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일까?이 글을 읽는 독자는 여기에 소개된 ‘영문과 교수’란 말을 읽고 아하 이 글을 쓴 사람은 대학교의 선생이구나라고 할 것이다. 독자가 보기에는 그럴지 모르지만 내 아내가 보기에는 나는 남편일 뿐이고 부모님이 보시기에는 아들일 뿐이다. 결국 나의 정체성은 내가 대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의하여 규정될 뿐이지 어떤 근본적인 본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나의 위치는 항상 불안정하고 변화할 수도 있다는 뜻도 된다.
이러한 생각을 이론적으로 할 수 있게 만든 저술이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1915년 발행)이다. 소쉬르라는 언어학자에 대해서 들어본 사람들은 대개 이 사람이 언어의 역사적 변화 양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통시적 연구에서 특정한 시기의 언어현상을 총체적으로 분석하는 공시적 연구로 언어학의 연구대상을 변화시켰으며 또 구체적 개인들이 말하는 파롤과 모든 사람이 추상적으로 공유하는 언어체계인 랑그를 구별하였으며 또 언어에서 어떤 뜻을 전달하기 위하여 소리를 낼 때 소리쪽을 기표라하고 그 기표가 뜻하는 것을 기의라 하였다는 것에 익숙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별들은 중요하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내가 처음에 얘기한 다각적이고 불안정한 정체성의 개념이 나올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소쉬르는 언어학자로서보다는 현대철학,문화이론 등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주의,탈구조주의,포스트모더니즘을 출발시킨 이론가로서 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소쉬르 학설의 집대성
우리는 관습적으로 무슨 말을 하면 그 말과 그 말이 뜻하는 것은 자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또 필연적인 관계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어린이들을 위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뽀뽀뽀에서‘산’이라고 쓰고 나서‘산’에 들어 있는‘ㅅ’이 마치 산 모양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소리와 글자로서의‘산’이 자연스럽게 가운데가 올라간 땅 덩어리인‘산’을 지칭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언어가 현실적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대상들을 지칭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단지 우리가 그렇게 믿고 있을 뿐 사실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산’이라고 말할 때 남산이나 북한산과 같은 구체적인 산을 지칭한다고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내가‘산’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생각하는 산과 독자인 당신이 생각하는 구체적인 산은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창밖으로 보이는 남산을 생각할 때 당신은 약수 뜨러가는 동네의 뒷산을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산’이라는 소리나 글자는 현실에 존재하는 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개념적으로 규정된 일반적인 산을 말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나아가면‘산’이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한국어를 쓰는 사람은‘산’이라고 소리를 내겠지만 영어를 쓰는 사람은‘mountain’,프랑스어를 쓰는 사람은‘montagne’,또 독일어를 쓰는 사람은 ‘Berg’하고 소리를 낸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소리쪽인 ‘산’‘mountain’‘montagne’‘Berg’와 뜻 쪽인 ‘산’하고는 근본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그 둘이 연결되어 있는 것은 필연적이 아니라는 것을,즉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단지 사회적 약속으로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산’이라는 뜻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뜻이 ‘나무’,‘숲’ ‘언덕’‘들판’등의 다른 뜻과 구별되기 때문에만 ‘산’이라는 뜻이 생길 수 있는 것이며 ‘산’이라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그 소리가 ‘삼’‘상’‘사’‘잔’등의 소리와 구별되어 나타나기 때문에만 가능한 것이다.
○언어는 단지 사회적 약속
결국 우리가 말하는 언어에서 소리 쪽에서는 소리 쪽대로 그 각각의 차이에 의하여 어떤 특정의 소리가 규정되는 것이며 뜻 쪽에서는 뜻 쪽대로 그 각각의 차이에 의하여 어떤 특정의 뜻이 규정되며 그 특정의 소리(‘산’)가 그 특정의 뜻(‘산’)이 결합하여 하나의 단어(산이라는 소리와 뜻의 결합)가 되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적으로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만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언어현상에서 언어가 언어밖에 존재하는 세계와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또 언어내부를 들여다 보아도 소리와 뜻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 더 나아가 이들의 연결이 단지 사회적 약속에 의하여서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각에 엄청난 파문을 불러 일으키는 생각이다.
20세기 이전까지 지배적이었던 생각들,세상은 어떤 중심이 있으며 그 중심적인 것이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생각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세계본질,하나님,절대진리,절대정신,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 등등이 바로 이러한 중심의 다른 이름들이었다.
또한 이러한 중심들은 그것들 밖에 있는 덜 중심적인 것보다 더 중요하며 이러한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들 사이에는 일종의 위계질서가 있다는 생각이 20세기 이전까지는 널리 퍼져있는 생각이었다.
예를 들어 사회에는 위계질서가 있어서 가장 위로 사회의 지도자가 있으며 그 지도자와 가까운 집단이 그 지도자의 뜻을 사회의 다수 층에 전달하며 사회의 다수 층은 그러한 지도자의 뜻을 실천한다는 생각 그리고 그 지도자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은 사회의 부랑아들이며 이들은 정상적 사회활동의 제약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며 이러한 지도자를 정점으로 하여 사회적 위계질서가 구성된다는 생각이 소쉬르를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한 20세기 중반 전까지 사상사에서 지배적이었다는 것이다.
○변화·발전가능성 암시
이러한 사회적 위계질서는 소쉬르식으로 본다면 사회적 약속일 뿐이며 전혀 근본적인 가치의 우열이나 또는 내적 본질의 우열에 의하여 구성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현재 구성되어 있는 모든 것은 단지 사회적 약속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약속은 언제든 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사회적 약속이 불안정한 토대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변화가능성을 항상 안고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불안의 요인이 되기도 하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항상 발전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점에서 희망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