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과 역할 — 정명(正名)의 의미를 떠올리며
나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서는 금슬이 좋은 부부셨다. 특히 외할아버지께서는 아홉 살 연하이신 외할머니께 언제나 존댓말을 쓰셨고, 단 한 번도 ‘지유 할머니’나 ‘인혜 할머니’처럼 누군가의 관계로서 부르지 않으셨다. 나의 할아버지께 할머니는 언제나 “예쁜 이종필”, “사랑하는 내 자기”, “부인”이셨다. 그 영향을 받아서일까? 내 휴대전화 속 연락처에도 외할머니의 이름은 “이쁜 할머니 이종필”로 저장되어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대할 때 호칭이 정말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께 예절 교육을 받을 때마다 나는 어떤 상황 어떤 위치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청할 때에는 말 걸기에 앞서 호칭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의 위치를 찬찬히 돌아 본 후,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말을 쓰도록 가르침 받았다. 돌이켜 보면 이런 할아버지의 말씀들이 참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상대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나와는 어떤 관계 놓여 있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이름이라는 것은 떠올릴 수 밖에 없는 한 정체성이다. 나는 호칭을 정하는 것이 상대를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으면서도 가장 쉽게 정의 내릴 수 있는 한가지의 방편이라고 본다.
내가 할아버지께 받은 가르침은 공자의 정명(正名) 사상과 유사한 면이 있다. 공자는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하지 않고, 말이 순하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즉, 이름(名)과 실질(實), 즉 역할이 일치하지 않으면 사회가 혼란에 빠진다는 것이다. 왕이 왕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다움을 잃으면 질서가 무너진다는 그의 말은 사실 오늘날 인간관계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할아버지의 세계에서 ‘이름’은 관계의 질서를 세우는 출발점이었다. 부부라면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역할의 인식이 ‘부인’, ‘자기’라는 호칭 속에 녹아 있었다. 그 이름을 바르게 불러주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과 존중의 질서 위에 서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말한 정명의 실천이 아닐까 싶다. 이름이 단지 호칭에 머물지 않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역할과 책임이 함께 살아 있는 상태 말이다.
수업중 나왔던 예시를 빌려보자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이름을 빼앗기고 ‘센(千)’이 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역할을 잃는다. 이름은 단순한 부름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와 사회적 위치를 결정하는 상징이며 결국 이름을 되찾는 것은 곧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공자가 말한 정명은 고대의 정치적 논리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인간의 윤리적 감각을 일깨워 준다. 정치인이 ‘공익을 위한 사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행동하고, 교사가 ‘교육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며, 학생이 ‘배우는 사람’으로서의 자세를 지닐 때 사회는 조화롭게 돌아간다. 마찬가지로 나 또한 누군가의 학생으로, 손녀로, 친구로서의 ‘이름’에 걸맞게 행동할 때 비로소 관계의 질서가 생긴다.
이름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자리이자 역할, 그리고 내가 세상과 맺는 방식이다. 무언가를 명명 하는 행위는 그 대상의 가치를 부여 하고 혹은 서사를 부여 하는 일이다. 그렇게 가장 신중해야 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공자의 말처럼 이름이 바르면 말이 바르고, 말이 바르면 행실이 바르게 된다. 외할아버지께서 평생을 통해 보여주신 존칭의 예절은, 결국 정명의 철학을 삶으로 실천한 모습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름을 바르게 부르고, 그 이름에 걸맞은 마음을 지니는 것 — 그것이야말로 관계를 존중하고 세상을 조화롭게 만드는 첫걸음일 것이다.
첫댓글 외가가 화목하군요. 부럽네요. 우리는 어떤 것을 인식할 때 그것과 다른 것과 비교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래야 그것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것에 그것과 그것 아닌 것을 구분하는 어떤 기호를 부여하지요. 그래야 다음에 그것을 쉽게 구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인식 구조를 만들어가게 되는데, 따라서 어떤 기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구축할 수 있게 됩니다. 외할아버지에게 외할머니는 연세가 많이 들었지만 여전히 존경하는 배우자로서 인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외할아버지의 인식 세계는 다른 사람의 인식 세계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존경하는 배우자와 함께 살아가는 세계가 되기 때문이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동일한 대상을 보지만, 전혀 다른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