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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라 거룩하라
레위기 19:1-2, 15-18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창조절 제9주일이다.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이다. 개혁은 고쳐,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그 정도에 따라 여러 가지 단어를 쓴다. 쇄신(刷新), 혁신(革新), 갱신(更新) 등이다.
쇄신은 청소를 의미하고, 혁신은 가죽을 수선하는 일이고, 갱신은 아예 바꾸는 것이다. 청소와 수선은 할 만하지만, 아예 바꾸는 일은 어렵다. 말로 벼르지만 이름만 개혁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은 이유다.
올해는 종교개혁 506주년이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말로 그치지 않고, 교회와 함께 세상을 바꾸어 냈다. 힘이나, 규모의 논리로 시작하지 않았다. 루터의 대자보가 비텐베르크성(城)교회에 걸릴 때만 해도 그리 후폭풍이 불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루터의 개혁은 20세기에도 지속되었다. 독일에서 1933년 히틀러와 나치 정권이 등장하였다.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서다. 1차세계대전의 패배로 좌절한 독일 사람들은 히틀러의 마술적 비전에 마음을 빼앗겼다.
당시 루터의 독일 교회에는 두 아들이 있었다. 한 아들은 히틀러의 권력에 붙은 주류 교회였다. 나치는 뮐러 감독 등 교회 권력을 앞세워 그리스도교와 나치즘이 혼합한 독일국가주의교회를 만들었다. 교회는 나치 권력에게 면죄부를 주었고, 나치 권력 안에 안주하였다.
그러나 다른 아들은 나치를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비록 소수의 그리스도인이었지만 교회 권력과 나치 권력에 당당히 맞선 고백교회 운동이다. “우리는 교회의 선포와 교회의 질서가 각 시기를 주도하는 세계관, 당시 선호되는 정치 신념에 따라 변화해도 무방하다는 거짓된 가르침을 단죄한다”(‘바르멘선언’ 3항 중).
개혁은 다수의 권력이나 규모의 논리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창조적 소수자의 믿음과 희생으로 시작되는 것임을, 루터의 종교개혁이나 본회퍼의 고백교회 운동은 일깨워 준다.
1)
레위기는 우리가 사는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뜻, 곧 거룩함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다. 무엇이 거룩한가? 거룩이란 단어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을 의미할 때 사용하는 개념이다.
오늘 제목 ‘거룩하라, 거룩하라’는 같은 단어를 반복하지만, 오늘 본문에 따르면 거룩의 의미를 두 가지 범주로 확장하고 있다.
먼저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2).
하나님은 나로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르셨다. 그리하여 나는 비록 죄인이나 하나님 앞에서 선 존재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부름 받았다. 예배자의 삶이 대표적 모습이다.
레위기는 어떻게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을까, 묻고 대답한다. 나처럼 세속적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부르고, 친교 할 수 있을까를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 비결은 예배에 있다. 레위기는 참된 예배를 드리도록 한 규정이다. 예배는 사람 기분에 맞춰 드리는 것이 아니다. 행여 사람의 기분과 관심사에 따라 멋대로 해서는 안 된다. 예배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고, 설교자도 아니다. 그러기에 예배자 자신이 바로 서야 한다.
예배는 예배드리는 나 자신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기 때문에 거룩함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를 다시 결심한다. 존 웨슬리는 “태산 같은 죄도 용서받은 죄는 먼지보다 더 가볍고, 털끝 같은 죄도 용서받지 못한 죄는 태산보다 더 무겁다”고 하였다.
우리는 주일 예배를 드릴 때, 매번 자신을 돌아본다. 참회 기도의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내 죄와 허물을 내려놓으며 이렇게 고백한다.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는 주님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실행하지도 못하는 죄인들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때문에 우리는 번번이 용서받은 죄인으로 살아간다. 그런 마음과 믿음으로 예배할 그때에 성전은 거룩하고, 성찬도 거룩하고, 예물도 거룩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내 모습도 거룩한 것이다.
그런데 늘 드리는 예배지만,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일이 쉽지 않다. 예배 시간조차 못 지킬 때가 많다. 불화한 채 분을 품고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선데이 크리스찬’이란 말이 있다. 언뜻 듣기에 비판적인 표현이다. 부정적인 의미인 까닭은 일요일에만 그리스도인 노릇을 한다고 들리기 때문이다. 그렇다. 365일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에 대한 반성이 담겨 있다.
그런데 보다 적극적으로 살펴보자. 날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면 먼저 제대로 된 ‘선데이 크리스찬’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선데이 크리스찬’도 못되면서 어찌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왜 ‘선데이 크리스찬’이 중요한가? 그는 예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또 예배자의 삶을 통해 사랑이신 하나님을 배우고, 서로 사랑하며 산다. 하나님은 우리로 예배 행위에 참여하게 하심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 거룩함을 통해 내 생활 속에서, 관계 가운데 사랑하며 살도록 하신다.
레위기는 속죄의 책이다. 우리는 늘 죄와 허물 가운데 살아간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거울로 보면 우리 자신은 얼마나 엉망인가? 얼마나 헝클어져 있는가? 우리 예배의 시작하는 자리에 참회와 사죄 기도가 담겨 있는 이유다.
하나님은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또 시간을 구별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닮고 또 사랑을 닮아감으로써 구별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2)
본래 거룩이란 단어는 성경에만 나온다. 하나님과 관련된 단어이기 때문이다. 원래 거룩을 뜻하는 ‘카다쉬’는 ‘따로 떼어 놓다’, ‘구별하다’라는 의미이다. ‘거룩’은 한마디로 구별된 삶을 뜻한다.
거룩은 종교적 용어지만, 종교인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은 특별한 사람만이 행하는 종교적 삶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녀들의 구별된 삶이다. 구별된 삶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선택과 결단 그리고 책임이 뒤따른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은 꼭 종교인처럼 사는 것이 아니다. 종교인인척하며 나보란 듯 사는 것은 위선적이다. 그래서 겉과 속이 다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비난을 들었다.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인가?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이다.
레위기 19장은 백성을 향해 거룩하라고 한 후, 그 거룩한 영역을 확장해 나가도록 이끈다. 당연히 거룩한 곳에서 거룩을 찾기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속으로 나아가 거룩의 의미를 확장시키라고 한다.
“불의를 버리고 공의로 행하라.”
“사람을 비방하지 말고 부당한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라.”
거룩의 개념이 하나님에게만 머물지 않고, 법, 이웃, 사회까지 적용한다. 거룩의 범위는 관계적이고, 인간적 규범으로 확장된다. 존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라는 신학이 통한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18).
지난 10월 6일에 대구를 방문하였다. 대구 10월항쟁 77주년 합동위령제 행사에서 개신교 추모 예식을 부탁받았다.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이 다양한 종교를 갖고 있으니, 기념행사를 앞두고 불교, 개신교, 천주교가 차례로 진행하였다.
행사가 끝나고 천주교 관계자들과 점심을 같이 먹었다. 나이가 드신 여성 두 명이 함께 했는데, 자신들을 수녀라고 소개하였다. 그런데 평상시 보던 수녀위 모습이 아니었다. 수녀복을 입지 않았고, 세례명을 쓰지도 않았다.
그날 처음 알았는데, 자신들은 사복(私服) 수녀라는 것이다. 수녀복을 입으면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일이 많기 때문에, 공동체가 아닌 개인적으로 생활하면서 사복을 입고, 일반인처럼 행동한다고 했다.
예복을 입어서 거룩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복을 입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행동, 선한 의지, 정의와 평화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거룩을 종교적 개념으로만 묶어둬서는 안 된다. 거룩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무관할 수 없는 생활언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를 뭇사람 중에서 따로 구별하셨지만, 사람들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신다.
레위기는 거룩을 두 가지 차원에서 말한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과 사회 속에서 거룩함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성결법이나 신명기 법전은 “너희는 거룩하라”는 대 명제 아래 그 실천 내용을 소개한다. 예배용어로서 거룩과 함께, 이어서 일상적인 실천의 내용을 담고 있다.
‘부모에게 경외하라. 안식일을 지켜라.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합당한 예배를 드리라. 가난한 이웃과 나그네를 돌보라’(3-10).
이렇듯 거룩은 예배로 출발하면서, 사랑의 윤리로 이어진다. 우리가 잘 알듯 율법의 두 기둥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두 가지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거룩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두 포함한다.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평소 거룩한 영역을 존중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
칼 마르크스는 기도하는 유대인만 보지 말고, 침을 튀겨 가며 돈을 세고 있는 유대인을 보라고 말했다.
레오나르도 보프는 <성사란 무엇인가>란 책에서 성사(聖事), 곧 거룩한 것에 대해 말한다. 그의 안목은 넓고 넓다. 단지 7가지 성사만이 아닌 세상 구석구석, 사람살이의 빈틈 빈틈에서 거룩성을 찾고 있다. 어머니가 쑨 옥수수죽, 낡은 책상, 선물 받은 굵은 양초, 고향 마을의 자갈길, 어버이의 옛집 등에서 거룩함의 흔적을 느낀다.
모름지기 종교적으로 거룩함을 추구한다면, 일상생활에서도 거룩함을 찾아야 한다. 거룩한 삶은 예배와 이웃사랑을 모두 포함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참된 예배, 정결한 생활, 안식일 준수, 부모 공경, 가난한 자와 외국인 보호, 경제정의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일상적이며, 포괄적이다.
3)
나는 고귀함이 무엇인가를 설교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목사라는 직업은 중요하지만, 때론 위험하기까지 하다. 주변에 종종 사고 치는 목사도 있다. 뉴스에 등장하는 꼴불견을 보면 남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늘 몸조심, 마음 조심, 말조심을 하고 산다.
사실 목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그런 고귀함으로 일한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거룩함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평생 거룩함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 산다. 믿음의 길은 한판 승부가 아니다. 나는 삶의 변화 과정을 살며, 추구하는가?
과연 내가 드리는 예배는 진실한가, 참된가, 평안한가? 중요한 것은 제물의 크기가 아니다. ‘거룩한 산 제물’로 나를 주님께 드리는가의 문제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된 예배자의 삶을 산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통해 여러 가지 삶의 문제, 위기, 고난을 돌아본다. 그리고 회개하고, 다시 결심하며, 희망을 품는다. 중요한 것은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나’이다.
내가 드리는 예배와 일상의 삶은 정결하고 구별되었는가? 정의롭고 평화로운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인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그 첫 번째 간구가 무엇인가? 바로 ‘거룩’이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예전에 서울시장이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해서 ‘서울시가 네 것이냐’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교회를 표를 얻으려고 그럴듯한 말을 했을 것이다. 과연 서울 시내에 화려한 예배당이 많으면 거룩한가? 거룩함을 추구하는 교회, 평화를 위해 일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없다면 서울시를 100번 봉헌한다고 한들 거룩할까?
오늘은 이태원 참사 1주기이다. 짧은 순간 도시 한복판에서 159명이 이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도시에서 벌어진 축제에 참여하다가, 무참히 희생당했다.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인데 일어났다.
세상에 모르는 사람도 이런저런 관계 때문에 조문도 가고, 애도도 표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자식을 잃은 사람을 비방하고, 험담하기도 한다. 어째서 이처럼 거룩함을 잃었는지 무참해진다. 특히 교회가 이태원 참사를,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태도는 왜 거룩하지 못한가? 포용하고, 눈물을 닦아 주고.. 종교든 정치든 저마다 공통적인 거룩함의 영역이 있다.
하나님은 내가 온전해서 의로워서 나를 오래 참아주시는 것이 아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고 기억하지 못하는 척, 심지어 모른 척 하시는 것일 것이다. 거룩하시기 때문에 사랑하시기 때문에 더 참아 주고, 용서하고, 감싸주고, 이해해 주신다.
개혁은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기본이 무엇인가? 거룩이다. 가장 자주 실패하는 것이 거룩이다. 그러므로 가장 큰 개혁은 나를 바꾸어나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거룩한 자녀로 삼으셨다. 그 은총의 힘으로 평생 진실한 예배자로서 또 그에 합당한 사랑의 삶을 살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