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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18일 (수) 촬영.
서울지하철 4호선 6번 출구로 나오면 만날 수 있는 소녀상입니다.
소녀상 옆에 계단길이 있더군요. 올라가니 작은 공터가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 모여 인사를 나눴습니다.
20명이 모였네요. 오늘의 리더인 서울사람의 일정 설명을 듣고 바로 버스를 타고 길상사로 향했습니다.
길상사입니다.
길상사로 들어서며 깜짝놀랐습니다. 경내에 석산화(꽃무릇)가 군락을 이뤄 활짝 피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도 꽃무릇을 볼 수 있다는 설레이는 마음을 잠시 접고,
기념사진부터 한 장 남겼습니다. 이런 모습으로요.
이 곳에 수록된 모든 사진들은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기념사진을 남기고 제일 먼저 찾은 장소는 길상사를 시주하신 김영한님의 공덕비입니다.
공덕비가 있는 곳으로 올라 가는 길.
공덕비 아래에는 김영한님이 마지막 밤을 보낸 집이 있네요.
1999년 11월 14일 이곳에서
김영한님은 쳣 눈이 오는 날, 나의 유골을 길상사 경내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길상화란 법명의 김영한님의 공덕비입니다.
이 곳에서 서울사람님의 설명이 있었습니다.
공덕비 위에 김영한님의 뜻과는 다르게 사당이 세워졌네요.
김영한님은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며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말아달라고 했었거든요.
적묵당앞에도 석산화가 만발했습니다.
가을빛이 내려 앉은 길상사의 모습은 눈물겹도록 찬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행복했습니다.
김영한님의 공덕비를 보고 법정스님이 생전에 기거했던 진영각으로 올라 갔습니다.
법정스님의 유골 일부가 모셔져 있는 진영각 화단입니다.
유골은 법정스님이 17년간 머물었던 송광사 불일암 후박나무 아래에도 모셔져 있습니다.
1995년 당시 1,000억이 넘는다는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법정스님에게 기증하여 오늘의 길상사를 있게한
김영한님은 세상을 떠나기 전 찾아온 기자에게 1,000억원의 돈도 백석의 시 한 줄 만도 못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백석과의 사랑을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 묘사된 나타샤가 당신이라고 했다죠. 그 시를 한번 감상해볼까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출출이 (뱁새) * 마가리 (오막살이 집)
통영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가깝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녁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서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든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馬山)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는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 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 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이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엿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녘 울듯 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백석-
백석(백기영,1912~1996)은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백석은 1935년 친구(허준)의 결혼식에 참석차 통영에 왔다가 당시 이화여고생이던 박경련(란이라 부름)을
만나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백석의 나이 24세, 박경련의 나이 18세 때의 일입니다.
백석은 그녀에게 청혼을 합니다. 그러나 박경련은 백석의 청혼을 거절하고 1937년 백석의 동료인 신중현과
결혼하여 백석은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백석은 박경련이 결혼한 이후에도 통영을 찾아오는 등, "란"이라 부르던 박경련을 잊지 못했습니다.
위의 시는 그 시절에 쓴 시, 3편 중에 하나 입니다.
백석이 "란"을 생각하며 통영의 충렬사 앞 계단에 앉아 시를 썼다는 이야기를 근거로 충렬사에는 백석의
시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백석은 1936년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중 동료 교사의 송별 회식자리에 나갔다가
기생 김영한을 보고 첫눈에 반해 그녀를 옆자리에 앉히고는 손을 잡고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내 여자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까지 우리에게 이별은 없어"라고 말했습니다.
백석이 26세, 김영한이 22세 때의 일이였지요.
이렇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연인이 됩니다. 그랬건만 기생과의 동거를 못마땅해 했던 백석의 부모는
백석을 불러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켜 만주로 보냈습니다.
김영한(1916~1999)은 16세의 나이에 진향이란 이름의 기생이 되었습니다.
22세에 함흥에서 백석을 만나 불같은 사랑을 나누던 진향은 서울로 오고 뒤따라 백석도 서울로 왔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두 사람의 사랑도 부모의 반대로 인하여 이루지 못한채 헤어지게 됩니다.
대원각이야기입니다.
서산 예산군 광시면에서 금광을 하던 조씨는 이학규라는 여인과 결혼해 조병희라는 딸을 낳고 살다가
병사했습니다.
이학규는 남편이 병사한 후, 홀로 광산을 운영하다가 미곡상이던 박현주를 만나 그의 아이를 낳게 됩니다.
그 아이가 박헌영입니다. 이학규는 이로 인해 시집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이학규의 딸인 조병희는 충격으로 집을 나와 중이 된다고 절로 들어 갔다가 이 곳에서 당시 대원각 터에서
작은 주점을 하던 주모를 만나 기생이 됩니다.
대원각은 조병희의 명의로 등기되었다가 1955년 김영한의 이름으로 등기가 이전되었습니다.
대원각이 조병희의 소유로 된것은 물려받았다는 설과 박헌영의 비자금으로 매매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조병희는 기생이 된후 전라도 익산 함라마을의 부자인 김병순의 첩이 되어 남매를 두게 되었는데,
박헌영의 비서를 했던 김제술(한산스님) 과 여간첩으로 유명한 김소산입니다.
김병순의 본처도 김해균과 김안균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큰아들인 김해균의 박헌영의 재정적 후원자로 혜화동에 있던 혜화장을 박헌영에게 제공 했습니다.
박헌영은 주세죽과 사이에 남매를 낳았고, 정순년이란 여인에게서 박병삼(원경스님)이란 아들도 두었지요.
조병희의 딸인 김소산은 어머니를 따라 기생이 되어 간첩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가
1950년 1, 4 후퇴때 총살 당했습니다.
김영한은 김소산이 체포될 때 대원각의 새끼 기생이었는데 김소산이 대원각의 운영을 맡겼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
1955년에 김영한은 당시 국회부의장의 애첩이 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대원각의 주인이 되었다는군요.
그때의 사람들은 이제 모두 이세상에 없어 진실을 알 수는 없지만
박헌영의 아들인 원경스님은 평택 만기사의 주지로 건재하여 당시의 삶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창문으로 보는 풍경과 그림으로 보는 풍경은 같은 듯 해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림으로 보는 풍경은 그린이의 관점으로만 보게 되지만 창문으로 보는 풍경은 직접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역사도 그렇습니다.
조선시대 수많은 충신과 간신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누가 그림을 그렸습니까? 누가 충신과 간신을 구별해 놓았습니까? 혹, 억울한 사람은 없었을까요.
적묵당입니다.
너무 늦었군요.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좋은 계절을 맞다보니 마음도 몸도 바빠졌습니다. 시기를 놓쳤다고 독촉도 당하고...
지금부터 그림만 올립니다.
동자스님.
길상7층보탑, 吉祥七層寶塔.
길상7층보탑은 조선 중기(1600~1650)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혜와 용맹을 상징하는 네 마리의 암수
사자가 기둥 역할을 하며 입을 연 두 마리는 교를 상징하고, 입을 다문 두 마리는 선(禪)을 상징한다.
4사자 가운데 모셔진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인은 정면에서 시계방향으로 선정인, 항마촉지인,
통인(통인은 시무외인과 여원인으로 이루어짐) 전법륜인을 하고 있다.
이 탑은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이 법정스님과 길상화보살님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종교화합의 의미를
전하고자 무상으로 기증하였으며 2012년 11월 11일 기단부에 오장경, 금강저, 오불(五佛), 108침향염주,
다라니 등을 봉안하였다. 이후 시절인연으로 미얀마의 제1보궁 우뚜리와 완사 큰스님이 1600년 전
고탑 해체 과정에서 직접 출토한 부처님 오색정골사리, 구강사리, 응혈사리와 제자인 목건련존자, 마하가섭
존자, 라홀라존자 등의 사리를 2013년 8월 25일 탑신부에 봉안하였다.
불보살님의 사리가 모셔진 이 길상보탑에서 기도한 공덕으로 모든 분들이 부처님의 무량한 가피 받으시고
이고득락(離苦得樂)하시길 발원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성북성당입니다.
제단 모습.
최순우 옛집으로 가는 길.
최순우 옛집에서는 김종학 화백의 수집가구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 2019년 9월 18일부터 11월 16일까지)
최순우 옛집의 앞마당 풍경입니다.
후원에서 해설사의 설명도 들었습니다.
최순우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개성박물관에 취직하며
당시 박물관장이던 사학자 고유섭선생을 만난 것이사학자의 길로 가게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두문즉시심산(최순우 필적), 즉 문을 닫으면 곧 깊은 산중이란 뜻의 현판이 사랑방에 걸려 있네요.
김종학 화백 수집가구전이 최순우 옛집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전시된 가구들입니다.
덕수교회내에 있는 이종석 별장.
내부 모습.
일본식이 가미된 한옥으로 툇마루가 아닌 복도가 있네요.
장독대
누마루의 장주초.
앞마당의 잔디도 우리의 전통 주택의 모습은 아닙니다.
덕수교회
심우장으로 가는 길.
층계 우측에 보이는 쉼터가 "구보씨의 일일"을 쓴 박태원 님의 집터입니다.
성북동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공존하던 동네였습니다. 지금도 그렇긴 하죠.
한용운님의 성북동 집, 심우장은 달동네에 있습니다. 서울성벽 아래죠.
심우장은 1933년 김벽산(金碧山)이 초당을 지으려고 사둔 땅을 기증받아 방응모 사장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지었습니다. -백과사전-
천지가 개벽할 일.
사람 하나 겨우 다닐 수 있는 골목길에 카페가 생겼어요.
김광섭(1904~1977)시인의 시 "성북동 비들기"를 생각하며 성북동을 걸어 갑니다.
"어디서 무었이 되어 다시만나랴"로 기억되는 <저녁에>라는 시도 생각나는군요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김광섭 시인의 이웃에 살던
김환기 화백은 이 시를 보고 영감을 얻어 달항아리를 접고 점화들을 그려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가의 그림 1위부터 9위까지를 김환기 화백의 그림이 싹쓸이 했습니다.
성북동 청설모.
성북동에 살려면 다람쥐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전선줄을 나무타듯 타고 달리는 청솔모.
확대한 사진입니다. 얼마나 빨리 달리던지, 기가 막히네요. ㅋㅋㅋ 두 번째 전신주를 건너는 중이었어요.
성북동에 숲속같은 곳도 있네요.
소설가 상허 이태준(1904~?)님이 살던 가옥 수연산방.
점심먹으러....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사진 봉사와 더불어 자세한 설명, 대단히 감사합니다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노고에 감사드리며,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사진 봉사 자세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