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99
2월12일[연중 제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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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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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ulRw14sWiQ (이동익 레미지오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8644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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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생각을 조용히 하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무리한 요구를 우리에게 하고 계신다는 느낌입니다.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오 복음 5장 22절)
예수님의 말씀 앞에 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까운 이웃들에게 알게 모르게 바보! 멍청이라고 외친 적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렇다면 내 미래는 불붙는 지옥?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시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남기신 말씀, 어떤 때는 글자 그대로 수용하고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에 적용시킬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말씀은 그 말씀의 진의(眞意), 다시 말해서 참된 뜻, 더 보편적인 의미를 찾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문자 그대로 적용하지 말아야 할 말씀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붙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말씀은 가까운 이웃을 쉽게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우리들을 향한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 말씀 정도로 받아들이면 무난할 것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평소에는 성인군자 같은데, 한번 ‘욱’하는 마음의 불길이 솟구치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심호흡과 더불어 단 1분만 마음을 가다듬었어도 될 일인데, 그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평소에 따놓은 점수, 그 한 번에 다 까먹습니다. 내가 많이 오버했구나, 하는 생각에 평상심에로 돌아가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따라서 하루에도 몇 번씩 자주 마음을 다스릴 일입니다. 특히 화가 솟구치는 순간, 그 감정을 긍정적으로 표출할 줄 아는 자기만의 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이 쉼 없이 흔들려 안정이 되지 않을 때, 폭파 직전에 한 영성가의 말을 귀 담아 들을 일입니다.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생각을 조용히 하십시오.”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충격에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야말로 성덕에 도달하는 지름길임이 분명합니다. 다음의 일화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두 승려가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바라보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한 사람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우겼고, 다른 사람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선사가 말했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오. 다만 당신들의 마음일 뿐이오’”
분노의 원인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 내면의 불안정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 내면이 평화롭고, 고요하며, 안정되어 있다면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억압이나 무시, 소외 앞에서도 자유로울 가능성이 있습니다.
쉽게 화가 나고, 또 자주 우울해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욕심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욕심을 버리고, 기대로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비웠다는 마음조차 한번 비워보십시오. 뜻밖의 평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찾아올 것입니다.
올라서려고만 발버둥 치지 말고 가장 밑바닥까지 한번 내려가 보십시오. 가장 미천한 일은 언제나 내 몫이려니 마음먹어보십시오. 마음이 홀가분해질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사람은 자기가 마음먹은 만큼만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큰 욕심을 버리고, 지나친 기대도 버리고 아주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기 시작하면, 의외로 삶이 편안해지기 시작합니다.
화는 상대방에게 발산하지만 머지않아 그 화는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와 또 다른 상처를 입힙니다. 화를 내는 자신을 괴롭힙니다. 고통이 지속됩니다.
결국 ‘마음 바꾸기’ 작업이 필요합니다. 왜 하루 종일 내 안에 ‘참 나’가 살지 못하고 그 몹쓸 ‘인간’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까? 자기 내면의 주인공, 내 감정의 주체는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설 수 있도록 언제나 지지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분노의 표출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면 끝도 없는 고통과 상처만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무거울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기도 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겠습니까? 인간관계가 제대로 형성되겠습니까? 건강이나 제대로 챙기겠습니까? 그 상태에 머무는 순간은 결국 불붙는 지옥에서 고생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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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ivE2QWOX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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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려 하면 더 할 수 없게 되는 것, 사랑!>
사랑은 모든 분야에 있어 영원불멸하는 주제입니다. 그만큼 파도 파도 새롭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을 알면 다 아는 것이기에 우리는 영원히 사랑을 배우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면 어떨까요? 내가 스스로 신이 되려는 것과 같이 됩니다.
영화 ‘헤어질 결심’(2022)은 형사 박해일이 한 사건을 맡으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이 산에서 떨어져 사망한 사건인데 실상은 중국인 아내 탕웨이가 그런 일을 벌인 것입니다. 박해일은 사랑하는 아내가 있음에도 탕웨이에게 끌리게 됩니다. 그러다 탕웨이가 자신을 구타하던 남편을 살해한 증거를 잡아냅니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눈을 감아주기로 합니다. 그는 사건의 유일한 증거인 휴대전화를 바다 깊숙한 곳에 던져버리라고 합니다. 탕웨이는 이것으로 박해일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또 다른 살인까지 저지릅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른 박해일은 그러려고 계속 자신을 이용하는 것이냐고 따집니다. 이에 탕웨이는 자신만 사라지면 박해일이 행복할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이 바다로 사라져버립니다. 이 모든 것이 탕웨이가 자신을 사랑해서 그런 것이었음을 안 박해일은 탕웨이를 찾아 계속 바닷가를 뛰어다닙니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요? 결국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것은 각자의 배우자를 배신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말은 비극입니다. 영화 대사처럼 완전히 ‘붕괴’하는 삶입니다. 결혼해도 결국은 배우자 자신이 ‘이게 사랑인가?’를 묻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자신들이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랑이라는 십계명을 스스로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러려면 손을 잘라야 하고 눈을 빼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결국 사랑이란 계명을 지키려면 다만 이것만 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자신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말씀에만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엔 예 하고 자기의 뜻엔 아니오 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사랑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백종원 대표가 골목 식당 방송 이후에 재 점검하면서 자주 하는 말이 “이건 내가 가르쳐 준 게 아니예요”입니다. 사람은 너무나 쉽게 변합니다. 너무나 친절하고 음식도 잘해서 인기가 좋았던 서산 돼지 찌개 집 사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워낙 부족한 게 없어서 백 대표는 그저 잔반만 잘 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손님들이 남기는 것을 보며 초심을 잃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사람이 몰려들자 사장님은 초심을 잃었습니다. 대량으로 팔기 위해 수를 쓴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맛이 변했고 결론은 안 좋게 끝났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곱창에서 샴푸 향이 날 정도를 팔고 있었던 곱창집 사장님이 있습니다. 사장님은 백 대표가 가르쳐 준 대로 그대로 맛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맛있다는 손님들에게 사장님은 말합니다. “그분이 해주신 거는 그대로만 변치 않고 하면 진짜 오래가요. 하라는 대로만 그대로 하면 돼요.” 손님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모습을 본 백 대표는 광대가 승천합니다. 너무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그 집은 계속 대박이 나고 마지막도 훈훈하게 끝납니다. 만약 백 대표가 가르쳐 준 대로 하지 않았다면 이는 백 대표를 요식 업계에서 최고 수준인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내 생각이 끼어들수록 내가 더 높아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힘으로 하려고 하면 더 안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 이유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완전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사랑할 수 있으면 하느님을 사랑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신데 거기에 내 의지가 들어가면 그 완전함은 불완전함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려면 무조건 완전 자체이신 분께만 예를 드려야 합니다. 사랑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명령에 무조건적인 순종을 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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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외국어를 잘 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듣기와 말하기입니다. 중학교에서 3년, 고등학교에서 3년을 배웠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학원’도 다녔습니다. 읽는 것과 쓰는 것은 어느 정도 되지만 듣기와 말하기는 미국에서 지낸지 4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힘들고 어렵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제가 말하고 듣고자하는 열의와 갈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영어를 배웠던 방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평가하는 것은 듣기와 말하기가 아니었습니다. 쓰기와 읽기 그리고 문법이 평가의 기준이었습니다. 교포사목을 하고, 한국 사람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으면 아무리 미국에서 살아도 영어로 말하고, 듣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반면에 미국 성당에서 지내고, 미국 사람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으면 영어에 익숙해지는 것을 봅니다. 수영을 하려면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영어를 하려면 영어의 바다로 들어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기준도 있습니다. ‘기도, 성경 읽기, 봉사, 친교’입니다. 봉사와 친교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신앙생활이라면 기도와 성경 읽기는 영적으로 다져지는 신앙생활입니다. 봉사와 친교는 신앙생활의 꽃입니다. 본당에는 봉사와 친교를 위한 조직과 단체들이 있습니다. 전례를 위해서 ‘해설단, 독서단, 복사단, 성가대, 제대 봉사회, 헌화회’가 있습니다. 이렇게 봉사하는 분들이 있기에 신앙생활의 핵심인 미사가 거룩하게 봉헌될 수 있습니다. 친교를 위해서는 구역과 반 모임이 있습니다. 성모회가 있습니다. 이렇게 봉사하는 분들이 있기에 본당 야유회도 갈 수 있고, 매주 미사 후에 음식 나눔도 할 수 있습니다. 장례가 나면 연도를 하고, 장지에도 함께 갑니다. 기도와 성경 읽기를 위한 조직과 단체도 있습니다. 성령 기도회, 레지오, 성서 공부반이 있습니다. 봉사와 친교라는 꽃은 기도와 성경 읽기라는 거름이 있어야 시들지 않습니다. 지금 나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채우는 신앙생활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3년간 코로나 쓰나미와 함께 하였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의 일상도 힘들게 했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백신과 치료제로 이제 우리와 이별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백신과 치료제가 있습니다.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강력한 예방 주사입니다. 성체성사는 나약해진 우리의 영혼에 힘을 주는 주님의 보약입니다. 고백성사는 조금씩 약해진 나의 몸과 마음을 비우고 새롭게 정비하는 보수공사입니다. 견진성사는 하느님의 군사가 되는 특수 훈련입니다. 병자성사는 심신이 약해진 이들을 위한 특진입니다. 혼인성사는 주님의 축복으로 보호받는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신품성사는 주님을 위한 봉사자를 선별하는 의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신앙인들이 충실히 살아가도록 많은 예방 접종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께 의지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욱 강력한 ‘백신’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부귀함 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와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런 삶을 택하였습니다. 가진 것이 많았던 부자 청년은 울면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욕심이 많았던 부자는 재물을 창고에 쌓았지만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것은 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표징이라고 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을 비롯한 많은 순교자들은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주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 오늘 하루도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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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전례는 율법과 그 율법을 표현하고 있는 계명들에 관한 주제가 나온다. 복음과 율법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 율법은 복음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율법이 본래의 근본정신은 잃어버리고 형식적인 것만 남아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 형식주의를 책망하시는 것이다. 법은 인간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있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은 잘못할 때도 그 행동은 자율적이고 인격적이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선택하느냐이다. 집회서는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집회 15,17) 생명은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하느님의 법을 받아들여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하며, 죽음은 그 하느님의 뜻을 거절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하는 좌절의 한 형태를 말한다. 여기서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은 생명을 선택할 수 있으며, 항상 하느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에 있어 주체가 된다.
복음: 마태 5,17-37: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과 달리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복음에서 법이라는 것은 그 법이 인간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변화시키는 그 본질적 의미를 알아듣고 살 때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이 “사랑하라.”라는 적극적인 계명으로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계속 죽일 수 있다.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는 계명이 나 자신이 충실하고 진실하라는 계명으로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거짓 맹세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법이 변화되면 그 법은 이미 복음이며 은총이 된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안에서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구약의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인해 충만한 의미가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됨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7-18절) 여기에는 하느님의 뜻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어기지 말고 실천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치라고 권고하신다.(19절) 예수님은 율법의 근본적인 의미를 해석해 주심으로써 인간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완전히 드러나게 해 주셨다. 이제 율법은 인간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더 자유롭게 해주는 은총의 복음으로 예수님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하는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21-22절) 여기서 선과 악은 마음속에 있으며, 형제를 무시하거나 그의 명예를 훼손한다면 이미 그를 죽이는 것이다. 즉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는 것은 사랑으로부터 그를 떼어냄으로써 그를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예물을 바치려 할 때 원한을 맺고 있는 형제와 화해하라고 하신다.(참조: 23-24) 주님 앞에 참된 제물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는 사랑과 용서로써 마련되는 것이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27-28절) 여기서도 악한 욕망, 욕정과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 생겨나는 악을 비난하신다. 우리의 눈이나 다른 지체가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시면서, 이혼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모세의 이혼장은 간음을 허락하는 것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 법을 폐기하신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32절) 그러니 악의 공범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러한 법은 폐지되어야 한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드려라.”(33-37절) 맹세는 이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을 개입시키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름은 우리 모두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인데, 이웃을 불신하는 데에서 쓰이게 되면 형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도 믿지 못하는 이중적인 거짓 맹세가 된다. 그래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기를 요구하신다. “예!”가 됐든 “아니오.”든 입술로 말하는 그것이 마음속에 똑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37절)
이러한 법은 명령이라기보다 복음의 새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완성하러 오신 율법은 율법주의나 전통적인 관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은총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복음이 복음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엄격한 것 같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주는 은총에 의해 그를 실현할 힘도 주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는 복음을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1코린 2,7)라고 말하고 있다. 오직 성령에 의탁하는 사람만이 그 지혜를 체험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세상 우두머리들은 아무도 그 지혜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1코린 2,8) 그 지혜를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시시고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1코린 2,10)라고 한다.
우리는 성령의 선물을 받고 있기 때문에(참조: 로마 8, 2-4),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율법을 실현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율법을 가르치실 때 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은총으로 가르치시며, 기꺼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완전히 깨닫게 해줄 뿐만 아니라, 배운 것을 성실하게 실행할 마음을 주시고 또한 실제로 실행하도록 하신다.”라고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De gratia Christi et de peccato originali, in PL 44,359)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깨우쳐주신 율법의 근본정신을 삶으로써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들,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8)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이 되어 행복을 누리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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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위선>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이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살지 마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라는 말은 ‘위선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의 ‘모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위선자였던 것은 아닌데, 그래도 그들 대부분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위선자들의 의로움은 ‘거짓 의로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뒤의 23장에서 위선자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7-28)
이 말씀에서 ‘무덤’을 ‘생명력 없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무덤이다.”라는 말씀은, “겉으로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죽은 상태다.”라는 뜻이 됩니다.
위선자들은 그 자신들의 위선 때문에 하느님의 생명력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래서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늘나라는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위선자들은 ‘하느님을 섬기려고’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신심 행위를 하는 사람들입니다.(마태 6,2.5.16) 그래서 그들의 신심 행위는 ‘거짓 신심 행위’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기도도 잘하고 단식도 잘하고 자선도 잘 베푸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일들은 모두 가짜라는 것입니다. 위선자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사람들입니다.(마태 23,3)
<세속에서 정말로 강의나 강연이나 토론을 잘하는 사람에게 처음에는 열광하다가 그 사람의 실제 삶이 말과 다르다는 것이 알려지면 금방 비난을 퍼붓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그렇게 세속에서도 위선을 싫어합니다. 교회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복음서의 내용 전체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위선’을 몹시 싫어하셨습니다.>
위선자들은 눈에 보이는 일은 잘하는데, 정말로 중요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은 무시합니다.(마태 23,23) <보이지 않는 일이니, 열심히 해도 표시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선자들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입니다(마태 23,25-26). 겉으로는 깨끗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속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위선자의 마음속이 보이지 않으니 겉모습만 보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위선자의 마음속을 보십니다.(마태 6,4.6.18)
그런데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나 자신’의 마음속을 나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위선자들은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릅니다. 자기는 겉과 속이 같다고, 즉 겉으로도 속으로도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선자들은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죄의식, 죄책감, 또는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전혀 없이 자기 혼자만의 ‘마음의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너는 위선자다.”라고 지적하고 비난하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발하면서 화를 냅니다. 사실 다른 사람이 위선자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태 7,1).> 정말로 중요한 일은 ‘나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위선자인가, 아닌가, 내가 하는 일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신앙생활은 겉으로 보이는 행동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흔히 하는데, 또 마음이 깨끗하면 된다는 말도 흔히 하는데, 나 자신의 마음을 나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말은 별로 의미 없는 ‘상투적인’ 말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양심 성찰’을 잘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양심 성찰만 잘하면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 사실 ‘양심 성찰’도 ‘내가 나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될 때가 많습니다. 양심의 가책 없이 살면서, 혼자만의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는 위선자가 양심 성찰을 한다고 해서 무슨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은 판단 기준으로 ‘사랑’을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2-3)
이 말은, “사랑이 없으면 모든 일이 다 위선이다.” 라는 뜻입니다.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과 ‘모든 재산과 몸까지 다 넘겨주는 일’이 위선이라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은 인간의 기준으로 하는 말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기준으로는 사랑 없이 하는 일은 다 위선입니다. 위선이라면, 그 믿음은 가짜 믿음이고, 그 희생은 가짜 희생입니다. 실제로 기적을 일으키고, 실제로 희생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그렇다면 양심 성찰을 할 때,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내 마음속은 얼마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가?”입니다. 물론 “내 마음속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라고 자기 혼자 착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큰소리치는 위선에 빠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나도 위선자일 수 있다.” 라고 겸손하게 인정해야 하고, 위선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날마다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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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나라를 잃고 성전도 없던 수많은 세월 동안 이스라엘은 회당에 모여 하느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회당 전례의 중심은 언제나 토라(율법)였습니다. 바룩 예언서에는 이스라엘이 복된 백성이며 그것은 자신들이 토라, 곧 “하느님의 명령과 길이 남을 율법을 기록한 책”(4,1)을 통하여 “지혜의 길”(3,27)을 가르쳐 주신 하느님을 알고 섬기는 백성이기 때문이라는 그들의 특별한 자부심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말씀을 참으로 존경하며, 그 말씀에 온전히 매료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어릴 적부터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예배를 드리며 율법을 들어 익히셨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어조로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해석과 적용은 당시의 율법 학자들이나 라삐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 율법의 근본 정신을 잊고 인간의 구원과 사람의 선익을 구하지 않는 이른바 ‘문자에 얽매인 해석’에 골몰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계명을 통하여 그 법을 선물로 주신 하느님의 뜻에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율법이 온전하게 유효함을 인정하시면도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가르침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성에 이르기를 바라셨습니다(마태 5,48 참조). 예를 들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만드신 사람을 다른 사람이 해칠 수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이 ‘살인하지 마라.’는 율법의 중요한 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더 나아가 자기 형제에게 해가 되는 어떤 말이나 행동도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서 살 수 없게 만든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형제에게 봉사하고 그를 섬기며 사랑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고 참생명의 길 밖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말씀이 지켜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당대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어느 라삐는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철저히 지키려고 죽을 때까지 결코 여인을 쳐다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인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교회의 규정과 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그것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걸어가신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는 지침이 되게 하려면 우리의 속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마음에 닿을 수 있기를, 그분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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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가톨릭대학 성신교정)
<목표를 잊지 말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유학하던 시절. 매일 아침 수영장에 가서 1km씩 수영을 했습니다. 어디까지나 공부 때문이었어요. 책상에 오래 앉아있기 위해서는 체력이 필요했고 삶의 활력윤 위해서라도 운동이 필요했거든요. 꾸준히 수영을 하자 허리가더 이상 아프지 않았고 밤에 잡도 잘 왔습니다. 이런 장점을 느끼자 공부가 끝나도 꾸준히 수영을 계속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됐어요. 그런데 애초에 목표로 했던 공부가 끝나고 나니 그러한 결심이 금방 사라지더군요. 목표가 사라지자 수영은 이제 짐처림 느껴졌어요. 결국 차일피일 미루다. 그 후에는 몇 번 가지도 못하고 체력이 바닥난 채 귀국하게 되었지요. 이 경협을 떠올려보면. '목표가 우리 삶에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정확한 목표가 있으면 우리는 그 일에 기꺼이 성실하게 임
하지만. 목표가 없거나 간절하지 않을 때면 싑게 포기하고 맙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하자들은 바로 목표를 잃은 사람들의 대표적인 표상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본래 '하느님의 사랑'이었는데. 이것을 '현세의 권위와 혼동하기 일쑤였기든요. 그러니 결국 꾸준히 행해야 할 사랑은 다른 사람에 대한 권위 행사와 교만으로 그릇되게 표출되곤 했어요. 성실한 삶을 겉으로 드러내고자 했고, 율법만을 강조하다 보니 자비와 이해 없이 남을 억압하고 종용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기본 정신인 '사랑'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일깨우고자 하셨지요. 그리하여 오늘 복
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페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살인, 긴음. 거짓 맹세)에 앞서 원천적인 동기(원망. 음욕. 맹세 자체)를 차단할 것을 강조하시지요.
사실 성경의 계명들은 때때로 짐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명을 지키는 것을 너무 어렵다고 생각해 이를 회피하곤 하지요.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해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결국 크나큰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일단은 쉬운 계명부터 하나하나 천천히, 그러나 성실히 지킬 것을 다짐하면 좋을 것 같아요.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목표를 잊지 말고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실행한다면. 하느님을 향해 혜엄치는 우리의 영적인 체력은 더욱 좋아질 것이고 어느덧 사랑을 행하는데 지치지 않는 건강한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물론 가끔 실수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괜참습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좋은 영양분을 다시 공급해 주시는 하느님이 결에서 기다리고 계시니까요. 격정하지 마세요. 포기하지만 않으면 결국엔 다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무엇보다 그 용기를, 그 마음을 전능하신 하느님이 알아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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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종섭 토마스 신부님]
<고집과 신념>
7년 전쯤, 자고 일어나니 왼쪽 발목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갔습니다. 붓기는 없었는데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겠고, 양말도 못 신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의사가 와서 보더니 정말 큰소리로, “통풍이네, 통풍! 신부님! 매일 술 먹죠? 신부님들은 술 좋아하시니까! 이거 고기 많이 먹고 술 많이 마셔서 그래요!”라고 말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저와 의사를 바라봅니다.
엄청 민망하고 부끄럽고, 무엇보다 불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절 저는 일이 너무 많아서 주 7일 근무를 하며 ‘제발 좀 쉬고 싶다.’라는 혼잣말을 입에 달고 지냈기 때문입니다. 회식이나 모임은 둘째 치고, 간단한 식사 자리조차 갖지 못했던 때였습니다. 어떤 연유가 있는지, 최근 무슨 이유로 통풍이 생겼는지, 상황에 대해 질문하거나 제 말을 들을 생각은 아예 없더군요.
‘확증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건, 상황에 대한 객관적 접근과 해석보다는 자기 경험이나 생각을 토대로 하여 왜곡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거나 자기 입장에서만 받아들여 그렇게 확신해 버리는 사고의 편향을 말합니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이런 편향의 이유는 선입견 때문입니다. 자기 경험의 축적인 선입견이 고착되면 고집이 되고, 고집으로 인해 불통(不通)이 생깁니다. 그러다 보면 어리석은 판단, 지혜롭지 못한 관점,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숙한 이들 가운데에서는 우리도 지혜를 말합니다.”(1코린 2,6) 지혜를 말해도 안 듣습니다.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말을 나누는 소통의 장마저 차단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그런 상황에 처합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그들을 통해 세상에 당신의 사랑을 알려주시기 위한 표징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과 의미는 희석되고 형식과 틀, 체면과 익숙함, 편안함과 안정감. ‘하던 대로 하면 된다.’는 식의 타성에 빠져버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 사랑의 새 계명이 전혀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폐지가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음에도 사람들은 심지어 제자들마저도 본질을 안 보고 있습니다. 못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살인’이라는 자의(字義)에만 얽매일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해쳐서는 안 된다. 매 미사에 참례하고 고해성사를 열심히 받기 전에 성체께 합당한 마음을 가져야 하며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원망을 품게 했다면 화해해야 한다.
“너희는 말할 때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끊임없이 조심하고 애쓰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죄를 짓지 않고 악을 피하는 것보다, 어쩌면 ‘나’ 속 깊은 곳에 잔뜩 똬리를 틀고 있는 신념이라고 착각하는 고집, 사랑 없는 믿음, 목적 없는 소망으로 딴딴해진 편향과 고집불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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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수진 사도 요한 신부님]
<주님의 감실인 우리>
“잘 듣고 계십니까?” 저는 미사 중에 신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 번씩 던집니다. 말씀 전례는 듣는 시간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 말씀을 나의 것으로 삼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계십니까? 물론 말씀을 잘 듣기 위해서 집중하고 계실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주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글자 하나도 흘려듣지 않기 위하여 온전히 집중하고 계십니까? 아마 우리 중에 자신 있게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흘려듣는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주님 앞에 당당하게 서있기에 한없이 부끄러운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말씀께서 살이 되셔서, 빵이 되셔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십니다.(요한 1,14 참조) 우리가 귀로는 당신의 말씀을 너무나도 쉽게 흘려버리니까 이제 더 이상 흘려버리지 않도록 말씀을 귀가 아니라 입으로 모시게 하십니다. 말씀께서는 스스로 빵이 되셔서 우리가 말씀을 통째로 받아 삼키게 만드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잘해서,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주님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그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를 완전하게 당신의 것으로 삼으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당신의 감실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듣고 열심히 실천하기만 하는 그들과는 달리 우리는 말씀을 통째로 삼키면서 말씀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을 주님의 감실로써 살아갑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을 적용해 본다면 사실 우리는 재판에도 넘겨져야 하고 불붙는 지옥에도 떨어져야 하며, 손과 발도 다 잘라 내던져버려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 안으로 들어오심으로써 우리를 완전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마태 5,48 참조) 우리는 그런 주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는 자격 없는 우리를 매번 당신의 감실로 삼으시는데 우리는 서로를 상대로 ‘상대방’이라는 감실을 주님의 것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상대방의 자격 없음을 탓하고만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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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지체가 아니라 죄를 잘라라>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한자 한 획’(18절)을 강조하는 건,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대하지 않아야 함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작은 것에는 눈길을 주지 않고, 큰 것에만 관심을 보입니다. 물론 사소한 것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작은 것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말해 줍니다. 어느 면에선 작은 것이 더 본질적입니다. 그 작은 것, 그걸(계명) 어긴다 해도 구원에 지장이 없다고 해도 그 작은 것을 지켜 온전히 의로움을 살아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작은 이 하나와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와 관련이 없나 봅니다.
1.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나 멍청이라고 한다면 지옥 불을 면치 못한다.’(22절)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랑이 아니고 업신여기게 되면 그는 기를 못 펴 죽게 될 것이고, 업신여긴 이는 살인죄에 해당하는 벌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무시당하기 쉬운, 작은 이를 귀하게 여기는 주님의 의노(義怒)를 여기서도 느낍니다. 주님은 당신 친히 비천한 몰골로 죽으실 정도로 작은 이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2. ‘제단에 예물을 봉헌할 때 (너는 그리 생각하지 않아도) 너를 원망하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가서 화해한 다음에 예물을 바쳐라.’(23~24절)
자기 처지에서만 보기 십상입니다. 상대의 처지에서 보면 어떨까요? 화해해야 할 범위가 넓어집니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괴로워한다면, 그때도 달려가서 먼저 손을 잡아주라는 겁니다. 상대의 시각에서 불 줄 알아야 한다니…. 상대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가 싶습니다. 미사 봉헌에 앞서 핸드폰으로 화해의 마음을 전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화해의 기쁨은 감격의 미사 봉헌으로 이어지겠지요.
3.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25절)
정치판이든 평범한 일상의 시민사회이든 걸핏하면 송사를 벌입니다. 정치력으로, 대화로 풀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합니다. 아는 교우분이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이를 고소했는데, 고소가 진행되면서 엉뚱하게 본인의 잘못이 드러나 많은 재산상 손해를 보고 마무리하는 걸 보았습니다. 진실과 정의는 바로 세우고 불의는 파헤쳐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얼른 타협하라고 이릅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실까? 내 쪽에서만 주장할 수 있는 절대선(絶對善)은 없다는 것일까요? 부활하신 주님의 인사말은 거듭거듭 평화이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하십니다. 서로 용서하라. 네 죄, 네가 셀프로 용서할 수 없는 법, 그대들의 죄를 그대들이 서로 용서하라. (요한 20, 23 참조)
4.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기만 해도 간음죄를 범하는 것.’(28절)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눈은 찍어내고 죄짓게 한 지체(肢體)는 잘라 던져 버리라. 참 무섭습니다. 여기에 저촉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작정하고 우리에게 백기를 들게 하시려나 봅니다. 이런 뜻으로 들립니다. ‘사악한 습성은 쉬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럴듯한 생각이나 열심한 마음, 의지로만 회심을 얘기하지 말라. 몸 전체를 걸고 죽기 살기로 정진하라.’ 지체를 가볍게 여길 수는 없는 법, 지체가 아니라 죄를 끊으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주님!
당신의 말씀 하나하나가 태산 같습니다. ‘한 자 한 획’도 들어 올리기 힘든 말씀입니다. 저는 ‘아니오.’라고, 못한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당신에 대해선 ‘예’입니다. 제 죄를 껴안고 당신 몸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당신의 사랑에 대해선 ‘예’입니다. 당신의 사랑에 응답하는 제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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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삶>
마태오 5,17-37 (예수님과 율법, 화해하여라, 극기하여라,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 정직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삶>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 때까지
낮아지고 더 낮아지고
더 이상
넓어질 수 없을 때까지
넓어지고 더 넓어지고
더 이상
깊어질 수 없을 때까지
깊어지고 더 깊어지고
더 이상
부드러워질 수 없을 때까지
부드러워지고 더 부드러워지고
더 이상
너그러워질 수 없을 때까지
너그러워지고 더 너그러워지고
더 이상
깨끗해질 수 없을 때까지
깨끗해지고 더 깨끗해지고
더 이상
착해질 수 없을 때까지
착해지고 더 착해지고
더 이상
곧아질 수 없을 때까지
곧아지고 더 곧아지고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때까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이상
그 너머가 없을 때까지
그 너머로 더 그 너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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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의 생각이 밖으로 나옵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10)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페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단호히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율법의 형식주의가 아니라 근본정신인 사랑의 중요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은 마음에 쌓아 놓은 것을 밖으로 드러내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드러난 행동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선한 일을 하였다면, 그는 선한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악한 일을 하였다면, 선하지 못한 생각을 품은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음에 가득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꺼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꺼낸다.”(마태12,35)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입고,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을 가슴에 모신 사람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구원받을 사람에게나 멸망할 사람에게나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멸망할 사람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죽음의 향내고,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이끄는 생명의 향내입니다.”(2코린 2,14-15)
어떤 사람이 살인을 하였다면 이미 미워하는 마음, 성내는 마음이 악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창세기의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창세4,1-8)를 보면,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바치고 아벨은 양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지만,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습니다. 분노와 상처 입은 자존심, 질투,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형제 살해’까지도 서슴지 않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미워하고 성내는 마음이 뿌리라면, 살인 행위는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다스리고자 한다면 뿌리를, 다시 말하면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시고, 미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손발 이전에 마음을 단속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단속하되 단호하게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5,29)
참으로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우리의 삶은 내면과 외면, 생각과 행동이 일치해야 합니다.
그래서 “행동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습관이고, 습관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성격이며, 성격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운명이다”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듭니다.
습관의 사슬은 매우 작아 잘 느껴지지 않다가 어느새 끊을 수 없을 만큼 강한 것이 되고 맙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이 그런 의미입니다. 어떤 죄를 두 번 지으면 더는 죄처럼 여기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행동의 뿌리인 마음을 단속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마음은 하느님의 숨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오늘 1독서 집회서를 보면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 “그분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굽어보시고, 사람의 행위를 낱낱이 아신다.”(15,17.19)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보나 안 보나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잠언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서 생명의 샘이 흘러너온다.”(4,23) “평온한 마음은 몸의 생명이고 질투는 뼈의 염증이다.”(14,30)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 하십시오”(필리2,5).
하늘에는 하늘의 질서가 있고, 땅에는 땅의 질서가 있습니다. 바다에는 바다의 질서가, 산에는 산의 질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구 파헤치고, 규정을 지키지 않고 항해하면 충돌이 일어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 생각과 행동에도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질서를 지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 질서가 어디 있습니까? 성경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 말씀의 삶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요한 21장3절에 보면 제자들이 밤새 고기를 잡으려 애썼지만, 그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한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참된 신앙은 주님의 지시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삶의 의미와 성공 여부는 주님께 얼마만큼 의존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풍요로운 축복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신부생활 하면서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사람의 속을 본다는 것’입니다. 속을 빤히 들여다보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때를 기다려 줘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인 사제가 이렇게 안타까워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더 큰 안쓰러움으로 바라보고 계실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바로 서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항상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면서 지킬 것을 지켜야 합니다. 매 순간 하느님의 마음에 들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와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희망합니다.
활을 가지고 과녁을 겨냥할 때 조준을 잘해야 합니다. 과녁에 정확하게 맞추지 못한 것은 잘 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조준을 잘못한 탓입니다. 조준을 잘못하면 설사 화살이 시위를 떠나지 않았어도 이미 과녁을 벗어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선이 주님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이미 죄를 범한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죄의 결과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부터 이미 탐스러운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먹기로 결심을 했으니 그것이 죄입니다.
지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마음이 진리를 향해 조준되었을 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생각이 넉넉하고 사랑으로 가득 차 언제나 그것이 쏟아져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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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줄리아 카메론은 35세에 그토록 가고 싶었던 영화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는 다른 학생들보다 자그마치 15살이나 많았지요. 주위에서는 나이가 너무 많다고 이야기했지만, 자신에게는 창조적 열망과 인생 경험이 많고 배움에 대한 욕구가 다른 학생보다 훨씬 강하다고 믿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책에 이런 내용을 적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지금부터 피아노를 배워서 잘 칠 때쯤이면 몇 살이나 되는지 아세요?”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알아요. 하지만 그것을 배우지 않아도 그 나이를 먹는 건 마찬가지예요.”
하지 못하는 이유만을 찾는데 너무나 익숙한 ‘우리’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사람은 그만큼 가능성이 훨씬 많은 삶을 살게 됩니다. 따라서 지레짐작으로 할 수 없다며 좌절과 절망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할 수 있는 이유를 바라보며 희망과 의지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계명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실천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일 역시 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고 있습니다. 바빠서, 여유가 없어서,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지금 하는 것이 마음에 와닿지 않아서…. 이런 이유로 과연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할 수 있는 우리와 함께하면서 더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사랑 실천은 자기 기준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주님 기준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당시에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도 더 엄격한 주님의 기준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하시고,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하십니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기 뜻보다는 주님의 뜻을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판단으로 ‘이 정도는 괜찮다.’라는 안일한 생각이 주님과의 거리를 더 멀게 만들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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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완성하는 사랑>
오늘 주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그런데 율법의 완성을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율법의 완성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것이 완성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완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율법의 정신과 목적도 사랑이라는 전제 아래서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이 사랑의 법이 아닌 다른 법일 리 없을 것이고, 주님께서도 그런 뜻에서 율법을 폐기할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완성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일 겁니다
그런데 율법도 사랑의 법이고 정신도 사랑이긴 한데 적극적인 사랑이 아니고 최대한의 사랑이 아닙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소극적인 사랑이고 최소한의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한다면 남에게 나쁜 짓이나 해를 끼치는 짓을 하지 말아라. 사랑한다면 적어도 이것은 해야 한다. 뭐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율법의 소극적 사랑의 예를 드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맹세하지 말라.
율법에서는 이 정도만 하지 않아도 훌륭하다고 합니다.
사실 이것을 안 하는 것도 쉽지 않고, 이런 사람 드믑니다. 그러니 이런 나쁜 짓 안 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고 할 수 있고, 이 세상 사랑으로는 이 정도로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사랑을 말씀하시고 있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에 이런 소극적인 사랑을 능가하는 사랑을 하라고 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그리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고작 불의한 짓을 하지 않는 이 세상 사랑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이 세상 사랑을 능가하는 하늘나라의 사랑을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성도 내지 말아야 하고, 간음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음욕도 품지 말아야 하며, 거짓 맹세는 물론이고 아예 맹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 보게 되겠지만 하지 말아야 할 사랑뿐 아니라 해야 할 사랑에 있어서도 이 세상 사랑을 능가하는 사랑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 유명한 사랑 그래서 우리도 너무나도 잘 아는 두 배 사랑과 원수 사랑인데 이것은 다음 주에 보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하늘나라 사랑은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하늘나라에서 살인이나 미움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하늘나라에서는 살인은 물론 성내는 일도 없어야 하고, 미움은 물론 남을 깔보는 말이나 업신여기는 말도 없어야 하며, 거짓 맹세나 사기는 물론 모두 정직하고 의로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관건은 이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제자인가? 나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가?
주님의 제자라면 그리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이 세상 사랑을 능가하는 하늘나라 사랑을 추구해야 함을 가르침 받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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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의인이, 성인이 되는 길>
-지혜, 선택, 훈련-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시편119,1-2)
이런 이들이 의인들이요 성인들입니다. 어제는 배나무들의 거대한 뿌리를 보며 믿음의 뿌리에 대한 깨달음을 나눴습니다. 오늘 새벽 배밭 산책중 소스라친 깨달음의 은총에 감사했습니다. 바로 배나무들이 뿌리를 내린 배밭 땅의 흙입니다. 배밭 땅의 흙이 없으면 어디에 뿌리를 내립니까? 바로 똑같은 이치가 우리가 믿음의 뿌리를 내린 배밭 땅의 흙같은 공동체에도 적용됩니다.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께 깊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공동체의 은총은 절대적입니다.
은총입니다.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매사 하느님 찬미와 감사요, 기쁨이요 행복이요, 사랑과 겸손이요, 마음의 순수와 자유로움입니다. 제 집무실 커다란 게시판에는 2년전 써놨던 깨달음의 글이 지금도 붙어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고마움의 고백입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수도공동체입니다.”-2021.7.20.
그렇습니다. 공동체 생활도 정말 커다란 은총입니다. 형제들 하나하나로부터 평생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형제들 하나하나의 모습에서 예수님 얼굴이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한몸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이 되는 길도 없습니다. 더불어의 삶이요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제가 좋아하고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작 좌우명시도 수도원 25년 기념감사제가 없었다면, 또 마르코 수사님의 각별한 당부가 없었다면 이 시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행복기도 역시 수도원에 잠시 머물렀던 바오로 신부님의 부탁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은총의 열매임을 깨닫습니다. 10여일 동안 순례여행을 다녀온 어느 자매님의 감사메시지도 은총의 고백이었습니다.
“아멘!
주님께 찬미 찬양드립니다!
잘 살아가겠습니다.
순례를 하며 신부님께서 강조하시던
지상에서 천국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신 말씀을 체감했습니다.
이렇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은 주님의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제가 무엇이기에 넘치는 축복과 은총을 주셨는지 눈물이 납니다!
앞으로 더욱 긍정적이고 간절한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겸손한 고백인지요! 수십년을 한결같이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는 참 사랑스런 성녀같은 분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의인으로, 성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바라시는바 우리 모두 한결같이 당신을 사랑하여 닮은 참나의 의인이,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첫째, 지혜입니다.
무지의 마음 병에 대한 궁극의 처방도 지혜입니다. 그러니 지혜를,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리하여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사랑할 때 성령의 은총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사랑의 지혜입니다.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지혜를 사랑할수록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여기서 사랑은 순수한 아가페 사랑을 말합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의 지혜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줍니다.
“성숙한 이들 가운데에서 우리는 지혜를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들은 아무도 그 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지혜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은총중의 은총이 성령의 은총입니다. 성령의 은총이 하느님의 지혜이신 주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고 깨닫게 합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성령의 은총인 지혜뿐입니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참으로 한결같이 사랑해야 할 분은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뿐입니다. 제 행복기도 서두처럼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
참회합니다
믿습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둘째, 선택입니다.
선택의 은총이요 선택의 자유입니다. 타고난 것도 많지만 매일 선택할 수 있는 좋은 것도 무궁무진입니다.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에 좌절하거나 절망할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주님을, 지혜를, 사랑을, 감사를, 행복을, 기쁨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삶에서 선택아닌 것이 없습니다. 왜 어리석게도 아까운 시간 불행을 선택하여 어둡고 우울하게 살아갑니까?
참 좋은 올바른 선택을 위해 성령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바로 제1독서 집회서가 선택의 자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내용이라 전문을 그대로 인용하여 다시 나눕니다. 참으로 올바른 선택으로 책임적 존재가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대로, 선택하는 대로 받으리라.
참으로 주님의 지혜는 위대하니
그분께서는 능력이 넘치시고 모든 것을 보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굽어보시고
사람의 행위를 낱낱이 아신다.
그분께서는 아무에게도 불경하게 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고
어느 누구에게도 죄를 지으라고 허락하신 적이 없다.”
얼마나 중요한 선택인지 선택에 따른 책임이 얼마나 엄중한지 깨닫습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선택의 결단이자 선택의 실행입니다. 선택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참으로 좋으신 주님을 선택할 때 일일시호일, 하루하루 활짝 열린 좋은 날입니다.
셋째, 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계시되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율법의 깊이를 계시해 주십니다. 우리가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 할 바 이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참으로 의인이, 성인이 될 수 있는 길은 하느님의 지혜를 선택하여 훈련하는 것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지혜에 대한 심오한 계시입니다.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신 주님이요, 주님은 이에 대한 근원적 처방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분, 예수님이 권위를 지니고 확신에 넘친 가르침이 반복됩니다.
살인에 앞서 형제를 “바보!”, “멍청이!”라 하며 무시하고 멸시하는 간접적 살인의 마음부터 깨끗이 정리하라는 것입니다. 예물을 바치기전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가 있으면 지체없이 용감하게 화해하고 와서 제단에 와서 예물을 바치라 합니다. 간음에 앞서 마음의 간음인 음욕부터 일소하라 하십니다. 참으로 주님의 충격요법적 표현을 통해 간음이 얼마나 치명적 죄인지 깨닫습니다.
사실 성적 문란이 모든 화근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른 눈이 죄짓게 하면 오른눈을 뽑아버리고, 오른손이 죄짓게 하거든 오른손을 잘라 버리라 합니다. 말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죄의 해악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 엄중함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호히 죄를 끊어버리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간음의 경우도 철두철미합니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를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요,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간음은 아예 상상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불륜의 죄가 얼마나 관계를, 영혼을 파괴하는지 생각한다면 간음은 꿈도 꾸지 못할 것입니다. 긴음은 파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이런 죄를 지었을 때는 지체없이 참회하는 것입니다.
맹세의 경우도 철두철미합니다. 무지로 인한, 제 분수를 넘은 맹세는 아예 하지 말라 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기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하시니 우리는 머리카락 하나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 말하는 솔직담백한 답변뿐이니 이 이상의 것은 모두 악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득 지난 수요일 마르코 복음 말씀과 묵상이 떠오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흡사 마음이 더러운 오물 가득한 쓰레기통처럼 보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무지의 현실입니다. 과연 여기서 제외될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고귀한 품위의 인간의 참으로 어둔 측면입니다. 이래서 평생 영적전쟁에 영적훈련입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하와를 유혹했던 뱀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여기 영적훈련에는 요령도 첩경의 지름길도 없습니다. 부단히 성령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선택하여 죽을 때까지 평생 훈련함으로, 쓰레기통 같은 마음을 뿌리로부터 정화하고 성화하는 길뿐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수도자들은 죽는 그날까지 하느님을 한결같이 사랑하여,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를 영적훈련으로 삼아, 하루하루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바침으로 아예 우리 마음에 애당초 죄가 뿌리내리지 못하게 합니다. 이래야 마음의 순결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주일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찾는 영적훈련에 항구하게 하시며 당신을 닮은 참나의 의인이자 성인으로 살 수 있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께서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마태11,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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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마태5,17-37)은 예수님의 산상설교로써, '예수님과 율법', '화해하여라.', '극기하여라.',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 '정직하여라.' 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로써,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생명 그 자체입니다. 지키면 사는 것이고, 지키지 않으면 죽음입니다.
이것이 구약성경 전체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모세오경이 전하고 있는 율법의 핵심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6,5)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19,18)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몸소 당신의 육화의 겸손과 땀의 찬가와 십자가 수난과 죽음으로 이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인 우리를 위한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율법을 완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완성해야 할 율법의 본질인 구체적인 사랑에 관한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화답송)
'율법의 완성을 통해' 행복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산 이들에게 주어지는 복이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어떠한 눈도 본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1코린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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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 5, 20)
나약한 우리들
삶입니다.
흔들리는
우리들
시대입니다.
바르게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악을 멈추고
선(善)을
실천해야 할
우리들 삶입니다.
그러기에
더더욱 지혜와
중심이 필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공동체의 질서는
계명처럼
사랑과 공경이
중심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는
지혜를 말합니다.
계명은 신앙인의
정체성을
회복시켜 줍니다.
하느님과의 약속이
그만큼 중요한
우리들 질서입니다.
삶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계명의 밝은
지혜입니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절제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마음 한가운데서
만나게 되는
삶의
기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주셨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키워나가야 할
우리들입니다.
더욱 중요하고
더욱 소중한 것은
사랑의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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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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