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8:26-39에 관한 토론 내용 (2019.6.23 주일 본문)
* 새롭게 발견한 흥미로운 점: 동내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추방한 것이 아니고,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묶어서 감시"하려 했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광야로 쫒아낸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가 마을 사람들의 감시와 통제에서 벋어나 광야로 도망온 것이다. 광야에 있으면 언제라도 마을로 다시 돌아와 그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눈에 보이는 공간에 가둬 놓는 것을 그들은 선호했다. 서구 근대사회에서 감옥, 병원, 학교가 크게 발전한 것은 이와 같은 감시사회와 관련이 있다. 일본 만화 "진격의 거인"에서도 거인들이 성벽 밖에서 안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위협을 느꼈다. 마을사람들이 예수가 행한 기적을 싫어한 이유는 귀신들린자를 다시 그들 사회 안으로 복귀시켰기 때문에 불안해서였다. 언제라도 다시 이상행동을 할지 모르는데...라는 불안감, 한번 낙인 찍은 사람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큰 부담감이 있었다.
* 이는 마치 분단상황에 너무 익숙해져서 통일을 거부하는 심리와 비슷. 북한의 평화적인 제스쳐를 전부 속임수라고 간주하고 북한은 끝까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갖혀있는 사람들이 있다.
* 많은 사람들이 진실되고 선하고 공정한 것보다는 익숙한 것에 안주하고 싶어 함. 사람이 회복되고 치유되는 것이 정상적인 상황인데, 왜곡된 상황에 익숙한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을 뒤흔드는 것을 싫어함. 불편한 진실보다는 익숙한 문제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있다. 통계에 의하면 종교를 갖는 가장 큰 이유가 마음의 안정이라고 한다. 진리가 무엇인지 상관없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면 좋은 것인가? 예수의 복음은 도리어 현실에 안주하려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가?
* 이탈리아 작가 죠반니노 과레스키의 책 <돈 까밀로와 뻬뽀네>라는 책 중에 한 에피소드: 마을 사람 중 한 사람이 총에 맞아 죽었는데, 대부분 누가 죽였는지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못하는 상황. 자살로 처리가 되고 장례식을 하는데, 돈 까밀로 신부가 장례사를 하면서 "나는 자살한 사람 장례식은 집례하지 않는다"라고 말해 간접적으로 이 사람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고 밝힘으로 스스로를 위험에 처하게 함. 후에 예수와 신부의 대화 중, 예수가 두렵지 않은지 묻자, 신부는 자신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진실을 말하면 사람들이 싫어해서 사람과 나 사이에 유리와 같은 벽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함. 사람들은 거짓이 밝혀지는 것을 불편해 한다고 말함.
* 많은 귀신 들린 사람과 관련된 영화로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23 아이덴티티"가 생각난다.
* 예수는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하여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 돌아오게 하였다. 인간관계의 회복을 포함한 전인적인 치유이다. 오늘날 정부나 지자체 차원에서 사회안전망 개선을 위한 많은 노력을 하지만, 이 문제는 지역에 기반한 교회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많은 교회들이 이미 독거노인, 고독사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지만 더 노력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