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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시모음
가방들 / 이리영
가는 곳마다 다른 사람의 가방을 들고 나왔다
내가 모르는 슬픔은 슬픔이 아니므로
나는 고기를 썰고 당신과 입을 맞추고 저 햇빛 아래 빈 유모차를 끌고 고기를 씹고 인공호수에 물고기 밥을 뿌리고
어떤 가방은 끝내 열리지 않아 그런 날이면
철조망을 따라 걸었다 내가 아는 슬픔 또한 슬픔이 아니어서
붉은 손톱자국 부서진 피아노의 건반들 깃털만 가득한 새장 당신이 키우는 식물의 그늘을 지나
어느덧 커튼이 쳐진 거실에 당도하는 것이었다
푸른 수영장 텅 빈 바닥에 버려진 갈색 가방처럼
아무것도 좇지 않고 누구의 손도 마주 잡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당신만 아는 슬픔은 슬픔이 아니므로
커튼 너머 저 햇빛 아래 아무도 울고 있지 않았다 믿기지 않아
나는 로즈메리 이파리를 씹고 검은 개의 목줄을 쥐고 언덕에 오르고 책을 읽고 당신의 두 손을 내 가슴에 가만히 얹고 모두가 떠나고
벽에 기댔다 기대고 나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아 누구든 기다리는 자세로
욕조에 물이 넘쳤다
가방들이 바닥과 함께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 2018년 하반기 「시인동네」 신인문학상 수상작
가방 / 이병률
딛고 있는 발 아래쪽을 생각하다가
문득 아래가 여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커다란 덩어리를
아주 물컹한 육체를 밟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 사실도 엄청난 소문이 될 것이지만
발 아래는 움직이면서도 가만히 있어보라는 듯
그러면 잠시라도 눈을 맞출 수 있을 거라는 듯
눈썹 끝으로 겨우 처마 끝을 디딘 듯
잎사귀를 밟은 듯
멈칫 발은 놀라지만
여러 가지 경우를 대신해서
우리는 밟고 디딜 곳이 있어 나아질 것이라고 믿어왔다
우리가 딛고 사는 것은 알고 보면
고래의 뒤편이거나 고래의 심장 쪽
우리가 마시고 사는 것은 알고 보면
고래가 사는 수족관의 물
세상 끝에 살고 싶은 섬 하나가 있을 거라 믿는
잘못된 저녁에는
저마다 고래에서 내려
신발을 털고 가방 안으로 들어가서는
무심히 밥냄새를 핥거나
철저히 눈을 감는다
가방, 혹은 여자 / 마경덕
그녀는 무엇이든 가방에 넣는 버릇이 있다. 도장 찍힌 이혼
서류, 금간 거울, 부릅뜬 남자의 눈알, 뒤축 닳은 신발. 십 년
전에 가출한 아들마저 꼬깃꼬깃 가방에 구겨 넣는다. 언젠가
는 시어머니가 가방에서 불쑥 튀어나와 해거름까지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녀의 취미는 접시 던지기, 지난 봄, 던지기에 열
중한 나머지 벽을 향해 몸을 날린 적도 있었다. 틈만 나면 잔
소리를 향해, 바람난 남자의 뻔뻔한 면상을 향해 신나게 접시
를 날린다. 쨍그랑 와장창!
그녀의 일과는 깨진 접시 주워 담기. 뻑뻑한 지퍼를 열고 방
금 깨뜨린 접시를 가방에 담는다. 맨손으로 접시조각을 밀어
넣는 그녀는 허술한 쓰레기봉투를 믿지 않는다. 적금통장도
자식도 불안하다. 오직 가방만 믿는다. 오만가지 잡다한 생각
으로 터질 듯 빵빵한 가방, 열리지 않는 저 여자.
어느 가방의 죽음 / 정진영
늙은 도편수가 눈 위에 연장 가방을 내려놓는다 끝도 없이 갈라지는 두 갈림길, 더 이상 메고 갈 수가 없다 축 늘어진 가방은 어깨 줄을 사지처럼 늘어뜨리고 길바닥에 그대로 누워버린다 한 뼘 벌어진 옆구리로 가루 눈발들 몰려든다 끝내 대목장이 되지 못한 그가 가방 입구를 손아귀에 쥐고 속이 다 쏟아진 상처 꿰매어 주듯 지퍼를 조심조심 여며준다 평생을 끌고 다녀 말 못하는 새끼보다 더 애처로운, 한낱 가방이었을 뿐인 가방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린다
남은 온기라도 마음껏 가져가라, 단 한 번도 온기를 바라지 않았으니,
꼭 제 테두리만큼 눈을 녹이며,
아주 특별했던 목수의 생이 흰 눈 속에 묻힌다 보르헤스 쌍갈랫길 정원 안에 소리 없이 묻힌다
트렁크 / 김언희
이 가죽 트렁크
이렇게 질겨빠진, 이렇게 팅팅 불은, 이렇게 무거운
지퍼를 열면
몸뚱어리 전체가 아가리가 되어 벌어지는
수취거부로
반송되어져 온
토막난 추억이 비닐에 싸인 채 쑤셔박혀 있는, 이렇게
코를 찌르는, 이렇게
엽기적인
가방을 든 사내 / 김 안
어두운 강변에서 그는 허리를 숙여 검은 가방을 연다 검은 가방 속에서 몇 개의 어둠을 꺼내 먼지를 털어낸다 그는 어둠을 펴들고 이 새로운 도시의 지리를 익힌다 그는 꺼낸 어둠을 강물로 던진다 강물 속에서 물고기의 머리를 한 사내가 그 어둠을 향해 몸을 날린다 달걀같이 둥글고 매끈한 물방울이 그가 있는 다리 위로 떠오르고 그는 그 물방울들을 잡아 검은 가방 안에 넣는다 다리 위에는 나체의 연인들과 교통사고 사망자들과 내일 학교를 가야하는 아이들이 뒤섞여 보이지 않는 가려운 상처를 긁어주고 있다 그는 꺼진 가로등의 전구를 빼내어 달걀같이 둥글고 매끈한 물방울을 집어넣는다 가로등으로부터 명암을 만들지 않는 빛이 뿜어져 나온다 다리 위의 사람들은 제 무덤을 찾아 떠나고 순찰을 돌던 경찰들이 그들을 쫓아 달리기 시작한다 그는 다리 위에서 강물로 향한 보이지 않는 사다리를 타고 다시 강물로 돌아간다 그의 검은 가방이 둥둥 흘러간다
참 큰 가방 / 권주열
강동 바닷가 마을에는
참 큰 가방이 하나 있다
지퍼 같은 수평선을 열면
멸치 가자미 꽃게 고래까지 온갖 잡동사니가
쏟아진다
가끔은 타고 나간 배 한 척 다 집어넣고 온 어부들이
신문에 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 날,
그 가방 속
가득 찬 것도 아니다
그 가방 그 날, 제법 더 묵직한 것도 아니다
강동에 오면
날마다 지퍼 같은 수평선을 열고
그 가방 속에서 둥근 해를 끄집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방에 손을 넣을 때 / 박현수
가방을 열면
소(沼)처럼 검푸른 심연이 출렁인다
당신 손이
아무리 깊이 휘저어도
닿지 않는 어둠이 있다
소용돌이에 휩쓸려
가끔씩 물건들이 사라지는 곳
어느 순간 손등이
다른 허공에 놓인 듯 서늘할 때
블랙홀 속에
손을 집어넣고
우주의 자궁을 더듬고 있는 당신!
닿지 않는 어둠 속 어딘가
당신의 슬픔이
희미하게 빛날 법도 하지만
어느 가방도
한 사람의 일생을 다 담을 수는 없다
미스 프로이트의 가방 / 감옥전
여행용 가방이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를 질질 끌고 가고 있다
여자가 뒤뚱거리며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할 때마다
가방은 소나 양을 몰 듯
짧고 팽팽한 여자의 다리를 몰아세운다
바람이 가방을 붙들고 늘어질수록
지능적인 손잡이는 여자를 더 세게 움켜잡는다
허둥거리며 가방을 쫓아가는 저녁은 양수가 터진 듯
미끌거리는 그림자를 질질 흘리고 있다
입을 꽉 다문 가방도 맘 가볍진 않았으리라
여자의 사생활에 끌려가던
하늘색이 점점 어두워진다
복잡한 발길들이 우선멈춤하고 선 공항입구 교차로
신호등이 길을 접었다 펴는 사이
가방은
비행기의 자궁 속에서 새롭게
콤플렉스를 착상 중이다
여행가방 / 박서영
지퍼의 개화(開花),
그건 낡은 가죽가방을 열어
걸어온 길을 쏟아내는 것이다
폭우가 쏟아지는 가방
폭설이 내리는 가방
꽃 사태가 일어나는 가방
그건 파문을 모아두는 일이었는데
쏟아내 보니 그랬다
떠나온 풍경은 죄다 어딘가 아파 보였다
모아 두는 게 아니었는데,
지웠어야 했는데,
가죽가방 하나 홀쭉해져서
온몸에 물결문양 새기고
바람문양 새기고 잠들어 있다
가죽 가방 / 김해자
자궁을 들어냈다, 고 말하는
여자의 웃음에서 만져지는 비릿한 핏덩어리
슬픔은 이렇듯 형이하학적이다
나이 먹을수록 여자의 복부는 부풀어갔다
봉분처럼 동그랗게 솟아오른 허리 아래, 여자는
뭐든 쑤셔넣기에 안성맞춤인 가방을 숨기고 다녔다
아이들이 먹다 남긴 음식도 우겨넣고 아무렇게나 빨래를 던져놓듯
함부로 내뱉은 남편의 욕설과 발길질과 갖고 싶지 않은 짐조차 다 떠맡아
꾹꾹 눌러 담은 여자의 가방은 속을 채우자 옆으로 뒤로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숨기기 좋은 질 좋은 가방 속에서 함부로 구겨넣은 비릿한 슬픔 때문에
종유석처럼 암 덩이가 자랐을 것이다 칸칸이 달린 지퍼를 열기라도 하면
꽁꽁 담아 둔 선사시대의 비릿한 시간들까지 줄줄 새어나오는
가죽 가방 속엔 태어나면서부터 환대 받지 못한 탄생의
울음소리와 다리 벌리고 하늘을 향해 치켜든 채
여자라는 동물만이 짓는 낙태라는 죄,
속에서 집어삼킨 슬픔이 숨어서
암각화를 완성해 갔다
한때 타오르던 아궁이였던 그곳은
한때 차오르는 우물이었던 그곳은
한때 고귀한 탯줄로 연결된 생명이 자라던 그곳은
이제 텅 빈 가방이 되었다
심장이 하나 더 있다는 걸 남자들은 알까
여자가 허리 아래 숨겨놓은 그곳이 또 다른 심장이라는 걸 알까
그곳이 밖으로만 뻗쳐나가 숨을 곳조차 없는 풀죽은 남자가
새처럼 팔딱거리다 날개를 쉬고 나오던
텅 빈 중심이었다는 걸
가방 / 송찬호
가방이 가방 안에 죄수를 숨겨
탈옥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시내에 쫘악 깔렸다
교도 경비들은, 그게 그냥 단순한
무소가죽 가방인 줄 알았다고 했다
한 때 가방 안이 풀밭이었고
강물로 그득 배를 채웠으며
뜨거운 콧김으로 되새김질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했다
끔찍한 일이다 탈옥한 죄수가 온 시내를 휘젓고 다닌다면
숲으로 달아난다면
구름 속으로 숨어든다면
뿔이 있던 자리가 근지러워
뜨거운 번개로 이마를 지진다면,
한동안 자기 가방을 꼼꼼히 살펴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열쇠와 지갑과 소지품은 잘 들어있는지
혹, 거친 숨소리가 희미하게나마 들리지 않는지
그 때묻은 주둥이로 꽃을 만나면 달려가 부벼대지는 않는지
가방을 버려야 할 시간 / 이미란
바다엔 얼마나 많은 가방들이 떠다니고 있을까
겨울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겨울은 지금이 성수기인데
내 낡은 가방은 너무 숨이 차다
가방을 버리러 갈 때가 되었나보다*
멍든 별의 두께로 쌓여진 비린 가시의 눈물을
장미도 왕자도 아닌 이율배반의 모래사막을
봄날의 아지랑이로 남아있는 푸른 기억의 페이지를
여름의 횡단보도에 묻어둔 길 잃은 사랑의 안부를
손바닥의 상처로 눌러버린 붉은 도장의 날들을
내 가방은 지금 너무 무겁다
난로 옆 가스통처럼 위험하다
만개한 지뢰의 꽃밭이다
복상사의 둥근 탁상시계다
숨어있는 것들은 향기가 없다
식어버린 짬뽕 국물이다
아직은 빈 꽃병의 침묵만 유효한 계절
겨울이라는 모반의 실내악을 듣는 계절
늦게 오는 것들은 슬픈 손잡이와 지퍼가 달려있다
바다엔 젖은 가방이 토해낸 이별의 뗏목만 요란하다
————
* 전경린 소설 「바다엔 젖은 가방이 떠다닌다」중에서
서봉氏의 가방 / 천서봉
집어넣을 수 없는 것을 넣어야 한다,
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거리는
더 커다란 가방을 사주거나
사물을 차곡차곡 집어넣는 인내를 가르쳤으나
바람이 불 때마다 기억은 집을 놓치고
어느 날, 가방을 뒤집어보면
낡은 공허가 쏟아져, 서봉氏는 잔돌처럼 쓸쓸해졌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
가령 흐르는 물이나 한 떼의 구름 따위,
망상에 가득 찬 머리통을 담을 수 있는, 그러니까
서봉氏와 서봉氏의 바깥으로 규정된 실체를
통째로 넣고 다닐 만한 가방을 사러 다녔지만
노을 밑에 진열된 햇살은 너무 구체적이고
한정된 연민을 담아 팔고 있었다.
넣을 수 없는 것을 휴대하려는 관념과
이미 오래전 분실된 시간
거기, 서봉氏의 쓸쓸한 가죽 가방이 있다.
오래 노출된 서봉氏는 풍화되거나 낡아가기 쉬워서
바람이나 빗속에선 늘 비린 살내가 풍겼다.
무겁고 질긴 관념을 담고 다니느라
서봉氏의 몸은 자주 아프고
반쯤 벌어진 입은 늘 소문을 향해 슬프게 열려 있다.
가방이 바뀌었다 / 정영선
배기즈 클레임(baggage claim)이 멈췄는데 가방이 없다
텅 비어버린
하이퍼 텍스트 방식으로 생을 바꿔 쓴다면
그는 손등 혈관이 도드라져 있다
바람이 흙을 걷어낸 벌판 같은 얼굴이다
일순 다정이 지난다
그의 집안에서 의심은 덩굴처럼 자라고
창문을 감싼 덩굴 보라꽃이 고개를 디밀고
떨려온다
쇄골이 드러난 블라우스 첫 단추를 잠근다
머릿속은 설원, 이전의 기억 지워졌다
구석을 찾는 몸의 습관이 갸우뚱해도
나는 가방으로 결정되는 사람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유괴는 즐거워
처음부터 그곳에 살았던 듯 싶다
초인종이 울리면 나는 없는 사람
천하루가 끝난 날 천둥이 친다
그 밤 숨겨진 가방이 내 주거지와 출생을 인증한다면
기억이 사라진 나는
나일지라도 나와 상관없는 자라고 단정하는데
안내원이 와서 영어로 말한다
나로 돌아올 때까지 가방은 대기 중이라고
내 가방 속 그림자 / 유현아
내 그림자가 하나일 거라는 고정관념은 버리는 게 좋아 처음부터 그림자가 많았던 건 아니야 너희들이 그림자를 잊고 지내는 동안 너희들의 그림자를 주웠을 뿐이야
밤이면 가방 속 그림자들은 기지개를 켜며 하나씩 튀어나오지 그리고 어느 틈엔가 창문이나 틈새에 딱 붙어 있어 그들의 일상은 붙어 있는 거야 유리창은 그림자들의 훌륭한 장막이 되기도 해 가끔은 유리창 너머로 슬며시 사라지기도 하지만 걱정 없어 내 가방 속에는 아직도 그림자들이 우글우글하니까
우울할 때면 난 가방 속에 숨겨놓았던 그림자들 중 하나를 골라 공연을 하지 그림자들이 공연하는 모습을 본 적 있니 보고 싶다면 언제든지 초대해 줄 수 있어 하지만 너의 그림자라고 착각하지는 마 내 가방 속에 들어온 이상 너의 것은 없으니까
내 가방은 그림자들로 꽉 차 있어 어느 때건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주지 변신의 능력이 무궁무진한 그림자들이야 울고 싶을 땐 웃음의 방식으로 그림자를 펼치지 슬픔의 모양은 어울리지 않아
잠깐, 가끔씩 뒤를 돌아봐 혹시 아니 내가 너의 그림자를 줍고 있을지
가방 같은 방 / 김소연
쌀 옆에는 운동화가 있다
생리대 옆에는 오렌지가 있다
과도 옆에는 상비약이 있다
팬티 옆에는 서류봉투가 있다
가방을 열어 변기를 꺼낸다
손수건을 열어 욕조를 꺼낸다
발바닥을 열어 슬리퍼를 꺼낸다
땡볕을 궁리하며
나날이 시커매진다
빨래를 궁리하며
나날이 더러워진다
솥을 들고
내 나라를 삶아
새로운 친분을 도모한다
불법체류자와 함께 나누어 먹는 두부조림
발톱에 매니큐어를 칠하는 레바논 여자와 함께 나누어 먹는 생수
혼자 앉아 계란 프라이를 먹어치운다
행주를 들어 내가 흘린 내 나라의 뉴스를 닦아낸다
모자가 이목구비를 먹어치운다
가방이 방을 먹어치운다
가방 하나 / 백무산
두 여인의 고향은 먼 오스트리아
이십대 곱던 시절 소록도에 와서
칠순 할머니 되어 고향에 돌아갔다네
올 때 들고 온 건 가방 하나
갈 때 들고 간 건 그 가방 하나
자신이 한 일 새들에게도 나무에게도
왼손에게도 말하지 않고
더 늙으면 짐이 될까봐
환송하는 일로 성가시게 할까봐
우유 사러 가듯 떠나 고향에 돌아간 사람들
엄살과 과시 제하면 쥐뿔도 없는 이문 없는
세상에
하루에도 몇 번 짐을 싸도 오리무중인 길에
한번 짐을 싸서 일생의 일을 마친 사람들
가서 한 삼년
머슴이나 살아주고 싶은 사람들
자주색 가방 / 김지명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작아
길을 잃어버릴 수 없는데
난민의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애초에 직각을 사랑했습니다
밟지도 밟히지도 않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
끓는 점 없는 억양으로
서류나 도시락, 필기구는 나란했습니다
정지된 세계는 유통기한 모르는 통조림 같아
자주 의심 많은 손이 생각을 부양했습니다
서류 대신 소곤소곤 표정들을 집어넣고
도시락 대신 모르는 지갑을 집어넣고
당분간을 닉네임으로 부착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날씨가 등장한 건지
얼마나 많은 손이 등장한 건지
찜찜한 등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배불리 모퉁이를 돌았습니다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작아
직각을 넘어서면 바닥입니다
뜻밖의 나무들이 계절 밖으로 자라도록 듬뿍 물을 주었지만
자주, 예측은 잘못된 예보처럼 대체로 흐렸고
내가 사는 마을의 둘레만큼 죄책감이 무성해지면
옆구리 터진 인물들은 줄줄
신체인지 시체인지
난민촌으로 유배된 얼굴입니다
여행가방 속의 아이 / 최형심
그는 기차를 탔습니까. 아니요, 그는 기차를 타지 않았습니다. 꽃들이 한쪽으로 눕는데 그는 기차를 탔습니까. 아니요, 그는 기차를 타지 않았습니다. 빗방울이 들이치는 창밖으로 봄이었습니까. 아니요,
그는 기차를 타지 않았습니다. 검붉은 통점 저편, 녹나무 숲에는 잠들기에 좋은 욕조가 있고, 물의 잠을 자는 아이가 있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 밤, 입천장에 별이 박힌 아이는 물만 마셨다는데,
배고픈 아이는 입천장의 별을 오래 만지다 첨벙첨벙 물속으로 들어가 기다란 그물에 몸을 드리우고 누웠다는데,
그런 밤이면 입천장의 별들이 부쩍 자랐고 눈썹까지 은빛 비늘로 뒤덮였다는데,
물 먹은 별이 날마다 자라 마침내 그의 머리를 뚫고 나왔을 때, 아이는 새아버지의 푸른 말뚝에 머리를 매달고 침묵을 침묵으로 답하고 있었습니다. 별들이 수면 위로 발자국을 찍으며 떠나고 있었으므로 그는 서둘러 여행가방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차고 투명한 살을 만지는 밤이 와서 아이를 떠난 별들의 전언이 푸른 심장과 맞닿았다는데, 그리하여, 당신을 꼭 잊어주겠습니다, 별들이 이따금 내려와 욕실의 차가운 문을 두드렸다는데,
은하로부터 흘러온 물방울과 눈알을 바꾼 아이는 울지 않았다는데, 웃지도 않았다는데,
그는 기차를 탔습니까. 아니요, 위태로운 밤이었으므로 그는 푸른 가방 속에 웅크리고 앉아 기차를 꿈꾸었습니다.
그는 기차를 타지 않았습니다. 푸른 여행가방 속에서 그는 바람과 몸을 바꾸었습니다.
가방의 존재 / 주민현
가방을 잃어버리고
어제와는 내가 조금 달라진 느낌이 들어
명함은 비에 젖어 부드럽게 찢어지겠지
간밤의 메모 뭉치는
자동차 바퀴 아래를 구르고 있을 거야
카드사의 전산망에서 사라진 내가
나인지 모르게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국수를 먹는다
집에서 개는 나를 몰라보고 꼬리를 치며
멍멍 짖는다
개집에는 내가 잃어버린 머리끈과 볼펜 뚜껑,
고지서 겉장이 찢어진 채 있다
주워, 네 거잖아
어떤 것들은 사라진 때부터
제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해
작아진 도트무늬 블라우스 가볍게 날아가고
풍선 같은 고무공 같은 꿈을 불어넣어줬던 선생님들도 함께 가고
이제는 인생의 고전이 되지 못하는
책들에 불이 붙어 날아가고
책상은 어쩐지 내가
모르는 내가 죽은 듯 낯설다
버려진 코카콜라 병을 모두 모아 두드리면
무질서한 음악이 되는 것처럼
수백 개의 썩은 달걀에서 태어난 병아리들이
놀랍게도 부화해 한꺼번에 삐악거리기도 하는*
나라는 가방
지구라는 가방 속으로
무엇이든 던지면
무엇이든 나의 새로운 가구가 된다
*조지아의 마르네울리시 쓰레기 처리장에서.
가방수집가 / 김향미
옆 좌석 승객이 목을 조른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가방을 뺏으려 한다
여기, 살려 주세요
거기, 이 소리 들리지 않나요
끝내 터져 나오지 못하는 비명은 발버둥의 크기로 가늠이 될 테지만,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는다
저항의 포기가 깊은 깨달음이라 생각한 적 있다
커다란 여행가방, 안에는
검은 나뭇잎과 푸른 눈발, 거짓의 혓바닥을 수없이 잘라 담았다
간혹 조인 숨통을 틔워 나의 발버둥을 즐기는
그것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
태어날 때부터 나를 노리고 있었던 것
모두가 귀가를 서두르는 중이다 버스는 노선을 벗어나지 않고
승객들, 묵묵히 큰 가방이다 기사와 승객, 모두
한통속일지도 모른다 버스의 좌석이 운명을 좌우한다
가방을 그냥 줄 수도 있었을 거다 이미 의지 밖으로 벗어난 건지도 모른다
저항이 포기되지 않는 건 깊이 꿈꾸기 때문이다
가방이 부려진다
여기는 꿈의 바깥, 검은 나뭇잎 뒹굴고 푸른 눈발 덮쳐오는 잿빛 숲이다
가방이 시작되는 이유 / 김송포
모르는 사람과
모르는 길에서
모르는 사이에 줄을 선다
모르는 사람과 사진을 찍는다 호떡을 먹는다 쇼핑을 한다 몸을 숨기면 안 된다
모르는 사람은 깍두기를 달라며 말을 건넨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면 고개를 끄덕인다
있어도 없는 듯 없어도 있는 듯 앞을 보고 걸으면 목적이 생긴다
모르는 사람은 지구에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내가 말을 걸면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여행을 가자고 한다
모르는 사람은 손을 든다 좋아요 커피를 마신다 뒷산이든 제주도든 해외든
모르는 사람과
모르는 곳을 걸으며
모르는 세계와 가까워진다
저 안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안에 내가 있어서
조건이 맞으면 티켓을 발부한다
가방의 준비는 시작된다
모르는 사람과
모르는 여행이 도처에 숨을 쉬며 불쑥 외로운 발들이 뛰쳐나온다
늙은 가방 / 마경덕
내 가방은 아니지만 내 가방이다. 며칠 전 전철에 두고 내린 가방이 고스란히 집으로 되돌아왔다.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빈털터리 가방, 내 건 아니지만 내 가방이다.
한때 불룩했던 가방. 주문만 하면 척척, 밥, 옷, 자동차, 손을 내밀면 돈뭉치도 나왔다. 가고 싶지 않은 곳엔 대신 가방을 보냈다. 일이 꼬여도 만능가방이 나서서 해결해 주었다. 가방이 있으니까. 가방만 믿고 가방은 가방이니까. 가방은 내거니까, 내 멋대로 여닫을 수 있으니까.
든든한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갔다. 커다란 가방을 들고 유학을 갔다. 가방을 털어 아파트를 사고 가방 때문에, 어른이 되고 아들을 낳고, 그런데 어느 날, 가방이 텅 비었다.
이런! 가방으로 아직 할 게 많은데,
가방의 배를 찢고
그 가방 속에서 나온 나는,
생각중이다
쓸모없는 가방을 어디에 버려야 하나
그놈의 커다란 가방 때문에 / 성미정
남편은 내가 끌고 다니는 커다란 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 있나 궁금해서 결혼했고
나는 남편이 내가 지고 다니는 커다란 가방을
받아주는구나 착각해서 결혼했고
결혼하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좀 더
커다란 가방만을 원했고
남편은 내가 온갖 잡동사니 쑤셔 넣고 다닐까
더 커다란 가방을 못 사게 하고
툭하면 좀 더 커다란 가방 때문에 다투면서도
나는 남편에게 더 커다란 가방이 왜
필요한지 이해시키지 못했다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고
남편은 내가 자기랑 헤어지고 더 커다란 가방을
끌고 다닐 꼴을 못 봐서 헤어지지 못하고
오나가나 그놈의 커다란 가방 때문에
만난 우리는 그놈의 커다란 가방 때문에
헤어지지도 못하고
그런데 이 시를 읽고 계시는 극소수의 독자 여러분
(크지 않은 가방에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우리 부부가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가 정말
커다란 가방 때문일까요
움직이지 않는 가방 / 조말선
움직이지 않는 가방을 들고 그가 돌아왔다 과묵한 가방이 그의 손에서 달랑거렸다 자크를 연 그의 입에서 하얀 이가 즐겁게 쏟아졌다 무거운 가방에 지친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큐 사인이 떨어졌을 때 관객들은 과묵한 가방을 주목했다 가방은 움직이지 않고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가방이 그를 들고 다녔을 뿐. 가방이 허공을 꽉 붙잡고 있었을 뿐. 가방이 오른쪽을 걷고 싶을 때 그가 재빨리 왼쪽으로 매달렸다 십 년의 유학생활 끝에 그는 더 이상 가방을 들고 다니기가 싫었다 가방에 끌려다니면서 가방에 배고파하면서 가방에 옷 색깔을 맞추면서 가방의 주인인 체하기가 싫었다 그와 가방의 관념을 바꾸었을 때 그는 움직이지 않는 가방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자크를 연 그의 입에서 즐거운 복종이 하얗게 쏟아졌다.
빈 가방 / 강연호
마지막으로 빈 가방을 버리기 전에 그는 무엇을 버렸을까
그가 버린 게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빈 가방을 버리기 전에 먼저 버린 것이 있을 것이다
증언에 의하면 언제나 가득 차고 무거웠던 그의 가방은
어느 날부터인가 조금씩 비어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버린 것들 중에는
물론 그가 버리고 싶어서 버린 것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버리고 싶지 않아도 버려야만 하는 것이 있고
삶이란 또한 꼼꼼히 챙겨도 조금씩 새어나가게 마련이므로
불룩하던 그의 가방은 점점 가벼워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방이 가벼워질수록 그의 어깨는
웬일인지 자꾸 처지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마침내 더이상 버릴 것 없어 가방이 텅 비었을 때
그는 결국 마지막으로 빈 가방을 버렸을 것이다
아니 지금 남은 것은 빈 가방이고 그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빈 가방 대신 그 자신을 버린 것 같기도 하다
아내의 가방 / 김륭
아내에겐 가방이 많다.
시집올 때 가져온 악어가죽 핸드백이 새끼를 친다. 평범한 디자인의 손가방만 네 개에다 보헤미안 스타일의 크로스백과 토끼털 고급 토트백 벨로체 다용도 보조가방 루이비통 복조리백이 있다.
여우꼬리가 장식으로 달린 김희선 숄더백은 지난달 카드로 긁었다.
쥐꼬리 월급에 목을 매고 사는 나는
언제나 성性에 차지 않는 아내의 가방 욕심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시뻘건 고무장갑을 끼고 매일 아침 찌-익, 여행용가방 지퍼를 열듯 방바닥에 눌러 붙은 내 배를 가르는 아내, 음매음매 눈으로 우는 소가죽지갑을 꺼내고 회사근처 지하노래방 마이크와 맥주병을 찾아내고 아뿔싸! 미스 金 입술도장까지 꺼낸다.
할부금처럼 밀린 섹스에게 잽싸게 칫솔을 물리자
지글거리는 프라이팬, 신이 났다.
속까지 부실하면 안 된다고 우유 한잔에 토스트 한 조각 물려주는
아내, 넥타이 꽉 졸라매면 루이비통 스타일의 복조리백이 되는 얼굴에 쪽쪽 뽀뽀도 해준다.
아침에 꺼낸 것들, 검은 비닐봉지나 장바구니로 담아올 수 없는 그것들
빳빳하고 싱싱하게 다시 채워오라고
날이 갈수록 배 불룩해지는 비닐가죽가방 하나
문밖으로 떠밀어놓는다.
가방 / 정호승
나를 가방 속에 구겨 넣고 출근할 때가 있다
휴지처럼 나를 구겨 넣은 가방을 들고 지하철을 탈 때가 있다
잠시 지하철 선반에 올려졌다가 신문과 함께 바닥에 툭 떨어질 때가 있다
지하철 문틈에 끼여 컥 숨이 막힐 때가 있다
그래도 가방 속에 구겨져 있으면 인간이 되지 않아서 좋다
무엇보다도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되는 남편이 되지 않아서 좋다
아내를 따라 성당에 나가 십자가를 바라보며 거짓 기도를 하지 않아서 좋다
나는 가방이므로 더이상 대출상환금을 갚지 않아서 좋다
친구에게 배반당하지도 용서하지도 용서받지도 않아서 좋다
언젠가 출장길에 부안 내소사 요사채 툇마루에 놓여 있다가
봄햇살에 깜빡 잠이 들어 잠 속에서도 새소리를 들었을 때
한강대교 아래로 휙 내던져져 물속 깊이깊이 가라앉아 있다가
고요히 나를 찾아온 물고기들과 뜨겁게 키스를 나누었을 때
나는 그 얼마나 행복했던가
나를 가방 속에 코 푼 휴지처럼 구겨넣고 퇴근할 때도 있다
회식이 있는 날은 술 취해 나를 잃어버릴까봐 미리 가방 속에 구겨넣는다
그런 날은 아내는 어디 가고 아들도 보이지 않고
노모만 밤늦도록 빈방에 늙은 텔레비전처럼 쭈그리고 있다가
가방이 와 이래 무겁노 하시면서 나를 받아주신다
가방에 애인이 있어요 / 박지우
인천국제공항 디트로이트행 출구가 닫힐 때, 나는
가방에 애인을 구겨 넣었다
바람에 찢긴 얇은 구름 한 채를 삼키고
오래도록 자크를 열지 않은 가방은 몸살을 앓았다
문자메시지에 계절을 전송해 주기도 했던
그 남자의 냄새 코끝에 달려있다
후두두 비가 내린다
빗물 속으로 녹아드는 나
그를 생각할 때마다 내 몸은 젖어들었다
비에 실린 바람의 무게
낡은 가방을 몇 번이고 놓고 싶었다
때론 깨진 거울을 넣어 상처를 내기도 했다
묵직한 가방,
그는 내 어깨에 실려 나를 끌고 다녔다
오랜 시간 침묵했던 그가 자크를 뜯어먹는 동안
중심을 이탈한 바람 한 자락 가방으로 들어간다
가방의 본색 / 곽문연
분신처럼 따라오던 가방이 사라졌다
바이킹의 흔적을 찾아
발칸반도를 누빈 크루즈 여행기간 내내 함께 백야의 정취에 젖었는데,
이건 미필적 고의
탈선한 가방의 의도가 궁금하다
허름한 청바지와 티셔츠, 발 편한 운동화와 소형 라디오, 강장제와 비타민
시의 종자들이 들어있는 가방의 실종
긴 여정이 기록된 메모들이 며칠 동안
몇몇 나라를 순례하고 돌아왔다
땀이 밴 청바지와 배터리가
소모된 라디오 앞에서 그의 본색이 드러났다
여정에 대한 용감한 반란들
다시 돌아온 가방 속
해마다 피던 진달래 꽃잎 한 장
함부로 떼지 못한 사내가
돌아오고 싶지 않은 본색의 날개를 접고 앉아있다
오래된 여행가방 / 김수영
스무 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 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방에 홀로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금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주워온 돌들은 어느 강에서 온 것인지, 곱게 말린 꽃들은 어느 들판에서 왔는지.
어느 외딴 간이역에서 빈자리를 남긴 채 내려버린 세월들. 저 길이 나를 잠시 내려놓은 것인지, 외길로 뻗어 있는 레일을 보며 곰곰 생각해본다. 나는 혼자이고 이제 어디로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모호한 가방 / 황혜경
지구본을 옆구리에 끼고 수선집에 가던 길에서
명랑한 만세를 외치던 내 친구 붉은 치마를 만났다
수심 없는 얼굴에는 가든에 가둔 가득처럼
종(種)이 다른 꽃들 화려하게 피어났다
붉은 치마의 서랍 안으로 착지하는 새들과 정지하는 말들
수선집 아줌마가 바지로 가방을 만들어 준다고 했을 때
떠오르던 실내
뒤집어도 볕이 들지 않던 실내
안을 떠올린 건 그날뿐만은 아니었다
헌책방 구석에 앉아 누군가 그어놓은 븕은 밑줄을 읽다가
애인여기(愛人如己)를 발음할 때도
서랍 안의 얼굴들 서로서로 겹쳐보였다
남을 내 몸같이 깊이 사랑한 적 있었나
쌍둥이 자리는 질투를 배제하는 별자리라는 걸
비서 아가씨 k가 내 좁은 서랍을 뒤져 읽어주던 그날 오후
눈을 돌려 바라본 밖의 문양들은
뒤늦게 누가 누구를 감싸주는 형태였고
수선집 아줌마는 바지의 앞면과 뒷면을 잘라내고 붙여
겉과 겉을 맞대거나 속과 속을 이어 붙여
바지의 겉과 속으로
가방의 안과 밖을 만들기 위해 바느질을 시작하고
나는 그 곁에서 외부와 내부에 대해 생각한다
외부에 의해 내부가 내부에 의해 외부가 결정되는 일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법
그러므로 이후의 모든 생일에 출생할 나는 방 안에서
부고(訃告)란을 맡아 쓰는 아저씨와 밤새 안과 밖의
사람의 붉은 부위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고
또, 잘린 케이크와 시든 꽃 사이로 핏물인지 꽃물인지
얼룩진 치마를 입고 한 아이가 뛰어 들어오다가 밖으로 사라질 것이고
바지의 외부의 바지의 내부의 외부의 내부의 바지에 의해
가방이 완성될 때까지
나는 외부의 내부의 외부의 내부의.......를 반복하다가
어려운 가방에 무심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지구본을 슬쩍 넣어본다
무엇이 무엇을 감싸고 무엇이 무엇을 담는지
확인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주위가 깜깜해지고 곧 밝아오기도 하니까
상호적인 것들은 모호하기도 하니까
안과 밖의 배후를 갖게 된 가방
수선집 아줌마가 바지로 만들어준 모호한 가방을
나는 하나 갖게 되었다
- 2010년 <문학과사회> 신인상 당선작
■ 황혜경 시인
- 1973년 인천 출생
-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졸업
- 시집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외
《 심사평 》
-- 황혜경의 시는 생활의 사소한 단편을 비범한 의미를 내재한 존재론적 사건으로 통찰하는 시인의 직관이 빛을 발한 경우이다. 사건의 의미성이 무엇인지 간파하여 그것을 그 자체로 드러내는 유일어를 찾아내고, 오직 그러한 유일어로만 이루어진 말도 높은 시를 빚어내는 힘은 자기 고유의 시 세계를 창조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들 모두 당선작으로 내어도 좋을 만큼의 완성도를 보여주었기에 최종 선택이 어렵지 않을까 예상되었으나, 의외로 당선작을 결정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당선자인 황혜경의 시가 다른 이들을 압도할 만큼 뛰어났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활동한 기성 시인이 아니냐는 즐거운 오해를 살 만큼, 황혜경의 시는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미숙함을 찾아볼 수 없는 완숙한 경지에 달해 있고, 그것을 세련되게 제엏는 능력뿐만 아니라, 자기 시의 문법을 어떻게 주조해야 할지를 본인 스스로가 터득하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덧붙여 그의 시가 2000년대 등장한 젊은 시인들의 단점과 아쉬움을 한 단계 극복하면서 그만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라는 평도 있었다..
- 예심: 강계숙 송종원 조연정
- 본심: 강계숙 이광호 우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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