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은동전 같던 어느 가을날의 전화. 너무 좋아서 전화기째 아삭아삭 가을 사과처럼 베어먹고 싶던. 그 설운 한마디. 어깨위로 황금빛 은행잎들 돋아 오르고. 그 저무는 잎들에 어깨 잡혀 생이라는 밀교. 밤의 어디든 보이지 않게 날아다니던. 돌아와 찬이슬 털며 가을밤. 나도 자주 잠이 오지 않았었다. ☆★☆★☆★☆★☆★☆★☆★☆★☆★☆★☆★☆★ 《2》 겨울 강가에서
김경미
눈과 함께 쏟아지는 저 송곳니들의 말을 잘 들어두거라 딸아 언 강 밑을 흐르며 모진 바위 둥글리는 저 물살도 네 가슴 가장 여린 살결에 깊이 옮겨두거라 손발 없는 물고기들이 지느러미 하나로도 어떻게 길을 내는지 딸아 기다림은 이제 행복이 아니니 오지 않는 것은 가서 가져 와야 하고 빼앗긴 것들이 제 발로 돌아오는 법이란 없으니 네가 몸소 가지러 갈 때 이 세상에 닿지 않는 곳이란 없으리 ☆★☆★☆★☆★☆★☆★☆★☆★☆★☆★☆★☆★ 《3》 겨울잠
김경미
가을 햇빛에 깨끗이 말려진 하늘 그 빛에 눌려 나뭇잎들 납작하게 내려앉으면 다 내려앉은 다음
겨울 비단뱀이 된다면 석달치 식량 계란 껍질째 깨지도 않고 삼켜 삭고 삭아 계란껍질이 우유처럼 묽어져 몸 안에서 아무 사금파리 상처도 찌르지 않을 때쯤 일어나 그새 돋은 발 거뜬히 새 신발 사러 뛰어다녔으면 ☆★☆★☆★☆★☆★☆★☆★☆★☆★☆★☆★☆★ 《4》 고백
김경미
나. 아무래도 지뢰인가 봐 늘 인적 드문 곳에 몸을 숨기지 숨겨 기다리지 흙처럼 오직 사람 발자욱만 모른 척 모른 척 마침내 누군가 다가오지 멋모르고 닿아오지 그 순간 그 환희 너무 두려워 폭발하고 말지 산산조각 폭발하고 말지 깨어보면 그 사랑들 형체도 없다 내가 다 죽였단 말인가 ☆★☆★☆★☆★☆★☆★☆★☆★☆★☆★☆★☆★ 《5》 그리운 심야
김경미
그래 다른 생은 잘 있던지 검정양복의 연인처럼 그리운 밤 카페들과 눈물처럼 글썽이던 막차의 차창들은 철제 셔터 내려진 어두운 상점들은 붕대같이 하얗게 빈 도로는 정든 미치광이 친구들 무청 같은 새벽 거리는 있기는 정말 있던지 아침마다 조용히 이불 밑 그대로이던 네 흰 발목의 검정 갈기는 정말 담을 넘었던 것인지 실밥처럼 흰 눈 쏟아지는 밤거리를 달리기는 달렸던 것인지 달려 다른 곳 다른 시간이 정말 있기는 있었던 것인지 나 살았던 것 같기도 하고 살아보지 못한 것 같기도 한 다른 창 밖 다른 생이 ☆★☆★☆★☆★☆★☆★☆★☆★☆★☆★☆★☆★ 《6》 기다림은 추한 것
김경미
구름들 모였다 금방 흩어지고 다음엔 심지어 비켜간다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면 모든 게 산뜻하고 선명해진다
오래전, 당연한 모임을 들떠서 기다리던 친구에게 말해버렸다 너 빼고 이미 모였었어 너 기다리는 거 안타까워서 말해주는 거야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추해서였다
벌받는 것만큼 산뜻한 것도 없다 친구는 모르게 모인 친구들이 아니라 말해준 나를 용서하지 않았고
똑같이 당했을 때 나는 모르게 모인 친구들을 다 버렸다
추하긴 마찬가지지만 고독만큼 깨끗한 인류도 없으므로 구름만큼 약한 것도 없으므로
출처 : 계간 시 전문 《POSITION》 (2020년 봄호) ☆★☆★☆★☆★☆★☆★☆★☆★☆★☆★☆★☆★ 《7》 길
김경미
이즈음 나는 무척 아름다우니 가을 하늘이 내 청명을 시기하지 기러기가 밤마다 찬 서리를 뿌리고 가도 흰 서리꽃 위에서 언 발로 세상 상처의 연혁을 사랑하므로
곧잘 난투극을 벌이며 앞날을 채가던 절망아 잘 있거라 다만 마음이 이정표일 뿐 믿는 것은 무책임뿐, 새벽 안개의 맨발도 두렵지 않단다 ☆★☆★☆★☆★☆★☆★☆★☆★☆★☆★☆★☆★ 《8》 나는 좌절하는 것들이 좋다
김경미
함박눈 못 된 진눈깨비와 목련꽃 못 된 밥풀꽃과 오지 않는 전화와 깨진 적금, 나를 지나쳐 다른 주소로 가는 그대 편지
나는 좌절하는 자세가 좋다 바닥에 이마를 대고 유리창처럼 투명하게 뿌리의 세계를 들여다본 것들 마치 하늘에 엎드려 굽어내려보는 신 같은 ☆★☆★☆★☆★☆★☆★☆★☆★☆★☆★☆★☆★ 《9》 내 마음의 지도
김경미
천천히 심장 속을 들여다보니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단풍 길과 거기, 리아스식 해안과 아픈 톱니들 사이 다도해 어둠들 제풀에 섬이 되어 주먹밥 크기들로 놓여 있는 눈물도 보여요 너무나 오래 헛되고 외로웠으며 어찌 다스릴 수 없었던 몇채의 무너짐, 그리움들은 많이도 줄 끊어져 나부끼고 사랑 아파서 아름답다니요
자꾸 무릎을 다치면서 깊이 돌아보니 행복은 왜 꼭 그렇게 나와 멀리 떨어져 앉아 서먹했던 것일까요 ☆★☆★☆★☆★☆★☆★☆★☆★☆★☆★☆★☆★ 《10》 네버 엔딩 스토리
김경미
-밤, 동명항에서
누군가 어둠 속에 웃고 있다 나부끼는 하얀 옷자락 손짓하는 바다와 마주섰다
갯벌에 지치도록 발자국을 찍거나 모래성을 쌓고 눈을 맞으며 슬며시 모래 무덤 속에 드러눕는다
어두울수록 투명해지는 영혼
울컥 독주에 취해 비린 날을 구토하거나 바득바득 우기며 뛰어들어도 저 바다, 성내지 않는다 지극히 가슴 열어 품어준다
하늘에 환한 구멍, 아 나는 너무 달이 아프다 ☆★☆★☆★☆★☆★☆★☆★☆★☆★☆★☆★☆★ 《11》 누가 사는 것일까
김경미
약속시간 삼십 분을 지나서 연락된 모두가 모였다 우리는 국화꽃잎처럼 둥그렇게 둘러앉아서 웃었다 불참한 이도, 더 와야 할 이도 없었다 식사와 담소가 달그락대고 마음들 더욱 당겨 앉는데
문득 고개 돌린다 아무래도 누가 안 온 것 같다 잠깐씩 말 끊길 때마다 꼭 와야 할 사람 안 온 듯 출입문을 본다 나만이 아니다 다들 한번씩 아무래도 누가 덜 온 것 같아 다 모인 친형제들 같은데 왜 자꾸 누군가가 빠진 것 같지? 한번씩들 말하며
두 시간쯤이 지났다 여전히 제비꽃들처럼 즐거운데 웃다가 또 문득 입들을 다문다 아무래도 누가 먼저 일어난 것 같아 꼭 있어야 할 누가 서운케도 먼저 가버려 맥이 조금씩 빠지는 것 같아 자꾸 둘러본다
누굴까 누가 사는 것일까 늘 안 오고 있다가 먼저 간 빈자리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저 기척은 기척뿐 아무리 해도 볼 수 없는 그들에겐 또 기척뿐일까 우리도 생은 그렇게 접시의 빠진 이 아무리 다 모여도
상실의 기척 더 큰 생은 ☆★☆★☆★☆★☆★☆★☆★☆★☆★☆★☆★☆★ 《12》 눈물
김경미
깍아낼수 없는 나이
청진기를 댄 계절이 심장처럼 지나가고
심각하지 말지어다 그게 지구의 새로운 전략임을 그렇게 타일렀건만
오오 또 생연탄만한 눈물이 ☆★☆★☆★☆★☆★☆★☆★☆★☆★☆★☆★☆★ 《13》 다정
김경미
꿈속에서 그는 물빛 양복의 서양청년이었고 우리는 신혼여행을 막 떠나려는 참이었다 비행기표가 싱싱한 초록 나무잎을 펄럭였고 그는 연신 사랑한다, 애정에 빛나는 트렁크를 꾸렸는데 내 속마음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라벤더향내의 여행 끝 이태리쯤의 낯선 뒷골목에서 그토록 다정한 그가 날 없애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도 모르게 스윽ㅡ 내 목을 처치해버릴 것만 같았다
다정해서 그럴 것 같았다 누가 다정할 때마다 그럴 것 같았다
장미꽃나무가 내게 다정해서 죽을 것 같았다 저녁일몰이 유독 다정해서 유독 죽을 것 같았다 뭘 잘못했는지 다정이 나를 죽일 것 같았다 ☆★☆★☆★☆★☆★☆★☆★☆★☆★☆★☆★☆★ 《14》 다정에 바치네
김경미
당신이라는 수면 위 얇게 물수제비나 뜨는 지천의 돌 조각이란 생각 성근 시침질에 실과 옷감이나 당겨 우는 치맛단이란 생각 물 컵 속 반 넘게 무릅이나 꺾인 나무젓가락이란 생각 길게 미끄러져 버린 검정 미역 줄기란 생각
그러다 봄 저녁에 듣는 간절한 한마디
저 연보랏빛 산 벚꽃 산 벚꽃들 아래 언제고 언제까지고 또 만나자
온통 세상의 중심이게 하는 ☆★☆★☆★☆★☆★☆★☆★☆★☆★☆★☆★☆★ 《15》 더 멀어지자
김경미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눈물이 솟았다 내 영혼 얼마나 상했는지 이럴려던 게 아니었는데 밤의 빗소리도 자운영꽃밭도 설탕냄새 나는 눈물이며 유리창들 기차 같던 손목과 포옹들도 잊은 지 오래다
귀가하니 몇 년 만에 편지가 와있다 원망과 악담이 가득한 편지 다들 뒤에서 혀 내두르는 이를 가까이했던 죄가 아니라 본인만 본인의 허물을 모르는 건 그녀와 나와 온 지구의 허물
반성하므로 그녀와 나는 각자 고독해야하며 고독의 역사라는 제목의 책이 있는지를 나는 확인하겠으며 없으면 나라도 머잖아 쓰겠으며 쓰기 전에 몇 겹이고 더 고독하겠으며 가족이나 친구가 없는 건 잘못 산 것이란 단정에 화를 냈던 것 저녁 해 지는 길 위에서 낮의 일들을 후회하는 것과 낙엽이 되어서야 멀리 걸어가는 나뭇잎 무릎 꿇고서야 투명해지는 진실 바람에 쓰러진 떠들썩한 간판 해치고 헤치며 상한 영혼 모두를 한 상자에 담아 조건 없이 반성하겠으나
너와 나는 부디 이대로 더 멀어져 더 쓸쓸해지자 입과 귀가 다르게 달린 서로가 별빛처럼 보일 때까지 ☆★☆★☆★☆★☆★☆★☆★☆★☆★☆★☆★☆★ 《16》 돌파
여기 이곳을 끝끝내 돌파하자고 내 영혼이여 ☆★☆★☆★☆★☆★☆★☆★☆★☆★☆★☆★☆★ 《17》 마음의 근황
김경미
그저께 저녁에는 눈 내리는 골목길을 마악 돌아섰지요 일주일 후쯤에는 밤 버스 차창을 내다보다가 눈물 핑 돌았지요 오늘은, 오늘은, 어김없이 그대 사랑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잘못 걸려온.
내년에는 사람 없는 곳을 찾아가 사람들을 생각하는데 봄이 꽃 피어 가슴 아팠습니다 삼 사년 후 즘엔 처음으로 세상을 사랑하려 애썼지요 그저께 밤에는 거울 앞, 화장을 지우고 보니 푸른 시신이 많이도 살아서 돌아다녔더군요 무엇을 더 갖고 싶었을까 바위들 치마에 스쳐서 다 닳아 없어지는 반석 겁의 시간쯤엔 내 눈빛도 맑아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눈물 잘 흘리는 전생에는 사랑이 참 많이 힘들고 미안했습니다 부디 용서하시기를 ☆★☆★☆★☆★☆★☆★☆★☆★☆★☆★☆★☆★ 《18》 만재홀 수선
김경미
그 해에는 바람 만드는 법을 배웠으되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괜찮았다
다음 해에는 내 삶의 전략이 나뿐임을 눈치채고 모두가 떠나갔다 그것도 괜찮았다
가령 내 키가 형편없는 건 너무 일찍 비애가 머리를 눌러서였을 텐데 그것마저 괜찮았다
어느 해에는 바다에 나갔다가 선박 옆구리에 그어진 세 단계의 선을 봤다 만재홀수선 -여기서부터는 침몰입니다. 곧 침몰입니다. 침몰 시작했습니다. 출렁대는 경고선들
내 침몰의 세 가지 <만재홀수선>은 라일락과 본동가칠목과 슬로바키아 불안과 공황과 흰 동전들 침묵과 기거리와 다정 노란 고무 슬리퍼와 책상과 자신이 내 엄마라는 남자 다 적을 수 없는 기울기와 가라앉음과 잠김
그래서 바닷물에는 절대 발을 담그지 않는다 ☆★☆★☆★☆★☆★☆★☆★☆★☆★☆★☆★☆★ 《19》 멸치의 사랑
김경미
똥 빼고 머리 떼고 먹을 것 하나 없는 잔멸치 누르면 아무데서나 물 나오는 친수성 너무 오랫동안 슬픔을 자초한 죄 뼈째 다 먹을 수 있는 사랑이 어디 흔하랴 ☆★☆★☆★☆★☆★☆★☆★☆★☆★☆★☆★☆★ 《20》 명함에 쓴 편지
김경미
눈 아주 많이 내리던 날이었지요 여의도 한 빌딩 지하에서 마주쳤지요 십 몇 년 만인가 아득한데 아직도 혼자라며 웃었지요 걱정 스치는 이쪽 눈빛에 괜찮아요, 괜찮아요 참 번듯한 명함을 내밀었지요 귀찮고 성가신 사소함들에 마다 찾으라 했지요 여름 햇빛 속 걷다 가방이 귀찮을 때, 손톱 밑에 가시 박혔을 때, 비싼 음식이 맛없을때, 돈 꾸고 갚기 싫을 때, 그리고 또, 소녀인 양 웃는데 문득 흰 나비 떼들 창을 넘어들고 따라 들어온 바람은 서늘했지요 신사의 악수는 청량했지요
돌아와 베란다 저 밑, 공사 끝나 가는 성당을 봤지요 봄 되면 가서 많이 뉘우치리라 했던 곳이지요 붉은 벽돌 위에 쌓은 흰 눈이 꼭 남자의 울어 붉던 눈 같지만
폐인 된다더니 안 된 그대 그 명함 눈 속으로 날려보냈지요 마당에 선 성모마리아, 두 손 벌려 그 흰 종이 다 받아드는 것 똑똑히 보았지요 ☆★☆★☆★☆★☆★☆★☆★☆★☆★☆★☆★☆★ 《21》 바닥의 날개
김경미
가을 속 마른 구두 태우는 냄새가 난다 어디서 또 누가 헤어지는가 변심과 상처가 지나가던 바람결을 흔드는가
날마다 기억 건대 바닥이 말했다 자신의 계단을 걸어간 이들에 대해 ☆★☆★☆★☆★☆★☆★☆★☆★☆★☆★☆★☆★ 《22》 바람둥이를 위하여
김경미
1 걷지 못하는 민들레가 바람을 만나니 걷잖아 탁 ! 터져서 간음 없는 마음이 흔하랴
그런 거야 욕하지 마 바람둥이들 한번 누운 곳 정 못 들이는 지상에서 영원히 단잠 못 이루는
2 욕하지 마 먼지처럼 어디에나 몸을 묻히는 마음 아세톤처럼 어디에서나 쉽게 마음 휘발되는 몸의 사랑 고단하게 귀한거야 ☆★☆★☆★☆★☆★☆★☆★☆★☆★☆★☆★☆★ 《23》 발톱 깎는 여자
김경미
목욕을 하고 가을 마당으로 내려선다 햇빛에서 잘 말린 수건 냄새가 난다
마음 무성한 것만이 능사가 아니니 낙엽들 큰 손바닥으로 꽃을 다시 말하고
젖으니 부드러운 발톱 마음도 눈물에 자주 젖어 식빵처럼 연해졌을까 겨울이면 저 나무들 뜨거운 껍질 속에서 연둣빛 배냇짓을 키우리라 그 헐벗은 외모가 긍지인 줄 이제야 알겠으니
욕망들 어디든 마음대로 가서 무엇을 누린들 이제 비로소 겸손이 되리라 목욕 뒤의 연한 손톱처럼 ☆★☆★☆★☆★☆★☆★☆★☆★☆★☆★☆★☆★ 《24》 불멸의 신혼
김경미
부엌채칼을 꺼내서 감자 속을 마구 파들어가 봐 그 안에 분명 숨겨놓은 불멸이 있을 거야 침대와 장롱도 수시로 번쩍 번쩍 들어 봐 그 밑의 먼지들이 불멸로 가는 암호일지도 몰라 갓 빨아놓은 와이셔츠한테 다리미를 대고 자꾸 물어 봐 불멸이 어딨는 지 낱낱이 다 불지도 몰라 냉장고 야채 칸의 파처럼 무조건 다리를 벌려봐 시들기 전에 불멸의 체조를 가르쳐줄지도 몰라 식탁 가장자리에 반쯤 걸린 유리컵 모양의 아이가 마구 휘두르며 입으로 가져가는 것들도 잘 봐 불멸로 가는 종이지도를 단숨에 삼켜 없애버릴지도 몰라 소파처럼 등에 뭉쳐있는 피곤이야말로 잘 봐야 해 드디어 불멸의 입장권일지도 모르니
불멸도 없이 매일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어 미칠 것 같이 쉬운 이 일만을 하면서 텅텅 남아도는 무직의 인생을 다 보낼 리 없어 불멸의 명예, 그에게 있는 것 같이 그것이 여기 어디에도 납땜되어 있을 거야 분명히 ☆★☆★☆★☆★☆★☆★☆★☆★☆★☆★☆★☆★ 《25》 상심
김경미
저녁밥 빛깔로 입 속에 앉힌 묵언 그 재속(在俗)의 하안거 며칠 지나 고양이 걸음에 연꽃 떠받치듯 나선 외출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가슴에 대못이 박혀 돌아왔다 ☆★☆★☆★☆★☆★☆★☆★☆★☆★☆★☆★☆★ 《26》 수첩
김경미
도장을 어디다 두었는지 계약서를 어디다 두었는지 구름을 어디다 띄웠는지 유리창을 어디다 달았는지 적어놓지 않으면 다 잊어버린다
손바닥에 적기를 잊어버려 연인도 바다도 다 그냥 지나쳤다 발꿈치에라도 적었어야 했는데 새 구두가 약국도 그냥 지나쳤다
시간도 적는 걸 잊자 한 달 내내 양파가 짓물렀다 토끼통이 한가득씩 어깨로 쏟아졌다
때론 살아 있다는 것도 깜박 잊어버려 살지 않기도 한다
다만 슬픔만은 어디에 적어두지 않아도 목공소 같은 몇 만 번의 저녁과 갓 낳은 계란 같은 눈물 자국을 어디에도 남기고 또 남긴다 ☆★☆★☆★☆★☆★☆★☆★☆★☆★☆★☆★☆★ 《27》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은
김경미
나뭇잎 한 바구니나 화장품 같은 게 먹고 싶다
그리고...... 말들은 무엇 하려 했던가 유리창처럼 멈춰 서는 자책의 자객들...... 한낮의 어둠 속에 웅크리고 누워 꽃나무들에게 사과한다 지난 저녁부터의 발소리와 입술을, 그 얕은 신분을 외로움에 성실하지 못했던, 미안해 그게 실은 내 본심인가봐
아무래도 책상 밑이나 신발장 속 같은 좀 더 깊은 데 들어가 자야겠다 그러한 동안 그대여 나를 버려다오 아무래도 그게 그나마 아름답겠으니 ☆★☆★☆★☆★☆★☆★☆★☆★☆★☆★☆★☆★ 《28》 슬픔이 너무 큰 날은
김경미
못 나눠줘 절대 이 슬픔 나 혼자 다 차지할 거야 애인처럼 연인처럼 다가오지 마 이런 전시에 나눠 먹다니 내 목숨에 슬픔 외의 빈자리 없음을 그런 슬픔 온전한 내 것이 있다는 이 가득함
사랑도 오늘은 혼자서 해 ☆★☆★☆★☆★☆★☆★☆★☆★☆★☆★☆★☆★ 《29》 식사법
김경미
콩나물처럼 끝까지 익힌 마음일 것 쌀알빛 고요 한 톨도 흘리지 말 것 인내 속 아무 설탕의 경지 없어도 묵묵히 다 먹을 것 고통, 식빵처럼 가장자리 떼어버리지 말 것 성실의 딱 한가지 반찬만일 것
새삼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제명에나 못 죽는 건 아닌지 두려움과 후회들의 돌들이 우두둑 깨물리곤 해도 그깟것 마져 다 낭비해버리고픈 멸치똥 같은 날들이어도 야채처럼 유순한 눈빛을 보다 많이 섭취할 것 생의 규칙적인 좌절에도 생선처럼 미끈하게 빠져나와 한 벌의 수저처럼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할 것 한 모금 식후 물처럼 또 한 번의 삶,을 ☆★☆★☆★☆★☆★☆★☆★☆★☆★☆★☆★☆★ 《30》 쓸쓸한 날에
김경미
쪽빛 엽서를 쓰고 싶네 몇 다발 정맥을 풀어 견딜 수 없는 안부와 그리움의 목례를 쓰고 또 쓰고 모조리 찢고 다시 또 쓰고
갑자기 퍼붓는 함박눈 사이로 자줏빛 달개비들 얼어죽은 길로 동백 꽃송이 검은 머리카락에 곱게 싸들고 지워진 길을 다시 가겠네 흰 눈발 위를 걷고 또 걸어 성급히 당신에게로 이제 곧 가고 싶네
성실한 답장을 받겠네 문 열어보면 거기 당신의 소인 쌓인 서로를 옥바라지하며 해후의 글씨를 다듬고 다듬는 그리운, 그리운 당신과 우리들 ☆★☆★☆★☆★☆★☆★☆★☆★☆★☆★☆★☆★ 《31》 쓸쓸함에 대하여 - 비망록 -
김경미
그대 쓸쓸함은 그대 강변에 가서 꽃잎 띄워라 내 쓸쓸함은 내 강변에 가서 꽃잎 띄우마 그 꽃잎 얹은 물살들 어디쯤에선가 만나 주황빛 저녁 강변을 날마다 손잡고 걷겠으나 생은 또 다른 강변과 서걱이는 갈대를 키워 끝내 사람으로는 다하지 못하는 것 있으리라
그리하여 쓸쓸함은 사람보다 더 깊고 오랜 무엇 햇빛이나 바위며 물안개의 세월, 인간을 넘는 풍경 그러자 그 변치 않음에 기대어 무슨 일이든 닥쳐도 좋았다 ☆★☆★☆★☆★☆★☆★☆★☆★☆★☆★☆★☆★ 《32》 야채사
김경미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의 입에 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맛없었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 꽃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꽃 수북했겠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 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 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 나왔든가 ☆★☆★☆★☆★☆★☆★☆★☆★☆★☆★☆★☆★ 《33》 어떤 날에는
김경미
수저같이 아귀같이 푸른 잎들 새로 돋는 봄날에 하루 종일 우두커니 부엌 창 앞에 서서 쏟아지는 물 잠그지도 못한 채 서서 두 손 떨군 채 낮고 작은 창 내다보다 핑 눈물이 도네 노란 봄 스웨터 환한 색깔옷들 아무리 가져다 입어도 낡은 겨울 검정 외투처럼 스스로 무겁고 초라해서
살아와 지금껏 단 한번도 누군가 잘.있.는.지. 물어봐주지 않은 듯
어떤 날에는 자꾸 눈물이 나서 잘.있.는.지......자꾸 눈물이 나서..... ☆★☆★☆★☆★☆★☆★☆★☆★☆★☆★☆★☆★ 《34》 열애의 서
김경미
개나리꽃이 터졌습니다 노랗게 진달래꽃이 터졌습니다 붉게 터진 그들 곁에서 나도 핍니다 핍니다 지난 겨울엔 정말 늘 찬밥이었지요 무엇이던 빨리 버리라고만 하는 사람들 틈에서 사랑에 대한 노력은 갈수록 불온으로 몰리고 나라를 문란히 하지 않기 위해서 사소한 악도 불륜처럼 두려웠어요
이제는 산이 화투 빛으로 피었습니다 누워 있는 들도 그렇게 피었습니다 강도 그렇게 핍니다 그들 곁에서 내 사랑도 무차별로 터집니다
따뜻한 밥으로 끓어납니다 ☆★☆★☆★☆★☆★☆★☆★☆★☆★☆★☆★☆★ 《35》 엽서 엽서
김경미
단 두 번쯤이었던가,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지요. 그것도 그저 밥을 먹었을 뿐 그것도 벌써 일년 혹은 이년 전일까요? 내 이름이나 알까, 그게 다였으니 모르는 사람이나 진배없지요 그러나 가끔 쓸쓸해서 아무도 없는 때 왠지 저절로 꺼내지곤 하죠 가령 이런 이국 하늘 밑에서 좋은 그림엽서를 보았을 때 우표만큼의 관심도 내게 없을 사람을 이렇게 편안히 멀리 있다는 이유로 더더욱 상처의 불안도 없이 마치 애인인 양 그립다고 받아들여진 양 쓰지요 당신, 끝내 자신이 그렇게 사랑받고 있음을 영영 모르겠지요 몇 자 적다 이 사랑 내 마음대로 찢어 처음 본 저 강에 버릴 테니까요 불쌍한 당신, 버림받은 것도 모르고 밥을 우물대고 있겠죠 나도 혼자 밥을 먹다 외로워지면 생각해요 나 몰래 나를 꺼내보고는 하는 사람도 있을까 내가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행복할 리도 혹 있을까 말예요. ☆★☆★☆★☆★☆★☆★☆★☆★☆★☆★☆★☆★ 《36》 오늘의 결심
김경미
라일락이나 은행나무보다 높은 데서 살지 않겠다 이른 저녁에 나온 별빛보다 많은 등을 켜지 않겠다 두 개의 귀와 구두와 여행가방을 언제고 열어두겠다
밤하늘에 노랗게 불 켜진 상현달을 신호등으로 알고 급히 횡단보도를 건넜으되 다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티끌 같은 월요일들에 창틀 먼지에 다치거나 내 어금니에 내 혀 물리는 일이 더 많았다
함부로 상처받지 않겠다
내 목에 적힌 목차들 재미없다 해도 크게 서운해하지 않겠다
한계가 있겠지만 담벼락 위를 걷다 멈춰서는 갈색 고양이와 친하듯이
비관 없는 애정의 습관을 닮아보겠다 ☆★☆★☆★☆★☆★☆★☆★☆★☆★☆★☆★☆★ 《37》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김경미
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 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
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 혼자 도망 나옵니다
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
바퀴벌레를 잡으려다 멈춥니다 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 갑니다 삶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
소리 없는 물만 먹는 꽃처럼 그것도 안 먹는 벽 위의 박수근 처럼 아득히 가난해지질 기다려봅니다
사는 게 다 힘든 거야 그런 충고의 낡은 나무계단 같은 삐걱거림 아닙니다
내게만, 내게만 입니다 그리하여 진실 된 삶이며 사랑도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리라 아주 이기적으로 좀 밝아지는 것이지요 ☆★☆★☆★☆★☆★☆★☆★☆★☆★☆★☆★☆★ 《38》 일상
김경미
보름달 안은 쟁반만한 약, 식후 삼십분마다 하루 세 번씩 시간 지켜 삼킨다
그래도 안 낫는다 그래도 안 죽는다
아 듣기 싫어라 어디서 권태가 내 목소리로 징징대는 소리
콩깍지만한 무책임도 없이 참신한 불행도 없이 김치같이 수박껍질같이 둔, 탁, 한 행복들이 집집마다 모여 있는 것도 상쾌하지 않다 ☆★☆★☆★☆★☆★☆★☆★☆★☆★☆★☆★☆★ 《39》 지구의 위기가 내 위기인가
김경미
지구가 내 이름을 아는가 날 좋아하는가 나 때문에 비 오는 날 잠 못 이룬 적이 있는가
날 환영했는가 날 쓰레기 취급하지 않았는가
내가 더 잘나야 하는가 더 잘해주어야 하는가
지구가 좋아한 사람은 따로 있지 않았던가 기준이 공정했던가 급하니 찾는가
삐뚜름히 서서 밤의 지구 위 별을 본다 별이라는 우산 폭우 쏟아질 때 씌워주던 긴 손목 아무에게도 할 수 없던 얘기 귀에 손을 모았다 덮었다 하며 들어주던 무한한 경청
왜 그러는가 별은 또 내게 왜 주는가 언제 무엇으로 다 갚으라고 무한대의 빚부터 안기우고 시작하는가
처음부터 위기에 묶어두는가 ☆★☆★☆★☆★☆★☆★☆★☆★☆★☆★☆★☆★ 《40》 지리 부도책을 보며
김경미
장백산맥에서부터 한라산맥까지 쓰러진 잔가지들만 한데 모아 이 나라 아궁이에 불때 올리면 이 땅 구들장들마다 온통 쩔쩔 끌겠지 ☆★☆★☆★☆★☆★☆★☆★☆★☆★☆★☆★☆★ 《41》 참패시대
김경미
강한 팀에겐 당연히 지고 약한 팀에게는 방심하다 지고 맞수에게는 심판 때문에 지고 어쩌다 간신히 이기면 스포츠신문이 쉬는 날이라 보도가 안 된다
인생을 겨누어 용케 먼저 방아쇠를 당긴 날은 총구를 빨대처럼 제 입에 문, 혹은 지푸라기가 장전된 총 그런 유머 어린 불운과 박복이 없는 라일락 냄새가 입덧처럼 그리운 겨울 흰 눈이나 노을이 되지 못한 먼지들 이마 위 저녁 어스름의 흔적을 가진 이들 부끄럼을 잘 타는 내성적인 남자들이 입덧처럼 그리운 겨울,없는 라일락 냄새가 그리운 ☆★☆★☆★☆★☆★☆★☆★☆★☆★☆★☆★☆★ 《42》 첫눈
김경미
마침내 그대편지가 오고 천천히 밖으로 나선다 하늘이 낮고 흐리고 어둑하니 자꾸 뒤돌아본다 무엇을 하고 싶은 대로 다했고 무엇을 못했을까 뱀의 머리 위를 지나듯 살라 했건만
낙엽 밟듯 살아왔을까 선한 눈빛이 가장 깊은 것인 줄 이제야 알겠거니 너무 많이 화를 내거나 울어왔던가 생각할수록 시간이여 미안하다 미안하다는데
창 밖으로 문득 첫눈 쏟아지네 희디흰 형광가루들 순간 점등되는 지상 낮고 흐린 하늘이 떨어지면서 저리 환한 눈송이 되는 이치를 아무래도 그대와 걸으며 생각하노라면
첫눈 밟듯 살다보면 삶은 거저 내준 게 처음부터 너무 많았다고 따뜻한 눈물 글썽여지리라 ☆★☆★☆★☆★☆★☆★☆★☆★☆★☆★☆★☆★ 《43》 초승달
김경미
얇고 긴 입술 하나로 온 밤하늘 다 물고 가는 검은 물고기 한 마리
외뿔 하나에 온 몸 다 끌려가는 검은 코뿔소 한 마리
가다가 잠시 멈춰선 검정 고양이 입에 물린 생선처럼 파닥이는 은색 나뭇잎 한 장
검정 그물코마다 귀 잡힌 별빛들
나도 당신이라는 깜깜한 세계를 그렇게 다 물어 가고 싶다 ☆★☆★☆★☆★☆★☆★☆★☆★☆★☆★☆★☆★ 《44》 춤추지 못하던 여인
김경미
대양을 건너 숲을 지나 온 푸른 사내가 춤추지 못하는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훈훈한 입김으로 굳은 얼굴에 스며들거나 거칠게 흔들어도 꼼짝도 않는 그녀 견고한 슬픔에 매혹된 사내가 겹겹으로 껴입은 그녀를 벗겨냅니다 곧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찡그린 그녀 주위에 무거운 상처의 옷들이 허물처럼 쌓여갑니다 실비가 내리는 대지 위 거침없는 육체가 움직입니다 검고 긴 머리칼이 푸른 동공 안에서 춤을 춥니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눈부신 뼈의 질서 단 한 번도 춤 춰 본 적 없던 무거운 미이라, 굳어가던 여인이 바람의 리듬을 탑니다 아 - 아 - 아 - 가쁜 숨을 쉴 때마다 대지의 짐승과 풀들이 노래합니다 춤추는 여인은 가볍고, 푸른 사내는 더 멀리 날아갑니다 무거운 내 몸 깊은 곳에는 나도 모르는 여인이 살고 있습니다 큰 바람이 불어와도 피하지 않는 춤추지 못하던 여인이…… ☆★☆★☆★☆★☆★☆★☆★☆★☆★☆★☆★☆★ 《45》 타인 타인들
김경미
그대들 내 곁을 스쳐갈 때마다 손목에 꽃이 돋고 돋아 가지를 뻗고 무성한 나뭇잎들 마음을 뒤덮어 온통 그늘을 만들고 그 무성한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르겠는 마음 털어 겨울 눈 내리는 길가에 홀로 오래도록 서 있으면 전신주처럼 속이 따뜻해지기도 했다
부질 없다 부질없다 부질없다고 대웅전 앞마당을 서성이던 기억밖에 더는 무엇이 있을 건가 몸 이룬 흰모래들 벚꽃 잎처럼 화르르 털어 내는 바람이 있을 뿐 손목의 꽃이며 마음 그늘도 다만 흩날림일 뿐 모든 생의 유일한 흔적은 오직 혼자일 뿐이라는 것 ☆★☆★☆★☆★☆★☆★☆★☆★☆★☆★☆★☆★ 《46》 틈에서
김경미
내 주먹 쓸모없었음을 은빛 재크나이프같이 늘 한발 더 빠르게 빠를 뿐 귀염성 없던 절망들. 나는, 안다, 화장품 바른 내 얼굴 또한 팔공년의 나라가 가두겠다, 나는 한 적 없던 가슴속 잔 지푸라기 많아, 너무 숨어도 머리카락 다 들켰겠지, 남들 것까지, 안다. 그물창 대신 커튼이 예쁜 버스들 가루비누같이 부푼 승객들의 머리 안다, 나는 구공년의 나라가 커튼 속 예쁜 집들이 손님 명단, 내게는 초대 없는, 저 칫솔처럼 길게 벌거벗어 누운 길들로 저 이빨대신 신발을 닦아도 즐거운 칫솔들의 새 희망, 비눗방울들의 터질 듯한 터질 듯함, 안다 내 복잡한 슬픔의 방식 또한 쓸모없음을, 환멸 또한, 가슴 속 지푸라기들이 넌, 갈 연대도 없지, 어디에서도 다 들켜, 들키니 막히니 눈치채는, 자꾸 ☆★☆★☆★☆★☆★☆★☆★☆★☆★☆★☆★☆★ 《47》 편력
김경미
파 꽃이 피었던가요 국화꽃 매워 울었던가요 맨발로 저녁 강물 위를 한없이 걸었던가요 편지들 모아 양지바르게 무덤을 세웠던가요 눈물이 바다로 가자던가요 갈대 소리나는
흐르는 기찻길 따라 너무 먼 곳까지 갔던가요 헌 옷처럼 낡아 가는 시간들을 가며 가며
적. 멸. 에 당도했던가요 깡그리 불타 사라지는 것들 없는 것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던가요 한겨울의 적멸 보궁, 마침내 상복처럼 흰 눈발 쏟아지고 가로등도 무너지고 신발이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마침내 그리운 입적.
그 후. 비로소 그 어떤 다른 목숨이 생기던가요 스산한 겨울 나무들이 푸르른 형광 빛을 내던가요 비로소 무엇도 아무것도 아니던가요
아무것도 아니던가요 ☆★☆★☆★☆★☆★☆★☆★☆★☆★☆★☆★☆★ 《48》 표절
김경미
우리는 매일 표절시비를 벌인다 네 하루가 왜 나와 비슷하냐 내 인생이 네 사랑은 그렇고 그런 얘기들
밤 전철에서 열 사람이 연이어 옆 사람 하품을 표절한다 ☆★☆★☆★☆★☆★☆★☆★☆★☆★☆★☆★☆★ 《49》 회귀
김경미
누가 또 어디쯤서 나를 저버리나 보다
마음 속 햇빛 많은 나뭇잎들 폭설처럼 떨어져 내리더니 수박향내 애틋하던 저녁 산책길이 돌변했다 이번엔 남의 집 대문 앞이 아니다 누드화 같은 이 바다로 바다로 누가 또 날 버리나 보다 잡을 것 오직 은박지 같은 물뿐이다 소리치는 것도 부끄럽다 망망대해 혼자뿐인데 누군가 나타나도 원수가 될 것이다 기다림 간절했으므로 언제나 이런 식이다
이렇게는 아니었다 이렇게는 아니었다고 미안하다고 용서하라고 현생의 나를 만난 내 생에 사과라도 남기고 싶었으나 물천장 위 비바람에 섞여 내리는 주황빛 저녁이 성당의 색유리 가득한 성가 같아 붉은 점박이 나리꽃처럼 걸핏하면 끼얹어지는 이 침수 이 상실감을, 하긴 나는 사랑하던가 떠나고 없는 고요할 물 속 묵묵함을 내심 더 바랬던가 늘 그런 식이었던가 ☆★☆★☆★☆★☆★☆★☆★☆★☆★☆★☆★☆★ 《50》 흉터
김경미
하루 종일 사진 필름처럼 세상 어둡고 몸 몹시 아프다 마음 아픈 것보다는 과분하지만 겨드랑이 체온계가 초콜릿처럼 녹아 내리고 온 몸 혀처럼 붉어져 가는 봄비 따라 눈빛 자꾸 멀어진다 지금은 아침인가 저녁인가 나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빈 옷처럼 겨우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본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 온갖 꽃들이 다 제 몸을 뚫고 나와 눈부시다 나무들은 그렇게 제 흉터로 꽃을 내지 제 이름을 만들지 내 안의 무엇 꽃이 되고파 온몸을 가득 이렇게 못질 해대는가 쏟아지는 빗속에 선 초록 잎들이며 단층집 붉은 지붕들이며 비 맞을수록 한층 눈부신 그들에 불쑥 눈물이 솟는다 나 아직 멀었다 아직 멀었다 ☆★☆★☆★☆★☆★☆★☆★☆★☆★☆★☆★☆★
첫댓글 정성껏 올려주신
김경미 시모음
감사히 잘 보고갑니다
멋진 가을 보내시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