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11]어느 친구의 유별난 고향사랑과 ‘황희 지혜관’
어제 오후에 서울에서 내려온 전각서예인 친구와 전북 남원군 대강면 풍산리 산수몰(산촌마을)을 찾았다. 마을을 찾았다기보다는 풍악산 줄기가 내려오다 우뚝 솟은 마을 뒷산 삼망봉 아래 썼다는 황희 정승의 조부 황균비의 묘를 찾은 것이다. 묫자리가 조선시대 8대 명당의 하나인 ‘홍곡박풍鴻鵠搏風’라 했다. ‘연작燕雀이 어찌 홍곡의 뜻을 알겠는가’ 할 때의 홍곡鴻鵠(큰 기러기와 고니. 큰 인물을 뜻한다. 전주의 홍지서림 이름도 ‘홍곡지지鴻鵠之志에서 따옴)이고, 박풍搏風은 칠 박에 바람 풍이니, 큰인물이 바람을 친다는 뜻이다. 모르긴 몰라도 좌청룡 우백호에 배산임수, 딱 그 형상이었다. 풍수風水(장풍득수藏風得水)는 모르지만, 얻어들은 말이 있어서였다.
사연인즉슨, 황희의 아버지가 아버지 황균비黃均庇의 묘를 쓸 적에 고려말 나옹대사가 그곳에 묘를 쓴 후 고향을 떠나야 후손 중에 큰 인물이 나타난다고 하여 고향인 그곳을 떠나 장수로 이사를 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황희는 장수 출생설과 개성 출생설이 있는데 확실치 않다. 아무튼, 황희는 우의정, 좌의정 6년에 영의정 18년을 했으니, 아마도 조선시대 정승 최장수(24년) 기록 보유자일 듯싶다. 명정승하면 황희, 이름 두 자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터. 황희의 후손 중 임진왜란때 진주성에서 순직한 황진장군이 있는데, 그의 기념관이 선사시대 암각화가 있는 봉황대 옆 대산면 대곡마을에 있다.
마을 안쪽에는 유서깊은 풍계서원風溪書院도 잘 보존돼 있었다. 1788년 정조때 황희 등 선현을 배향하고 지방교육을 담당했던 곳이다. 오래된 집성촌(장수황씨는 1530년에, 연안김씨는 1650년에 입향) 마을에 오씨 집안이 타성받이로 있었는데, 황희 조부의 묘 설화(나옹대사 지정설은 믿거나말거나이다)와 황희정승의 이름을 어릴 적부터 귀가 아프게 듣고 자란 1957년생 오씨가 이 마을에서 성장했다. 그가 이 오지에서 남원 Y중학교와 서울의 중동고, 전주교육대학을 나와 초등학교 교사로 10여년간 근무하다, 오랜 꿈을 이루고자 서울의 유수한 S대 법학과 야간을 졸업했다. 사법고시를 패스하여 변호사가 되었으니, 가히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할 것인가. 스토리가 계속 이어지는 게, 마을앞 600년쯤 되어보이는 느티나무 두 그루 밑에수년 전 5칸짜리 집을 지었는데, 그곳을 ‘황희지혜관’과 카페로 꾸밀 생각이란다.
‘황희지혜관’은 황희문집 등 자료를 다 뒤져, 그가 남긴 어록語錄을 비롯하여 후손들에게 교훈이 될만한 얘기 등을 정리하여 기념관식으로 꾸밀 것이라 한다. 일단 오랜 세월 홀로 자료를 추적해 20여개의 어록을 준비했는데, 나무나 돌에 멋들어지게 새겨 그의 삶과 사상을 조명한다는 것. 최근 우연케 만난 사람이 바로 어제 동행한 전각서예인. 서로 처음 만나자마자 “귀인貴人을 만났다”는 칭찬과 함께 그 작업이 시작되었다. 오변호사라는 분의 계획과 뜻이 정말 너무도 가상하지 않은가. 어릴 적부터 삶의 멘토로 삼았다는 황희 정승을 기리는 일환이자 후손들에게 뭔가 교훈이 될 거라는 믿음의 소산所産일 터. 전각서예인의 탯자리가 인근 대산면인 것도 조금은 희한한 일.
이제 고희를 앞둔 그 변호사는 조만간(1, 2년내) 대처생활을 정리, 귀향하여 남원지역에서 무료변론을 하며 노후를 보낼 생각이라고 하는데, 전각서예인의 매니저로서 깜짝 놀라 그를 처음 만나보자 죽이 잘 맞는 듯했다. 이보다 더 가상嘉祥한 노후설계가 어디 흔하고 쉬운 일이겠는가. 미국의 단편소설 <큰바위 얼굴>가 바로 그 변호사로 대치되는 게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님을 알았다. 그런 전문가들이 많이 귀향과 귀촌을 하여 고향을 빛내는 뜻있는 일을 해야 농촌이 살고, 나라가 산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하여, 그에게 무한한 박수와 찬사를 보낸 게 며칠 전이었기에, 그와 인연을 맺게 해준 황균비 묘를 찾은 전각예술인을 따라나선 까닭이다. 나도 참 별스런 호사가好事家이지 않은가. 흐흐.
아무튼, 그 변호사가 어떻게 황희정승의 어록과 일화를 찾아 정리했는지는, 차차 내용이 드러나겠지만, 나로서도 조금은 그 작업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하여, <장헌대왕세종실록>에서 찾은 내용을 오늘 오후 다듬어 변호사에게 보냈다. 채택해준다면 나로서도 영광일진저.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그들의 아름다운 작업을 기대한다.
<후대 임금은 선대 임금의 실록을 결코 볼 수 없다>
#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방원)을 사관들이 어떻게 기록했을까 궁금했다.
# 영의정 장수기록(18년) 보유자인 황희 정승에게 <태종실록>을 보게 해달라고 졸랐다.
# 황 정승은 “후대 임금은 선대 임금의 실록을 볼 수 없다”며 불허했다.
# 그 이유를 “임금이 그른 일을 옳게 꾸미거나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라는 등 간섭을 하면, 사관이 두려움을 느껴 제대로 쓰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후세 사람들이 어떻게 이 기록을 어떻게 믿겠냐?”며 세종의 요청을 일축했다.
*황희 정승의 지혜는? 투철한 기록정신 강조, 사관에 대한 절대 존중, 후세 사람들이 역사기록을 보고 교훈을 얻게 하려는 깊은 뜻이 담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