔습니다. 기가 막힌 것은 자녀들이 맏아들의 집에 모여 있는데 대풍으로 집이 무너져 10명이 다 죽었습니다. 거기다 피부병이 생겼는데 얼마나 가려운지 손으로 긁어서는 시원치 않아 질그릇 조작으로 몸을 긁어야 했습니다. 고통이 너무나 심해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아내는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저주했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한다는 소식을 들은 욥의 친구들이 욥을 방문했는데, 욥의 사정을 보고는 너무나 기가 막혀서 7일 동안이나 아무 말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고난 속에서 욥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없었습니다. 자기는 믿음으로 살았는데, 자기는 정직하게 살았고, 늘 하나님을 예배했으며, 어려운 사람들을 잘 도와주면서 살았는데,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니 욥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본문 1절에 보니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반항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6절에 보니 그럼에도 욥은 하나님은 큰 권능을 가지신 분으로 자기의 말을 들으시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8,9절에 보면 욥이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려고 애를 썼으나 도무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욥기서의 주제는 ‘의인이 당하는 고통의 의미’입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도 자기는 믿음으로 살지만 정말 중요한 기도 제목이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하나님이 침묵하셔서 답답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욥기 23장은 욥이 그런 답답한 상황 속에 있을 때, 친구들이 찾아와서 욥을 위로한답시고 욥의 속을 뒤집어 놓을 때, 욥이 그들에게 자기가 고난 중에 어떻게 했는지를 말하는 내용입니다.
저는 원래 오늘 설교에서 두 가지를 다루려고 했습니다. 먼저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 원인이 무엇인가? 두 번째는 고난 중에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준비하다 보니 분량이 많아서 이 설교는 1,2부로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고난의 원인을 나누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다음 주에 욥이 고난 중에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고난의 원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오늘은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나누겠습니다.
1. 스스로 자초하는 고난
자신의 잘못 된 판단이나 실수로 인하여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어리석은 아들 탕자가 나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서 아버지를 떠나면 잘 살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판단 미스였습니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탕진한 후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 집에서 돼지를 치게 되었습니다. 배가 고프니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여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탕자의 고난은 물론 부모에 대한 죄 때문이지만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2. 재난으로 인한 고난
재난(災難)이란 뜻밖의 불행한 일을 말합니다. 성경에 보면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었습니다. 18명이 죽었다면 다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요? 그들은 뜻밖의 재난으로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2022년에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건수가 196,836건이었습니다. 그 중 사망자수는 2,737명이었습니다. 뜻밖의 재난으로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는 끊임없이 재난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홍수피해, 태풍피해, 근래에 와서는 지구 온난화와 이상 기온으로 인하여 생각지도 못했던 각가지 재난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진과 폭염 또는 폭설 등으로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1972년 6월 8일 월남 사이공에서 40km 떨어진 트람방 마을에 베트콩들이 폭격을 가했습니다. 한 집이 불에 타면서 당시 9살 난 킴폭이라는 소녀가 집에서 뛰어 나왔습니다. 온 몸에 불이 붙자 옷을 벗고 알몸으로 달렸습니다. 그 모습이 AP 통신 기자인 콩니웃에게 찍혀 온 세계에 알려지면서 그 기자는 사진기자가 받는 최고의 상인 풀리처 상을 받았습니다.
킴폭은 온 몸에 70% 이상 화상을 입고 육신적인 고통과 자기 집에 폭탄을 퍼부은 베트콩들을 향한 증오심을 불태우면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그는 흉측하게 된 몸을 날마다 보면서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수십 차례 수술로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렸습니다. 인생을 비관하며 살던 중 20살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면서부터 그의 마음에는 사랑이 솟아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밝은 미소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몸에 있던 모든 병이 다 나았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사람, 전도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겪었던 화상으로 인한 고통은 전쟁이라는 재난으로 인한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3. 조상들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겪는 고난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시작 되었습니다. 몇 년 전, 제주에서 어떤 엄마가 세 살짜리 딸을 이불에 감싼 채 어두운 밤바다로 들어갔습니다. 죽은 아기가 먼저 발견되었고 나중에 엄마의 시신도 발견되었습니다. 그 아기는 엄마의 잘못으로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축복도 흐르고 저주도 흐른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출 20:5입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우상숭배하는 부모 때문에 후손 3~4대까지 저주가 흐릅니다. 출 20:6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부모 때문에 후손 천 대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가 잘 살아야 합니다.
4. 자신의 죄로 인한 고난
요나서를 보면 요나가 큰 풍랑을 만나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물고기가 요나를 삼켜 요나는 밤낮 3일을 지옥의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다가 고난을 만난 것입니다.
요 5:14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요한복음 5장에는 38년 동안 중병으로 고통 받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치료된 내용이 나옵니다. 주님은 후에 그와 성전에서 만나셔서 그에게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38년 간 고통당했던 병의 원인이 죄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5. 예언적인 고난
이 부분은 처음 듣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행위예술은 성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카피하는 버릇이 있는데 행위예술도 그런 경향이 큽니다. 성경에는 행위예술과 같은 퍼포먼스들이있습니다.
에스겔서 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390일 동안 왼쪽으로 누워 자고, 40일 동안 오른쪽으로 누워 자라고 하셨습니다. 390일 동안 모로 자면 힘들고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왼쪽으로 390일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당한 것이고, 오른쪽으로 40일은 유다의 죄를 담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의 특별한 행위를 통해서 유다에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예언적 고난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떡을 만들어 에스겔이 옆으로 눕는 390일 동안 음식을 만들어서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루 양식을 20세겔로 제한 하셨습니다. 우선 그런 재료로 음식을 만들면 너무 맛이 거칠고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0세겔이면 약 228g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 하루에 먹기에는 너무나 적은 양이었습니다. 물은 육분의 일 힌씩 마시라고 하셨는데 약 0.6리터로 작은 페트병 하나 정도입니다. 물도 하루 종일 먹기에는 너무나 적은 양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떡을 만드는데 사람의 똥으로 불을 피우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이 너무나 기가 막혀서 항의하니까 하나님께서 인분 대신 쇠똥을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에스겔에게 이런 고통을 주신 것일까요? 겔 4:16,17을 보겠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백성이 근심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두려워 떨며 물을 되어 마시다가 17 떡과 물이 부족하여 피차에 두려워 하여 떨며 그 죄악 중에서 쇠패하리라” 에스겔의 이런 행위는 예언적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겔 24:16,17을 보겠습니다.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17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 이 말씀을 받은 에스겔이 아침에 백성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에스겔의 아내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슬퍼하거나 울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초상집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백성이 에스겔에게 그가 당한 일이 자기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에스겔이 그들에게 예언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행위는 유다의 멸망을 예언적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에스겔은 유대인들이 입술을 가리지 아니하고 음식물을 먹지 아니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인 채, 발에 신을 신은 채로 슬퍼하지도 아니하며 울지도 아니하되 죄악 중에 패망하여 피차 바라보고 탄식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겔 24:24을 보겠습니다. “이같이 에스겔이 너희에게 표징이 되리니 그가 행한 대로 너희가 다 행할지라 이 일이 이루어지면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에스겔은 예언적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그 사역 때문에 아내를 잃은 슬픔을 당했으나 울지도 못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예언적인 성격의 행동을 했습니다. 사 20:3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 이사야가 3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한 것은 전쟁 포로의 비참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더위나 추위 등의 다양한 기상 여건 속에서도 선지자가 3년 내내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닌 것입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 3년 간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닌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목사님이 목회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그분을 정신병자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감옥에 갈지도 모릅니다. 가족들은 강제로라도 정신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습니다. 이 예언적인 행위는 당사자들에게는 얼마나 큰 고통이겠습니까?
6. 영적 싸움의 패배로 인한 고난
월남전이 거의 끝나 무렵에 미국의 어느 가정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 집에는 월남전에 아들을 보낸 엄마가 살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엄마! 엄마 아들 스티브예요! 엄마 보고 싶어요?”, “오 그래 내 아들 스티브구나. 그래 어디 다친대는 없고. 엄마도 네가 너무 보고 싶구나. 그래 언제 집에 오니?”, “네 이제 전쟁이 끝나서 곧 집에 갈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런데 엄마 한 가지 부탁 드려도 될까요?”, “부탁, 그래 네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줘야지. 무슨 부탁인데?”, “네 엄마. 저와 함께 전쟁을 치른 친구가 한 명 있는데요. 이 친구가 좀 다쳤어요. 한 쪽 다리도 없고, 한 쪽 팔도 없어요. 그리고 한 쪽 눈도 실명이 되었는데 돌아갈 집이 없데요. 그 친구를 데려가서 집에서 함께 지내도 될까요?”, “아이고 참 안 됐구나! 집에 데리고 오는 것은 좋은데 함께 있는 것은 좀 귀찮지 않을까!”, “네 알겠어요. 엄마 사랑해요.” 이렇게 전화를 끊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뉴스에서 월남전에 참전했던 군인이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그 뉴스를 보던 엄마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자살한 군인이 바로 자기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한 쪽 다리도 없었고, 한 쪽 팔도 없었고, 한 쪽 눈도 없었습니다. 엄마는 현장으로 달려가 그 아들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고 말았습니다.
전쟁은 없어야 합니다. 전쟁으로 인한 불행과 고난은 너무나 큰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특히 마지막 때에는 더 심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전쟁은 계속 될 것이고 전쟁으로 인한 고통도 계속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육적인 전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전쟁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악한 영들과 전쟁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에게 패하고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으로 찾아온 마귀에게 패했습니다. 그 결과 사망의 종노릇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눅 13:11입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님께서 18년 동안이나 허리가 꼬부라져서 펴지 못하는 한 여인을 보시고 치료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보면 그 여인이 앓으며 허리가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한 원인이 ‘귀신 들려’라고 말씀합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던 한 아이가 예수님을 만나서 치료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진 이유도 귀신 들려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런 고난의 원인은 영적인 싸움에서 졌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싸움에서 진다면 반드시 마귀가 주는 문제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 말씀을 듣는 우리 중에도 어떤 분들은 영적인 싸움에 패배해서 지금 고난 중에 있을 것입니다.
7.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한 고난
다니엘은 기도를 금하는 법을 어기고 기도하다가 사자 굴에 들어갔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아서 풀무불 속에 들어갔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고난당한 것입니다. 예수님 이후에 믿음을 지키려다가 순고한 사람들을 적게 잡아도 7천만 명입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려다가 고난당할 수 있습니다.
8. 부당한 고난
벧전 2:19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이 세상은 언제나 불공평이 심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질서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불공평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불의해서도 그렇지만 무지해서도 그렇고 또 판단 미스로 불공평한 처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부당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제가 지난번에 부모님을 모시고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저녁에 숙소에 둘러앉아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억울했던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하나는 남동생이 욕을 했는데 제가 그랬다는 누명을 쓰고 혼이 났던 이야기와 어머니가 털모자 두 개를 떠주셨는데 그 중에 색상 좋은 것이 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에 남동생이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했고 가족들이 동생 편을 들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제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농담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 저는 부당하게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부당한 고난을 당해보셨을 것입니다.
9. 자원하는 고난
골 1:24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사도 바울은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해서 스스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자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스스로 자원하여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자원하는 고난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고난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한 수고입니다.
마 26:39입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수치스러운지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 구원의 대역사를 이루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원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일본의 바울이라고 불리는 세계적인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입니다. 그는 기생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는 안질, 치질, 축농증, 심장병, 척수염, 간염으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습니다. 그는 죽기까지 절박한 하루하루를 살면서 빈민들 밑바닥 일을 하다가 죽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신학을 항문을 닦아주는 신학이라고 하여 ‘항문 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별세 신학, 민중 신학, 소망의 신학도 있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는 빈민들의 항문을 닦아 주겠다고 하여 그의 신학을 ‘항문 신학’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원하여 고난을 받았습니다.
10.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
요한복음 9장에 보면 한 맹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치료 받은 사건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주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주님의 대답을 보죠. 요 9:3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는 맹인이었기 때문에 눈이 건강한 사람들보다 큰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의 원인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처럼 누가 고난을 당할 때 그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고난을 허락하시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교만 때문에 정신병에 걸려서 짐승처럼 7년간 풀을 뜯어먹고 살았습니다. 그가 당한 고난은 분명히 그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가 꿈을 꾼 후에 다니엘을 통해서 해몽을 받았는데 그 해몽 그대로 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그 과정을 통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시고, 자기는 그 당시 세계 최강대국 바벨론의 왕이었지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단 4:37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그의 고난을 교만에 대한 징계로 볼 수 있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11. 하나님의 단련으로 인한 고난
욥이 당한 고난은 하나님께서 욥을 단련하신 고난이었습니다. 본문 욥기 23:10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하나님은 욥을 순금 같이 만드시기 위하여 단련하신 것입니다.
운동선수의 훈련은 더 위대한 선수가 되기 위한 과정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공부는 고난일 수 있지만 더 성장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과정을 통과하며 성장합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난 후에 아라비아에서 3년을 훈련 받고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신약 성경의 절반을 기록하였습니다. 요셉은 어린 나이에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13년간 고난을 받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낮아져서 고난의 학교를 통과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데도 지금 고난 중에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순금으로 만드시는 단련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소망을 가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