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이사야 7,1-9 마태오 11,20-24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좋은 생각 6월호에서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낚시를 갔습니다.
그날 아버지는 맛있고, 값이 비싼 고기를 잡았습니다. 옆에서 낚시를 하던 젊은이가 아버지에게
한 마리만 팔 수 있는지 부탁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돈을 받지 않고 크고 맛있는 고기를
그냥 주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돈을 주고 사겠다고 하는데 돈을 받지 그러셨어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렇게 돈을 받기 시작하면 낚시는 취미가 되지 않는단다.
젊은 날 그렇게 돈을 받고 물고기를 준 적이 있단다.
그러자 다음 낚시를 할 때 값이 나가지 않는 물고기는 잡아도 즐겁지가 않았단다.
그 뒤로는 절대로 돈을 받지 않았단다. 그래서 지금까지 낚시가 취미가 되었단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던 아들도 생각하니 아버지의 이야기가 맞았습니다.
취미로 시작한 사진이었습니다. 사진을 출품하고 약간의 돈을 받으면서 작품이 될 것 같은
사진만 찍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사진 찍기가 소홀해 졌고, 지금은 거의 사진을
찍지 않게 되었습니다. 취미는 취미로 여길 때 취미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거래를 합니다. 공정한 거래는 사회를 발전시키는 축이 됩니다.
우리는 살면서 욕심을 가지게 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욕심은 삶의 동기를 부여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은 욕심을 먹으면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거래와 욕심은 현대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입니다.
우리는 부당한 거래를 보곤 합니다. 추악한 욕심을 보게 됩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대사제와 거래를 하였고,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유다는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았습니다.
지금도 부당한 거래와 추악한 욕심은 우리 사회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집 앞에 텃밭을 가꾸고 있습니다. 상추, 호박, 고추, 깻잎이 잘 자라고 있습니다.
화단에는 코스모스도 심었습니다. 바람에 춤을 추는 코스모스를 보면서 사람들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면 그것으로 기쁨입니다. 직원들과 함께 싱싱한 야채를 먹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먹고 남아 이웃과 나눌 수 있으면 그것도 행복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거래가 아닙니다. 사랑은 그저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사랑에 욕심이 있다면 끝까지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당한 거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추악한 욕심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부당한 거래와 추악한 욕심을 버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상실에 대한, 고통에 대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강대국들의 위협 앞에
두려워하지 말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때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확실히 가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을 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소돔과 고모라에 내려졌던 재앙보다 더 큰 재앙이
내릴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은 피어납니다. 알이 깨어지는 아픔이 없이 병아리는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힘들고 어려운 일은 있었습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절망하는 것도 우리의 선택이고, 장애물을 넘어서는
용기를 가지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갖는 것도 우리의 선택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양의 냄새가 나는 목자’가 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진흙탕에
빠질지라도, 옷이 더러워질지라도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라는 울타리에 안주한다면, 섬기려 하기 보다는 섬김을 받으려고 한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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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이사야 7,1-9 마태오 11,20-24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으십니다.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은 모두 갈릴래아 호숫가에 있는 마을입니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고을’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예수님께서 많은 시간을 보내셨던
곳입니다. 코라진과 벳사이다 역시 카파르나움에서 북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을들로,
지금도 그곳에는 무너진 마을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 근처의 이 고을들은 오늘 복음에서 불행 선언의 대상이 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다른 곳보다 더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한 표현이지만, 그 결과는 항상 예수님을
향합니다. 기적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가장 많은 기적을 일으키신 이 고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예수님을 더 믿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 하였지만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그만큼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큰 용서를 받은 사람도 그만큼 많이
용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받은 사람 역시 더욱 참된 신앙인으로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받는 것에만 익숙하고 베풂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은 감사한 마음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더 좋은 것을, 더 큰 것을 받고자 애쓸 뿐입니다.
우리는 얼마만큼의 은총과 사랑을 받고 용서를 체험하였습니까?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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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 루카 신부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이사야 7,1-9 마태오 11,20-24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특별한 호의를 받은 고을들을 꾸짖으시며 저주받은 고을에나 어울릴
법한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복음에 따르면 그들이 불행해지고 심판 날에 무거운 벌을 받는
이유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을의 이름을 정확히 지칭하시며 그 잘못을 지적하시고 벌을 내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통쾌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나라면 그 정도까지 호의를 못 알아보지는 않았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불행한 이들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고, 심지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 고을과, 이미 멸망한 고을에까지 비교된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의 주민들이
지녔을 분노가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 고을들에서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에서 통쾌와 분노 가운데 어떤 감정을 느끼시나요? 때때로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라는 고을 이름에 가톨릭 교회, 우리 본당, 우리 구역,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겹쳐 보이는 것은 죄책감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와 우리 각자 안에 예수님께서
베푸신 말씀과 성체라는 기적, 전례와 성사, 그리고 거룩한 전통들을 통하여
기적이 계속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예수님의 이 ‘기적’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데서
이미 회개는 시작되었습니다.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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