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98
2월11일[연중 제5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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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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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2SCHM2rhjGE (구본석 사도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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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 백성의 중심에 병자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세계 병자의 날이자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오래전 루르드에 들렀을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성모님의 극진한 환대가 온몸으로 느껴졌습니다. 동시에 병들고 지친 제 육신과 영혼을 따뜻이 어루만져주시는 성모님의 손길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당시 루르드에는 전 세계에서 치유의 은혜를 구하러 온 수많은 환자들로 붐볐는데, 저 역시 환자의 한 사람으로 그들과 나란히 서서 간절히 치유를 청했습니다. 주님과 성모님께서는 절박하게 기도하는 저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치유에는 일련의 단계가 있더군요. 먼저 진지한 성찰과 처절한 회심, 그 후 선물처럼 다가오는 잔잔한 마음의 평화, 보물 같은 깨달음, 완전히 내려놓음, 그리고 보너스로 주어지는 육체의 치유.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병고로 사무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측은지심의 주님과 우리의 고통을 결코 지나치지 않으시는 성모님께서 세상의 모든 환자들을 가련히 여기시어 내적, 외적인 치유를 선물로 주시길 간절히 청합니다.
당신도 환자인 관계로, 더욱 환자들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올해 세계 병자의 날 담화문을 발표하셨는데, 우리 모두 귀담아 들어야 할 소중한 말씀입니다.
질병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일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고립되고 버려진 채로 질병을 겪는다면, 돌봄과 연민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질병은 비인간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혼란과 질병과 쇠약함을 체험하는 것은 인간 여정의 일부입니다. 이는 우리를 하느님 백성에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 관심의 한가운데로 데려갑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이시며 이 여정에서 당신 자녀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기를 바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버리는 문화에 저항할 수 있는, 참으로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가 되는 법을 그분께 배웁시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질병에 거의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이 듦을 인정조차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취약함에 겁먹고, 만연한 능률만능주의 문화는 취약함을 숨기라고 우리를 다그치며 인간의 약함이 설 자리를 남기지 않습니다.
온 교회가 참다운 ‘야전 병원’이 되려면, 질병 안에서도 착한 사마리아인의 복음적 모범을 잣대로 삼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특히 우리 시대의 역사적 상황 안에서 돌봄의 실천을 통하여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약하고 힘없는 이들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멈추어 서고 가까이 다가가며 치유하고 일으켜 주는 법을 아는 연민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아픈 이들의 고난은 마치 형제도 자매도 없다는 듯 자기 갈 길만 가는 사람들의 무관심을 깨고 들어가 그 발걸음을 늦추는 부르심입니다.
기능을 잘하는 것과 생산적인 이들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하느님 백성의 중심에 병자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이가 소중하고 아무도 버려지거나 소외되지 않는 인류의 표징으로서 병자들과 함께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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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민이 기적을 일으킨다!>
어렸을 때 어머니와 시장을 가면 저는 좀 창피해 했습니다. 물건 값을 깎고 또 깎는 것에 제 손이 오그라드는데, 거기다가 가게 주인이 집어넣는 것에 한 움큼 더 집어서 우겨넣는 모습이 조금은 창피해 보였던 것입니다.
‘고작 몇 백 원 차이인데, 왜 가격표에 쓰인 대로 돈을 내고 그것만 사면되지 저렇게까지 하실까?’ 물론 그 이유는 가진 돈은 한정되어 있고, 그 돈으로 우리들을 더 배부르게 하시려고 그랬던 것을 잘 압니다.
만약 제가 그 돈으로 장을 보았다면 어머니가 사셨던 양의 반도 못 샀을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의 체면이 먼저이지만,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서는 당신 체면은 아무 것도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어머니가 강할 수 있는 이유이고 하느님께서 그런 어머니에게 자녀를 맡길 수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왜 아기를 낳으면 동시에 젖도 나오게 되는 것일까요?’ 어쩌면 자신이 낳은 아기를 배불리 먹이고 싶은 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얻게 된 은총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 대한 가엾은 생각을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부정적으로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빵이 몇 개 있느냐고 물으시고 일곱 개밖에 없음을 아십니다. 가진 것은 한정 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고 싶은 예수님의 심정은 마치 어머니의 가슴에서 없던 젖이 생기는 것처럼 기적이 일어나게 합니다.
이 기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없던 포도주를 다시 생겨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게 하시는 모습을 더 자세히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성모님은 혼인잔치에 필요한 술이 떨어졌음을 바로 알아차립니다. 자녀에 대한 연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만이 군중에 대한 연민으로 그들이 돌아가다가 쓰리질 것을 걱정하십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는 예수님은 한 가정의 아버지이시고 성모님은 어머니이시며 잔치에 참석한 모든 이들은 두 분의 자녀들, 곧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은총을 청하는 성모님께, “그것이 당신과 나에게 무슨 상관입니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물론 성모님은 원죄가 없으셔서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는 그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꺼려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모님 같지 않아서 은총을 얻으면 그대로 흘려버리거나 죄를 지어 바로 소진해 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성체를 영해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영해야 합니다. 아이에게 책을 사라고 돈을 주면 책은 안 사고 PC방에 가서 다 쓰고 오는 데 또 돈을 주라고 성모님께서 그리스도께 청하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은총을 주지 않으시려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아빠가 돈 준단다. 빨리 받아.”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사랑스런 아내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또 기적을 행해 줍니다. 이는 순전히 자녀를 위한 아내의 사랑 때문에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구약의 에스델이 자기의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왕 앞에 나아가 자신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여 그 백성을 구한 모습과 같습니다.
성모님의 중재를 통해 얻은 그 포도주는 곧 성령으로 그것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어머니가 우리를 위해 오늘도 성령의 은총을 또 얻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미사를 드릴 때 성체는 사제를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생명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 은총이 사제들의 믿음으로 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제들은 그 큰 기적을 얻어 낼 믿음이 없습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혼인잔치를 위해 일하는 종들이 그저 포도주를 떠서 날라주는 것처럼, 물을 포도주로, 곧 빵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일으키게 하실 수 있는 믿음은 오로지 성모님을 통해서입니다.
성모님의 믿음으로 첫 성체의 기적인 그리스도의 강생이 이루어졌듯이, 아직도 우리는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믿음 덕분으로 생명의 양식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나가서는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은총을 전해주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그리스도의 연민으로, 성모님의 모성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자한다면 기적적으로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사랑합시다. 그러면 더 받게 되고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이 더 풍요롭고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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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의 대화는 신선하고, 달달합니다. 너무 달달하다 못해 닭살이 돋기도 합니다. 멀리 출장을 떠난 연인에게 “자기 어디에 있어!”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어떤 대답이 정답일까요? ‘응 난 늘 자기 마음에 있어’가 정답이 아닐까요? 연인은 사랑하는 사람이 출장을 어디로 간 것이 궁금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디에 있어도 사랑이 변치 않기를 바랄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마음에는 사랑하는 이가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가브리엘 너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그 정답은 “저는 뉴욕에 있습니다.”는 아닐 것 같습니다. 정답은 “저는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둘이나 셋이 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은 ‘성체성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체의 모습으로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셔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담아 너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아담아 너는 무슨 일을 하였느냐?”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질문에 아담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변명을 합니다. “제가 알몸이라서 숨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또 묻습니다. “네가 알몸인 것을 어찌 알았느냐?” 아담은 또 변명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짝으로 주신 이 여인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열매를 먹고 나니 제가 알몸인 것을 알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인에게도 묻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열매를 먹었느냐?” 여인도 변명을 하였습니다. “뱀이 저 열매를 먹으면 하느님과 같아진다고 해서 먹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변명을 하는 아담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그리고 땀을 흘려 노동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변명을 하는 여인에게도 책임을 묻습니다. 그리고 출산의 고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며칠 동안 먹지 못해서 굶주린 백성들을 측은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가진 것이 있느냐?”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보리떡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묻습니다. “몇 개나 있느냐?” 제자들은 대답합니다. “일곱 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중풍병자도 걷게 하셨습니다. 죽은 아이도 살리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무엇을 가졌는지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질문은 “너희가 가진 보리떡 일곱 개를 기꺼이 나눌 수 있느냐?”가 아닐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꺼이 자신들이 가졌던 보리 떡 일곱 개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보리떡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굶주린 백성 4000명이 충분히 먹고도 일곱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이 체험이 아주 강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이 충분히 먹고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고도 했습니다. 보리떡이 몇 개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몇 명이 충분히 먹었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몇 바구니가 남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눈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분열과 갈등을 키우는 것은 자신의 책임을 미루고, 남에게 전가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아담이 책임을 하와에게 미루지 않았다면, 하와가 책임을 뱀에게 돌리지 않았다면 하느님께서는 용서해 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회개를 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용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같은 잘못을 반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눔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주는 인생의 나침반입니다. 나눔은 나뿐만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내비게이션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비움의 삶, 나눔의 삶이셨습니다.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처럼 천국에서 빛을 내는 모든 성인 성녀들은 바로 ‘비움의 삶, 나눔의 삶’을 사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변명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나눔입니다. 변명에는 책임이 주어지지만 나눔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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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8,1-10: 사천 명을 먹이시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2절) 광야에서 허기지셨던 주님께서 지금은 생명의 빵으로 인간을 먹이신다. 군중들은 사흘째 주님을 따라 다니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길에서 쓰러질까 염려하셔서 굶겨 보내시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제자들도 난감하였다. 그리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많은 군중을 먹이려 하니 빵을 한 덩어리씩 나누어준다고 하더라도 돈이나 그 부피가 만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4절)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3절)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난감해하는 것이다. 아직은 주님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지만 어떤 면에서는 우리도 인간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때에 그 문제를 빨리 잊어버리고 외면하고 싶은 그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상의를 하고 계시며 희생을 요구하신다.
그 요구는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빵이 얼마나 되는지 내어놓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일곱 개 있습니다.”(5절) 대답하면서 그것을 예수님 앞에 내어놓았다. 빵 일곱 개는 그 많은 군중 앞에 아무것도 아닌 양이었다. 그러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 빵을 주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 빵을 다른 사람과 나누려는 마음이 없어서 내어놓지 못했다면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으며 제자들이 군중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셨다. 제자들의 나눔과 주님의 축복이 그 큰 기적을 이룰 수 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내가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을 때, 주님의 축복도 함께 따라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내가 나누지 못할 때 절대로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
상하 성당에서 이 기적을 자주 체험할 수 있었다. 처음에 부임하여 음향을 고치면서 신자들이 주님 앞에 봉헌할 수 있었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그때까지의 성당과 강당의 음향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신자들 모두가 만족하는 음향이 된 것과, 엘이디 전구로 성당 건물 전체를 교환하여 전례의 공간으로 변화될 수 있어서 성당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다. 라자로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후원회원들의 일곱 개의 빵이 라자로 마을을 위해 기적을 일으키고, “그대 있음에” 음악회의 빵 일곱 개가 해외의 한센인들에게 기적을 보여주고 있음을 체험하였다. 라자로 마을의 가족들까지도 이 일에 함께 참여하기도 하였다.
많이 가졌기 때문에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빵 일곱 개밖에 되지 않는 적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나누려고 내어놓을 수 있어서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혼자 일하시기보다 우리의 협조를 원하신다.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에 어떻게 협조하는가에 따라 하느님께서는 보다 큰일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음 안에서 체험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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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제1독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하느님께 벌 받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하느님의 벌이 무서워 남자는 여자에게 탓을 돌립니다. 여자도 뱀에게 탓을 돌립니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다릅니다. 여자는 뱀에게 속은 사실을 말합니다. 뱀의 기만과 교활함을 인식하였다는 뜻입니다. 뱀으로 형상화된 욕망과 싸우는 것은 힘겨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여인의 후손)이 하느님의 말씀에 힘입어 욕망을 이겨 내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이야기의 배경에는 고대 근동의 독사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과 미움이 깔려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과 악의 만남이 마치 사막에서 유목민과 독사의 만남처럼 필연적으로 둘 중 하나가 살고 죽는 싸움으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싸움의 최종 승리자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여인의 후손이신 그분께서 악마의 유혹을 이기시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지배하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된다고 말합니다(야고 1,14-15 참조). 제1독서의 말씀에 따르면, 욕망(뱀-욕망의 총체)은 성경에 등장하는 첫 번째 저주의 대상입니다. 사람들이 동물들과 싸우며 땅의 풀을 뜯어먹고 이마에 땀을 흘려 먹을 것을 얻게 된다는 창세기의 예고는 오늘의 현실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모두가 경쟁자가 되고 땅은 미래를 약속받지 못한 채 점점 더 황폐해져 갑니다. 죄의 결과인 벌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시는 어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내부적인 것으로서 인간이 자기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탓에 겪어야 하는 결과를 하느님께서 알려 주시고 선언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인간의 범죄 이후 우리는 친구로서 다가오셨지만 심판관이 되어 버리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적어도 불의한 심판관이 아니십니다. 그분께서는 거짓과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자 애쓰시는 의로우신 심판관이십니다. 그보다 더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주님이시고 인자하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죄가 많아진 곳에 은총도 충만히 내렸다고 증언합니다(로마 5,20 참조). 언제나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시다(마태 9,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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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넷선교회 이회진 빈첸시오 신부님]
<일곱 개 있습니다>
마르꼬 복음은 6장에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와 더불어 여기에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함께 전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빵에 관한 기적 이야기는 그 형식이나 내용에서 거의 비슷합니다. 다만 6장과 달리 오늘 읽는 복음에서는 이야기의 배경이 팔레스타인 밖의 지역이라는 점이 특이합니다.
특히 오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그냥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라고 하시며 그들을 먹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흘 동안 당신 곁에 머물며 하느님이 전하는 영적 양식을 받고 영혼의 위로를 받았던 그들에게 주님은 육신의 양식마저 주어야 한다고 제자들을 가르키십니다.
그렇다면 교회와 우리가 육신의 양식을 만들어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고 물으시자 제자들은 빵 “일곱 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7”은 완전함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사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먹어야할 몫이고, 받아야할 사랑이라고 생각하기에 움켜쥔 빵, 자신 안에 간직한 사랑을 나누어야 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마음 안에 일곱 개의 빵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기에 충분한 영적 은총과 육신적 양식마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만나는 삶의 자리인 교회 안에서 우리는 위로와 평화를 전하는 영적 유산만이 아닌 실천적인 나눔의 문제도 또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만남은 그렇게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생활 속에서 하느님을 섬긴다며 가족이나 형제자매 혹은 이웃에게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정작 사흘 동안이나 꼬박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온갖 영적 유산을 다 듣기는 하지만 그가 하느님을 찾아 나섰다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지치고 기진할 뿐일 것입니다.
간혹 그런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밖에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천사 같은 사람이고 훌륭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불리는 데, 집에만 들어오면 말도 없고, 조금만 잘못해도 화와 짜증을 내서 가족들을 불편하게 하는 아버지들이 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내와 자녀들은 그 모습 때문에 힘들어할 뿐만 아니라, 그런 이중적이 모습을 이해할 수가 없고 반발하게 되죠. 결국 본인도 사랑에 굶주리고 가족들도 사랑에 허기진 황량한 시간을 살아가게 됩니다.
신앙은 좋은 말을 듣고 혼자 기뻐하며 행복을 만끽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어디서 커다랗게 많은 것을 구해다 주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곱 개의 빵”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쓸려고 마음 먹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는 기적을 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죠.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공동체의 삶을 찾는 것입니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하느님으로부터 위로 받지 못하고,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된다면, 눈을 돌려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자기 주변의 사람들도 또한 그렇게 여러분에게서 위로 받고 싶어 하고, 행복을 얻고 싶어 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한 것이 아니라 강요하고 있었고,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을 나누는 그 순간부터 자신이 변하고, 함께하는 가족이 변하며, 세상이 변하는 기적이 시작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기적의 힘은 분명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일곱 개의 빵”으로 시작합니다. 그 은총을 나누는데 두려워하지 않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이미 충분히 당신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나누지 못하는 것일까요? 주님, 제게 있는 일곱 개의 빵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게 마음을 열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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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이재학 예로니모 신부님]
<예수님의 사랑법>
외할머니는 모두 그렇겠지만 내 외할머니는 정이 참 많으셨다. 언제든 외가에 가면 엉덩이 두들겨 주시면서 반가워하셨다. 외가는 홍씨 집안이어서 외할머니는 나를 ‘우리 홍 강아지’라고 부르곤 하셨다. 그러면 어린 마음에 할머니의 마음도 모른 체 “아니에요, 나 이씨에요, 이 강아지예요!”라고 했었다.
외가에 가면 반드시 밥을 먹어야 했다. 점심밥을 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시간에 가도 꼭 밥을 먹이시곤 했다. 조금 일찍 먹는 거라며 꼭 밥을 챙기셨다.
당시에는 ‘뭐, 내가 밥 굶고 다니는 줄 아시나?’, ‘아, 귀찮아. 다음엔 아예 밥 때 와야겠다.’라고 생각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사랑이었음을 알겠다.
사랑하는 이에게 그 사랑을 표현해야만 하는 넘치는 사랑 때문이었다. 밥이라도 꼭 먹여 보내야 한다는 사랑 표현법인 것이다.
그 사랑법이 꼭 외할머니만의 것은 아닌가 보다. 예수님의 사랑 표현법도 역시 밥이라도 먹여 보내려는 마음으로 표현된다. 예수님을 따라온 이들, 하느님의 말씀에 함께 기뻐하던 이들, 새로운 가르침을 수용하고 새 삶을 다짐한 이들이다.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인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밥이라도 먹여 보내려는 사랑의 마음 때문에 또 한 번의 놀라운 기적을 보이신다. 그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빵이 많아진 것에 놀란 것이 아니라 측은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놀라고 감사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했다. 내 주위의 사랑하는 이들에게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을 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예수님도 기뻐하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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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박영진 베드로 신부님]
<사천 명>
오늘 마르코복음은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사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기적과 소문으로 인해서 예수님 주변에 많은 군중이 모이게 되었지만 먹을 것이 변변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흘 동안이나 동고동락하던 군중을 가엾게 여기십니다. 제자들은 불가항력이라 포기하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군중들에게 하나라도 주시려고 합니다. 그래서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지시고서 엄청난 기적을 베푸십니다.
‘안됩니다.’ ‘할 수 없습니다.’ ‘능력부족입니다.’고 늘 핑계거리만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우리에 대한 자애심을 다시 한 번 더 묵상하게 합니다.
오늘 창세기의 독서는 인류의 첫 죄에 대한 그 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창조주와의 관계단절,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단절, 고통, 노동, 죽음, 에덴동산에서 쫓겨남 등 단 한 번의 죄에 대한 그 결과는 실로 엄청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온 인류에게 유산(?)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원상복구 시켜 주실 주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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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늘 사랑>
마르코 8,1-10 (사천 명을 먹이시다)
그 무렵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
<나는 늘 사랑>
사랑에 주린 이
지금여기 있으니
누가 사랑을
바로 내가
언제 사랑을
바로 지금
어디서 사랑을
바로 여기서
그리하면
나는 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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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연민과 배려>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말씀도 듣고 치유의 은혜도 입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거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군중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려고 하였습니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하시며 걱정을 하십니다. 굶주린 백성을 향한 연민이 가득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마르8,4)하고 말하였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을 생각은 하지 않고, 지극히 인간적인 계산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빵이 몇 개인지, 물고기가 몇 마리인지 물으시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고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습니다. 사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습니다.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주님의 손을 거치면 풍요로워집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먼 옛날이 아니라 오늘도 지속됩니다. 주님께서는 미사 안에서 말씀과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를 배 불리시고 영적으로 풍요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주 성경을 읽고 영성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성자로 불리셨던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에게 어떤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지구상에 가난한 사람은 왜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가난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수녀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면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항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비라도 베풀면 세상은 덜 냉랭해지고, 한결 따뜻하고 올바르게 될 것입니다.” 많고 적고를 떠나서 물질이든 영성이든 서로 나누어서 풍요로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재료를 사용하였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함으로써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또한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신 행위를 통해 모든 것은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과 당신이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 있음을 말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사성제를 통하여 하느님의 연민을 통하여 생명의 빵을 건네주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먼 데서 온 사람들의 염려와 걱정을 통해, 이방인들도 예수님의 배려에서 배제되지 않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유다인 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풍요롭게 해 주시는 능력의 주님을 모시고 있음을 기뻐하고 언제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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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여러분의 주변을 보면, 남을 잘 설득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남을 잘 설득할 수 있을까요? 말을 잘하기 때문일까요?
대부분 자신의 언어 능력이 부족해서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로 상대를 설득하는 사람은 진짜가 아닙니다. 아마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진짜로 설득을 잘하는 사람은 ‘내가 먼저 도움을 줄 수 있는 이가 누구일까?’ 를 늘 먼저 묻는 사람이었습니다. 대체로 ‘상대방이 내게 어떤 도움이 될까?’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이 먼저 도움 줄 것을 생각한다면, 이런 사람을 사람들이 좋아할까요? 싫어할까요?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편인 사람을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라보기에, 그 사람 말에 설득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도움과 지지를 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자기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는다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내가 나만을 생각하면서 도움받기만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도움을 줄 수 있는 이가 누구일까?’를 자주 물으며 주변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습 역시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에 많은 이가 모여듭니다. 그 숫자가 자그마치 사천 명가량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 요구사항이 있었지요. 병을 고쳐달라, 마귀를 쫓아내 달라, 삶의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 하느님에 관한 말씀으로 희망을 갖게 해달라 등등…. 사실 빵의 기적을 베풀어달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흘 동안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굶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를 곧바로 알아채십니다. 사람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 사랑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 마음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 곁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설득되어서 그들은 예수님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않으리라는 결심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마음은 생각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사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사랑의 마음은 이렇게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받을 사랑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또 입으로만 외치는 사랑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바라보고 직접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 안에서 주님께서는 함께하시고, 우리 안에서 커다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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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는 지금 어디에?>
“너 어디에 있느냐?” 하느님께서는 오늘 죄짓고 숨은 아담에게 어디 있는지 물으십니다.
여기서 그의 물리적인 위치는 동산의 나무 사이입니다. 그러나 그의 심리적이고 영적인 위치는 하느님 앞을 피해서입니다.
어제 창세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그리고 오늘 아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렇습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그러니 아담의 심리적 위치는 두려움 가운데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두 가집니다. 알몸이 드러나는 두려움과 벌을 받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 죄로 인한 두려움입니다.
우리말에 알몸이 드러난다는 것은 죄가 드러나는 것이니 아담의 알몸이란 죄이고 우리도 알몸은 죄입니다.
사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인간은 옷을 입는데
옷이란 것이 치부는 은폐하고 멋지게 포장까지 하는 것이니 옷이라는 위선의 포장이 벗겨져 죄의 알몸이 드러나는 것은 끔찍한 것이지요. 인간은 자기의 죄가 드러나는 것에 대한 심리적인 두려움이 엄청나게 큽니다.
그런데 아담에게는 심리적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두려움도 있지요. 영적인 두려움이란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요.
아무튼, 아담은 지금 두려움 가운데 있고, 하느님 밖에 있으며 두려움 가운데 있기에 하느님 앞에 있지 않는 것 이것이 지금 그의 위치입니다.
우리도 종종 심리적 두려움이 영적인 두려움으로 커져 주님의 계명을 어긴, 어쩌면 작은 죄인, 1차 죄가 주님을 피하는 더 큰 2차 죄가 되게 하곤 합니다.
어린애가 돈을 훔치고 그것이 드러날까 두려워 집을 나가버린다면 부모에게는 돈을 훔친 죄보다 부모를 떠난 죄가 더 큰데 우리 인간은 종종 이런 미성숙의 죄를 부모에게도 하느님께도 범합니다.
사랑을 믿기보다 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하느님께서는 벌주심도 사랑임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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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
-실락원에서 복락원으로-
“지상천국의 삶”
요즘 배밭을 지나다 보면 자주 얼마전 포크레인으로 뽑아 놓은 거대한 배나무 뿌리들에 눈길이 갑니다. 그대로 믿음의 뿌리를 상징합니다. 과연 내 믿음의 뿌리는 병들지는 않았는지, 또 날로 주님께 깊이 뿌리 내리는 튼튼한 믿음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수십년 살다가 수도원을 떠나거나 사제직을 떠나는 이들을 보면서 역시 생각하는 바, 믿음의 뿌리입니다. 정주의 나무되어 하루하루 충실히 파스카 신비의 삶을 살아갈 때 날로 깊어지고 튼튼해 지는 믿음의 뿌리일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었나이다.”(시편90,1)
오늘 화답송 후렴 시편입니다. 바로 파스카 미사은총이 주님만이 세세대대 우리의 안식처임을 깨닫게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안식할 수 있는 곳은 주님뿐이라는 고백입니다.
오늘 2월11일은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이자 제31차 세계 병자의 날이기도 합니다. 교황님은 담화문 마무리에서 성모님이 발현한 루르드 성지는 이 시대를 위한 예언적 가르침이라 말씀하시며 병자의 치유자이신 성모 마리아께 전구를 청하며 병자 여러분을 맡겨드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제 아름다운 스콜라스티가 동정녀 축일에 저는 참 오랜만에 치과 병원에 갔다가 명동 서점을 다녀오던 중 파스카의 신비를 체험했습니다. 바로 파스카의 신비를 사는 순수와 열정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무려 25년간 치과진료를 해주는 섬세하고 친절한 의사분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세속의 수도자처럼 영적전투 치열한 최전방에서의 주님의 전사처럼 치과병원에서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감동스러웠습니다. 18년전 써놨던 “어느 치과 의사 예찬” 이란 글이 생각났습니다.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다
욕심없어
마음 또한 맑고 깨끗하다
최소한도의 의식주로 만족하는 이다
식물성이라
그 곁에선 풀냄새가 난다
시를 좋아하는
섬세한 감성을 지닌 이다
부드러움 중에
강인한 의지가 빛처럼 배어나오는 이다
그의 일은 하나의 예술이다
때로 쉬는 날 그는 진료 봉사를 한다
주중에도 한번은 꼭 요셉병원에서 진료 봉사를 한다
쉴틈이 별로 없는 이다
몸으로 사는 게 아니라 정신으로, 영성으로, 훈련된 습관으로
하루하루 사는 이다
평상심의 도를 살기에
외로움도 그를 슬며시 비켜간다
그러니
그는 의사이자 예술가이고 세속안의 수도자이다
내 좋아하는 치과의사다”-
이어 또 몇 년 만에 명동에 있는 분도서점에 가던중 어느 자매의 “이수철 선생님” 하는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마스크로 얼핏 알아볼 수 없는 자매였습니다. 바로 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로 교회기관에서 참으로 열심히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는 역시 파스카의 신비를 살아가는 자매였습니다.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의 만남이 우연이 아닌 은총의 선물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치에서도 순간 파스카의 신비를 체험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는 에덴동산 낙원에서 참 멋지게 시작됐던 부부의 삶이 죄로 말미암아 산산히 파괴되는 장면입니다. 말그대로 어둠과 죽음의 절망스런 분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말 그대로 실낙원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
때로 우리에게도 화두처럼 주어지는 말마디입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고 있는지 우리의 회개를 불러 일으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은 사람은 주님이 두려워 숨었습니다. 이어 사람도 여자도 서로 비겁하게 책임을 전가하며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하니 서로의 관계는 무너지고 부부공동체는 완전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둘의 변명이 점입가경이고 막상막하입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자기는 빠지고 책임을 하느님과 여자에게 전가합니다. 이제 하느님과의 관계도, 여자와의 관계도 무너졌습니다. 마귀가 바라는 바 이런 분열이요 마귀는 환호했을 것입니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뱀은 어디 따로 있는 실체가 아니라 하느님을 잊고 살 때 언제 어디서나 호시탐탐 유혹의 기회를 노리는 마귀를 상징합니다. 뱀에 이어 사람에게, 또 여자에게 주어지는 심판의 벌이 참 엄중합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십니다. 이어 에덴동산에서 내치시니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은 차단되고 말 그대로 실낙원의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대로 오늘날 희망을 잃고 광야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의 절망적 현실을 보여줍니다.
오늘 창세기 제1독서가 실낙원失樂園의 현실을 보여준다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00명을 먹이심으로 복낙원復樂園의 실현을 보여줍니다. 그대로 파스카 신비의 실현으로 실낙원에서 복락원의 지상천국의 삶을 살게된 우리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제1독서가 어둠과 죽음의 절망을 상징하는 분위기라면 오늘 복음의 사천명이 배불리 먹은 기적의 현장은 빛과 생명의 넘치는 희망의 분위기입니다. 앞서는 분열되었던 부부공동체였는데 이젠 모두가 함께 나누는 일치의 공동체가 실현되었으니 그대로 파스카 예수님의 구원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일곱 개를 들고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는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 하셨고, 이어 물고기 몇 마리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4000명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만 일곱 바구니였다 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참으로 나눔과 섬김, 일치의 풍요로운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과거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탈출시 광야에서 만나의 기적이 오늘 복음의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4000명이 배불리 빵을 먹음으로 현재화되었고 지금도 매일 미사를 통해 구원 은총은 계속 현실화되고 있으며 언젠가 미래에 완전히 실현될 하늘 나라 천상잔치의 기쁨을 미리 앞당겨 맛보는 우리들입니다. 문득 사순시기 성금요일 주님의 수난 예식중 십자가 경배시 사제의 외침이 생각납니다.
“보라, 십자나무 여기에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바로 파스카 예수님의 십자나무가 상징하는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입니다. 예수님 덕분에 차단되었던 에덴동산의 하늘문이, 하늘길이 활짝 열렸고 천상낙원을 앞당겨 지상에서 천국을 살게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 미사중 십자나무, 생명나무의 열매가 바로 우리가 모시는 주님의 성체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체성가 177장 마지막 셋째 절을 나눕니다.
“그 만나 먹은 백성들은 죽었을지라도,
이빵을 먹는 자들은 영원히 살리.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머무를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
십자나무, 생명나무의 열매인 주님의 성체를 모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 기쁨과 감격을 고백한 성가입니다. 하여 저는 주저없이 오늘 강론 제목을 다음과 같이 택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
-실락원에서 복락원으로-
“지상천국의 삶”
그러니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 모두 광야에서 지상 천국의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을.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시고,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네.”(시편107,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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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마르8,8)
<예수님과 함께라면>
오늘 복음(마르8,1-10)은 '사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 몇 마리'로 사천 명 가량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예수님이시기에 그것이 가능합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이시기에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우리를 통해서도 그런 기적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기적이 필요한 때입니다.
2월6일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큰 고통 속에 있는 튀르기예(터키)와 시리아에 우리를 통한 기적이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건물과 가옥이 10만채 이상 무너졌고, 대성당도 무너졌다고 합니다. 엄청난 수의 희생자들이 나오고 있고, 아직도 갇혀 있는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다고 합니다. 날씨는 춥고,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교회도, 국가도, 지방자치단체도, 지체하지 말고 하루 빨리 그들을 돕는 기적을 만들어 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기억하는 날'인 오늘은, '1858년 2월 11일 루르드에서 성모님께서 베르나데트에게 발현하신 날'입니다
그리고 '병자들의 빠른 쾌유와 병자들을 돌보는 모든 의료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인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우리의 중재 기도가 기적을 일으키시는 주님께로 전해져서 '병자들에게 빠른 쾌유'와 '병자들이 병을 이겨내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희망합니다.
"너 어디 있느냐?"(창세3,9)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3,1)
아담처럼 죄를 지으면 숨게 되어 있습니다. 죄짓고 숨어있는 영적 병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자비로우신 주님 앞으로 나아가 치유 받고, 다시 부활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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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마르 8, 5)
우리에게
따뜻한 빵이
있습니다.
빵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입니다.
생명은 나눔으로
더욱 깊어지는
사랑의 길이
열립니다.
생명의 빵을
앞에 두고도
생명의 빵을
우리는
찾습니다.
사랑의
성사(聖事)안에
있어야 할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의 것을
나눌 때 비로소
생명은 열립니다.
빼앗길 수 없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 그것은
생명입니다.
생명을 품어 안는
생명을 만납니다.
모든 것을
감싸고
받아들이십니다.
지나오고 보니
우리 힘이 아니라
생명의 빵이신
주님의 힘으로
우리가
살아왔습니다.
삶의 조각들을
모으니 감사로
가득찹니다.
감사는 감사로
돌아오고
축복은 축복으로
돌아옵니다.
빵이 되는 삶은
주저하지
않는 빵의 삶입니다.
빵과 빵 사이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에게
주시기로 한 빵이
주님 자신임을
이제서야
깨닫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생명의 아침은
이렇게 다시
시작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생명의 빵이라
부릅니다.
마침내
빵이 되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여기에 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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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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