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호세아 8,4-7.11-13 마태오 9,32-38
‘내로남불.’ 좋은 말도 아니고 교육적이거나 윤리적이지도 않고 더욱이 신앙적이지 않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안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동일한 사건이지만 개인의 입장에 따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용하지 말아야 할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오늘 복음에서 하나의 같은 사건을 경험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자
말못하는 이가 말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들려 말을 못하였으니 마귀를
쫓아내자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당연해 보입니다.
예수님의 ‘구마’이자 ‘치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습니다. 군중은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라며 놀라워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 말하며 예수님을 비하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이런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정치나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해석하는 각자의 시선은 참으로 다릅니다.
때로는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입장과 시각이 다른 사람들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습니다.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고민하고 판단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무엇이 복음적인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시각과 잣대로 사건을 볼 것인지,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기준인지
끊임없이 되돌아보며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인으로서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
김창대 임마누엘 신부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호세아 8,4-7.11-13 마태오 9,32-38
제가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을 직업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소리꾼”은 소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요,
“춤꾼”이나 “씨름꾼”은 춤이나 씨름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꾼”이란 말은 상당히 명예로운 호칭입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붙여주는 이름이 아닙니다. 그만큼 귀한 것입니다.
“교회”라는 신앙공동체도 사실은 예수님을 믿는 “예수꾼”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꾼”들의 모임이 세월이 지나면서 변질되고 오염되어, 이제 교회에
예수꾼은 없고 “말꾼”이나 “구경꾼”들로 가득 찼다고 한탄하는 이도 있습니다.
교회 역사는 이런 말꾼이나 구경꾼들에 의해서 발전되어 온 것이 아니라
“일꾼”에 의해서 성장해 왔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이런 일꾼을 찾으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하시며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하십니다.
첫째 예수님이 찾는 일꾼은 일에 미친 사람입니다.
“일꾼”이라는 말을 사전에서는 “품팔이 하는 사람,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 하루동안만 일을
시키기 위해 데려온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꾼”의 성경적 복음적 의미는
“일에 미친 사람” 즉 복음에 미친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보통 예수님을 열심히 믿으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얼핏 들으면 상당히 불쾌할 수 있지만,
사실 그 말은 이제 주님에게 합격점을 받았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예배당의 경우 가장 만만하고 흔한 직분 중에 하나가 집사(執事)라는 것이 있습니다.
웬만한 교회는 절반쯤이 집사요, 많은 교회는 신자의 삼분의 이가 집사라고 합니다.
이 “집사”라는 것이 무어냐 하면 “일(事)을 붙잡고(執)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한 시도 손에서 일을 놓지 못하는 사람을 집사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일을 안 하면 좀이 쑤시는 사람, 일을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이 사는
사람입니다. 희랍어로는 디아코노스- “봉사자”라는 뜻입니다.
이 봉사자를 “집사”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봉사자나 “일꾼”은 같은 말입니다.
또 “일꾼”을 말하는 다른 희랍어로는 에르가테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일 즉
에르곤에 미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일꾼은 일에 미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하는 이도 피곤하고, 일을 시키는 이도 짜증스럽습니다.
물론 일의 능률도 오르지 않습니다. 일에 미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일 많이 한다는 것”은 교회에서 요란스럽게 떠들고,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인 줄 압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6장 28절을 보면 제자들이 “하느님의 일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했습니다. 믿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것이 “일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초가 돼있지 않으면 공연히 선무당 사람 잡듯, 예수님의 이름만 더럽힙니다.
성당의 이미지만 나쁘게 만듭니다. 일꾼이란 모름지기 일에 미쳐야 합니다.
예수님께 미쳐야 합니다. 예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찾는 일꾼은 사명을 자각하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2절을 보면 일꾼 중의 일꾼인 사도 바오로가 세 번째 전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항구도시 밀레도스에서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을 불러놓고 고별 연설을 합니다.
이 고별연설 속에는 복음 전하는 일꾼으로서의 사명감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성령의 지시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인데, 거기에 가면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모릅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어느 도시에 들어가든지 투옥과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나에게 일러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 사명을 완수하고 하느님의 은총의 복음을 전하라고 주 예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임무를 다할 수만 있다면 나는 조금도 목숨을 아끼지 않겠습니다.”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오로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면서도 예루살렘에 간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 속에서 사도 바오로가 얼마나 선교사명에
불타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위해 그토록 열성적으로 살 수 있었다는
것이 부럽기만 합니다.
여러분, 보통 사람들은 이런 불평을 합니다. “우리 성당에는 일꾼이 없어요.”그럽니다.
그 이유도 다양합니다. 작은 본당이라 없고, 이사 갔기 때문에 없습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불평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은 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것은
“일꾼을 보내 주소서”할 것이 아니라 “주여 우리를 일꾼이 되게 하소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일꾼을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면서 내가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부산교구 김창대 임마누엘 신부
************
박재구 시몬 신부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마태오 9,32-38
인간의 마음 자세는 자기 스스로가 다스려 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날씨가 맑아도 기분이 나쁜 사람이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날씨가 흐려도 기분이 좋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날씨의 변화에 따라 인간의 마음이 변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마음에 따라 그날 기분이 달라지는 것일까요?
저는 그날 인간의 마음에 따라 날씨의 색깔도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날씨 속에서 여러분들은 어떤 기분을 가지고 있습니까?
왜 갑자기 날씨 이야기를 하느냐구요?
왜냐하면 오늘 복음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을 한번 묵상해 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귀 들린 벙어리 한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때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군중들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의 치유 기적에 신기해하면서 경탄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다른 한 부류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저 사람은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독기에 찬 눈으로 증오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의 이러한 하나의 행동에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나타내고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 자세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군중들은 하느님의 사정에 순수하고 단순했으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이 그들에게는 축복이요, 은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중들은 환호와 찬미를 아낌없이 터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정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고 하고,
가장 올바르게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들의 왜곡된 생활을 비판하고 꾸짖으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삐뚤어진 마음의 자세는 예수님의 올바른 행동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하루하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진다면
날씨가 찌푸려져 있어도 산뜻하게 출발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이웃의 잘못에 대해서도 비판이나 멸시보다는 너그럽게 이해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오심을 손꼽아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어두움으로 쌓여 있다면 아무리 날씨가 쾌청해도
짜증과 불만투성이의 얼굴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며,
이웃의 선행에도 인정할 줄 모르고 비웃음과 증오감만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만나도 바리사이파와 같이 거부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일꾼들을 원하십니다.
그 일꾼들은 바로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그분의 말씀을 믿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세상이 그분을 미워하더라도, 그분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참 일꾼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마음 자세는 자기 스스로가 다스려 가야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마음의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지
기쁨으로 충만 된 삶을 살아가겠지만, 마음의 문을 닫고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걱정과 불안으로 뒤덮인 암울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출발하셨고,
지금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가 나를 보살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마음에 안고 기쁘게 출발하면
행복하게 하루를 마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매일매일 건강한 날 기쁜 날 되시길 바랍니다.
부산교구 박재구 시몬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