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블라디보스톡과
근교인 우수리스크(2시간 거리)
다녀왔습니다.
8월 한여름에는
한국의 여름보다 더 덥다고 하고
겨울은 훨씬 춥다고하니,
9월경 선선해져서 다니기
딱 좋을 때로
여행 날짜를 잡았습니다
블라디보스톡은
시베리아횡단열차의
시, 종착점이기도 하고
러시아에서 부동의 바다가 있는
유일한 지역이면서
이주한인인 고려인들의
아픈 역사가 있는 곳입니다.
사실 잘 몰랐고
배틀트립이나 맛있는 녀석들 등
tv 예능프로그램 정도와
한국사 시간의 근현대사 파트에서
어렴풋이 알고 있는 정도였는데,
직접 가보니 여러모로 신기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도착해서 첫 느낌은
러시아인데 겨울이 많은 도시에서
바로 여름을 겪고난 날씨 좋은 곳의
묘하게 따뜻하지만 차가운 느낌,
시멘트로만 마감된
두꺼운 건물들과 세미 유럽식 건물들,
아무래도 험한 운전을 하면서
총기도 소유한
백인 러시아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무섭지만 생각보다 호의적인 느낌들,
이곳에 한국인들이
한국식으로 지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생각해보자니
동해, 삼척 그런 느낌이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
등등이었습니다.
우수리스크 반일투어를 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는데
옛 발해 추측 터전과
이상설 선생의 마지막,
최재형 선생의 삶과
항일운동의 메카,
한인(고려인)들이 닦아 놓은
삶의 터전과
그들의 강제이주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그저 놀러올 곳만은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최근에는 LG에서
두꺼운 벽인 추운 나라 러시아에
그누구도 못하는 타공을 해서
보일러 시공을 하여
LG다리까지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차는 압도적으로
일본차가 많더라구요.
이것은 기후가 일본 윗지방은
춥기 때문에 같은 온도 선상에서
테스트를 많이 거친
일본차가 짱짱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얀덱스(택시)어플,
지도기반으로 동선 상 계획을 짜고
루스키섬투어와 우수리스크 반일투어,
마린스키 극장 오페라,
숙소, 샌딩버스, 비행기는
사전에 예약을 했습니다.
블라디 시내는 크기가 크지 않아서
외곽을 제외하면
대부분 산책겸 걸어도 좋은 곳이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톡 여행 start
밤에 도착한 블라디보스톡
역사입니다.
밤에, 이곳에서 시내로 가는 방법은
택시 or 사설업체에서 운영하는 버스편
(낮에는 전철도 있음)이 있는데
AZIT라는 업체에서
공항버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했어서
두개 다 예약을 하고
편하게 블라디 시내로 이동했습니다.
(약 30분이 걸리더라구요)

아지트라는 업체는
여러 게스트하우스, 숙소를 운영하는데
한인들끼리 모이기 좋게 되어 있습니다.
(만나서 같이 밥도 먹으러 가기도 하고,
밤에는 클럽같은 곳에도 가고
그러는 것 같더라구요)
도착하면 마지막 종착지에서 내리면
바로 게스트하우스가 있는데,
러시아 여자분께서 안내해주십니다.
1층은 여자전용,
2층은 남성전용 + 혼성인

루스키 섬에 따로 가려면
가는 시간도 그렇고
차편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투어로 예약했습니다.
아침이 되고 미리 예약한 버스투어
(루스키섬, 3시간 코스)에 가기 위해서
짐을 맡기기 위해
아지트에서 운영하는 짐보관소에 짐을 넣고
약속된 장소인 맥도날드 앞에서 기다리니
봉고차가 왔습니다.

아지트 업체 짐 보관하는 곳 30분쯤 달리니 루스키섬 도착!
정말 사진보다 더 파랗고 녹색입니다.
흙은 조금 황폐하지만
이곳에서는 북한도 보인다고 하고,
부동의 항이라 군사지역인데
개방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산책 정도의 트래킹입니다.
발이 더러워지니
운동화 위에 비닐신을 덧신습니다.
운이 좋으면 여우를 발견하는 곳으로
잠시 여우가 나타났었는데
뒷태만 보고 지나가버려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슬슬 1시간 정도 걸어갔다가
다시 1시간쯤 걸어 나왔습니다.
맥도날드에 내리면
거의 블라디 시내의 정중앙이기 때문에
어디든 가깝습니다.
분수대에서 해양공원 따라 있는
광장이 가장 여행객들에게 핫한 장소로
그곳에 추다데이, 수프라, 편의점,
우흐뜨블린 등등이 있습니다.

수프라라는 식당에서 약간 터키식?의
식사를 하려고 바글바글한
인파를 뚫고 입성했습니다.



손잡이 부분은 먹는 게 아닙니다 분위기도 있고 맛도 있는데,
동양인 차별인지
자리도 늦게 내어주고
서빙하는 사람은 돈받을 때만
친절하게 애교를 부리십니다...
(아 정말 욕하고 싶다)
옆에는 히피같은
이상한 할머니 무리가 와서
안되는 영어로 칭찬같은 것인지
저주인지 하고 가서
더 이상하긴 했고
2층은 볕이 많고 에어컨이 없어서
정말 더워요.
서버가 2층 보내면
탈주하시면 될 듯 합니다.

식사를 하고
해양공원을 잠시 산책을 하고는
택시를 불러 킹크랩을 사러
중국시장에 갔습니다.
에어비앤비 조리 가능한
숙소가 참 좋습니다.
중국시장에 가면 건물이 많아서
헤매기가 쉬운데 어찌저찌 찾아집니다.
저 DNS라고 적힌 건물에서 -
길 건너에 '작은 창고 같은 곳'으로
들어가면 그쪽에 해산물을 많이 팔고
그쪽 안쪽의 뒷골목에서
이것저것 팔면서
반대방향으로 나가면
트램인지 기차인지 길이 나오고
그곳에 버스가 많이 다닙니다.
아무튼 킹크랩 2키로정도를 구매하고,
곰새우도 500그람정도 사고,
그렇게 맛있다는 납작복숭아를
구매했습니다.
(진짜 너무 좋아 납작복숭아!)




사고 버스를 탔는데
와 서양인들 암내 정말 미쳤어요...
버스에서 숨 못쉴뻔했는데
죽어가니 혁명광장에 도착했습니다.
동상이 생각보다 멋있구요.
광장이 넓고 좋은데,
이곳 광장에서는
장날마다 여러가지를 파는
부스들이 가득가득 열립니다.
(cctv를 통해 장이 서는지 확인 가능해요)

일단 장을 보러
클레버하우스에 갔습니다.
(블라디보스톡은 9시 넘으면
술을 일절 판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느긋한지
계산대 2개에
줄이 어마어마하게 많고
계산원 속도가 2g정도 수준이라
사람몰릴 때 과감하게
패스하는 편이 나아서
일정 마지막 날에는 줄 보고
각잡고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물, 맥주, 사이다, 라면, 과자, 음료,
초콜릿을 샀어요.

이제 에어비앤비 호스트와 컨택하여
부랴부랴 숙소를 찾아 갑니다.
아파트인데
여기는 외관 골자만 같고
인테리어는 집주인이 하기 때문에
집 안은 다 다르다고 해요.
벽이 너무 두꺼워서
조금 공산주의 벙커인가
싶기도 했는데
추운 곳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겠죠.
중국시장에서 사온
자숙 킹크랩과 곰새우를
냄비에 잠시 해동을 시켜주고
살을 발라줍니다.
(한국에서 초장을 사갔어요.
그리고! 게 파먹기용 도구 진짜 필요함)


만찬입니다.
수프라에서 배불러서 싸온 피자와
해산물, 납작복숭아, 초콜릿,
그리고 정말 맛있는 맥주!
(이거 한국에서 왜 안팔지)

숙소에서 빨래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다만 사용한 수건들
다 세탁한 후에
널어 놓고
퇴실해야합니다.
3일차
미리 예약한 우수리스크 투어 미팅하러 -
전날 먹었던 수프라 앞으로 갑니다.
하늘이 정말 맑아서
오레오 아이스크림을 먹었네요.
행복(제일 예뻤던 하늘입니다)

우수리스크 투어 시작!
우수리스크는
직접 기차를 타고 가도 되는데
시간때가 다 안맞고
잘 모르다가는 허탕을 칠 것만 같아서
미리 한인업체에 예약을 했는데
정말 후회없습니다.
30인 정도 한국인들이
같은 날 예약을 했고
버스로 2시간 정도 걸려서
우수리스크에 도착했습니다.
첫번째 간 곳이
이상설 선생 유허비입니다.
헤이그특사로 유명한 분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 분이 가시는 길목마다
항일 단체가 설립되었다고 하고
다시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죽어서 이 강에 뿌려달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이 강이 동해상으로
한국으로 간다고 하네요)
강과, 강이 보이는 유허비에서
추모를 합니다.


다음 장소는 발해 성터입니다.
정말 너무 멋있어요.
같이 가신 분들은
땅 값 물어보시더라구요.


식사는 고려인 업체에서
식사를 했는데
한 10개의 메뉴가 나오고
테이블에 둘러 앉아서
자기 양씩 떠서 먹었습니다.
차라리 뷔페처럼
떠서 먹었다면 좋았을 것 같은데
결국 가장 멀리 있는 것은
못먹어봐서 아직도 궁금합니다.
맛은 그런대로 다들 좋았어요.
중국과 러시아, 한국이 음식에
섞여 있을 수 밖에 없겠죠.
제 취향 호 입니다.
매일도 먹을 수 있습니다.
(약간 애기입맛이죠)


먹고나서 발해 거북이로 추정되는
석상이 있는 우물에도 가보구요.

만지면 아들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고합니다.
아들 원하시는 분들은
블라디보스톡 우수리스크 추천!
지금은 학교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인데,
하늘이 너무 예쁜 곳입니다.
이 건너편에
최재형 선생 고택(박물관)이 있습니다.

최재형 선생은
한국에서 블라디로 이주한
가난한 집의 자식이었는데,
너무나 배곯고 괴로워서
무작정 항구로 갔다가
선장인 양부모님을 만나게 되고
거두어져 교육받고
전 대륙을 항해하면서
인텔리가 된
특이한 케이스의 사람입니다.
(유진초이가 생각나긴 하는데)
이 분이 청년이 되어
블라디에 다시 돌아왔을 때
한국어도 가능하고
한인도 있다보니
사업수완도 있고
여러모로 블라디에서
대접을 받게 됩니다.
한인들에게 일을 주고
돈을 벌 수 있게 해주면서
독립운동의 무기 자금줄이
되게 됩니다.
그러다가 무차별총살을 당해
돌아가신 분이신데
어떻게 사람이
자신의 창창한 앞날을 두고
그렇게 숭고한 선택을 할 수 있는지

고려인 센터에 가서
아리랑 등을 들어봤습니다.


투어를 마치고 돌아가는 도중에는
항일 영화를 보여주셔서
보다보니 다시 블라디보스톡
시내로 돌아왔습니다.
박세라 가이드님 감사합니다.
처음에 이름만 듣고
여자인 줄 알았어요.
혁명광장을 한 번 보고,
에끌레어를 사고
(굼옛마당에서 있다가),
프리모르스키허니라는 꿀 집에서
꿀을 사고,
다시 클레버마트에서 식료품을 사고,


클레버하우스 앞에
도우너케밥이라는
케밥 맛집이 있는데
이곳에서 생각지 않게
맛있는 케밥을 먹었습니다...!
(한입 먹고 왜 유명한지 알았어요)

짐을 두러 숙소에 들렀다가
이번에는 프리모르스키 극장에서 하는
오페라를 보러 갑니다.
사전에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예매를 했는데
하필 이 날은 뮤지컬이나 콘서트가 하지 않고
오페라밖에 없더라구요.
평일이라 시간대에
택시가 너무 막혀서
애를 먹었는데,
이곳은 거리비례요금이라
요금은 정상이었는데
문제는 오페라 시작한 후라
빠르게 들어가려고 했어요.
짐 스캔하고 위치를 찾는데,
극장 직원분이
자리가 많으니 다른 좋은 곳으로
옮기라고 하셔서 감동했습니다.
내용은 로미오와줄리엣 +
치정막장극이었습니다.
클라이막스 노래가 좀 인상깊었어요.
극이 끝나고 버스 타는 곳으로 뛰어가니
버스가 딱 와서
바로 숙소로 갈 수 있었습니다.


숙소로 돌아와서
같은 맥주와 납작복숭아,
에끌레어(크림으로 속을 채우고
겉은 초콜릿 따위로 덧입혀 만든
길쭉한 모양의 빵)를 먹었습니다.

에끌레어 맛은 쫀득합니다.
한국에서 파는 것과
그 한가지가 다른데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사먹을만 합니다.
4일차 마지막 아침
이제 숙소(2박)를 나와
짐을 다시 아지트 짐보관소로 가지고 갔습니다.
맡겨 놓고, 택시를 불러 마약등대로 고고
물 때 맞춰서 들어가야
등대에 손도장을 찍고 나올 수 있는데
제가 갔을 때는 물이 차오르고 있어서
저만 들어갔습니다.
자갈에 맨발이 지압이 많이 되어서
아팠는데
꿋꿋이 등대를 보고 오려구요.
가까이서 본 등대는 정말 멋있었어요.
파란 하늘에 새하얀 등대와 또 파란 바다

발을 털고 다시 양말을 신고 택시를 잡아서 (인터넷도 잘 안터질 수도 있고, 택시가 잘 안잡힌다고 하는데 한번에 잡혀서 다행이었네요) 블라디 시내에서 멀지 않은 모비로 가기로 했습니다.


좀 뭐가 없었는데
태극기와 국화가 꽃혀 있더라구요.
걸어서 현지인 시장에도
가보기로 했어요.
가는 길들이 초록초록해서
기분이 좋았는데
현지인 시장은 조금 더 깔끔하고
식료품 파는 것도 좋았던 느낌입니다.
밤이었으면 킹크랩을 사가는 것인데
해동이 되기 때문에
바로 가져갈 수가 없어서
패스했습니다.
해적커피가 있길래
초코음료를 사서
먹으면서 걸었습니다.

오그뇩에 가서 식사를 하려고 했는데
건물이 너무 커서
잘못 오그뇩바에 들어가기도 했고
예약 안했는데
어떻게 2층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네요.
시킨 음식이 맛이 슴슴한데
제 취향이 아니고
우유에 밥 만 것 같은
느낌의 요리가 있어서
별로 못먹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러시아 정교회 건물
(밤에 정말 너무 예쁘게 반짝반짝 빛남)
낮에도 웅장하고
내부는 삐까뻔쩍해서 신기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버스를 타고
독수리전망대에서 내렸는데
길을 헤매서 두배로 걸었습니다.
정말 잘 못가면
뒷편 철창쪽으로 간다고하니
정말 유의하셔야 할 것 같고,
푸니쿨라타고 내려가시면 안됩니다!
푸니쿨라를 타는 건
아래 지대에서 독수리전망대 쪽으로
올라올 때 타는 것이고
내려가면 군사광장쪽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내려가면 독수리전망대 빠이니까
내려가는 실수를 하지 마셨으면 해요.
독수리전망대는
육교 타고 더 올라가서
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교각이 보이는데
어젯밤에 극장에서 본 그 다리입니다.
여러 포즈로 사진도 찍고
여기에 결혼 사진 찍으러 온
커플도 봐서 신기했습니다.

전망대를 구경하고
푸니쿨라를 타고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두 분이 두 푸니쿨라에 각각 계신듯 한데
아까 잘 못생각하고
징수당한 비용 다시 올 때
빼주겠다던 약속 지키셔서
감사했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꽃과 잠수함을 보고



따라 걸으면 혁명광장이 나오는데
나왔더니 장이 열려 있었습니다!
우유광고하는 젖소들이
춤추는 것도 지켜보구요.


블라디보스톡 기차역에도 가봤습니다.
기찻길이 쭈욱 있고
주변에는 율브리너 동상도 있어
멋있더라구요.


다시 분수광장을 따라
해양공원에 내려가
관람차를 한바퀴 타주며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해져가는 분수광장 멋있는데
해 지고나면 술취한 백인들이
가끔 시비걸더라구요. (조심)

바로 옆에 있는
우흐뜨블린이라는 곳에서
팬케익을 먹었는데
여기 진짜 맛있었어요.

현지인 식당에서
버거랑 맛없는 커피를 먹고

짐보관소에서 짐을 찾아서
아지트 샌딩버스를 타고
공항에 갔습니다.
새벽행 샌딩 버스가 와서 탔는데
그 사이 앰뷸런스가
현지인을 모셔가는 모습이
아픈 사람이 걸어 나오고
하나도 돕지 않는 모습을 보고
러시아인들 정말 세구나
싶었습니다.

그렇게 블라디보스톡 여행이
끝이 났습니다
한국이랑 멀지도 않으면서
부담없이 갈 수 있는 곳이라
휴가없이도 가봐야지 싶었는데
코로나로 못가는게 너무 아쉽습니다
조선인 외양의 미국인으로
등장했던 유진 초이(이병헌 분)은
실존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드라마 속 유진 초이는
조선시대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났는데요.
억울하게 죽은
부모의 모습을 뒤로 한 채
미국으로 떠났죠.

낯선 외양의 조선인을
가만 두지 않았죠.
잦은 폭행에 시달렸습니다.
역경을 이겨내고
유진은 미군 장교가 되죠.
미국에서의 삶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이후 미국 공사관 영사대리로
조선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요.
일제에 저항하는 애기씨
'고애신'(김태리 분)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를 도와 항일운동하다
결국 일본군의 손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유진은 물론 허구의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삶을 살다 간
독립운동가를
실제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독립운동가 황기환입니다.
유진과 마찬가지로 미군인데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프랑스, 영국을 거쳐
미국에서 활동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입니다.

황기환은 평남 순천 출생입니다.
10대 후반이던 1904년
미국으로 떠났죠.
미국에서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는 등
온갖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후 1917년,
미국의 1차 세계대전 참전과 동시에
지원병으로 입대하게 됩니다.
유럽 전선에 투입되는데요.
그는 당시 중상자 구호를
주로 담당했습니다.

전쟁은 1918년에 끝났습니다.
2년간 유럽 전선을 누빈
황기환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훗날 임시정부 부주석이 되는
김규식의 제안으로
프랑스 파리로 이동합니다.

당시 파리는
종전 후 국제정세 논의의
중심이었는데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곳에서 강대국들을 상대로
대한독립의 당위를 알리는
일을 시작했죠.
여기서 황기환은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서기장을 맡아 활동했습니다.

황기환은
임시정부에 더없이 귀중한
인재였는데요.
뛰어난 영어 실력과
서양 문화에 익숙한 태도,
미군 복무 경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황기환은 프랑스, 영국, 미국 등
1차 대전 승전국을 돌아다니며
대한독립의 당위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당시 러시아를 거쳐
영국까지 온 한인 노동자들이
일본으로 강제 송환될
위기가 있었는데요.
황기환이 영국 정부를 설득해
이를 막아냈습니다.

'미스터션샤인' 마지막 회에 등장했던
영국 기자 역시 실존 인물인데요.
황기환은 영국인 종군기자
프레데릭 메켄지 등을
상대로 독립의 당위성에 대해
끈질기게 알렸습니다.

메켄지는 황기환을 만난 이후,
의병활동과 3. 1운동에 대해
꾸준히 취재했습니다.
1920년에는
'한국의 독립운동'이라는
책까지 썼습니다.

드라마 속 유진은
사후 조선 땅에 묻히는데요.
"고귀하고 위대한 자,
소풍같은 조선에 잠들다"라는
묘비명이 남겨졌죠.

황기환의 묘지는
80여 년이 지난 2008년
뉴욕의 한 공동묘지에서
발견됐습니다.
유해의 국내 송환은
아직 어려운 처지라고 합니다.
닭도리 탕
퇴근길이었다.
아까부터 서너 걸음 뒤로
뭔가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의 앞엔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낯익은 모습의 초라한 행색의
한 중년 여인이 있었다.
누구지?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잃어버린 시간 한 토막이
문득 스쳐 지나간다.
바로 친구 형용이의 부인이다.
그래 20여년전 결혼식하고
서울 근처에 신접살림
냈다며
경기도 부천역 부근의
방 둘 짜리 300만원
전셋집에서 친구들 불러
집들이했던 중학 동창
'조형용'의 부인이었다.
차린 건 많지 않았지만
정성이 묻어났고,
우리는
그날 맥주와 소주를 벗 삼아
옛 얘기하며
밤을 지새웠지.
그리고 그게 전부였나 보다.
그 친구는 리비아의
아랍대수로 건설 공사 현장
으로 떠났고,
무심한 우리들은 그 뒷 소식조차
챙겨보지 않은 채
여기까지 달려왔다.
운 좋게 아직 대기업 계열사에
부장으로 있는 난
그래도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부천 집들이에 갔던 벗들도
하나 둘 명퇴다,
정리해고다, 구조조정이다 하는
두어 차례의
칼바람을 벗어날 수 없었고,
요즘은 아예
모임자체가 형상화된 셈이다.
가끔씩 생각 나,
홀로 포장마차에서
비우는 소주와 벗하는
추억으로만 곱씹곤 했다.
그런데 그녀가 왜?
이름을 기억 못하는
내 머리에 너무 화가 났지만
"저... 혹시 형용이 부인...
아니시던가요?" 란
말로 그녀에게 첫 말을 건넸다.
그녀는 어색하고
또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인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지금 남편이
병원 중환자실에 있다고 답한다.
반갑기도 했지만
무슨 급한 상황이 생겼다는 느낌에
함께 그곳에
가자고 했더니
갈 수가 없다고 한다.
남편은 중동에서 돌아와
그럭저럭 거기서 번 돈으로
지내왔는데,
3년 전 폐암 진단을 받고
수술과 항암치료를 반복하던 끝에,
결국 다음 주면
생을 마감할 거라는
병원의 통보를 받았다는 거다.
그러면 이승을 떠나기 전에
얼굴이라도 봐야겠다고 하니
그제서야
그녀는 내게 용건을 말한다.
아무도 없어 나를 찾아왔노라고.
중환자실 입원 이전까지 나온
병원비는
부천에 있는 아파트를 처분하고
어렵게 사는 친정아버지로부터
도움을 받아 지불했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는
거였다.
병원 측은 당장 이삼일 내로
밀린 병원비
3천만원을 내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내보내겠다는
거였다.
평생을 가족 위해 살아온 남편에게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라도
편하게 해드리고 싶다는
눈물 섞인 형용의 부인의 말에
억장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
나라고 월급쟁이인데
뭔 대수가 있을까?
순간, 카톡을 통해
온라인상으로 자주 대화가
되는 벗들이 떠올랐다.
일단 형용의 아내를
집으로 데리고 함께 들어갔다.
거실에서 집사람과
옛 얘기 잠깐 시키고는
동창생의
마당발인 ‘이시무’ 라는 이름의
총무에게 전화를 했다.
사정이 이런데
내가 좀 여유가 있으니,
1천만원 마련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자 시무는
자기도 은행 빚이 없는 건 아니지만
거의 정리되었고,
보험 겸 저축상품 장기 가입한 거
해지하면 5백만 원은
모을 수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 친구들에게
사정을 전하겠다고 했다.
많은 동창들이
적게는 몇 만원에서부터
많게는 수 백 만원에 이르는 돈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시무 계좌로 보냈다.
형용은 3천만원 조금 넘게
돈이 모아지던 날
새벽 눈을 감았다.
마지막 힘을 다해 친구들에게
하늘에 가서라도
그 은혜 갚겠다는 말을
아내와
두 남매 앞에서 남기고.
우린 모두 벽제 장례식장에서
그를 한 줌 재로 보냈다.
돌아오는 길,
진관사길 하늘은 잿빛이었다.
아니, 우리 모두의 가슴은
먹빛이었다.
차창도 울고 가로수도 울었다.
우리 모두가 울었다.
10여년 전의 일은
그렇게 우리들 기억에서
서서히 지워져가고 있었다.
세월이 흘렀다.
형용의 부인은
서울 변두리에서
테이블 두 개짜리
조그마한 닭도리탕 집을 냈다.
처음엔 모든 게 서툴렀다.
설익은 감자를 내동댕이치며
육두문자로 시비를
거는 주정꾼들은
그래도 나은 손님이었다.
인근에 먼저 영업 하던
큰 식당 주인 부부가 와서
괜시리 욕하며,
여자 혼자 남자 꼬시려고 하느냐며
비아냥거릴 땐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는 그 모든 걸 딛고 섰다.
먼저 가장 신선한 채소와
가장 맛있는 고춧가루를 확보했다.
그리고 김치며 밥을 손수 정성껏 만들었다.
육수를 만들기 위해
별도로 닭 두 마리를 따로
투자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쳐
그녀는 다른 곳에선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최고의 닭도리탕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인근에 금세 소문이 퍼졌다.
그 맛과 정성이 명성을 만들었다.
'식객'을 쓴 허영만 선생이
찾아와서는 최고의 찬사와 함께
''조선반도 최고 닭도리탕" 이라 쓴
사인을 남겨줬다.
그렇게 해서
"조형용 닭도리탕"은
지금 월 매출만 1천만 원이
넘을 정도로 단골이 늘었고,
상표등록까지 마친
서울 최고의 맛 집이 되었다.
밴드를 통해 늘 만남을 실천해온
번개파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조형용 닭도리탕'에
모여들었다.
동창 6백 명 가운데
그 집 모르는 친구는 없었다.
멀리 천안에서, 강릉에서조차
가족들? 서울 행사를
그 집에서 했다.
괴산에서 프리랜지로
들판에 풀어
놓고 키우는
토종 자연 청정 양계 업을 하는,
또다른 동창이
그 소식을 접하고는
영원히 최고의 닭을
생산원가에 납품하기 시작하면서
식사 때마다
대기하는 손님 줄이
2백 미터 넘게 길게 늘어설
정도였다.
형용의 아들은
가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반듯하게 자랐다.
바르게 자식 교육에 힘써온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지금은 한국의 국가대표 기업인
현대 자동차의 전략기획실에 입사,
글로벌 마케팅 아이디어로
국가의 부를 창출하는 초석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늘은 정말 기분 좋은 날이다.
형용의 아내가 내게 문자를 보냈다.
"혹시 저도 형용씨 친구 분들
밴드에 정식 멤버로
가입할 수 있도록
해주실 수는 없는가요?“
물론 예쓰다.
누구에게 물을 것도 없이 예쓰다.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을 시무에게도 전했다.
시무는 고지할 것도 없이
우리 모두를 이렇게 결속 시켜준
형용이 가입하는 것보다
100배 더 반가운 일이라며
그녀를 밴드로 불렀다.
그녀는 밴드가입 인사를 이렇게 했다.
"세상에... 저는 수어지교(水魚之交)니,
문경지교(刎頸之交)니 하는 말들은 그냥
책에서나 있는 말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형용씨가 친구들한테 잘 한 것도
없는데,
어쩌면 친구들의 사랑이 이렇게
클 수 있는지 참으로 고마웠어요.
전 정말 기대하지도 못했어요.
제가 그 은혜 평생 갚아나가며 살게요.
그리고 형용씨와 제가 만들어 키운
저희 큰 녀석이
지난달 좋은 아이디어로
마케팅 실적 높였다는 공로로
회사로부터 특별 인센티브
5천만원을 받았습니다.
그 돈 전액을 저도 회원이 된 이 밴드,
바로 우리 남편의 동창생 모임의
기금으로
기부하고자 합니다."
그녀는 바로 우리 모두의 우정이었고,
우리 모두의 사랑이었다.
우리 모두는 뜨거운
물줄기가 눈가에서 흘러 내리는 걸
그 밴드 글
읽으며 억제할 수 없었다.
친구의 이름으로 살아 있는
그 닭도리 탕 집은
전 세계 어떤 식당보다도
가장 눈물 깊은
사연을 안고 출발했다.
하지만 어떤 식당도
해내지 못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편안한
벗들의 안방이 되었다.
오늘 봄볕이 무척 따사롭다.
이 저녁, 퇴근길이 무척이나 가볍다.
아니 기대가 가득하다.
분명, 굳이 밴드에 고지하지 않아도
늘 600명 가운데 10여 명은
그곳에서 감자와 닭다리를
뜯으며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웃고 떠들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말이다.
사랑과 우정의 크기는
어느 게 더 클까?
그 부등호의 결말을
혼자 셈해보며
회사를 나선다.
오늘은 형용의 아내를 위해
그녀가 좋아하는 오메기 떡
한 봉지를 사가야겠다.
- 끝 -
친구라는 힘 있는 우정과 사랑을
생각하게 하는
감동적인 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