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 버린 시간, 증도의 겨울 염전
전남 신안군의 섬 ‘증도’를 찾아갔습니다. 스피드가 미덕이 되어 버린 시대, 증도에서는 느리게 사는 삶이 지켜지고 있다 했습니다. 사실 느리게 사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살이에 휘둘려 기운이 빠질 때마다 입버릇처럼 쫓기지 않고 살고 싶다 했는데, 증도에서는 그럴 수 있다는 뜻인가요? 증도에서 만나고 겪게 될 일들은 무엇일지 예상할 수 없었기에 오히려 마음은 급해지기만 했습니다.
새벽 6시 서울을 떠나 찻길이 끊어지는 사옥도 선착장에서 11시에 출발하는 철부선을 탈 수 있었습니다. 자동차를 싣고 15분쯤 지나니 어느새 증도랍니다. 싱거운 유람을 마치고 선착장을 지나 얼마나 달렸을까요. 서울 여의도의 2배 정도가 된다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염전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인공 위성에서도 보인다고 하니 입이 쩍 벌어졌습니다. 입구에 서있는 소금 박물관과 함께 근대 문화 유산이 된 염전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천일염 생산지라 합니다. 계절 탓에 3km가 넘는 소금 창고 위를 분주히 오가는 염부들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염전의 시간은 잠시 멈춰 있는 듯했습니다. 누가 두고 갔는지 모를 대파(고무래) 하나가 버려진 듯 나뒹굴고 있더군요.
고즈넉한 염전의 풍경을 바라보니 염부들의 고된 소금 농사가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어떤 기계의 도움도 없이 오롯이 사람의 노동으로, 자연의 혜택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기다림의 연속일 것입니다. 뜨거운 햇살에 바닷물이 증발되기를 기다린 후 얻게 되는 소금 결정체는 염부들에게는 금싸라기 같은 보물이겠지요. 언제쯤이면 그들의 구릿빛 얼굴을, 새하얗게 빛나는 소금밭을 볼 수 있을까요? 아스라하게 펼쳐져 있는 갯벌의 산삼 함초밭을 지나 증도 면 소재지로 향했습니다.
지금 내 삶의 속도는 얼마입니까?
면사무소를 지나고 경찰서도 지나고 어린이집도 지나갔습니다. 사람 사는 곳에 으레 있어야 할 것들을 지나고 나니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낡은 여인숙과 다방, 간판만 덩그라니 남은 미용실 사이에 서니 어디선가 연출가의 큐 사인이 들려올 것 같았어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내가 살아 보지 못한 삶을 경험해 볼 수 있겠다는 떨림이 느껴졌습니다.
흐린 날씨 때문인지 오가는 차도, 사람도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그곳은 참으로 조용한 마을이었습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건 서울에서 온 이방인인 우리들뿐이었지요. 취재라는 뚜렷한 목표를 가진 우리는 지도를 펼쳐 놓고 숨 가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발도장을 찍어 댔습니다. 점심 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상정봉을 오르고, 짱뚱어 다리를 뛰어다녔습니다. 뿌옇게 안개가 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김 양식장을 찍겠다, 일몰을 찍겠다며 고집을 꺾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안달해도 먹빛 하늘은 그대로이건만 잔뜩 예민해진 채 말이죠.
하루라는 시간이 더 있었지만 생각처럼 마음이 여유로워지진 않더군요. 슬로 시티에 와서 전혀 동요되지 않는, 여전히 속도 지향적인 모습을 보며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천천히 걸으면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도 있으련만, 잠시 머물고 있으면 잃었던 것을 찾을 수도 있으련만 어느새 우리들의 몸과 마음에서 느리게 사는 기능이 퇴화된 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