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호 루카 신부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호세아 2,16.17ㄷ-18.21-22 마태오 9,18-26
‘손’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봅니다.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예수님께서 ……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손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사람의 손’입니다.
간절함과 믿음으로 ‘손’을 내미는 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아픔을 인정하는 동시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기에 그렇습니다. 혈루증을 앓는 여자의 ‘열두 해’가 그 손을 만들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손’으로 사람을 살리는 손입니다. 성전에서 솟아나는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살아나듯(에제 47,9 참조), 예수님의 손이 닿은 소녀가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손에서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손’이 보입니다. 단순히 건강을 회복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고 하신(창세 1,31 참조) 새로운 창조가
오늘 예수님의 손에서 시작됩니다.
여인의 간절함과 믿음은 그가 예수님의 옷을 만지게 하고, 회당장의 간절함과 믿음은
예수님의 손을 움직이게 합니다. 오늘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겸손과 용기의 손으로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 그분을 만지고, 하느님의 손이 내 삶에 닿아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기를 청해 봅시다.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
***********
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호세아 2,16.17ㄷ-18.21-22 마태오 9,18-26
오늘 복음은 액자처럼 구성된 이야기입니다. 회당장의 죽은 딸을 되살리는 이야기 안에
혈루증을 앓던 여자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이야기는 모두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과 병을 앓는 여자가 보여 주는 굳은 믿음과 간절함을 강조합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회당장의 청은 놀랍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께서 죽은 이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게 하신다는 것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회당장이지만 딸에 대한 간절함은 그의 믿음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과 청원처럼 예수님께서는 그의 딸을 되살리시어 회당장의 품에 돌려주십니다.
열두 해 동안 병을 앓던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에서 벗어나고픈 그녀의 간절함과 절실함은
그녀를 구원합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그녀의 간절함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믿음입니다. 이에 어떤 화가는 이 장면에서 한 여자가
많은 사람들의 발 사이로 기어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모습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회당장과 병을 앓는 여자의 치유 이야기는 그들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선물은
믿음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보여 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죽음조차도 넘어섭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호세아 2,16.17ㄷ-18.21-22 마태오 9,18-26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야이로는 회당 장으로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자였지만, 죽어가는 어린 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을 가졌다 하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을
뿐입니다. 그 속수무책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모든 희망이 무너져 버린 참담한 순간입니다.
또한 열 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은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느라 고생하였지만, 가진 것마저 모두 탕진해 자포자기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바로 이 절망의 순간, 억울함과 원망이 밀어닥치는 이 순간, 하염없이 넘어지는 이 순간이
그들에게는 더 깊은 데서 물을 길어 올리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퍼 올리는 기회의 순간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의 시련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또한 기회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이 그를 더 깊은 믿음에로 이끄시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혈루증 여인도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믿었지만, 사실 그들의 믿음은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믿음은
언뜻 보기에는 미신적이기까지 합니다.어찌 보면 주술적이고 마술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미 죽은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면 다시 살아나리라.’는 회당 장의 믿음 역시 억지 부리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짓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났다고 여길 때,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실 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절망적이라고 여길 때,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요, 은총의 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그분을 밀쳐대는 이는 많지만, 믿음으로 만지는 이는 적습니다.”
바로 이 순간 주님을 밀쳐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님의 옷깃을 만지는 일이 필요합니다.
만약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약한 까닭일 것입니다.
베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단순한 마음이 아니라 의심과 이중성으로 주님께 다가가기 때문에
만져도 만져지지 못합니다.”
그들의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거나, 예수님이 손을 얹어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상황을 바꾸실 수 있는 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 곧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줍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에 빠지는 일이 없이 끝까지 믿고,
오로지 예수님께만 희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전부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으로 이끄시는 그분의 전능한 손길에
우리의 손을 맡겨드려야 할 일입니다. 믿음의 손으로 그분의 옷을 부여잡고 그분의 권능과 자비가
우리들 안에 흘러들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선악과를 붙잡았던 제 손을 대신하여 당신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 손을 얹으시어 저를 축복하소서!
제 안에 새긴 당신 얼을 새롭게 하소서!
제 온몸에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제 손을 잡는 이마다 사랑의 전등이 켜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