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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출 2: 23-25
야곱의 가족 75명(행 7: 15)이 애굽으로 이주를 했는데 430년의 역사가 지나서는 약 2ㆍ3백만명의 숫자로 증가되었으며 이 때에 애굽의 바로 왕은 이렇게 이스라엘의 증가된 백성을 보고 두려웠습니다. 행여 전쟁이 일어나면 이스라엘의 이 노예들이 이적 행위를 하여 적군의 편이 되어 애굽백성들을 치고 도망 갈까봐서 말입니다. 그래서 더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역을 통해서 자손을 번성하지 못하도록 괴롭혔습니다.
1.이스라엘의 고역으로 탄식하며 부르짖는 소리가 있습니다.
모세의 출애굽 년대에 관한 학설 가운데 후기 년대 설에 의하면 그 동안 모세의 생명을 끈질기게 노리던 애굽 왕은 세도스 Ⅰ세이고 그는 이미 죽었고, 이제 새로운 왕 라암세스 Ⅱ세가 통치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역의 현장에서 하나님에게 부르짖으며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소리를 들으시고 역사에 개입하시었습니다.
민중이 부르짖었다는 소리! 속박과 고역으로부터 자유를 찾기 위해 부르짖은 정치적 구원의 호소였습니다. 정치적 자유를 찾아 울부짖은 소리는 성서 속에서도 수 없이 증거 되고 있습니다. 본문 외에 시편 142:6절에서 "나를 핍박하는 자에게서 건지소서 저희는 나보다 강하니이다." 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저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왕과 그의 신하로부터 당하는 고통의 소리를 모세는 외면했으나 하나님은 듣고 계셨다는 것을 성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왕도 지도자도 다 외면했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눈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외면한 그 부르짖음의 소리에 귀를 기우리고 계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의 소리에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시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가 70년만에 마치리라는 말씀을 발견하고 하나님에게 기도를 했습니다.
(단 9: 1-6)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書冊)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또 우리나라도 일제의 35년간의 고통과 압박에서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 독립군들이 일본 제국주의 군대와 싸우고 독립투사의 독립운동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항거와 주 앞에서 부르짖음이 하나님에게 상달되어서 오늘 날 이 독립과 해방을 쟁취했습니다. 우리나라 성결 교단도 일제 때 교단이 해산되는 큰 고난을 당했습니다.
43년 5월 전국 성결교회 일제 검속령이 내렸습니다. 이 때 강원도 철원교회의 박봉진 목사는 철원경찰서에 구속, 수감됩니다. 목사님은 유치장으로 들어가기 전 텍타이와 허리띠를 풀게 하고 좁쌀과 콩밥을 주는 색다른 환경에서 박 목사는 차디찬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습니다. 그러나 박 목사에게는 더 큰 고통과 형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형사 앞에 불려간 박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절한 이유를 하나님 이외에 참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고 하나님이 천황보다 더 높다고 여기냐고 묻는 질문에도 언제나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의 강직한 신앙은 왜놈들의 원하는 대답을 절대 허용치 않았습니다. 목사님을 때리는 소리가 마치 장작 패는 소리로 들렸다고 합니다. 그의 아들은 이렇게 그 당시의 상황을 증언합니다. "기절하면 다시 물을 끼얹어 깨우고 갖가지 방법으로 3개월간을 주야로 고문했지요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마른 볏집처럼 말랐지만 항복을 얻어내진 못했습니다. 일본천황에 충성하겠다고 자술서 한 장만 쓰면 풀려나올 수 있는 것을 아버님은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키신 거지요." 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수많은 순교자들의 울부짖음과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시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어려울 때 하나님에게 부르짖어 아뢰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고통과 탄식 가운데서 도움을 호소한 당신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고통소리와 신음소리가 마치 향이나 연기가 위로 피어오르듯 백성들의 부르짖음이 기도가 되어 위로 올라가 하나님께 닿았습니다.
다시 성서는 말씀합니다. 자유를 구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자유를 갖다 주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은 반대로 고통을 주셨습니다. 광야 40년의 고통 말입니다. 이 고통의 경험을 거치는 훈련을 통해서만 하나님은 가나안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자유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자유를 부르짖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왜 고통을 주셔야 했는가요?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고통을 아는 신앙 안에서만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성서는 말씀합니다. 영혼의 구원을 울부짖는 소리 앞에 하나님은 "영혼의 구원"을 하나의 완성품으로 선물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반대로 아기 예수로 주셨습니다. 로마의 학정 밑에 배고프고, 부자유했으며, 메말라가는 영혼의 절규를 부르짖는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 하루아침에 로마를 넘어뜨리고 새 왕국을 건설하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그 민족 앞에 하나님은 가장 무기력한 어린 아기 예수를 주셨습니다.
또 성서는 하갈의 부르짖음을 창 21: 14-19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창 21: 14-19)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가죽 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放聲大哭)하니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 부대(負袋)에 물을 채워 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이 말라 애타는 하갈과 이스마엘 앞에 "물"을 갖다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서의 하나님은 "하갈"의 눈을 밝게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눈"을 밝히셨다는 말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세계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눈"- 신앙관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물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하갈의 울부짖음에 하나님이 눈을 열어 준 것처럼
이렇게 수많은 순교자의 피의 호소와 핍박받는 성도의 눈물의 기도와 부르짖음이 하나님에게 상달되어, 하나님은 이 백성에게 독립을 통한 구원받을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이 부르짖을 때 구원받을 수 있는 소망의 빛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하나님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그 들은 바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실행 여부까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언약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던 일을 마침내 실행에 옮기기로 하셨습니다.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 즉 이미 650여년전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었고(창 15:13-16), 이삭과 야곱에게 재확인되고 비준된 약속의 땅 가나안에의 복귀 언약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비록 침묵 속에 계셨으나 이스라엘의 모든 한숨과 눈물과 상처를 일일이 기억하셨으며 곧 그들을 구원하실 계획을 세워놓은 것을 실현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때를 위하여 모세를 준비시켰습니다.
모세가 애굽 땅에서 애굽인을 살해하고 도피하던 당시의 나이가 40세였고(행 7:23-29). 모세가 바로 앞에 나아갔을 때가 80세였습니다(7:7).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약40년 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한 인생의 경로에서 40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지 않습니다. 더욱이 당시 모세가 삶의 지향점을 상실한 무료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40년 기간은 하나님의 연단 기간이었습니다. 즉 장차 선민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로서 육체적으로는 광야 생활 및 지리에 익숙토록 하고, 영적으로는 순종과 겸손 및 자아를 철저히 깨닫도록 한 하나님의 학교였습니다. 이렇게 고난과 훈련으로 준비된 모세를 부르시고 그 에게 사명과 능력을 주어 그 일을 감당하도록 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라고 하는 학교에서 가장 어려울 때 힘든 장소에서 하나님은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인물을 훈련하고 연단 시키어 사용하시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힘이 있었을 때는 좋은 환경에서가 아니라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은 인물을 양육하고 훈련시키어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키십니다.
알버트 까뮤는 "기독교가 가장 힘있던 때는 로마제국에 대항하던 초대교회였다" 고 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는 수가 많아서 힘있는 것이 아니고 그 신앙고백이 투철할 때가 가장 힘있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는 수는 많으나 과연 민족의 문제를 제대로 짊어지고 가고 있는가 한번 반성해 볼 일입니다. 3.1운동 당시에 기독교인은 불과 25만명 채 넘지 않았습니다. 아주 소수의 인구가 국가적 십자가를 의연하게 지고 갔습니다.
일제말기에 너무 혹독한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비록 신사참배에 굴복한 치욕이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한국교회는 이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민족문제를 늘 선교의 과제로 안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전통이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고난과 힘든 고역과 같은 삶 속에서 울부짖는 성도의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으시고 이 백성을 구원하시어 강대국의 힘을 빌리어 이 나라에 해방을 주시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 백성을 굽어살피신 하나님의 도웁는 은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부르짖는 기도와 신음(呻吟)소리를 들으시고 역사에 개입하시어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출 2: 23-25, 3: 7-10
오늘 아침 우리 성가대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감동적으로 불렀습니다. 제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가장 감명 깊게 들은 때와 장소는 1993년 2월 14일 주일 로마니아의 오라디아 침례교회에서였습니다. 로마니아인들의 음악적 수준도 높았지만 챠우세스크 공산 독재 치하에서 해방되어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된 200여명의 성가대원들이 감사와 감격에 사로잡혀서 온 몸으로 부른 찬양은 너무나도 깊고 웅장한 감동을 자아냈습니다. 저는 그들의 찬양에 눈물로 화답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설교를 했습니다.
“계 7: 13에 ‘큰 환난에서 나오는 흰 옷 입은 무리들’이 있는데 바로 여러분들이 큰 환난에서 나오는 흰 옷 입은 무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난과 환난의 길을 걷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로마니아 교회로 하여금 고난과 환난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날 한국교회로 하여금 고난과 환난의 길을 걷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난 40여년 동안 로마니아 교회로 하여금 고난과 환난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고난과 환난은 버림과 저주의 표시가 아니라 사랑과 은혜의 표시오 훈련의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쓸모없는 진흙 덩이를 가지고 쓸모 있는 질그릇을 만드시는데 하나님께서 로마니아 사람들을 쓸모 있는 질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40여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셨습니다. 아니 2000여년의 긴 세월이 걸렸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속에는 라틴 문화라는 고귀한 문화적 유산이 남아 있고 고난과 환난이라는 보배로운 십자가의 유산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는 할 일이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할 일을 맡겨주시고 있습니다. 로마니아를 살리고 동구와 서구를 살리고 세계를 살리는 일입니다. 바울처럼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고 이삭처럼 세계 곳곳에 우물을 파는 일입니다. 로마니아 교회는 서구교회의 자본주의와 세속주의를 결코 따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국교회가 범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인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도 따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북한의 복음화를 위해서 북한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로마니아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에 깊은 감동이 되 살아남을 느낍니다. 저는 그 후 두 번 오라디아 침례교회를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성가대가 저를 위해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부르곤 했고 그때마다 저는 눈물겨운 감동과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들이 너무너무 보고 싶습니다. 어제 비두 목사님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의 찬양과 설교의 일부를 그대로 여러분들에게 들려드리겠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감동적인 장면이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은 우리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통소리도 들으시고 조선 사람들의 고통 소리도 들으시고 로마니아 사람들의 고통 소리도 들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의 고통 소리도 들으셨고 야곱의 아내 레아의 괴로움도 권념하셨고 엘가나의 아내 한나의 고통 소리도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편은 이렇기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시118:5). 하나님은 우리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아침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는 주제로 17번 째 하는 설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권념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시고 그 소리를 들으시고 내려와서 그들을 건져내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아침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고통은 어떤 때는 우리의 죄 값으로 주어지고 어떤 때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는 방편으로 주어집니다. 고통이 죄 값으로 주어지는 때에도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는 방편이 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오래 전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13,14).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창22: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가서 바다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되었고 그리고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가 일어나서 크게 번성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학대하고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출1:8-11).
결국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의 학대에 못 이겨 하나님을 향해서 고통 소리를 내며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출2:23).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한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까운 원인으로는 바로의 악함 때문에 그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궁극적인 원인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섭리 때문에 고통을 당했습니다. 현실적인 원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정착하는 동안 애굽의 문화와 문명을 좋아하고 그들의 우상을 따른 죄 값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고통을 주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죄 값일 수도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이루는 방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고통을 당하지 않은 개인이나 민족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이룬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앗수르와 애굽에 노예로 잡혀가서 70여년 동안 고통을 당하게 하셨는데 바로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게 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고통은 저주로 끝 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축복으로 바뀌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들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119:71).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1:12). 강변의 새벽 성도들도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지난 일년 동안 저희 가족들을 슬픔과 아픔 중에 위로하시고 힘 주시면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금요일 새벽에 드린 감사입니다.
“고통의 순간들에 함께 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넘치는 생명력으로 끝없는 사랑으로 사랑의 나무가 자라게 하여주신 하나님 감사 드립니다.” 토요일 새벽에 드린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난과 고통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인류 구원의 사역을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통 중에 부르짖게 하셨습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출2:23). 부르짖으며 고통 소리를 내는 것은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부르짖을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은혜와 사랑입니다. 어린 아기가 울지 못하면 큰 일입니다. 병든 자가 아픔을 느끼지도 못하고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면 큰 일입니다.
부르짖음은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지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해서 부르짖으라고 분부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우리들을 향해서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고통 중에서 부르짖는 부르짖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사모함이 있고 자기를 향한 진정한 겸손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통 중에서 부르짖으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모하면서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리에서 부르짖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이성봉 목사님이 부흥 집회 때마다 읽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116:1,2). 박윤선 목사님이 자주 읽으시던 말씀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김치선 목사님이 항상 읽으시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해서 고통 중에서 고통 소리를 내면서 부르짖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소리도 들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출6:5).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찌라”(출22:23).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출22:27).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시81:7). 하나님은 하나님의 분부를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가던 요나의 부르짖음도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2:1,2).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통곡하며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우리들을 향하여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우리들의 부르짖는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 보이시는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반드시 하여야 할 최소한의 책임과 의무는 고통 소리를 내면서 부르짖는 일입니다. 부르짖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부르짖을 수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부르짖을 수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 소리를 듣고 내려와서 저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려 하노라”(출3:7,8).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 소리를 들으셨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너게 하셨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 가장 뚜렷한 사건은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로 구름으로 바람으로 소리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까이 내려오셨습니다. 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직접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성육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요 1: 14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라는 사실을 누누이 지적하셨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8,39).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6:51). 하나님은 “하늘 영광 떠나서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이십니다. 우리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였고 우리들을 구원의 도구들로 삼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과 시내산 사건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성육의 사건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고 우리들을 구원의 도구들로 삼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역사는 반복되고 계속되면서 발전합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인류 역사의 모형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히브리 노예들의 고통의 역사도 반복되고 그들의 부르짖음도 반복되고 출애굽의 구원의 역사도 반복됩니다. 그러면서 인류의 역사는 천국의 완성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들이나 우리 민족이나 세계에 고난과 고통을 주십니다. 우리들이 모두 이 세상이 낙관적으로 발전하기를 소망하지만 이 세상은 그렇게 낙관적으로 발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가 이를수록 큰 환난이 더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마25:21). 사도 바울은 마지막 때가 이를수록 고통하는 때가 임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딤후3:1).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큰 환난과 고통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보다 순수하게 만들고 우리들을 보다 겸손하게 만들고 우리들로 하여금 보다 간절하게 주님을 사모하게 만들고 그리고 우리들을 구원의 도구들로 만드는 훈련의 방편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여야 할 것은 우리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고통 소리를 내면서 부르짖을 것 뿐입니다.
소경이 고통 중에서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부르짖은 것처럼 우리들도 부르짖으면 됩니다.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9:27).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고통 중에서 예수님께 부르짖은 것처럼 우리들도 부르짖으면 됩니다. “한 사람이 소리 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나이다”(눅9:38).
우리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에게로 내려와서 우리를 고통에서 건지시고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 보이시는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제가 고통 중에 있던 저의 아들 철원이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 보였던 것과 비슷하다고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바라보아야 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은 이스라엘 나라의 땅도 아니고 북미 대륙의 미국 땅도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바라보아야 할 땅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의 그림자인 벧엘 곧 하나님의 집입니다.
고통 중에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신음 중에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주님을 바라보시면서 고통 소리와 신음 소리를 내시기 바랍니다. 송명희 시인도 이중표 목사님도 아니 사도 바울도 육체의 고통 중에서 주님을 향해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소유하고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천국을 소유하시고 천국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뜰과 주의 집에 거하는 즐거움과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65:4).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