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욱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14주일
에제키엘 2,2-5 2코린토 12,7ㄴ-10 마르코 6,1-6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
영국의 화가 윌리엄 홀먼 헌트의 ‘세상의 빛’이라는그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예수님)이 한 손에
등불을 들고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에는 문을 두드리고 있는
예수님이 계신 쪽에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손잡이는 오직 문 안쪽에만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안에서 문을 열어주어야만 열릴 수 있는 문입니다.
이 그림이 우리들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은 늘 문을 두드리고 계시지만 문 안에 있는
사람이 문을 열고 예수님을 맞이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결코 그 집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과 예수님의 모습이 이 그림의 모습과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주어도 고향 사람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기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의 삶은 어떤지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는 참삶의 길, 참행복의 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아무리 전해준다 하더라도 또 예수님이 우리들과 아무리 함께 하시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올 수 없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다른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 당신의 말씀을
전해주시면서 우리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달라고 하십니다. 또 우리들과 함께 살아가시기 위해
당신의 몸까지 내어주십니다. 하지만 내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그 말씀은 허공을 떠도는
말이 될 것이고, 우리들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은 결코 내 안에 들어오실 수 없고 함께
살아갈 수 없습니다. 결국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내 안의 손잡이를 돌려 예수님을 맞아드리고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말씀을 잘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부산교구 최현욱 베네딕토 신부
2024년 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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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환 요셉 신부
연중 제14주일
에제키엘 2,2-5 2코린토 12,7ㄴ-10 마르코 6,1-6
보는 마음
어느 날부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공포도 느꼈다. 고통스러운 나날이
1년 이상 이어지던 중 어느 성당에서, 예전에 알던 의사분을 만나게 되었다.
증상을 설명하자 그분은 그것이 ‘까봐병’이라고 알려주었다. 죽을까 봐, 잘못될까 봐....
빙긋 웃으며 나에게 한마디했다. “신부님, 염려마세요. 안 죽어요.” 바로 그 순간,
1년 이상 나를 괴롭히던 호흡곤란이 사라졌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그 사건을 이렇게 해석, 아니 이렇게 믿었다. ‘하느님께서 수많은 신자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의사를 만나게 해주셔서 나를 치유하는 기적을 행하셨다.’
어떤 사람은 그 치유가 의사의 유능함 때문이라는 식으로 다른 해석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쩔 것이냐, 내가 그렇게 믿겠다는데. 하느님께서 나에게 그런 일을 해주셨다고
내가 믿겠다는데...
회당에서 예수님께 가르침을 들은 이들도 기적이란 말을 쓴다.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그들이 쓴 기적의 의미는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그들은 예수님을 안다고 믿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진정한 의미의 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 사실 그것은 기적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고 한 복음의 증언은 섬뜩하다.
사실상 행하신 기적이 그들에게는 기적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는 것은 ‘경악’에 가깝다. 슬픔과 안타까움이 담긴
경악, 주려 해도 받지 않는 자녀들을 보고 탄식하는 주님의 마음이 느껴진다.
사실 기적은 외적 현상이기에 앞서 믿음의 시야로 보이는 그 무엇, 하느님의 은총과 내 믿음이
합쳐져 일어나는, 나에게 열리고 보이는 주님의 순간이기에 똑같은 일이 누군가에게는
기적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나는 기적이라 부르는 주님의 순간을 늘 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고 싶은 마음,
주님의 순간을 ‘보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솔로몬이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도록 ‘듣는 마음’을 청했듯이 매일의 일상에서 구원의 시간을 살 수 있도록
주님께서 나에게 임하시는 순간들을 ‘보는 마음’, 그것을 청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순간을 보고 싶은 마음으로 기도한다. “나의 눈을 흐리는 불신과 나의 마음을
옥죄는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나는 기어이 주님의 순간을 보리라.
기어이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나는 오늘도 주님의 순간을 만끽하며 막힘없는 감사의 숨을 쉰다.
대전교구 노승환 요셉 신부
2024년 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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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호철 세례자 요한 신부
연중 제14주일
에제키엘 2,2-5 2코린토 12,7ㄴ-10 마르코 6,1-6
받아들이는 마음에서 기적은 시작된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 4)
오늘 예수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고향인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목수인 요셉의 아들 정도로 여겼고, 자라던 모습을 봐 왔던 동네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음의 바탕에는 바로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도 별다른 기적을 일으킬 수 없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우리들에게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으로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높은 곳에 있는 사람,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을 자꾸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좀 특출하고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면, 끌어내리고 모함하고 시기합니다.
다 끌어내리고 싶어 하고 나와 똑같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술을 잘 먹는다고 해서
다른 이들도 잘 먹을 수는 없는 것이고, 내가 운동을 잘한다고 해서 모두가 운동을 잘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와 다르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선입견이고 고정관념입니다. 그가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속 좁은 생각이고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옹졸한 마음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지만, 저 사람은 나와 다르게 살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과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이나 동료들, 혹은 우리 믿음 공동체의
식구들을 편견 없이 긍정적이고 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아니면 고정관념,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고 계십니까?
사람에게 생각은 중요합니다. 생각은 행동을 일으키고, 인생을 만들고 변화시켜 나갑니다.
“사람이 생긴대로 논다”는 말이 있습니다. 외모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이
그렇게 생겨서 그렇게밖에 못산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의 생각이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지요. 생각에는 여러 가지 모양이 있는데
그중에서 버려야 할 것이 바로 선입견이고 고정관념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닫힌 생각으로 구원에서 제외되는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비행기에서 뛰어 내릴 때 낙하산이 펴지지 않는다면 살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펼쳐지지 않고 닫혀지면 그렇게 됩니다.
생각은 운명의 열쇠입니다. 하느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각을 겸손되이
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각보다 더 좋은, 하느님의 생각으로 열린 삶,
남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안동교구 차호철 세례자 요한 신부
2024년 7월 7일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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