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세기가 바뀌던 때가 기억납니다. 괜히 두근거리기도 했습니다. 뭔가 새로운 일이 생길 듯한 예감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길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 그냥 평범한 날을 맞이했으니까요. ‘19’에서 ‘20’으로 바뀌던 때입니다. 아직 1년의 기한이 있었지만 일단 ‘2000’이란 수자는 대단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인생 반을 살아온 사람으로 남은 반이 다 채워질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시대를 살 수 있게 된 것만도 대단하고 감사했습니다. 여느 때 맞던 새해와는 좀 다른 감정을 가졌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공감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덤덤해졌습니다. 그냥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하기야 우리는 그렇게 역사 속에서 이미 수십 번을 지나왔습니다. 물론 그것을 느끼며 산 것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끼리 만들어놓은 시간관념으로 생긴 감정인지도 모릅니다. 별다른 것 없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다소 실망감도 있기는 했습니다. 다른 한편 안심이 되기도 했고요. 행여 세상 종말이 되는 것은 아닌지 괜한 걱정(?)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어제와 큰 차이 없는 새 날을 맞으며 그냥 희망만 키우기로 했습니다. 늘 가져본 새해의 희망이지요. 가지고 못 가지고 따질 것 없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희망 아니겠습니까? 뭔가 나아질 것 같은 희망 말입니다. 발버둥 쳐도 나아질 것 없다 싶어도 희망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 세기가 바뀌면서 우리의 의식과 문화도 많이 바뀐 것이 사실입니다. 그 가운데 요즘 특히 대두되는 문제 중 하나가 가족에 대한 관념입니다. 여태 우리가 유지하고 있던 개념은 혈통 중심의 가족입니다. 간혹 어느 집단에서 자신들의 유대관계를 돈독히 한다는 취지에서 ‘가족’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사용하곤 합니다. 하지만 일단은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를 중심으로 가족을 생각합니다. 차츰 그 개념이 확장되어 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우리 가족 가운데 들어와서 함께 살며 가족이 된 것입니다. 피가 섞이지 않아도 소위 정으로 엮어진 관계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가족’보다는 ‘식구’가 훨씬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함께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집단이지요. 한두 번이 아니라 거의 매일 같이 앉아 밥을 먹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식구가 되어 결국 가족이 됩니다. 사람이 먹어야 사는 것처럼 식사는 생존의 기본입니다. 그것을 같은 자리에 둘러앉아 주고받으며 이야기도 나누고 식사를 합니다. 어쩌면 가장 편하고 안전한 환경입니다. 우리 속담에 ‘먹을 때는 개도 안 때린다,’고 합니다. 그만큼 식사는 최고의 기본권입니다. 함께 한 사람들이 누구든 서로 가장 편안하게 그리고 평안한 마음으로 먹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는 조건이 아니겠습니까?
혼자서 짝사랑하다 가진 것 다 날리고 사기꾼과 공조했다는 죄명까지 덮어쓰고는 잠시 옥에도 들어갔다 나옵니다. 외모를 보고 붙인 것인지 형편을 보고 붙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기 말’이란 별명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하기야 그러거나 말거나 ‘영미’는 그런 대로 살아갑니다. 옥에서 나오자 잃은 돈을 찾고자 합니다. 사실 갈 곳도 살 곳도 없습니다. 세상 가운데 외톨이입니다. 그 과정에서 좋아했던 남자의 아내가 나타납니다. 돈을 찾겠다고? 알았어. 내가 주지. 그런데 받기 어려울 거랍니다. 그 남자의 아내인 ‘유진’은 전신마비 장애인입니다. 남동생이 돕고 있지만 남자와 여자 한계가 있지요. 돈을 받겠다, 주겠다, 하면서 두 사람이 동거합니다. 영미는 거할 집이 필요하고 유진은 도우미가 필요합니다.
영미는 가진 것 없이 빈털터리, 유진은 가진 것은 있으나 몸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아무 공통점도 없는데 바로 그 점이 두 사람을 함께 엮어줍니다. 유진은 몸은 불편해도 개성은 뚜렷합니다. 영미는 평범한 보통사람이고 힘쓸만한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둥글둥글 잘 어울리며 살아갑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은 그저 자신에게 맞게 세상을 살게끔 되어있나 보다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됩니다. 때로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잘 어울려(?) 살아갑니다. 하기야 어찌 보면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흐르며 같이 지내다보면 정도 들게 됩니다. 서로 의지가 되는 것이지요. 자신들의 숨겨진 이야기도 나누고 아픔과 슬픔, 억울함이나 분노도 나누게 됩니다.
세기 말은 지나고 그저 평범한 날들이 이어집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 세상을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려운 세상에 익숙해지며 살아가도록 변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사건이나 사고도 당하고 뜻밖의 환경에 처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 시간들을 이기며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합하면서 어울려 사는 것이지요. 내놓을 것도 없지만 주눅들 필요도 없고 나의 삶을 당당하게 만들어 가면 됩니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Ms. Apocalypse)을 보았습니다. 독특한 상황의 두 여자들 이야기입니다. 가족에 대해서 또 다시 생각해봅니다.
첫댓글 잘보고갑니다.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