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은 누구인가
2008년 10월 시진핑(習近平 1953.6~)은 8000만 중국공산당원을 이끄는 9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된 뒤 장시(江西)성 지방시찰을 하면서 현지에서 대학생 ‘촌관(村官)’들과 만나 이런 이야기를 했다. ‘촌관’이란 도시의 대학생들에게 지방의 현실을 파악할 수 있도록 벽지의 하급행정관직을 맡아 일정기간 일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시진핑은 이들 대학생 촌관들에게 “농촌에서 기층(基層)공작을 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인생에 좌표를 제시해줄 것”이라고 말하고 젊은 시절 농촌에서 일하면 무엇이 군중이며, 군중을 어떻게 존중해야 하는지, 무엇이 실사구시이고, 왜 현실을 존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고 했다. 자신이 16살 때 하방(下放)당해 농촌에 가서 고생하며 깨달은, 생생한 체험을 통해 얻은 깨우침을 들려준 것이다.
시진핑이 우리의 고등학교 1학년 나이에 하방당해 간 곳은 마오쩌둥이 토굴생활을 하던 옌안서도 동북쪽으로 70㎞ 깊숙이 들어가 있는 량자허(梁家河)라는 마을이었다. 마오쩌둥이 1968년 12월 “지식청년들은 농촌으로 가서 가난한 농촌 속에서 재교육을 받으라”고 지시를 했기 때문이었다. 시진핑을 포함한 베이징 청년학생 15명이 배당받아 간 량자허라는 산골마을은 옥수수국수 밖에는 먹을 것이 없는 깡촌이었으며, 그들에게 배당된 숙소는 토굴이었다.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는 물이 모자라는 이곳에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저수지 만드는 임무를 맡은 흰 얼굴의 베이징 청소년들은 이후 20년간 이 일을 해야 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그 지방에 남아서 살기도 하고, 일부는 베이징으로 돌아갔으며, 그 가운데에는 당간부로 출세한 인물도 있는데 바로 시진핑이 그 경우이다. 이들이 만든 저수지는 지금도 남아 기능을 하고 있으며, 베이징에서 온 학생 15명을 포함한 200명이 참가한 저수지 건설 작업을 지휘한 현지의 여성 대대장은 스위싱(石玉興)이라는 꺽다리 처녀였다.
스위싱은 1969년 1월 13일 베이징에서 온 흰 얼굴의 애송이 15명을 집합시켰을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집합시키고 보니 이들이 커다란 상자 하나를 갖고 온 것을 발견했어요. 나는 그 상자에 무슨 금은보화라도 들어있나 해서 열어보라고 했는데 책이었어요. 그러니 얼마나 무거웠겠어요. 자기네들도 무거운 책 상자를 들고 온 걸 후회하면서 투덜거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상자는 시진핑이라는 학생 것이더군요. 다른 학생들은 일이 힘들어 지쳐서 곯아떨어지는데, 시진핑 학생은 끝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어요.”
그로부터 23년 후인 1992년 어느 가을이었다. 이미 동부 연안의 부유한 지역 푸젠(福建)성 당위원회 상무위원 겸 푸저우(福州)시 당서기로 출세한 시진핑이 다시 이 량자허촌을 방문했다. 이때 시진핑은 하방당한 청소년 학생들을 지휘하던 시골처녀 스위싱을 만났는데 이때 스위싱이 한 말은 “그래도 그때 베이징에서 온 지식청년들에게는 옥수수국수를 만들어 먹였지만 다른 마을 사람들은 조와 밀껍질 밖에 먹을 것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20여년 만에 동부 해안의 부자도시 푸저우시 당서기가 되어 깡촌의 저수지 공사장으로 돌아온 시진핑에게 마을사람들은 추억의 옥수수국수와 콩, 깨 등을 선물했다.
시진핑이 량자허라는 산골마을로 하방을 당해 갔을 당시 41살이었던 량여우창(梁有昌·79)이라는 노인은 당시의 시진핑에 대해 이런 기억을 털어놓는다. “참을성이 대단한 학생이었어요. 산시성 북부의 음력 2~3월이면 눈이 아직 녹지 않은 때인데 저수지 공사장에서 일하는 시진핑은 허연 다리를 드러낸 채 뼛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운 물속에 발을 담그고 씩씩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 하오허우성(好后生·훌륭한 학생)이라는 평가를 받았지요.”
시진핑이 량자허촌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6년 후인 1975년이었다. 량자허촌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서인지 시진핑은 추천 케이스로 칭화대 입학자격을 얻었다. 량자허마을 사람들 모두 “할 일은 다 하면서도 책 보기를 좋아하는 학생,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이라는 평가를 해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시진핑을 “하루의 작업이 끝난 뒤에 호롱불을 켜고 흙벽돌보다 더 두꺼운 책을 읽던 학생”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시진핑이 읽던 책 가운데에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관한 것과 수학에 관한 것도 있었다. 도시의 다른 학생들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시골마을에서 견디지도 못할 상황임에도 시진핑 학생은 책까지 읽는 점이 남달랐다고 시진핑에 대해 마을사람들은 평가했다.
시진핑은 40년 전 마오쩌둥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벌인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도시의 지식청년들을 농촌 산골로 하방시키는 바람에 질곡에 빠진 자신의 청소년기를 잘 탈출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버지 시중쉰이 마오쩌둥 지지파들에 의해 반당(反黨)집단의 지휘자로 낙인 찍혀 있다가 그때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배려로 당간부 재교육기관인 당교(黨校)라는 안전지대로 피신할 수 있었던 점이, 시진핑이 량자허촌을 떠나 칭화대에 추천케이스로 입학할 수 있었던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열여섯 살에 베이징에서 옌안보다 더 깊은 산골에서 저수지 만드는 공사를 6년간 한 뒤 8,000만명의 중국공산당원들 가운데서 한 계단 한 계단씩 올라가 결국 최고 정점에 이른 인물이었다.
2008년 이미 중앙당정치국 상무위원 겸 당무를 총괄하는 서기처 서기에 올라 산시성 인민대표들 토론회에 참석한 시진핑은 당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옌안에서 입당했습니다. 옌안은 나를 키워주었고, 자라게 해주었습니다. 산시는 나의 뿌리이며, 옌안은 나의 혼입니다. 나는 꿈에도 여러 번 옌안으로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나의 희망은 적당한 때에 산시성으로 가서 옌안을 돌아보고 그곳 인민들과 각급 간부들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렇게 보면 시진핑은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이 아직도 버리지 않고 갖고 있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에 관한 한 그 기반이 탄탄한 인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후진타오 국가주석 역시 1942년생으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때 7살이었으니 소학교, 중학교, 대학 교육을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이 시퍼렇게 날이 서 있을 때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1953년생인 시진핑은 마오가 실패작으로 끝난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을 밀어붙이는 시기에 중·고 교육을 받기는 했으나, 시진핑이 정치적으로 다소 좌파적인 성향의 인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더구나 아버지 시중쉰이 30대의 젊은 나이에 마오의 눈에 들어 출세의 길을 달린 군인이요 행정가였지만, 문화혁명과 함께 반당분자로 낙인찍히는 바람에 시진핑은 인생에서 귀중한 초년고생을 겪은 인물이다. 그러므로 중국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아버지 시중쉰은 덩샤오핑보다 더 빠른 개혁개방에 대한 생각을 일찍이 갖게 된 사람으로, 문혁이 끝나고 복권된 이후에 개혁개방의 출발점인 광둥(廣東)성에서 최고위 행정가 겸 군구(軍區) 정치위원을 지낸 인물이다. 아버지 시중쉰의 개혁개방에 관한 생각은 시진핑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군인 출신인 아버지의 경력은 시진핑에게 군내 인맥관리와 군의 지지에 유리한 강점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시진핑은 또한 최근 생산되고 있는 중국공산당 인재들 가운데서는 드물게 꾸준히 군 경력을 쌓아온 인물이며, 그런 점에서 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는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군 경력은 26살 때인 1979년부터 3년간 당중앙군사위 판공청 비서로 3년간 현역 군복무를 한 것을 시작으로, 지방 행정조직 가운데 군사담당인 무장부 서기와 정치위원을 두루 역임했고, 인민해방군에서 대공(對空)방어를 담당하는 고사포부대 예비역사단 제1정치위원도 지냈다. 그는 2000년부터 3년간은 난징(南京)군구의 국방동원위원회 부주임을 지내는 등, 지방 행정 수장과 지방 당 위원회 최고위직을 맡으면서도 항상 군사담당자로서 군을 관리하는 일을 꾸준히 해왔다. 오히려 장쩌민과 후진타오 두 사람의 전 당총서기 겸 국가주석, 군사위원회 주석보다도 군 경력을 제대로 갖춘 인물이기도 하다.
2008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가 베이징에서 개최됐을 때 시진핑은 그의 체중보다 더 무게 있어 보이는 언행과 함께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할 줄 알고, 울림이 좋은 육중한 목소리로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의사표시를 해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과시하기도 했다. 시진핑은 중국 지방관영신문인 시안만보(西安晩報)와 인터뷰를 통해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지금까지의 일생을 통해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쪽은 혁명선배님들이고, 또 다른 한쪽은 산시성 시골의 량자허마을 사람들이었다. 량자허마을 사람들은 내가 항상 군중 속에 있어야 하며, 결코 군중의 곁을 떠나서는 안될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 주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이름 “진핑(近平)”이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가깝게 느끼게 만들어준다는 뜻의 ‘평이근인(平易近人)’이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시진핑은 청소년 시절의 혹독한 고생이 그에게 선물한 겸손함과 부드러움과 신중함,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따뜻한 인사를 할 줄 아는 훌륭한 인품을 갖춘 인물이다. 지구 최대의 정당으로 당원 수가 8,000만명인 중국공산당은 거대 조직에서 살아남아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기 위해 겸손과 신중함은 필수요건으로 갈수록 중국 각계의 엘리트 그룹을 흡수해서 확대의 길을 걷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이미 ‘공산당’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중국 내 최대의 엘리트 정당으로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왜 중국공산당이 법학박사 학위를 가진 인텔리겐차를 당의 얼굴로 내세우려 하는지에 대해서도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아버지를 잘 만나 출세한 인물이라는 의미의 ‘태자당’이라는 이름을 그에 대한 평가로 삼는 것은 어울리지 않다. 오히려 그는 현 중국사회 내에서 갖추어야 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갖춘 인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으로 평가된다.
시진핑의 9년 연하 부인 펑리위안(彭麗媛)은 중국의 전통가곡 가수이며 현역 인민해방군 소장이다. 직책은 군 총정치부 가무단 단장이다. 당초 시진핑 부주석은 아버지를 잘 둬서 출세한 태자당(太子黨)으로, 부인 펑리위안은 유행가를 부르는 가수로 국내에 소개됐다. 그러나 부인 펑리위안은 중국의 전통가곡을 고음으로 부르는 가수로, 이른바 중국군의 문예전사(文藝戰士) 출신이다. 14살 때 산둥(山東)예술학원에 입학해서 민족가요를 전공했고, 18살 때 군에 입대했다. 군의 사기를 중시하는 중국 인민해방군은 이 문예전사들의 역할을 중시하고 있으며, 문예전사들로 구성된 군 가무단 가운데 최고 지휘자가 펑리위안이다.
펑리위안이 부르는 대단한 고음의 중국민족가곡은 군내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즐겨 들으며, 펑리위안은시진핑이 푸젠성에서 지방행정책임자로 일할 때 만나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 사이에는 1992년 출생한 딸 밍쩌(明澤)가 있으며 밍쩌를 출산할 때 시진핑은 지방의 홍수대책반에 가서 일하느라 집을 비우고 있었다고 펑리위안은 말한다. 그녀는 시진핑과의 결혼생활은 서로 함께 있는 시간보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고 말한다. 자신은 근무지가 베이징이지만 남편이 오랜 기간 동안 지방을 다니며 일했기 때문이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이기도 하며, 상하이 사범대학 대학원 겸직교수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남편 시진핑에 대한 평가는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그는 좋은 사람(好人)이며, 집안에서 큰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우리 식의 정치인과 가수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혁명동지의 관계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