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레데릭 오자남
재속프란치스코 회원,빈첸시오회 창설자,1997년시복,2005년 시성.
앙토안느-프레드릭 오자남 (Antonie-Fredric Ozanam)은 1813년 4월 23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리용 출신인 그의 부모님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임시로 밀라노에서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신앙심이 깊은 오자남의 가족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가르쳐 주었고
사회적 불의와 무거운 고통의 짐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도록 교육하였다.
오자남은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영민하고 통찰력이 깊은 그는 흔히 철학 초보자들이 겪는 일종의 불신과 회의론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탁월한 철학자로 명성을 떨치던 노아로 신부 (Father Noirot)를 만나게 되고, 그의 도움으로 회의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노아로 신부는 오자남의 가톨릭 신앙을 확고히 다져 준 분이었다.
지식과 성덕을 겸비한 성인 사제 노아로 신부를 ’영혼의 탁월한 교육자’라고 불렀다. 이렇게 청년기의 위기를 벗어난 오자남은 열린 정신의 신앙인으로 성숙해 갔다. 그의 신앙은 진리의 원천에서 물을 마실 수 없는 불안한 영혼들을 도와주고 싶은 불타는 열정으로 나타났다. 오자남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도와주는 일을 자신의 삶의 목표로 정했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이 목표에 충실하였다.
(성빈첸시오 아 바로로회홈에서)
Ozanam, Antoine Frederic(1813∼1853). 프랑스의 문학사가, 철학자.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창립자의 한 사람.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나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별세하였다. 프랑스 리용에서 소년시절을 보내고, 파리에서 법률을 공부하면서 1833년 평신도의 빈민구제단체인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창립에 주동역할을 하였다.
1836년 법학박사학위를 취득, 리용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으나, 1839년부터 1년간 리용대학 상법교수로 있었다.
한편, 1841년 파리대학 비교문학교수, 1844년 정교수로 승진하였다. 1848년 가톨릭 사회주의의 이상을 발표하기 위해 라코르데르(D. Lacordaire), 마레(Maret)와 함께 잡지 <신세대>(L’Ere Nouvelle)를 창간하였다.
이어서 프랑스 국내,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등을 여행한 후 1852년 신병으로 파리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으로 전지요양했으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귀국 도중 마르세이유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위대한 가톨릭 신자로서 신앙과 덕성(德性)이 가득 넘쳐 있었고, 그의 종교적 저술로써 한층 더 애호를 받았으며, 웅변가로서도 인심을 사로잡았다. 프랑스인들에게 단테, 프란치스코의 시(時)를 소개하고 중세 초기의 문명에 대해서도 광명을 던졌다.
대표적 저술로는 ≪제5세기 문명사≫(Histoire de la civilisation au Ve siecle Etudes, germaniques, 2권, 1847∼1849)가 있고, 또한 전집 ≪Oeuvres completes≫(8권, 1855)이 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1923년 그의 시복(諡福)조사에 착수한 바 있다.
(가톨릭대사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