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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9월11일 금요일[(녹)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청주] 너나 잘해!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1티모 1,1-2.12-14
+ 복음 루카 6,39-42
◈ 오늘의 묵상
눈먼 이가 눈먼 이의 길잡이가 될 수 없듯이, 알지 못하면 가르칠 수
없습니다. 공자도 수신제가, 곧 먼저 덕을 쌓아서 자기 가정의 평화를
이룬 다음에 다른 사람 앞에 나서라고 하였지요.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하느님과 예수님을 넘어설
생각일랑 아예 하지를 말 것이며, 언제나 그분의 모습을 삶의 척도로
삼아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이해됩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그런데 다른 사람에 대해 판단하지 않으려고 평생
노력을 해도, 보이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가능하다면 형제의 잘못을
지적하여 그가 고치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 또한 형제에 대한 사랑과
책임의 표현이 아닐까요?’(마태 18,15-18; 에제 3,16-21 참조)
이렇게 넋두리도 해보지만, 예수님 말씀대로 형제의 눈 속에 티가 들어
있다고 해서 그에게 화살을 돌릴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가
‘형제’라면 그의 눈 속에 든 티는 나에게도 아픔이고 상처이며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보다 더, 나는 그의 눈에 든 티를
짊어질 뿐, 그는 내 눈에 든 커다란 들보를 짊어져야 하지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형제입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가장 선한 사람에게도
적지 않은 결점이 있듯이, 우리 모두 약점을 지닌 사람들이기 때문에
형제적인 충고가 아닌 비난을 위한 비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에게도 분명 좋은 점이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약점을 발견하여 헐뜯기보다는, 오히려 장점을
찾아내서 격려해 주라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지금 우리가 이웃을
대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종말에 우리를 그렇게 대하실 것이라고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 매일 미사 -
◈ [서울]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2015년 나해 9월11일 금요일[(녹)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제1독서
<나는 전에 그리스도를 모독하였으나,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시작입니다. 1,1-2.12-14
복음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9-42
꾸르실료 봉사자분들과 함께 용문사엘 다녀왔습니다. 파란 하늘, 예쁜
꽃들, 산사에서의 차 한 잔이 주는 여유와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매표소의 직원은 저의 복장을 보시고는 ‘신부님은 무료입장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종교의 성직자를 배려하는 모습이 고마웠습니다.
용문사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은행나무 주변에
노란 종이를 걸어 놓았습니다. 이번에 대학 시험을 보는 학생들이 좋은
결실을 맺기를 바라는 내용입니다. 용문사에는 부처님을 모신 전도
있지만, 삼신각, 칠성각과 같은 기도처도 있습니다. 다른 것들도
받아들이는 불교의 넉넉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포용성은
진리는 ‘깨달음’으로부터 온다는 불교의 사상에 기인할 것입니다.
은행나무 옆에는 높은 철탑이 있습니다. 철탑위에는 피뢰침이
달려있습니다. 예전에 천둥, 벼락이 있었고 키가 큰 은행나무에 피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은행나무 대신에 벼락을 맞아줄 철탑을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지만 마치 호위무사처럼 은행나무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철탑의 우직함을 생각합니다. 시류에 떠밀려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말없는 가르침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산사의 찻집에서 다른 본당에서 오신 교우 분들을 만났습니다. 역시 저의
복장을 보시고 인사를 하셨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스쳐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깊은 인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서로 만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베푸는 선행과
나눔 그리고 사랑과 희생은 험난한 삶의 거름이 되어 또 다른 모습으로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제게 커다란 가르침을 주십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을 충분히
받았으면서도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가식과 비난 그리고 험담과 질투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봉사의 직분을 살아가는 교우들은 특별히 오늘
주님의 말씀을 늘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봉사와
나눔이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나쁜 말 때문에 빛이 바래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대신할 희생자를 찾는 버릇
개 눈엔 똥만 보인다는 오래된 말, 제 눈의 안경이란 말도 생각납니다.
그런가 하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말도 떠오르네요.
성경 보면 예수님 시대에도 그와 비슷한 아래의 말이 있었나 봅니다.
그러니 예나 지금이나 진화와 발전과는 상관없는 버릇들이 있나봅니다.
자기에게 탓 있고 핑계 찾는 버릇 있고 흠 있어 그런 걸 볼 수 있겠지요.
제 눈의 안경처럼 말이지요. 나를 감추고 대신할 희생자를 찾는 거지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루카 6,41)”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인천] 내가 만나는 사람이 원하는 모습으로
2015년 나해 9월11일 금요일[(녹)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제1독서
<나는 전에 그리스도를 모독하였으나,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시작입니다. 1,1-2.12-14
복음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9-42
제 사회 친구들 중에서 혼자 사는 사람은 저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장가, 시집을 가서 아이들과 함께 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지요.
그런데 저를 보면 하나같이 “부럽다”고 말합니다. 배우자에게 싫은 소리
들을 필요 없고, 자식 걱정으로 신경 쓸 일이 없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말합니다. 더군다나 돈에 얽매이지 않고, 승진을 위해 공부할 필요도
없으니 부러운 이유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이 친구들의
그런 부러움에 대해 인정하면서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제의 자유로운
삶을 즐기고 있습니다. 옷 입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피부를 가꾸는 것도
무관심합니다. 이런 저를 오랫동안 보았던 친구 한 명이 이런 말을 합니다.
“너 그렇게 자유롭게 사는 것도 좋지만, 겉으로 보이는 네 모습에 대해서
신경 쓰면서 살아야 해. 그래야 사람들에게 호감도 줄 수 있잖아. 그
모습이 공인으로서의 의무가 아닐까?”
나 혼자만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것도 좋지만, 공인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면 아무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이 말에 스스로에 대해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혼자 사는
독신이니까 대충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책임감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진정으로 위로와 힘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때로는 배우처럼 연기도 필요한 법입니다. 물론 명품으로 온
몸을 치장하라는 것이 아니지요. 그보다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호감이 가는 적합한 겉모습을 갖추었을 때, 그들에게 쉽게 가깝게 다가설
수 있고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너무나 내 중심으로 살아왔던 것이 아닐까 라는 반성을 합니다.
혼자 사는 사람의 특권이고, 이러한 털털한 모습을 사람들도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들은 어쩌면 나 자신만을 생각했던 이기적이고 편협된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는 사람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이야기하십니다.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빼내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먼저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은 자신의 모습은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남들에게
이러쿵저러쿵 말만 할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진정한
위로를 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제는 먼저 내 자신을 꾸며 보았으면 합니다. 스스로의 만족을 위한
꾸밈이 아니라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즉 내 이웃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모습으로 스스로를 먼저 꾸밀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래야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 안에서 주님의 뜻에 맞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위대한 꿈을 먼저 세워라. 그리고 기술과 실력을 다져라. 그 이후에
얻어지는 직업은 그 어떤 것이든 자신의 위대한 꿈을 실현시켜 주는
징검다리가 되어줄 것이다(고도원).
스스로를 제대로 보지 못할 때 십자가를 보세요.
플라세보 효과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라고 있지요. 특정한 유효성분이 들어
있는 것처럼 위장하여 환자에게 투여해서 유익한 작용을 나타내는
효과를 말합니다. 그런데 반대의 효과가 날 때도 있습니다.
한 여인이 자살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살충제를 마셨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마신 것은 독이 없는 액체였지만 그녀는 살충제를 마셨다는
심적인 충격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담석증 수술을 받기로 한 여인은 수술 전에 자기 배에 칼을 댄다는 사실이
두려웠지요. 그래서일까요? 수술대 위에서 마취 전에 먼저 알코올로 배를
소독했는데 이를 마취도 하기 전에 자기 배에 칼을 댔다는 생각에
쇼크사했다고 합니다.
러시아에서는 철도국 직원에 냉동차에 갇혔지요. 그는 차의 바닥에
자신이 얼어 죽는다는 유서 비슷한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사실 냉동차는
고장 나서 내부 온도는 영상 13도였고, 환기구도 있어서 산소도 충분한
상태였습니다.
정신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하는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마음이 지금의 삶을 더욱 더 나은 곳으로 이끈다는 굳은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말했습니다.
“낙관론자는 위기에서도 기회를 보지만, 비관론자는 좋은 기회에서도
위기를 느낀다.”
어제 제 신학교 추천 신부님이신 이학노 요셉 몬시뇰님의 칠순미사가
있었습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9월11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루카 6,39)
여러분은 캄캄하게 어둔밤을 길어 본 적이 있나요?
혼자서는 도저히 갈 수 없을 때 누가 등불을 비춰준다면
그 길을 안전하게 갈 수 있겠지요?
우리 삶의 여정에는 도저히 앞이 안 보일 때가
누구에게나 가끔씩은 찾아옵니다.
그때 나의 손을 잡아 앞길을 인도해 주는
빛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바로 우리의 길이요 빛이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걱정이 없습니다.
그분의 빛을 받아 어둠과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해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빛이신 그분의 빛을 받아
다른 사람의 길을 비추어주는 작은 등불이 될 수 있답니다.
오늘 길을 잃고 헤매는 누군가를 보게되면
그냥 그 사람 앞에서 작은 빛만 비추어 주는 사람 되소서.
그 빛을 비추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태양같은
더 큰 빛을 받아야 함을 늘 기억합시다.
우리가 빛이 아니라 우리는 단지
빛을 비추는 거울이나 반사경일 따름입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나해 9월11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루카 6,39-42)
제대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됩니다.
제대로 바라보는 것의 시작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자신을 제대로만 볼 수 있어도 세상은 참으로 밝을 것입니다.
깜깜하고 컴컴한 대상은 바로 우리자신임을 깨우쳐주십니다.
욕심과 교만이 우리의 시력을 잃게 하였습니다.
우리자신의 들보를 먼저 보지않기에 형제의 티끌이 더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의 눈에서 교만의 들보를 빼내어야 합니다.
길은 있는데 참된 길로 이끌 인도자가 마땅하지 않음을 성찰하게 됩니다.
볼 수 없는 눈 먼 이들의 하는 일이란 어리석고 아픔을 주는 일들뿐입니다.
참된 길의 인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길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꼭 필요한 것은 영혼의 눈을 믿음안에서 이제 뜨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사람 섬기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눈이 밝아지는 겸손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 - ‘먼저’ 나부터 살피는 영성생활
2015년 나해 9월11일 연중 제23주 금 루카 6,39-42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2)
‘먼저’ 나부터 살피는 영성생활
하느님과 일치하는 길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몇 십 년 수도생활을 하고
성경공부나 기도를 하여 영적으로 진보했다고 해도 자만심과 세속의
것으로 향하는 눈길, 악으로 기우는 육의 정신으로 말미암아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지금 여기서 있는 그대로의 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어디서부터 영적 성장의 길을 시작해야 할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6,41) 하시며
위선자들을 향하여 책망하신다. 여기서 위선자들은 율법의 세세한
규정은 강조하면서도 그 근본정신을 소홀히 한 바리사이들이다.
바리사이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먼저’ 자신이 아닌
외부 환경과 다른 이들에게 시선이 향했다는 점이다. 자신에게는 눈이
먼 채 다른 이들의 율법 준수 여부에 촉각이 곤두서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에 대한 성찰이나 영혼의 정화 없이 다른 이들에게 ‘사랑도
혼도 없는 율법 준수’를 강요했다.
바리사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자기 폐쇄와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가져왔고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과의 단절을 가져왔다. 그들이 안식일법을 근거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처신을 문제 삼고 도발을 이어가 끝내는 그분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은 ‘먼저’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적 성장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중요한 것은 ‘먼저’ 자신을 돌보고
살펴 깨끗하고 순수한 자신이 되는 것이다. 내 영혼이 맑으면 하느님을
일상 안에서 뵈올 수 있고, 만나는 이웃도 사랑스럽고 좋게 보일 것이다.
영안(靈眼)이 열리면 만사를 하느님의 눈으로 보게 되고, 따뜻하고 관대한
눈길로 다른 이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6,39) 자신부터 성찰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말씀이다.
하느님 앞에 성숙한 사람이란 이렇듯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어둠과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다. 육의
정신을 품은 채 남을 가르치거나 남의 행동을 고치려 하고, 정의롭게 살지
않고 마음의 평화가 없으면서 평화를 부르짖고 있지 않은지 ‘먼저’ 자신을
살필 일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6,42) 영적 성숙을 위한 출발점은 언제나 ‘나 자신’이다.
‘나다운 나’가 되는 것이 영적 성숙이다. 어떤 기준에 따라 나다워져야
할까? 그 기준은 나 자신의 가치 기준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6,40)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을 넘어설 생각을 하지 말고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을 본받아 그분이 걸어가셨던 십자가의 길,
사랑의 길을 기쁘게 걸어가야겠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하느님을 향해 순례하는 모든 이들은 겸허한
마음으로 먼저 자신을 성찰함으로써 육(肉)의 정신을 버리고 주님의 영
(靈) 안에 머무르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내가 ‘먼저’ 또 다른 복음이
되고 성체가 되어 걸어갈 때 모든 존재와의 만남이 성사가 되고 복음
선포가 되며 사랑의 향기가 될 것이다.
이제 가을이다. 밖으로 향했던 시선을 내 안으로 가져와 자신을 가다듬는
‘영혼의 추수’를 준비하자! 밖에서 문제를 찾고, 남의 탓을 하고, 늘 자신은
제외한 채 살아온 발걸음을 멈추도록 하자! 지금이 바로 멈추어 주님께로,
주님께로부터 멀어져 있는 자신에게로 시선을 집중해야 할 때이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거울
류지인 야고보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9월11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루카 복음 6장 39-42절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거울
필리핀 국제 양성소 책임을 맡고 있던 때의 일입니다.
더위에 지친 형제들이 아침기도를 위해 성당에 맥없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허겁지겁 달려와 기도 시작 시간을 정확히 맞추어 성당 문에
들어서는 형제도 있었습니다.
저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렀고 강의실에 형제들을 한데 모았습니다.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할 때에도 필요한 준비 과정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뵙는 일에는 더더욱 정성스런 준비 시간이 필요합니다.
내일부터는 적어도 기도 시간 10분 전까지는 성당에 앉아 있기 바랍니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고 이 정도면 좋은 가르침이 되었으리라 생각하며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새벽 한 형제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급히 잠에서 깼습니다.
이른 새벽 대침묵을 깨면서까지 제 방을 찾아온 건 무언가 긴박한 일이
벌어졌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다급하게 문을 열고 물어보았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형제가 대답했습니다. “신부님, 저희가 아침기도를
마쳤고 미사 시간도 10분이나 지났습니다.”
시계를 확인하곤 화들짝 정신이 들었습니다.
참수도자는 거울을 두지 않고 다른 형제의 모습 속에서 스스로를
성찰하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저는 그날 거울을 만났습니다.
제가 타박하며 바꾸려 했던 형제의 모습은 다름 아닌 저 자신을 향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 하느님의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면 단점보다는 장점을 더 빨리 찾아낼
수 있습니다.
- 류지인 야고보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
◈ [청주] 너나 잘해!|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9월11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루가 6,39-42)
너나 잘해!
말은 청산유수인데 삶이 뒷받침 되지 못하여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큰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도 남의 작은 허물만 보고는
나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서 대접받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방귀뀐 놈이 성낸다.’라는 말을 합니다. 남의 잘못은 잘
찾아내고 자기 잘못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문제입니다. 그는 누가 충고를 해줘도 자기에게 하는 소리인줄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의 지극히 하찮은 잘못은 크게 보이지만 자신의 잘못은 대단히
중대한 것일지라도 작게 보이는 것은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내 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가6,42)는 주님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너나 잘해, 내 걱정 하지마!’. ‘너나 잘해, 잘난 체 하지 마’하는 노랫말이
있습니다.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 속으로는 그런 감정을 갖게
되는가봅니다. 삶이 풍요롭지 못할 때 하는 말이나 행동은 헛소리요,
위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 합니다. 말하는 것은 행동과
일치해야 합니다. 언행일치의 삶이 힘입니다.
어미게와 아기게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어미게가 아기게의 걷는
모습을 보니 걷는 보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미게가 말합니다.
“제발 옆으로 걷지 마라. 의젓하게 똑바로 걸어라.”그러자 아기게가
말합니다. “네, 엄마. 그러면 엄마가 걷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어미게는
“그래. 따라서 하렴”하고 걷는데 자꾸 옆으로 옆으로 걷습니다. 아기게가
뒤따라 옆으로 옆으로 걸었습니다. 교훈을 늘어놓기 전에 자신부터
똑바로 살고, 똑바로 걸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라고 하며
가슴을 펑펑 칩니다. 입으로가 아니라 온 몸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용서를 할 수 있고 화해를 이루며 화목해지고 행복해 집니다. 남의 탓하지
않는 하루의 삶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끝맺음 역시 주님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노력한 만큼 잘 살게 되고, 사랑하는 만큼 아름다워지며 가슴을
여는 만큼 풍족해 집니다. 주님께 마음을 열고 내 자신을 바꾸고
쇄신시키는 일부터 시작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어떻게 하면 제
눈의 들보를 빼낼 수 있을까요?”“우선 네 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부터 하여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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