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 서전서숙의 설립은 중국조선족 근대교육의 시작을 알리는 중대한 사건이며 서전서숙은 조선족 이주 교육의 주요한 대표자이다. 서전서숙은 조선의 애국반일지사들이 광복을 꿈꾸며 후대 양성과 독립무장투쟁의 해외기지를 마련하려는 치밀한 계획 하에 실시되었다. 을사보호조약을 막기 위하여 이회영은 이상설 등과 상의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면서 조약의 체결을 막으려 했으나 결국 올 것은 오고 말았다. 이회영은 이상재와 협의하여 학생과 군중을 종로거리에 모으고 나라를 잃게 된 슬픔과 원한을 국민에게 호소하여 온 국민이 모두 분기할 것을 촉구하였다. 또 자신의 가산을 내다 팔아서 활동자금을 마련하고 사람을 놓아 나인영, 기산도 등 여러 사람과 연락을 취하며 이완용 등 을사오적의 암살을 꾀하였다. 그러나 의도한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우당 이회영 약전>(을유문화사, 1985)은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의 방향을 바꿀 것과 만주를 새로운 운동기지로 정하는 준비과정을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1906년 초 여름이 되자 선생은 이동녕, 여준, 장유순, 유완무 등 여러 지사들이 모여 각 방면의 동향을 살피어 앞으로의 운동추진방향을 논의하고 모색하였다. 그 결론은, 당시의 정세를 볼 때 국내에서는 큰 규모의 운동을 전재할 수 없으니 만주에다 토대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 선생과 여러 동지들은 운동원의 훈련, 교육과 계획, 준비 등을 위해서 활동의 근거지를 만주에 두기로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만주의 어느 곳을 선택할 것인가에 관하여 논의한 끝에 본국과의 거리, 우리 교포의 숫자와 정착상황, 그리고 러시아와의 거리 등을 참작하여 룽징촌龍井村에 근거를 잡기로 결정하였다. ... 지도자의 위치에 서서, 경험, 지식, 포부, 도량을 갖추고 외국 땅에까지 나가 대내외적으로 권위를 세우며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적임자는 바로 이상설이라는 선생의 주장에 대하여 함께 자리한 모든 지시들은 아무런 이의가 없었으며, 이상설 스스로도 수궁하여 동의하였다.이상설은 인천에서 중국 상선을 타고 상하이로 갔다가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 그해(1906) 8월경에 용정촌에 도착하였다. 또, 용정에서 제일 큰집인 천주교 교인 최병익의 집을 사서 학교를 만들고 서전서숙을 개숙하여 그 지방 교포의 자녀를 교육하면서 지방 유지들과 사귀면서 동지를 얻는데 주력하였다. 때는 1906년 10월경이었다. 학교를 세우기 위해 소요된 자금은 이동녕 3000원, 이상설 5000원, 정순만, 황공달 각기 500원, 김우용 300원, 홍창섭 100원을 냈다. 어렵게 만들어진 이 돈은 학교운용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숙장은 이상설이 맡고 학교운영은 이동녕과 정순만이 책임졌다. 교원의 월급에서 학생들의 지필묵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비는 이상설이 전담하는 무상교육이었다. 인근 지역에서 한인 청소년 22명을 모아 시작하였고 후에는 학생수가 70명에 이르렀다. 김약연은 문하 학생 10명을 보내왔다. 학생에겐 수업료가 면제되고 침식까지 무상이었다. 교과내용은 산술 역사 지리 헌법 국제공법 등의 신학문이었고 이상설이 산술신서 상하권으로 수학을 가르쳤고 늦여름에 도착한 여준이 한문 정치 법학 경제 등을 강의하였으며 황달영이 역사 지리 정치를 강의했고 김우용이 산술을 가르쳤다.서전서숙은 학생들의 연령과 수학 능력에 따라 최초에는 고등반인 갑반과 초등반인 을반으로, 갑반에는 20세 전후의 청년학생들도 배웠다. 후에는 갑, 을 , 병반으로 나누었다. 갑반에는 20명, 을반에는 20명, 병반에는 34명의 학생이 있었다. 이상설을 비롯하여 서숙창설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교단서 가르쳤으며 역사. 지리, 수학, 국제공법, 헌법 등 근대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상설은 ‘산술신서‘을 상, 하권으로 나누어 저술하여 가르쳤고 황달영黃達永은 역사와 지리, 김우용金禹鏞은 산술, 여준呂準은 한문, 정치학, 법학 , 이동녕도 역사과목을 가르쳤다. 교육의 중점은 신학문과 함께 실시한 철두철미한 항일민족주의 교육이었다. 이러한 반일의식은 서전서숙 교가에서도 엿볼 수 있다.
不咸山이 높이 있고/ 頭滿江이 둘렀는데
瑞甸書塾 創立하니/ 聰俊才子 雲集이라
人一已百 工夫하니/ 救國安民하여 보세
동척에서 발행한 <간도사정>은 당시 상인으로 가장한 일본밀탐이 서전서숙에 들렀다가 냉대를 받은 일화를 적고 있다. 당시 통감부는 한국정부와 협동하여 간도조선인보호책을 내정하고 1907년 봄에 육군중좌 사이또와 사무관 등을 파견, 밀행케 하여 간도파출소의 예정지 및 기타의 상황을 조사케 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일행은 용정촌에 도착하여 서전서숙의 주무자(主务者)를 방문 하였을 때 마침 이상설은 산보를 하려고 문을 나서려하다가 이자들의 내의를 묻게 하였는데 일행은 상업관찰 도중에 들렸다 하고 때는 정심시간이었으므로 지니고 온 도시락을 먹기 위해 온수와 식기를 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동교위원들은 빌려줄 수 없다하여 냉냉히 이를 거절하고 이상설의 경우는 일언반구의 질문도 없이 출타하였기 때문에 일행은 할 수 없이 강변에 가서 강물로 목을 축여가며 식사를 끝냈다. 당시 이들의 일본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오만하였는가 알 수 있는 일이다. 1907년 5월, 이상설이 헤그밀사로 떠났다. 비밀지령을 지니고 떠났기에 훈춘에 학교를 하나 더 세우러 간다고 말하고 떠난 것이다. 그 뒤 숙장에 여조현이 추대되었다. 이상설이 떠난 약 한달 뒤에 이동녕과 이상설의 아우 이상익李相益만이 돌아왔다. 이상설이 없음으로 재정난은 막심했고 더욱이 그해 8월 용정촌에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가 세워지고 일제의 통제, 유인과 탄압으로 8월에 서숙은 부득이 스스로 문을 닫았다. 서전서숙의 교직원들은 일부 학생을 거느리고 훈춘 탑두구 부근으로 옮겨가서 서전서숙을 회복하고 학생을 더 모집하여 1년간의 수업을 거쳐 3개 반 학생 74명을 졸업시키고 해산하였다.서전서숙의 정신을 이어 간도에는 김약연의 명동서숙을 비롯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서숙, 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일떠섰고 이는 향후 반일무장투쟁의 사상과 인적, 물질적 기초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