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이사야 26,7-9.12.16-19 마태오 11,28-30
방향도 바꾸고 방식도 바꿔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여러분도 그러시겠지만 제게 이 말씀은 가장 짧아도 가장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하나도 빠지지 말고 당신께 오라는 말씀이고,
안식을 주시겠다는 말씀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초대를 하시면 사람들이 다 갈까?
이런 묵상을 해봤습니다. 고생도 모르고 짐이 없는 사람은
주님께 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렇겠지요? 고생을 모르는 사람, 무거운 짐을 다 남에게 지우는 사람은 주님께 갈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 생각해보니 고생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몸 고생이 없으면 마음고생이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몸 고생이든 마음고생이든
고생스러울 때 그리고 지고 있는 짐이 너무도 무거울 때 어디를 향하고
누구를 찾아가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 신자들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사람이 고생스럽고 책임이나 인생의 무게가 무거워
위안이나 도움이 필요할 때 주님께 가야 하지만 그렇지 않고 인간에게 가서 인간의 위안과
조언을 받고 그것도 시원치 않으면 점쟁이한테 가서 점쟁이의 위안이나 조언을 받습니다.
세례 받았지만 성당에 나오지 않는 상당 수의 사람들이 아마 그런 사람들일 겁니다.
주님께 가서 위안을 받았거나 받는다면 왜 냉담하겠습니까?
앞에서 어디를 향하고 누구를 찾아가느냐 그것이 문제라고 했는데 사실 고생스러울 때 위를
보지 않고 옆을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영적 감각이 없는 사람에겐 그만큼 위를 쳐다보는 것이
쉽지 않고 바로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바로 위로의 말을 내 귀에 들려줄 사람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수없이 벌을 받으면서도 우상을 만들고 숭배한 것이 뭣 때문이겠습니까?
하느님은 멀고 사람들은 가깝기 때문이 아닙니까? 문제는 인간이 안식을 주고 인간이 만든 것이
답을 주느냐 그것입니다. 안식을 주길 바라는 그도 위안을 바라기에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는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안식과 위로를 필요로 하기에 인간이 위로를 줄 것이라고
기대한 사람이 위로를 주지 못하면 실망하고, 위로를 주지 않으면 섭섭하거나 더 나아가 밉거나
화가 나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어리석지 않으려면 이럴 때라도 위로의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옆이 아니라 위로 방향을 바꾸고 차제에 위로받는 방식도 바꿔야 합니다.
그러니까 안식을 달라고 말만 하지 말고 들려주시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때
당신이 옆에 있으니 두려워 말고 안심하라고도 하시지만 어떤 때는 오늘처럼 안식 법
그러니까 안식을 얻는 법을 알려주시기도 합니다.
고기를 주지 않고 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는 스승처럼 주님은 안식을 주지 않고 안식을 얻는
법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고생을 없애주시지 않고 고생 중에도 안식을 얻는 법을 알려주시고,
짐을 덜어주시지 않고 짐을 편하고 가볍게 지는 법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멍에 곧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의 멍에입니다. 그것으로 짐을 지면 그리
고생스럽지도 않고 그리 무겁지도 않다는데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믿고서
그 멍에로 짐을 져 보시겠습니까?
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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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 루카 신부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이사야 26,7-9.12.16-19 마태오 11,28-30
예수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을 향하여, 당신께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에 따르면 “무거운 짐”은 율법과 관련됩니다(마태 23,4 참조).
당시 율법 학자들은 율법의 세부 규정들을 만드는 일에는 열중하면서도 정작 그 규정을
마주한 이들의 어려움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세부 규정들 앞에서 느끼는 부담과 죄책감을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신심 있는
태도로 여겼나 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세부 규정들을 마주하는 이들의 힘겨움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당신께 초대하시며 “안식”을 약속하십니다.
성당 입구에서 자주 발견되는 이 말씀이 좋아 보였는지 이단과 사이비 종교 교주들도 세상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걱정 없이 쉬게 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직장이나 가족, 인간관계에서 오는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고 그런 것과 다른 세상을 경험하라고 합니다. 내려놓아야 할
‘무거운 짐’은 힘든 의무들이고, ‘안식’은 단절을 통한 일시적 편안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짐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라는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단순히 짐을 지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삶에 밀착시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 배우는
사랑은 율법으로는 해낼 수 없었던 일, 나와 우리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향한 진정한 안식,
곧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체험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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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이사야 26,7-9.12.16-19 마태오 11,28-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스스로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존재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편하고 가볍게 해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만큼 위안과 위로가 됩니다.
사실 오늘 말씀은 비슷한 내용의 반복입니다. ‘멍에’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유다교와
신약 성경에서 멍에는 율법을 나타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당시 율법을
따르며 살았던, 율법을 힘겹게 지켜나가던 사람들입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것은 ‘내 멍에’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당신의 가르침을 따라 살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안식을,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율법은 점점 사람들을 힘겹게 하는 틀이 되었습니다. 율법은 부정한 일을 피하도록,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세세하게 모든 것을 규정하고 그 부정적인 것들에서 멀어지기를
요구합니다. 율법은 ‘하라.’는 것보다 ‘하지 말라.’는 것을 더 많이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실천하고 행동하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가르침은 부정에서 긍정으로,
소극적인 것에서 적극적인 것으로, 피하고 멀어지는 것에서 다가서고 실행하는 것으로의
변화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실천하기가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 그 가르침은 우리에게 안식을, 영원한 생명을 선사할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