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 선교사는
1840년 9월 7일 영국 하노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20살인 1859년 런던대를 졸업하고 24살인 1863년 6월 4일 목사안수를 받자마자
그 다음 달에 부인과 함께 중국 선교사로 길을 떠났다.
하지만 불행히도 중국 상해에 도착한 4개월 뒤
아내인 캐롤린 고드프리(Carolin Godfery)가 유산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런 와중에 토마스 선교사는 상해에 나와 있던
영국의 선교본부 총무와 사소한 일로 인해 불화하였고 그 골은 점점 더 깊어졌다.
결국 다음 해인 1864년 12월 8일 25살의 토마스는 선교사직을 사임한 후
1865년부터는 산뚱성 치푸로 자리를 옮겨 해상세관 통역관으로 취직을 하여
자급전도를 시작하였다.
이에 선교사가 사표를 내고 세속직업에 취직했다는 보고를 받은
영국의 선교본부는 펄쩍 뛰면서
이제 토마스 목사의 선교는 실패했다고 속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무렵 토마스 선교사는 우연히 만난 한국인 천주교 신자
김자평과 최선일과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열정을 얻게 되었고,
이는 한국 선교를 결행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북경에 들러 조선에 대한 소식을 듣고 난 토마스는
조선으로 가는 배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는 중국을 떠나 조선이라는 새로운 땅에 선교의 열정을 쏟아 부을 생각을
하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마침 프랑스의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가 조선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토마스 목사는 성서공회의 파견원 자격으로 이 배에 타게 되었다.
27살인 1866년 7월 25일 자로 영국 선교본부에 보낸
토마스 선교사의 마지막 편지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나는 상당한 분량의 책들과 성경을 가지고 떠납니다.
조선 사람들로부터 받을 환영을 생각하니 얼굴이 달아오르고 희망에 부풉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전하기 위해 미지의 나라로 떠나는 나의 노력을 언젠가는 반드시 인정해 주시리라 믿으며 나는 갑니다."라고 썼습니다.
1866년 8월 27일에 대동강 평양에 큰 배 한척이 정박하였다.
제너널 셔먼호 다.
조선의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며 총과 포를 쏘던 배는
홍수 때 대동강으로 올라왔다가 물이 빠진 9월 2일에 양각도 모래톱에 좌초되었다.
배에서 탈출을 시도하던 27살의 토마스 선교사는 복음 한번 전하지 못하고 순교하였다.
토마스를 죽인 병사 박춘권은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책을 웃으면서 받으라고 권하였다.
내가 죽이긴 하였으나 그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라고 말했다.
토마스가 던진 성경 중에 3권을 가져온
영문주사였던 박영식은 종이가 귀하던 시절이어서 그 성경으로 집에 도배를 하였다.
후에 최치량이에게 이 집을 팔았다.
최치량은 이집을 여관으로 사용했는데 마포 삼열 목사가 하루밤을 그 여관방에서 머물렀다.
벽지가 예사 벽지가 아니라 성경이었다.
이집은 널다리골 교회가 되었고 나중에 이름을 장대현교회로 바꾸었다.
또한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박춘권은 안주교회 영수가 되었고
여관집 주인 최치량은 평양의 초대 크리스토교인으로 장로가 되었다.
토마스가 허무하게 죽은 것 같지만 그의 피로 조선의 영혼이 살아 났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된다”는 터툴리안의 말대로 토마스 선교사의 피는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하지만 1달 반이 지난 1866년 9월 5일, 토마스 선교사가 탄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 관군의 공격을 받아 대동강변에서 침몰하고야 말았다.
이때 토마스 선교사는 침몰하는 배에서 건져낸 성경책을
조선 관군에게 전해주며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히고 참수당하여 순교하였다.
이로써 토마스 선교사는 한반도 복음화를 위한 개신교의 첫 번째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 칼을 들어 토마스 목사의 목을 친 병사 박춘권은 후일 회개하고,
33년 후인 1899년 세례를 받아 평양에서 교인이 되었고,
이후에는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또한 토마스 목사에게 성경을 받았던 장사포의 홍신길은 서가교회,
석호정 만경대의 최치량은 평양교회를 창설한 인물이 되었으며,
토마스가 건낸 한문성경을 뜯어 벽지를 바른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널다리교회가
평양 장로교회의 모교회인 장대현(章臺峴)교회의 전신이었습니다.
그렇다.
결국 26살의 청년이 대동강변에서 흘린 순교의 피가 씨앗이 되어
조선에 복음의 싹이 난 것인 것입니다.
한때 그를 선교사로 파송했던 영국의 선교본부에서는 선교에 실패했다고 당황하고 또한 그를 보낸 것을 후회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교에는 실패가 없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교를 위해 뿌린 씨앗은 많은 열매를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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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
“내가 영국을 떠날 때에는 여기서 처음 쓰는 편지가 이런 것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지난 달 (3월) 24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더 글을 써 내려가지 못하겠습니다.”
1864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영국의 〈런던선교회〉로 보낸
스물 네 살 젊은 선교사의 첫 번째 선교 보고서입니다.
그는 스물 여섯의 꽃다운 나이에 아내의 뒤를 따릅니다.
1866년 7월 조선 땅 평양 대동강변 모래톱에서 조선 병사의 칼에 찔려 피를 흘리며……
조선 땅에서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긴 로버트 토마스선교사는,
1863년 고향인 영국 웨일스의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같은 해 7월21일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폴메이스Polmaise〉호를 타고 중국으로 왔다.
그가 중국에 도착하여 여행을 하는 중에
우연히 북경에서 조선인 동지사 일행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에게서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톨릭 교인들의 수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원군의 ‘병인 박해’ 였습니다.
토마스선교사의 눈길이 조선을 향해 내내
그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된 것이 이 때였다고 한다.
1865년 9월13일 중국에서 작은 목선을 타고
황해도 연안의 창린도 (자라리 혹은 솔내)에 도착한 토마스선교사는
약 두 달 반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조선인 천주교인들에게서
조선어를 배우는 한편 가지고 온 한문 성경을 섬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제너널 셔면호
그 해 12월 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그는 이듬해인
1866년 7월 (고종 2년)미국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의 통역관 신분으로
조선으로 다시 들어왔다.
선주인 프레스턴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평양감사인 박규수가 이를 거절함으로써 조선인에 대한 살육이 시작되었고,
이에 격분한 백성들이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웠으며
이 배에 탑승한 모든 사람들은 몰살하였습니다.
다음에 전개되는 이야기는 총신대학교
박용규교수의 저서 『한국기독교회사 1』에서 발췌했습니다.
“평양 양각도 앞 모래밭에 좌초된 셔먼호가 불길에 휩싸이자
토마스 선교사도 가지고 있던 한문 성경 1권을 가지고 헤엄쳐 나왔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는 병졸 박춘권에게 성경 1권을 건네주려 했으나
거부하는 바람에 전해주지 못했다.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장사포에서 성서를 받은 소년 홍신길, 석정호에서 성서를 받은 김영섭과 김종권, 만경대에서 성서를 받은 최치량이 후에 강서와 평양 판동교회 창설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토마스를 죽인 병졸 박춘권은 토마스를 죽인 후
집으로 가는 길에 성경을 주워 가지고 돌아가 읽고
예수를 믿은 후 안주교회 영수가 되었다.
그의 조카 이영태도 후에 주님을 영접하고 평양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 남장로교회 레이놀즈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한국인 성경번역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한글 성경 번역에 큰 기여를 하였다.
토마스의 순교는 평양 복음화의 초석이 되었다.
셔먼호의 불타는 광경을 목격한 이들 가운데 12세 된 최치량은
토마스가 준 세 권의 성경을 받고 보관하고 있다 겁에 질려 영문주사 박영식에게 주었다.
박영식은 이것을 뜯어 자기 집 벽지로 발랐다.
최치량은 성경책으로 도배된 박영식의 집에 갔다가
벽에 붙어 있는 성경 말씀을 읽고 크리스토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 집이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는 참으로 놀랍고 신기하기 이를 데 없다.
한국 교회는 그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1927년 5월 8일 그가 묻힌 쑥섬에서
“천여 명의 크리스토인들”이 모인 가운데 추모 예배를 드렸고,
장로회 총회는 그곳에 기념 예배당을 지어 1933년 10월 14일 봉헌예배를 드렸다.”
-제4장 한국 개신교 전래를 위한 노력-
26세의 꽃다운 나이로 숨진 토마스선교사의 순교는
이 땅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나는 상당한 분량의 책들과 성서를 가지고 떠납니다.
조선 사람들한테 환영받을 생각을 하니 얼굴이 달아올라 희망에 부풉니다
……(런던선교회) 이사들이 성서의 교리를 전하기 위해,
아무 인간의 과오와 혼합되지 아니한 심정으로 미지의 나라로 떠나는 나의 노력을 언젠가는 반드시 이해해 주리라 믿으면서 나는 갑니다”
이 편지는 그가 세상에 남겨 놓은 마지막 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짧은 인생은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 지금도
여전히 우리 조국 대한민국에 머물러 있으며, 또한 이제는 대한민국의 선교사들을 통해
세계만방으로 그 귀하고 복된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미국은〈제너럴 셔먼호〉사건을 빌미로 조선과 통상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하였고
(신미양요. 1871년. 고종 8년),
이후 끈질기게 조선을 설득하여 결국 1882년 한미수호조약을 맺었다.
이렇게 하여 1885년 부활절 아침 한국 최초의 공식 개신교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인천의 제물포항에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딛게 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