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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1. 묵상글 (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 하심(下心)과 믿음의 관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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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1.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심(下心)과 믿음의 관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오늘 주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는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런 믿음’이란 어떤 믿음일까 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이런 믿음이란 이 정도의 믿음은 본 적 없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믿음의 깊이로 말하면 이스라엘인들의 믿음보다 훨씬 깊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깊은 믿음이란 자신을 아주 낮춘 자, 곧 하심과 하인의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백인대장은 下心과 下人의 대표입니다.
불교에서 하심은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을 말하는데
자신은 땅바닥까지 낮추고 남은 하늘까지 높이는 그런 마음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자기를 낮출수록 믿음은 깊어진다는 겁니다.
사실 교만할수록 하느님을 믿지 못하니 겸손할수록 믿음이 깊어짐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백인대장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 그 누구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하지
않았는데 이방인인 그는 예수님을 보고 즉시 “주님”이라고 불렀던 것이고,
주님을 누추한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다고도 한 것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스승 정도로만 알았고,
기껏해야 예언자 정도로 알았는데 백인대장은 주님으로 믿었던 것이고,
그런 주인을 종인 자기의 집으로 모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더 놀라운 믿음 고백을 합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오셔서 제 죽은 딸을 살려달라거나 손을 얹어달라고 하는데
그는 그러실 필요가 없다는,
말씀만으로 다 이루실 수 있는 분이기에 그럴 필요 없다는 믿음을 보입니다.
창세기 1장의 하느님은 2장의 하느님보다
초월적인 하느님이요 능력의 하느님입니다.
2장의 하느님은 땅에까지 내려오시어
사람의 코에 당신 숨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시지만
1장의 하느님은 어디 계신지 알 수 없는 곳에 계시며 그저 말씀으로 창조하십니다.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 말씀에 생사가 달린 하찮은 존재임에 반해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을 당신 말씀으로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능력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백인대장은 이방인이면서도
예수를 이런 주님이요 하느님으로 믿은 것이고,
주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본 적이 없다고 하신 겁니다.
아무튼, 우리는 하심과 믿음의 관계를 오늘 백인대장에게서 배우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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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1.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 8,8)
오늘 <복음>은 앞 장면의 나병환자 치유에 이어, 백인대장의 하인을 고치신 이야기와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이야기, 그리고 악령 들린 이들과 병자들을 고치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오늘은 백인대장의 한마디의 말만 되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오늘 날 전 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이 영성체 때에 드리는 신앙고백입니다.
“주님, 제 안에 당신을 모시기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접하게 될 때 취하게 되는 두 가지 태도를 보게 됩니다.
<첫 번째 태도>는 “주님, 저는 주님을 저의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이는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뵈었을 때,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자신의 비참한 실존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을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곧 자신이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라는 것이요, 백인대장의 신분이지만 하인의 병을 어찌할 수 없는 무능력한 이요, 종일뿐이지 결코 주인이 아니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종인 자신이 감히 주님이신 예수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카복음>의 병행구문에서는 ‘주님 앞에 나서기에도 합당치 못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는 제 자신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제대 앞에 설 때마다 합당치 못한 제 자신의 모습이 몹시 두렵고 떨리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의 태도>는 “주님,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라는 의탁과 신앙고백입니다. 이는 마치 베드로가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빵이심을 깨달았을 때, “주님, 당신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셨는데, 제가 당신을 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믿고 의탁하는 것과 같습니다. 곧 그분이 주님이심에 대한 깨달음과 그분의 권능에 대한 의탁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고, ‘이렇게 하라’ 하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 하면 저렇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광야에서 ‘낮이건 밤이건 구름만 걷혀 올라가면 길을 떠났고, 구름이 이틀이고 한 달이고 한 해이고 머물러 있으면 떠나지 않았던 것’(민수 9,21-22)처럼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이제 저도 백인대장처럼,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 8,8)하고, 믿음의 간청을 드립니다. 주님의 권능뿐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믿으며, 특별히 사랑을 성취시키시는 ‘말씀의 권능’을 믿습니다. 저를 ‘먼저’ 믿어주시는 당신의 믿음에 의탁하여, 성모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저도 ‘먼저’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하오니, 주님!
저도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믿음으로 듣고, 청하기 전에 ‘먼저’ 믿고 청하게 해주십시오.
오늘 제가 당신의 거룩함 앞에서 제 비참함을 깨닫게 하시고
광야에서 당신 백성이 그러했듯이,
오로지 당신 말씀에 의탁하여 가능해 보일지라도 ‘돌아서 가라’ 하면 돌아서 가고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곧바로 가라’ 하면 곧바로 가게 하소서.
거룩하신 당신이 진정 저의 주님이시오니, 저를 인도하시나이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 8,8)
주님!
당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게 하소서!
당신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만을 제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은 머리 위에 계시되 속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유를 주시니,
당신께 온전히 속한 자로,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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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1.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은 대로 될 것이다
오래도록 위암으로 고통을 받고 계신 형제님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언제나 맑고 밝은 웃음을 가지고 미사참례를 하고 구역모임에도 빠지지 않으시려 애를 쓰셨습니다. 근황을 여쭈며 어떤 생각을 하시느냐? 고 했더니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자유를 누릴 때가 곧 오겠구나!”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꿈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좋은 꿈도 있고, 그렇지 않은 꿈도 있는데 요즘은 아주 나를 옴짝달싹 못 하는 꿈에 시달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좋은 꿈이란 것을 가톨릭 성가 29번 ‘주 예수 따르기로” 1절에 비유해 주셨습니다. “주 예수 따르기로 나 약속했으니 내 친구 되신 주여, 늘 함께하소서. 주 함께 계시오면 나 든든 하옵고 주 나를 이끄시면 바른 길 가리다.” 그리고 좋지 않은 꿈은 2절 “이 세상 온갖 유혹 내 맘을 흔들고 내 모든 원수들이 늘 괴롭히오니 주 나를 돌아 보사 내 방패 되시고 내 옆에 계시옴을 깨닫게 하소서.”에 빗대시며 3절은 주님께 맡기고 또 주님의 고유권한이시라고…. “저 영광 빛나는 곳 주 내게 보이니 그 아름다운 곳을 사모합니다. 주 예수 섬기기로 나 약속 했으니 끝까지 따라가게 용기를 주소서.”
‘성가로 하는 기도는 2배로 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냥 입으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을 담아 간절히 기도하시는 모습에 감사했습니다. 내용 하나하나가 나의 미래를 비춰주고 유혹을 극복하는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성가를 부를 때 가슴으로, 온 마음으로 불러야 하겠습니다.
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씀드립니다.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나빠도 꿈입니다. 그러나 그 꿈을 주님의 눈으로 보고, 더 큰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꿈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귀합니다. 꿈을 통해 메시지가 주어지기도 하지만 모든 것은 주님의 섭리 안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자기 하인이 중풍으로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마’하셨습니다. 이에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하시며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 주셨습니다. 참으로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이방인 군인이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마음속에 갖고 있는 생각과 그분께 대한 신뢰를 우리는 믿음이라 합니다. 백인대장은 확고한 믿음을 소유했습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다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먼저 받고 나중에 받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래된 신자, 새 신자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얼마나 의탁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세례를 받은 지 오래되었다고 저절로 믿음이 생기는 것도 더 많은 은총을 체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새로 영세받은 신자가 훨씬 더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시기 질투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까롤로 까레또). 매 순간 하느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구하는 바를 넘치게 받고 또 다른 것도 더 받을 것이지만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감히 청하지도 못하고 그럼으로써 얻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믿음에 믿음을 더하여 믿는 대로 이루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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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1.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 중에 ‘에게 해’ 연안에서 며칠 머물렀습니다. 잔잔한 바다와 빨간 지붕의 집들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제게 ‘에게 해’는 폴 모리아 악단이 연주했던 ‘에게 해의 진주’로 친숙했습니다. 순례를 안내하던 가이드는 ‘에게 해의 진주’는 원래 노래 제목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역이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 제목은 ‘페넬로페(Penelope)’라고 합니다. 가이드는 페넬로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스파르타 지방의 왕이었던 이카리오스는 딸 페넬로페를 아주 사랑해서 딸이 오디세이와 결혼해서 떠나려 하자 같이 살자고 설득합니다. 남편 오디세이는 아내 페넬로페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베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것으로 남편을 따라가겠다는 뜻을 밝히고 이에 아빠 이카리오스는 딸과 사위를 보냈습니다.
오디세이가 전장으로 떠나면서 페넬로페에게 10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재혼하라고 했는데 그녀는 20년이 지나도 재혼하지 않고 오디세이를 기다렸습니다. 오디세이가 없는 사이 구혼자들의 청혼이 밀려오자 시아버지에게 드릴 수의가 완성되면 결혼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낮에는 옷을 만들고 밤에는 풀어버리는 식으로 시간을 벌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페넬로페의 베 짜기’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쉴 새 없이 하는데도 끝나지 않는 일을 비유할 때 쓰입니다. 후에 오디세이가 돌아오자 페넬로페는 침대를 옮기라고 합니다. 오디세이가 그 말을 듣고 무슨 말이냐며, ‘이 침대는 옮길 수 없지 않소?’라고 말하자 진짜 신랑이 돌아온 것이 맞는다고 부부는 감격의 해후를 합니다. 오디세이와 페넬로페의 신혼 침대는 성안을 뚫고 자란 단단한 올리브 나무를 베지 않고 그 나무 중심으로 침실을 만든 둘만의 사연이 있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에게 해의 바다가 더욱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오늘은 며칠 전에 읽은 책의 이야기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동공이 커지고, 목이 아픈 증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병원에 갔지만 의사들도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더 큰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신장이 좋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고 해서 약을 먹었습니다. 치아가 안 좋은 것 같다고 해서 잇몸 치료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몸은 더욱 나빠지고,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실망이 커진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여행이라도 다녀오려고 하였습니다. 여행을 위해서 새로이 옷을 맞추려고 양복점엘 갔습니다. 옷을 재단하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목 치수는 22인치로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오랫동안 19인치로 옷을 입었습니다. 22인치는 곤란합니다.’ 그러나 재단사의 말을 듣고 22인치로 옷을 맞춰 입었습니다. 그랬더니 눈도 좋아졌고, 목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병은 신장 때문도 아니었고, 치아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목에 꽉 끼는 옷을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 성공’이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믿음에 대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토마 사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고야 믿습니까!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정말 복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려 주셨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물위를 걸으셨습니다. 이런 모든 표징은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만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의지하고, 주님을 따르면 우리는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와 같은 믿음을 아름답게 노래하셨습니다. “그분이 비천한 당신 종을 굽어보셨음이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음이네.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네. 그분 자비는 세세 대대로,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미치리라.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 편하고 쉬운 승리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희생과 봉사의 길이었습니다. 나눔과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신앙은 희생과 고난 속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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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1.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람을 찾는 하느님
-환대의 사랑, 환대의 믿음-
시인은 떠났어도 시는 영원히 남습니다. 아니 시와 더불어 영원히 살아 있는 시인입니다. 오늘은 7월 첫날, 7월이면 떠오르는 시, 이육사의 청포도입니다. 윤동주처럼 일제 강점시 옥중에서 순국한 애국시인으로 두분 다 시와 삶이 일치된 한없이 고귀하고 청순한 시인들이었습니다. 청포도 전문을 인용합니다.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야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결코 감상적 나약한 시가 아닙니다. 희망과 기쁨이 싱그럽게 피어나는 청신淸新한 시입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아마 우리 나라 역사를 통해 가장 많이 인재를 배출했던 때가 선조시대 임진왜란과 그 전후와 영.정조시대, 그리고 일제강점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청포도를 읽으며 저는 청포를 입고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의 환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시인이 그린 손님은 빼앗긴 곤고한 나라를 상징하겠지만, 저는 고달픈 몸으로 우리를 찾아 오신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고달픈 세상, 고달픈 손님들을 통해 부단히 수도원을 찾는 고달픈 주님이십니다. 베네딕도 규칙을 읽을 때마다 감동과 동시에 뉘우치는 참 아름다운 구절이 있습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장차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 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성규53,1)
수도원을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이 또 하나의 그리스도라는 놀라운 진리를 설파하는 성 베네딕도가 존경스럽습니다. 그러니 정주의 베네딕도 수도원은 환대의 집이며, 수도자들은 환대의 사람들입니다. 정주영성과 환대영성이 하나로 연결됨을 봅니다. 교회내에서 큰 가정 역할을 하는 것, 바로 이것이 베네딕도회의 자랑일 것입니다. 이에 근거한 제 사랑하는 좌우명시 한연이 생각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찬미받으소서.-
수도원 앞문은 세상에 늘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고, 뒷문은 늘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을 환대하는 삶, 얼마나 멋진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삶인지요!
환대전통은 예로부터 동서방이 일치합니다. 예전 어렸을 적 제법 산다는 집에는 손님맞이 사랑방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제 아파트 문화가 대세라 사라진 환대전통이 참 아쉽습니다. 옛 서방은 물론 중동에서도 환대전통은 계속되었고 교회의 전통이 되었으며, 정주의 베네딕도회가 그대로 수도영성에 담아낸 것입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믿음, 환대의 기쁨, 환대의 행복, 환대의 아름다움...환대 예찬에는 끝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도 환대라는 렌즈를 통해 보면 그 내용이 확연히 이해됩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 선행하는 사람을 찾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찾아오셨기에 하느님 찾기가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만 강조하다가 사람을 찾는 하느님을 잊어 버리면 안됩니다. 더불어 짧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나무에게 가도가도 하늘은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짧지만 엄청난 지혜를 함축한 시입니다. 하느님을 찾기전 이미 와 계신 하느님안에 머무는 관상을, 텅빈 충만의 행복을 누려보자는 것입니다. 이래서 향심기도를 비롯한 온갖 묵상기도의 수행입니다. 부단히 끊임없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오늘 제1독서 아브라함의 지극정성의 환대가 감동적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고달픈 몸으로 찾아온 손님들을 환대했는데 놀랍게도 하느님과 그 일행이었습니다. 제1독서 전반부가 아브라함의 손님환대하는 모습이 그림처럼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의 환대에 감격한 하느님 일행은 아브라함의 늙은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 축복하셨으니 환대의 축복입니다. 이어 사라는 못미더워 속으로 웃었고 전개되는 주님과 다툼이 참 유머러스합니다.
‘사라가 두려운 나머지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하면서 부인하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저는 이를 하느님의 유머라 부르고 싶습니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의 결정적 표현이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친히 병자를 방문하시어 치유하시는 모습들로 가득합니다. 어제는 나병환자, 오늘은 백인대장의 병든 종, 베드로의 장모, 많은 병자들 치유하노라 온힘을 다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우리를 치유해 주시고자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방문하십니다.
오늘 백인대장의 주님을 맞이하는 겸손한 믿음, 환대의 믿음이 놀랍습니다. 주님 환대의 정신으로 충일한 참 단순하고 순수한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에 감탄하신 주님의 고백에 이어 주님은 그에게 하늘 나라의 축복을 약속하시며 종의 치유를 선언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도 이런 믿음을 본적이 없다....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주님을 감동, 감탄시켜 종의 치유를 가져온 백인대장의 순수한 믿음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온마음을 활짝 열어 주님을 환대하면서 백인대장처럼 겸손한 믿음을 고백하면서 주님의 성체를 모시도록 합시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아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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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1.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신앙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그것이 다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절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늘나라를 차지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그 이름이 하늘나라 입성의 보증수표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전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신부님 저는 늘 십일조를 봉헌합니다. 꼭 십분의 일을 봉헌합니다.
저는 처음에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지 않다기보다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자신은 그렇게 한다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들 학교, 학원 보내고, 생활도 해야 하고 여러 가지 돈 들어갈 곳이 많은데 그런데도 십일조를 정확히 하신다니 대단하시네요.
그랬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쓸 거 다 쓰고 남은 것 중에서 십일조를 봉헌합니다. 십일조는 그렇게 봉헌하는 것이 아닌가요?
참으로 씁쓸했습니다. 많은 분이 그러하기에 비판하기도 씁쓸했습니다. 차라리 말하지 말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믿음은 우리를 먼저 챙긴 후 우리의 주님께 봉헌되고 있었으니까요.
남은 것을 믿음을 보이는 우리를 주님은 어떻게 보고 계실까요? 동쪽과 서쪽에서 밀려오는 것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구엘공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구엘 공원
그곳에는 예쁘고 신기한 것들이 한가득입니다.
놀이 공원처럼
바이킹도 없고, 회전목마도 없짐만
그만큼 신나고
그만큼 스릴 있는 곳이며
그만큼 신비함 가득한 곳입니다.
그곳에 벤치가 있습니다.
구엘 공원에만 있는 벤치가 있습니다.
문득 갑곶성지 십자가 동산을 걷다가 구엘 공원의 벤치가 생각났습니다.
그렇게 편하고 그렇게 아늑하고 그렇게 신비로운 벤치가
여기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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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1.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청년이 “이제 졸업인데 과연 전공을 살려 일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라는 말을 합니다. 전공을 살려 일할 수 있다면야 쉽게 일을 배우고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어서 좋겠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잘하는 전공을 살려야 할까? 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저는 학창 시절에 이과 쪽이 제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수학이나 과학이 훨씬 재미있었고, 또 다른 과목에 비해 잘했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서 글을 쓰고 남 앞에 말하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했고 그래서 전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문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불평불만으로 가득했었습니다. 신부가 된 지 25년째의 삶을 사는 지금, 그래도 잘한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그토록 싫어했고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했던 글쓰기와 말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어느 책을 보니, ‘인생의 단계마다 나만의 특기를 발굴하라.’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적성에 맞지 않고 전공도 아닌 것이 나만의 특기도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늘 새로운 것을 행하며 그 안에서 즐거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모든 배움이 다 쓸모 있음을 깨닫습니다. 어떤 배움이든 나를 성장시키고 기쁘게 잘 살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걱정과 두려움은 뒤에 두고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만큼 이 세상 안에서 할 일은 많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포기하는 순간, 그만큼 내가 할 일도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우리에게 원하실까요? 이 세상 안에 사는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새로움을 간직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라며 도움을 청합니다. 종을 이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주인이 있을까요? 주인은 종을 위해서 무엇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종이 주인을 위해 무엇을 할 뿐입니다.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주인의 모습을 버리고, 오히려 종처럼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 직접 고쳐 주시겠다고 했을 때,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라면서 굳은 믿음을 표현합니다. 이 역시 로마의 백인대장이라는 지휘 아래에서 보기 힘든 모습입니다. 자기 지위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끌고 와서라도 기적을 행하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원하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갔던 것입니다. 한 명의 종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겸손하게 나아가는 모습. 이전까지의 자기 모습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었기에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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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한 마음으로 치밀한 계획도 없이, 먼저 벽돌부터 쌓는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발타자르 그라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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