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호 루카 신부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이사야 6,1-8 마태오 10,24-33
오늘 복음에서는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대상’과 관련되어 쓰였습니다.
‘의회에 넘기고, 채찍질하고, 미워하고 죽이려는 자들’(마태 10,17-23절 참조), 곧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이 바로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그들”입니다.
세 번째는 ‘두려워해야 할 대상’으로,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하느님이십니다.
네 번째는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인데, 하느님께서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실 만큼 귀한 이들이 바로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과 ‘두려워해야 할 것’이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며 허세를 부릴 때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말고는
모든 것이 두려울 때도 있습니다.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노후, 그리고 일과 사랑에서는
두려움을 느끼지만, 진실을 말하고 정의를 외치며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는
‘겁쟁이’가 되었는지조차 모를 수도 있습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엄마, 아빠에 대한 믿음 때문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머리카락 한 올도 손댈 수 없다는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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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이사야 6,1-8 마태오 10,24-33
성경에서 말하는 두려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많은 경우에 경외로 표현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함은 “영광과 자랑”이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물”이며 “지혜의 뿌리”로 표현됩니다(집회 1장 참조).
반면에 다른 두려움은 세상에 대한 것입니다. 근심은 걱정을 낳고 걱정이 심해지면
두려움으로 바뀝니다. 세상에서 오는 두려움은 우리 자신을 속박하고 성장하지 못하게 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두려움이라는 같은 말이지만 그 결과는 사뭇 다릅니다.
같은 두려움이지만 다른 두려움입니다. 하나는 우리를 위축시키고 겁먹게 하는 두려움이지만,
다른 하나는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두려움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은 믿음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기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 약함은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의탁하게 합니다. 약한 것이 문제라기보다
그것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향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분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 사랑을 실천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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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바오로 신부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이사야 6,1-8 마태오 10,24-33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물으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오 10,26.28).
"두려워하여라"(마태오 10,28).
예수님은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존재와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을
명확히 가르십니다.
죽음을 포함해 육신에 해를 입힐 수 있는 존재는 본능적, 감정적으로 위협이 될 수는 있으나
영원한 생명을 믿는 이에게는 극복해야 할 피조물일 뿐이지요. 육신과 영혼 모두를
소유하신 분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경외하고 사랑해야 할 분이시지요.
제1독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소명 기사입니다.
"주님을 뵈었는데 ...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 날개 ...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이사 6,1-2).
이사야는 환시 중에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 주위에는 사랍들이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주님을 모시는 존재로 알려진 어떤 혼합적 존재라 하는 사랍들의 행동에 머무릅니다.
여섯 날개 중 둘은 얼굴을 가리는데, 감히 주님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는 지극한 경외심을
표현하지요. 날개 둘은 발을 가렸다는데, 고대 중동 언어에서 발은 성기를 완곡하게 표현한다고
하네요. 즉 주님 앞에 감히 내놓기에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부분을 가리는 것입니다.
나머지 두 날개는 온전히 날아다니는 제 역할에 충실합니다.
이는 주님 주변을 맴돌며 그분께 찬미와 영광과 경배를 드리는 모습을 상징하지요.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들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거룩한 주님의 현현 앞에서 예언자가 두려움에 싸여 외칩니다. 아마도 그 순간 그에게는 일생을
거쳐 행한 죄스런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을 겁니다. 이 은혜로운 주님과의 만남의 순간,
아무리 예언자지만 그 역시 나약한 인간인지라 주님을 바라보기보다 자신의 불결함을 바라봅니다.
부정한 이, 죄인은 주님을 뵐 수 없으니 그에게는 남은 것은 죽음 뿐입니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이사 6,7).
예언자의 두려움을 감지한 사랍이 "제단에서 타는 숯"을 가져와 그의 입에 댑니다.
주님을 뵈온 이 영광의 순간은 자기 죄악에 자지러져 무너질 때가 아닌 거지요.
숯은 불과 열기로써 그의 "더러운 입술"을 정화합니다. 이 행동은 매우 의미심장하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제단에서 타는 숯"은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떠올려 줍니다. 그분은 불타는 사랑으로 스스로를 바치셔서 백성의 죄를 씻으신 분이시지요.
이 희생 제사는 매 미사 때마다 나눠지는 성체와 성혈이고, 또 말씀입니다.
그분은 지금 이 순간도 당신을 바쳐 우리를 정화하고 또 성화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는 복음 속 예수님의 목소리에는 당신이 모든 걸 감내하고
구원하신다는 보증이 담겨 있습니다. 불결한 우리 입에 닿아 다시 깨끗하게 하는 숯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예언자에게 하셨듯, 그분은 우리를 쓰시기 위해 우리 두려움의
근거인 자기 비난과 자기 검열의 죄의식을 태워버리십니다.
"두려워하라!“
그리고 예수님은 오직 하느님만을 경외하라고 하십니다.
노예적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에서 우러난 경외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벌을 주기 위해 잘못을 포착하려 주시하는 냉혹한 심판관이 아니라
참새 한 마리의 안위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런 분께 우리는 귀하고 소중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
사랑으로 정화된 예언자는 조금 전과 백팔십 도 다른 태도로 변화됩니다.
영예로운 만남 앞에서 자기의 부정과 불결함에 두려워 떨던 이가
주님께 먼저 파견을 청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비로소 제 질서를 찾은 겁니다. 실패와 몰락, 상실과 소외, 박해와 죽음에 대한
인간적 두려움은 주님을 가리고 제 죄에 빠져 허우적대게 만들지만,
하느님 사랑에 대한 경외심은 우리를 사랑의 투사로 변모시키지요.
이제 복음 속 제자들도 독서의 예언자처럼 힘 내어 길을 나설 것입니다.
그들의 시선은 더 이상 자기 죄와 약함을 향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선택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미움과 박해와 죽음의 길을 갈 것입니다.
사랑과 경외가 그 길에 동행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날마다 우리에게 와 닿는 주님의 말씀과 성체가 날마다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가슴 설레는 주님과의 이 접촉은 뜨거운 일치로 이어지지요.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영혼에게 두려움은 없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묵혀둔 두려움과 근심을 훌훌 털고 용기를 내어 주님께 나아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 우리는 진정 귀하답니다. 주님께서 벗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31).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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