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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욥기 23:1-17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hcRuMc-OmLc&t=37s
사람은 누구나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고난이 있습니다. 욥에게는 엄청난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돈보다 더 귀한 자식 열 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식 앞세운 아픔을 한자로 참척(慘慽)이라고 합니다. 참혹한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참척의 고통을 겪은 부모 가슴의 상처에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딱지가 앉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욥은 하루아침에 열 명이나 되는 자식을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거기다가 몸은 병이 들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욥 7:5에 보면 욥은 자신의 몸의 상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온 몸에 구더기가 가득했고, 딱지가 의복처럼 입혀졌는데 속은 곪아서 터졌습니다. 몸이 너무나 가려운데 손으로 긁어서는 시원치 않아 질그릇 조작으로 긁었습니다. 고통이 너무나 심해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아내는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저주했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한다는 소식을 들은 욥의 친구들이 욥을 방문했는데, 욥의 사정을 보고는 너무나 기가 막혀서 7일 동안이나 아무 말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받아도 그 고난의 의미를 안다면 그리고 고난 중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안다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난 보다 더 큰 절망은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모두가 나를 떠나고, 모두가 나를 비난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극심한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찾았지만 만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매보다 더 아픈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8,9절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어디를 봐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만나려고 몸부림쳤지만 고아처럼 버려진 느낌이었습니다.
욥기 23장은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욥이 어떻게 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경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은 믿는데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내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시험의 수렁에서 헤매다가 인생이 끝날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욥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해답을 보겠습니다.
1. 간절히 하나님을 찾으라(3-5절).
3-5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4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5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욥은 고난을 당하면서 고난의 이유를 몰랐습니다. 욥은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 정도 되면 보통 사람 같으면 “하나님은 안 계신다! 지금까지 내가 믿었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라고 말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불신앙으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 하나님은 반드시 나에게 응답하실 것이다.”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융해점 혹은 융점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잘 들어보지 못한 용어입니다. 융점은 물질이 고체에서 액체로 변화되는 온도를 말합니다. 얼음은 0℃가 되면 녹습니다. 철은 1,538℃가 되면 녹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질 중에 융점이 점이 가장 높은 물질은 탄소입니다. 탄소는 3642℃가 되어야 녹습니다. 사람마다 고난의 융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처럼 고난의 낮은 온도에서 시험이 들어 신앙을 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철과 같이 고온의 시험이 오면 신앙을 포기합니다. 욥은 탄소 정도의 융점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엄청난 시험이 찾아왔지만 신앙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만했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고 하며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해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욥이 가진 믿음대로 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시험의 원인도 알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졌고, 시험을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의 해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이 닥칠 때 해결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키질을 하면 알곡은 안으로 모여들고 쭉정이는 밖으로 나갑니다. 신앙적으로 내가 알곡인가 쭉정이인가는 신앙의 키질을 당할 때 알 수 있습니다. 쭉정이는 시험이 오면 주님을 떠나고 알곡은 오히려 주님을 찾습니다.
어느 농장에 허리케인(Hurricane)이 불어 닥쳤습니다. 집과 농작물, 가축들까지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농부는 절망하여 주저앉았습니다. 그때 무너진 닭장 속에서 벼슬이 찢기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수탉 한 마리가 비틀거리며 나왔습니다. 수탉은 날개를 퍼덕이며 무너지지 않은 담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햇살을 바라보며 목청껏 외쳤습니다. “꼬끼오” 이 모습을 보던 농부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 다시 일어나자. 나도 하늘을 향해 울고 있는 저 수탉처럼 다시 일어나자” 잿더미 속에서 수탉이 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본성 때문이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도 고난이 오면 하나님을 찾는 본성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을 찾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복을 경험해야 합니다.
2. 기도 응답을 확신하라(6절).
욥은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욥 19:7입니다. “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 없구나” 욥은 폭행을 당하는 것과 같은 고난 중에 부르짖었으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했으나 정의가 없었습니다. 정의가 없다는 말은 욥 편에서 볼 때 자기가 받는 재앙이 지나쳤다는 것입니다. 욥은 기도했으나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의 기도응답을 확신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욥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으신다고 고백했습니다.
레이몬드 에드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빛 가운데서 하신 말씀에 대해 어둠 속에서 의심하지 말라!” 우리의 상황이 곤고하고 어렵다고 해서 하나님을 이상하게 보지 말라는 말입니다.
상황 때문에 하나님이 멀게 느껴질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내가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심판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나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났고 그는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절망의 상황이었습니다. 그 절망에서 벗어날 길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절망에 처했다할지라도 물고기 뱃속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3. 순금이 되는 소망을 가지라(10절).
10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단련하시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순금처럼 만드시기 위하여 단련하신 것입니다. 욥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시 119:71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자기에게 유익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으로 다윗을 성장시키셨습니다.
매달 한 번씩 저희 교회 실버예배에 오시는 이환목사님 지인 이야기입니다. 그의 형은 성수대교 붕괴 당시 죽은 소방관입니다. 형의 두 자녀는 한 명은 세월호 사고 때 죽었고, 다른 한 명은 이태원 사고 때 죽었습니다. 그 형제는 네 가지 암을 가지고 있는데 10년째 투병 중이고, 투병 중에 두 다리가 잘렸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그 형제는 예수님을 만났고 병실에서도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형제가 있는 병동에 간호사가 10명인데 그 중에 4명이 그 형제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 형제가 체온이 44도까지 올라갔습니다. 그 정도면 죽어야 하는데 놀랍게 살아났습니다. 형제가 혼수상태에서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형님과 조카 둘이 돌아가라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 형제에게 고난이 유익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것 같지만 고난을 통해서 영적인 유익을 얻은 것입니다. 그 형제가 비록 몸은 병들었지만 주님을 만난 후 너무나 긍정적으로 병실생활을 하기에 간호사들이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이라고 한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나 비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육체를 옷처럼 주셨기 때문에, 부활 시에 새 옷으로 갈아입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영혼인데, 그 형제는 고난 중에 죽었던 영혼이 살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고,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몇 가지 유익을 얻었습니다.
①자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 의가 가득했던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난 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을 알게 되었고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②귀로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지식으로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진짜입니다. 이론으로 아무리 많이 알아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종이호랑이와 같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그림의 떡과 같습니다. 아무런 유익도 되지 않습니다. 요즘은 종이호랑이 신앙이 많습니다. 그림의 떡 신앙이 많아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는데 들은풍월은 있어서 아는 것은 많지만 하나님과는 단절 되어 있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③진정한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욥 42:6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지금까지 자기의 언행심사가 얼마나 잘못 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말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였습니다.
신앙생활에서 회개와 죄의 자백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교통이 회개로 시작되고,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도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통해서 일어난 기적의 간증 하나 하겠습니다. 어느 병이 깊게 든 환자가 있었습니다. 좋다는 약은 다 먹어 보았고, 용하다는 의사는 다 만나 보았습니다. 그러나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는 숨을 거둘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이 심방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지금 용서하지 못 하고 미워하고 있는 이가 있나요? 미움을 가지고 죽으면 안 됩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살려 주실 지도 모릅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자기가 미워하며 용서해 주어야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용서하여 주어야 할 사람을 가르쳐 주옵소서.” 그는 한 주간동안 이 기도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러자 자기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 약 500명의 이름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미워하고 상처를 주고 용서하여 주지 못했음을 깨닫고 눈물을 흘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용서하며 눈물로 기도해주고 전화해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마음에 평안이 찾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회개를 통한 능력입니다.
④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욥이 고난 받기 전에 그의 양이 7천 마리, 낙타가 3천 마리, 소가 천 마리요. 나귀는 5백 마리였으며 부리는 종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통과하고 난 후에 욥의 재산은 배가 되었습니다. 욥기 42:12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딱 두 배입니다. 자녀들은 죽었지만 그들의 신앙으로 볼 때는 천국에 갔을 것이고 전과 동일하게 또 10명의 자녀를 얻었습니다.
장경동목사님은 욥의 일생을 3단계로 구분해서 설명했습니다. 1단계는 고난 당하기전에 축복 속에 부족함이 없이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2단계 고난 속에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3단계 고난을 이기고 갑절의 축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 3단계의 삶을 하나님은 동시에 다 보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걸 한 번에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잘 나갈 때는 자기가 굉장한 줄 알고 교만합니다. 고난 속에서 헤맬 때는 금방 죽을 것 같고 고난이 안 끝날 것 같습니다. 다시 축복해 주시면 언제 그랬느냐 하는 듯이 살아갑니다. 우리들도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통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 합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네 가지 유익을 얻었습니다. 그 유익 중에 세 가지는 영적인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고난을 통해서 순금이 되게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고난 중에 있고, 절망 중에 있어도 순금이 되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시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의 길을 걸으라(11-14절).
11,12절을 보겠습니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욥은 고난 중에도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갔습니다. 말씀에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의 음식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착시현상을 아시죠! 시각적 정보가 뇌에 의하여 잘못 처리되어, 실제와 다른 방식으로 인식 되는 현상입니다.
그림 하나를 보시죠. 이 그림의 중간 부근에 빨간 굽은 선 두 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선은 정확하게 일직선입니다. 착시현상입니다. 인간의 눈의 한계입니다. 착각도 있습니다. 착각은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실제와 다르게 느끼거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은 얼마든지 잘못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판단은 어떤 때는 기가 막히게 정확하지만 많은 경우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판단은 삶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잠 14:12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분명히 바른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 길이 사망의 길입니다.
똑똑한 레지던트 둘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유능한지 병원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유능한 의사들은 사람을 조금만 보면, 어디가 아픈지 압니다. 하루는 한 환자가 다리와 허리를 구부린 채로 걸어옵니다. 얼굴은 샛노랗고, 땀을 뻘뻘 흘리며, 얼마나 힘들게 걷고 있는지, 그것을 본 레지던트 둘이 이야기를 합니다. “저분은 분명 류마티즘 관절염이야!”, “아니! 분명히 허리 디스크야!” 두 사람은 그 환자에게 물었습니다. “어디가 아프세요?” 그 사람의 대답이 기가 막힙니다. “화장실이 어딥니까?”
여러분! 사람은 내 생각, 내 판단을 의심해봐야 합니다. 내 눈이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는 영적인 세계는 당연히 볼 수 없고 보이는 세계도 다 볼 수 없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지극히 일부이고 볼 수 없는 곳이 더 많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의 판단은 잘못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시각적인 것도 이런데, 우리가 영적인 면, 정신적인 면, 복잡한 인간관계, 실타래처럼 얽힌 사회생활의 이면에 숨은 것들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가장 좋은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판단 미스를 범해왔습니까!
시 119:105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등이요 빛이라는 의미는 어두운 밤길을 밝혀주는 후레쉬나 가로등과 같다는 말입니다. 밤길에 후레쉬나 가로등은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막아주고, 가파른 언덕에서 구르는 것을 방지해 주고, 위험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데, 인생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처럼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말씀에서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정하게 식사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 날이 없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믿음 때문입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구약학을 가르치셨던 잭 윌슨 박사님에게 몇 명의 학생들이 말했습니다. “박사님, 성경의 이러이러한 말씀은 우리가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수님과 토론하러 왔습니다.”, “그래요. 학생들은 성경을 몇 번이나 읽었나요?”, “한 번도 못 읽었습니다.”, “이 사람들아, 나는 40년을 밤낮으로 성경을 수백 번 읽었지만 그 안에 의심되는 것이 하나도 없이 다 믿어지네. 그런데 자네들은 성경에 대해 토론하자면서 성경을 한 번도 읽지 않고는 믿어지느니 안 믿어지느니 한단 말인가? 가서 한 번이라도 읽은 다음에 다시 와서 토론하세.” 그 학생들이 다시는 오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성경을 읽으면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믿음으로 인하여 올바른 판단력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조율해야 합니다. 13,14절을 읽겠습니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작정하신 일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일부는 우리를 향하신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일정하십니다. 기분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바뀌지 않습니다. 반면에 사람은 변합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의 심정은 늘 변하기 마련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입대 후에는 훈련소에서 보낸 아들의 사복을 받고 밤새 울던 어머니가 일병 때는 “휴가 나와서 쓴 네 용돈 때문에 가계부 정리가 안 된다. 너무 자주 나오지 마라.”고 한답니다. 상병 때는 “아들아! 전화는 이제 그만해라. 그렇게 할 일이 없니?”라고 한답니다. 병장 때는 “아들아! 가져간 돈 다 갚든지 아니면 말뚝 박아라.”라고 한다네요. 과장이 섞였지만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사람의 마음과 뜻은 그렇게 쉽게 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변함없이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을 하십니다. 욥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욥은 자기를 향하여 작정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리라 믿었습니다. 어떤 존재도 하나님의 작정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내게 맞추시라고 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이 작정하신 대로 변해야 합니다.
악기 튜닝기는 정확한 음을 제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기를 튜닝할 때 튜닝기를 기준으로 악기의 음을 조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튜닝기처럼 우리 인생의 정확한 기준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인생의 튜닝기인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절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에게 맞게 조정하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시도를 하며 살아갑니다.
워싱턴 D.C.에 있는 성경박물관에는 많은 성경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1,800년대 영국의 선교사들이 노예를 개종하고 교육시키는데 사용했던 노예 성경이 있습니다. 그 성경에는 노예들의 반란이나 해방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든 성경 구절을 없앴습니다. 구약의 90%가 사라지고 신약의 50%가 빠져 있습니다. 노예 성경에는 성경 1,189장 중에 232장만 남아 있습니다. 노예 제도를 공고화하기 위하여 삭제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8 같은 경우는 매우 위험하다고 여겨져서 제일 먼저 뺐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어처구니없습니다. 성경을 상황에 맞게 변개한 것입니다. 미국 켈리포니아에서는 동성애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성경에서 동성애의 잘못을 지적하는 내용을 제거하는 작업이 시작 되었답니다. 중국에서는 공산주의에 맞게 성경을 변개하고 있답니다. 성경은 진리입니다. 진리란 어느 시대, 어느 장소, 어떤 사람에게나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상황에 맞게 성경을 변개 시켜서는 안 되고 인간의 삶이 성경에 맞게 변해야 합니다.
성경은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고난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평상시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 양심을 통해 소곤소곤 하시지만 사람들을 깨닫게 할 때에는 고난을 통해 폭풍우처럼 말씀하신다.” 우리는 고난 중에 폭풍우처럼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하고 성경을 통해서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으로 내면의 소리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음성을 기준으로 나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5. 하나님을 두려워하라(15-17절).
15-1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 16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 17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 욥은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고난이라는 방법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마음을 약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욥을 두렵게 하셨습니다. 욥이 두려워했던 것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자신의 작정을 이루신다는 사실과 지금 자신이 극심한 고난 중에 있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두려움도 사용하십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법조인의 길을 가려다가 수도사의 길로 들어선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비오는 날 길을 가다가 벼락이 내리쳤는데, 루터와 함께 길을 가던 친구가 벼락에 맞아 숨졌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성직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을 사용해서 루터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 후에 그는 성경을 통해서 그 당시 교회의 가르침이 잘못 되었고, 바른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종교개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파스칼(Pascal)은 물리학의 여러 법칙을 발견한 과학자요 수학자인데, 그는 위대한 신앙 체험을 한 그리스도인이요 신학자이었습니다. 그의 저서 팡세는 기독교의 고전입니다. 파스칼이 신령한 은혜를 받고, 영적 세계에 눈을 뜨게 된 까닭은 육체의 고난을 통해서였습니다. 어느 날 말을 타고 다리를 건너다 말이 놀라 펄쩍 뛰는 바람에 다리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온 몸이 상하고 죽을 뻔했습니다. 수개월 동안 누워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병석에서 치료받는 동안 경건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친구의 감화를 받아 성경을 읽고 명상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당신은 내게 당신을 섬기라고 건강을 주셨건만 나는 그것을 세상을 위해서 전부 다 써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은 나를 일깨워 주시려고 나에게 육신의 고통을 주셨습니다.” 파스칼에게는 고난이 유익이 된 것입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고난이 유익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욥이 극심한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욥기 23장은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욥이 어떻게 했는가를 말씀합니다. 우리도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할 때 욥과 같은 반응을 해야 할 것입니다.
1. 간절히 하나님을 찾으라.
2. 기도 응답을 확신하라.
3. 순금이 되는 소망을 가지라.
4. 하나님에 말씀의 길을 걸으라.
5. 하나님을 두려워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