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金氏) 이야기[김성회의 한국 성씨(姓氏)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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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씨의 기원 - 김수로왕계 김해김씨 제외하면 대부분은 김알지계 신라김씨
# 한국 사회에서의 김씨
2010년 대한민국 인구주택 총조사 잠정결과를 보면, 현재 우리나라의 총인구는 4821만9000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리고 올 초에 주민등록번호를 받은 인구가 5000만명을 넘어섰다고 발표되었다(2011년 1월 행안부). 이 숫자는 해외에 거주하는 재외동포(약 570만)와 북한 주민(약 2400만)을 제외한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우리식 성과 본을 사용하는 인구는 대략 8000만명으로 추산된다.
그중 대한민국의 성관(姓貫)은 286개 성씨와 4179개 본관으로 파악되고 있으며(2000년 인구센서스·통계청), 성씨별 본관 수는 김(金)씨 349본, 이(李)씨 276본, 박(朴)씨 159본, 정(鄭)씨 136본, 최씨(崔)씨 159본, 강(姜)씨 33본, 서(徐)씨 57본으로 되어 있다.
그중 김씨는 전체 인구의 5분의 1인 992만600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김수로왕계의 김해김씨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김알지계의 신라김씨 계통이다. 그 외에 신라김씨 계통이나 김해김씨 계통이 아닌, 조선에 귀화한 ‘왜장 사야가’를 시조로 하는 ‘사성 김해김씨’도 있다.
김씨의 본관별 인구 수를 보면 김해김씨가 412만5000명으로 가장 많고, 경주김씨가 173만7000명, 광산김씨가 83만7000명, 김녕김씨가 51만3000명, (구)안동김씨(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의 둘째 김숙승을 시조로 하는 안동김씨로, 고려 개국공신인 김선평을 시조로 하는 신안동김씨와 구분된다)가 42만5000명이다. 그 외에도 의성김씨(25만3000명), 사성김해김씨(19만9000명), 강릉김씨(16만5000명), 선산김씨(10만9000명) 등이 있다(2000년 인구센서스, 통계청).
사실 김씨라는 한자 성을 사용하는 인구는 중국과 만주 등 동아시아 지역에 매우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 금나라의 금이라든지, 중국 성씨 중에 금씨는 우리나라의 김씨와 깊은 연관이 있다. 김씨는 고려 때까지 금씨로 불렸는데, 음양오행에 따라 이씨 조선을 무너트릴 것이라는 불길한 소문을 염두에 둔 태조(이성계)의 명으로 쇠금이 아닌, 성김으로 바꿔 부르게 된 것이다.
# 설화로 본 김씨의 기원
그럼 김씨의 뿌리는 무엇인가?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삼국사기의 김알지 설화(서기 65년)와 삼국유사의 김수로 설화(〃 42년)이다. 그중 삼국유사의 김수로왕 탄생설화는 다음과 같다.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 3월 상사일에 구지봉(龜旨峰)에 이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어 구간 등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들었다. (중략) 구간 등이 구지가(龜旨歌)를 부르고 춤을 추자, 하늘에서 자색 줄이 드리워 땅에 닿았는데, 줄 끝에는 붉은 폭에 금합(金合)이 싸여 있어 열어 보니 해와 같이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다음날 새벽에 알 6개가 화하여 사내아이로 되었는데 용모가 매우 깨끗하였다. 이내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이 축하하는 절을 하고 공경을 다하였다. 그 달 보름에 모두 왕위에 올랐다.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휘(諱)를 수로(首露)라 하고 혹은 수릉(首陵)이라 하였는데, 수로는 대가락(大駕洛)의 왕이 되고 나머지 5인도 각기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린 김알지 설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65년(탈해왕9) 8월 4일 왕이 밤에 금성(金城·경주) 서쪽 시림(始林) 숲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 호공이 시림 속에서 큰 광명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자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뻗쳤는데, 구름 가운데 황금 궤가 나무 끝에 걸려 있고 그 빛이 궤에서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어 왕께 아뢰었다. 왕이 숲에 가서 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이는 박혁거세의 옛 일과 같으므로, 박혁거세를 알지(閼智·지혜가 뛰어나 이름을 ‘알지’라고도 함)라 한 선례에 따라 이름 지었다.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이라 하였다. 아기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며 기뻐하였다. 왕이 좋은 날을 받아 태자로 책봉하니 그가 곧 김알지이다. 그리고 시림도 계림(鷄林)으로 고쳐 국호로 삼았다.”
이렇듯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실린 김씨의 유래를 보면, 그 시조는 하늘에서 내려온 금궤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676년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수한 신라 제30대 왕 문무왕비에는 아버지인 태종무열왕의 업적, 백제를 멸망시킨 과정, 문무왕이 죽어서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는 유언 등이 적혀 있다
# 금석문이 전하는 김씨의 기원
이와 다른 이야기들도 발굴되고 있다. 역사서가 아닌 금석문을 통해서이다. 그중 하나가 김유신과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의 비문이고, 추사 김정희가 밝혔다가 200년이 지난 1961년에 우연하게 발견된 문무왕 비문이다. 또한 중국에서 발견된 ‘대당 고 부인 김씨 비문’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먼저 김알지 설화를 전한 김부식조차도 “신라 고사에 금궤가 하늘에서 내려와 김씨로 성을 삼았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며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고 하였고, 성을 김씨라고 한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기에 삼국사기에 전하는 김유신 비문에는 [김유신이 헌원지예(軒轅之裔)요 소호지윤(小昊之胤)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김춘추의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비문에도 나와 있다.
그런데, 1954년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 동쪽 교외 궈자탄(郭家灘)에서 출토된 ‘대당 고 부인 김씨 비문’에는 “태상천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금천씨이다.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의 성씨를 받게 된 세조이시다. (중략) 먼 조상은 일제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 아래서 벼슬을 하였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황제께서) 그를 발탁해 시중과 상시에 임명하고 투정후(투후)에 봉하시니, 7대에 걸쳐 벼슬하매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중략) 한이 난리가 나서 괴로움에 처하자 멀리 피해 요동에 살게 되었다. (중략) 지금 다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번성했다(이하 생략)”라고 적혀 있다.
이렇듯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천강설화와는 달리, 신라 김씨들은 자신의 조상을 소호금천씨(중국 3황 중의 하나인 황제 헌원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의 사기)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전에는 김부식이 전하는 김유신 비문이나 같은 내용이 수록된 김인문의 비문에 대해 ‘모화사상’에 따라 지어낸 것이라고 치부하였으나, 새로 발견된 문무왕 비문과 대당 고 부인 김씨 묘지명의 내용을 볼 때, 단순히 모화사상에 따라 지어낸 이야기로 덮어두기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특히 다시 발견된 문무왕 비문의 내용은 더욱 구체적이다. 그 비문에는 “지재생 … 후 제천지윤 전 칠엽(枝載生…侯 祭天之胤 傳七葉)”(5행), “15대조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신라로 내려왔고”(6행)라며 신라 김씨의 내력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투후’는 한무제 때, 흉노 휴도왕(흉노는 선우 묵특 때 한 고조 유방의 15만 대군을 물리친 후 한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던 국가인데, 휴도왕·休屠王은 흉노 선우 휘하의 왕이었다)의 태자였다가 곽거병에게 포로가 되어 노예로 살다가 무제의 신임을 받아 김씨라는 성을 하사받고 투후에 봉해진 ‘김일제’(BC134∼BC86)를 뜻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7. 김씨의 거짓과 진실-400만명에 달하는 김해김씨, 과연 한 뿌리서 파생된걸까
김씨 기원에 대한 다양한 견해
앞의 글(세계일보 4월 13일자)에서 거론했듯이, 김씨의 기원에 대해 4가지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김유신과 김인문 비문, 그리고 대당 고 김씨부인 묘비, 그리고 삼국사기에서 부분적으로 거론되었듯이 김씨의 시조는 중국 삼황오제의 하나인 ‘소호금천씨’라는 주장이 있다.
둘째는 문무왕 비문과 대당 고 김씨부인 묘비문에서 거론된 흉노 왕의 태자이면서 전한의 광무제에게서 김씨 성을 하사받은 투후 김일제가 시조라는 주장이다.
셋째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천강설화에 따라 대보공 김알지와 가야 김수로왕이 시조라는 주장이며, 넷째는 신라가 고대국가로 왕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씨족을 표시하는 한자식 성으로 김씨 성을 쓰게 되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네 가지 주장은 제각각 근거가 있어 현 단계로서는 어느 주장이 진실이라고 단정하기 힘들다. 다만 첫째 소호금천씨가 시조라는 주장과 셋째 김씨의 시조 대보공 김알지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주장은 과학적으로 볼 때 신빙성이 높지 않다.
결국, 둘째와 넷째 이야기가 어느 정도 사실적 근거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중 문무왕 비문과 중국 사서에서의 ‘투후 김일제’에 대한 기록을 볼 때, 두 번째 주장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일제 이후 7대에 걸쳐 벼슬을 하던 중국 김씨 일족이 왕망의 난과 신나라 건설에 참여한 것까지는 파악되나, 어떻게 해서 한반도 동남단에 흘러왔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일부에서는 김해지역에서 출토된 오수전(일명 왕망전)을 근거로 왕망의 신나라 김씨 일족이 김해 등 한반도 동남단으로 진출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 동남단에 진출하고 가야나 신라 왕족이 된 이후에도 왜 김씨라는 성을 숨기고 살았는지에 대해선 명확하게 해명하지 못한다. 진흥왕 이전의 비문에 왜 왕의 성이 쓰여 있지 않은지, 중국 사서에 법흥왕의 성씨를 모(募)씨로 거론하는지에 대해 반박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일부에서는 募씨를 성씨를 알 수 없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법흥왕의 성씨가 선비족 모용씨의 앞글자인 모씨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필자는 수많은 성씨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진흥왕(고구려는 장수왕, 백제는 근초고왕) 이전에는 씨족명은 있었을지 모르나, 한자식 성은 삼국의 왕권이 확립된 중엽 이후라고 판단한다.
따라서 씨족의 내력이 대보공 김알지에서 시작하든, 아니면 한무제 때 투후 김일제에서 시작되든, 더 올라가 삼황오제의 한 사람인 소호금천씨에서 시작되든 상관없이 김씨라는 성을 사용한 것은 진흥왕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김해김씨도 씨족의 뿌리가 수로왕 등 6가야 왕들에게서 시작되었더라도 신라로 병합된 이후, 구체적으로 거론하면 진흥왕 이후에 신라 왕족의 성씨인 김씨 성을 쓰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김씨 성을 쓴 시조는 신라계에선 진흥왕이, 가야계에선 김유신(또는 조부인 김무력이나 아버지인 김서현)이 처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당대나 후대에 국사를 편찬하면서 씨족의 내력까지 포함해 성씨와 연결하다 보니 마치 대보공 알지의 성이 김씨고, 수로왕의 성이 김씨라고 주장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물론 광무제에게 김씨 성을 하사받은 것이 분명한 투후 김일제의 후손들이라면, 그리고 정치적 우여곡절 끝에 김씨라는 성을 숨기고 살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증거자료는 현재까지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김씨의 시조를 소급해서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 김씨의 분화 1, 가야계 김씨
진흥왕 이후 성을 쓰게 된 김씨는 이후 수많은 분화를 겪게 된다. 먼저 분화를 겪은 것은 김유신의 가야계 김씨이다. 태종무열왕과 겹사돈을 맺은 김유신은 외조카 문무왕까지 삼국통일을 완성하고, 죽은 후에 흥무대왕에 추존된다. 그때까지는 신라계 김씨나 가야계 김씨는 서로 구분 없이 ‘김씨’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통일신라의 후대에 들어오면서 신라계 김씨에서 가야계 김씨를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가야계 김씨는 그동안 통합되어 있던 성씨에서 자신만의 뿌리를 찾게 되었다. 그 과정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은유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혜공왕 때 김유신 묘에서 일어난 회오리바람이 미추왕 묘까지 이어졌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통일신라 후기에 들어와서 신라계 김씨와 가야계 김씨 간에 심각한 권력투쟁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 김부식도 ‘기록이 과장되어 일부만 인용했다’는 김장청의 ‘개국공(김유신) 행록’이 나오게 된 것도 몰락한 가야계 김씨가 자신들의 뿌리인 김유신의 공을 기록하려 했던 것 아닌가 짐작된다.
즉, 김유신의 직계 후손인 장청(또는 김장청, 김유신의 손자 윤중의 아들 또는 손자)의 벼슬은 집사성의 미관말직의 하나인 ‘집사랑’이었는데, 김유신의 직계후손이 그 정도로 몰락을 했고, 그나마 김장청 이후로는 맥이 끊겨 사료에서 찾을 길이 없다.
이는 장청의 서동생인 김암(金巖)의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즉, 김암은 천문학에 뛰어나 사천박사가 되었으나, 벼슬은 항상 6두품에 머물렀다. 그리고 일본으로 파견되었다가 억류될 뻔했다는 기록만 전한다. 결국 통일신라의 가야계 김씨는 신라계의 견제로 점점 더 몰락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신라계 김씨가 아닌 가야계 김씨로의 뿌리찾기가 이뤄진 셈이다.
# 김씨의 분화 2, 신라계 김씨
신라계 김씨가 본격적으로 분화한 것은 경순왕 이후이다. 지금 일부 김씨의 성관은 그 뿌리를 대보공 김알지를 시조로 한다든지, 문성왕계 또는 신무왕계 등을 그 시조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경순왕 이전에 분화되었다기보다는 경순왕 이후, 고려조에 들어와 분봉되면서 경순왕과 다른 신라계 김씨들이 자기들의 조상을 찾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니면, 더 후대에 내려와 고려와 조선 시대 새로운 본관을 개관하면서 그 뿌리를 경순왕이 아닌 신라의 다른 왕으로부터 찾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2010년 신라김씨총연합 대종원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신라계 김씨 본관은 총 356개이며, 다른 성씨를 쓰고 있는 성관은 9개(감천문씨, 강릉왕씨, 곡산연씨, 광주이씨, 수성최씨, 안동권씨, 영양남씨, 철원궁씨, 태안사씨)이다.
그중 다른 성을 쓰고 있는 9개를 제외한 356개 본관 중에서 경순왕을 뿌리로 삼고 있는 본관은 총 179개이며, 177개 본관이 대보공 김알지를 뿌리로 삼고 있다. 또 대보공 김알지를 뿌리로 삼고 있는 본관도 각각 내물왕 1, 태종무열왕 4, 신무왕 9, 헌안왕 4, 희강왕 1, 문성왕 2로 나타나 있다.
결국 신라계 김씨는 경주 김씨를 비롯하여 절반 이상이 경순왕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이며, 절반 가까이는 대보공 김알지의 직계 후손임을 자처하고 있는 셈이다. 그중 일부는 대보공 김알지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면서 시조를 내물왕(안성김씨), 태종무열왕(강릉김씨·강릉왕씨 등), 신무왕(광산김씨·태안사씨 등), 헌안왕(아산김씨·광주이씨·철원궁씨 등), 희강왕(성주김씨), 문성왕(선산김씨 등)이라고 주장하는 본관들도 있다.
이들 중에는 본관이 같으면서 다른 뿌리를 주장하는 성관들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안동김씨(경순왕의 손 김숙승계, 태종무열왕 후손 김선평계), 강릉김씨(태종무열왕의 김주원계, 경순왕의 6자 강릉군계), 광산김씨(신무왕의 후손 김흥광계, 경순왕의 후손 김법노계), 아산김씨(헌안왕 후손 김신검계, 경순왕의 자 대안군 후손 김구계), 영광김씨(경순왕의 자 대안군의 후손 김심언계, 경순왕의 자 대안군의 후손 김석공계)가 그들이다.
또한 음은 같으나 한자가 틀린 본관들도 다수 있다. 예를 들어 경주김씨와 경주(京州)김씨, 경산(京山)김씨와 경산(慶山)김씨, 경성(慶城)김씨와 경성(鏡城)김씨, 광주(光州)김씨와 광주(廣州)김씨, 금산(金山)김씨와 금산(錦山)김씨, 김화(金化)김씨와 김화(金華)김씨, 무주(茂州)김씨와 무주(務州)김씨, 보은(保恩)김씨와 보은(報恩)김씨, 상산(尙山)김씨와 상산(常山)김씨, 연평(延平)김씨와 연평(連平)김씨, 영산(永山)김씨와 영산(靈山)김씨, 예천(醴川)김씨와 예천(醴泉)김씨, 옥천(沃川)김씨와 옥천(玉川)김씨, 이천(伊川)김씨와 이천(利川)김씨, 정주(定州)김씨와 정주(貞州)김씨, 등이 그들이다.
# 김씨의 거짓과 진실
결국 김씨는 진흥왕 이후 신라계, 가야계 동일하게 ‘김씨’라는 성을 썼다가 통일신라 후기에 들어와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가야계 김씨가 독자적인 뿌리를 찾으며 분화되기 시작했다. 그 후 신라계 김씨 안에서도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하면서 경순왕을 뿌리로 하는 김씨와 그렇지 않은 김씨로 분화했으며, 경순왕계에서도 고려 초기 사성정책과 분봉에 따라 분화가 가속화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김씨의 분화와 역사에서 의문시되는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한 본관으로 400만명이 넘는 대본관을 형성할 수 있는가이다. 현재 김해김씨는 총인구가 98파에 412만5000명(2000년 인구센서스)이 넘는 대본관을 형성하고 있는데, 과연 김유신 이후 1300여년 동안 그 많은 후손을 배출할 수 있는가이다(사실 과학적으론 불가능하다).
둘째, 경순왕의 후손들은 총 179개의 본관으로 분화되었다. 여기에 다른 성씨로 분화된 곡산연씨, 수성최씨까지 더하면 181개 본관이다. 현재 이들 본관 인구를 합하면 김해김씨의 412만5000명과 비슷하다. 1000년 동안, 한 사람의 후손이 181개 본관으로 분화된 것도, 또 400만명 가까운 후손을 갖게 되었다는 것도 과학(생물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셋째,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를 자처하는 대다수의 본관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개관(開貫)한 본관들이다. 앞서 성씨와 족보 편에서 이야기했듯이 족보가 만들어진 것은 조선 중기 이후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개관을 하면서 어떻게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후손)임을 증명하고 표명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한국의 대표 성씨인 김씨의 역사에서 보듯이 그 진실은 역사적 과정을 거쳐 윤색되고, 채색되고, 각색되어온 것이다. 또한 창작되고, 개작되고, 첨작되어 그 진실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게 되었다. 그중에는 진실도 있을 것이며, 거짓도 있을 것이다.
8. 김해김씨(金海金氏)
- 가야 수로왕이 시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씨 수로왕 금함서 나왔기때문 김씨로 써 …알지왕 신라계 김씨보다 20여년 앞서, 印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 왕비로 삼아 …아들에 모후 성씨 내려 ‘동조동본이
한국의 김(金)씨는 신라계(알지계)와 가야계(수로계)로 나뉜다. 김(金)씨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성씨(姓氏)이다. 2000년 주택인구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21.6%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난해(2010년) 조사된 인구는 1072만명이다. 그중 신라계 김씨가 약 600만명이 넘고, 가야계인 김해김씨가 420만명(2000년 인구센서스에선 412만명)이다.
그 외 김씨 중에서 신라계도 가야계도 아닌 김씨가 있다. 이름하여 사성김해김씨다. 사성김해김씨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 귀화한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우선봉장 사야가(김충선)와 부장 사여모(김성인)를 시조로 하는 씨족이다.
약 20만명으로 파악되는 이들은 조선왕조에서 북방 경계를 맡겼기 때문에 북쪽에 많이 살고 있고, 남쪽에는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어 우록김씨라고도 하고, 경북 청도군 이서면 구라동리에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어 구라동김씨라고도 한다.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관, 김해김씨(金海金氏)
김해김씨는 한자식 성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성씨 중 하나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따르면 가야의 수로왕 탄생연대가 서기 42년으로 되어 있으니, 서기 65년 신라계 김씨의 시조인 대보공 알지의 탄생연도보다 23년이 빠르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김해김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가 되는 것이다.
물론 한씨나 기씨, 선우씨 등에서는 고조선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조상을 언급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조선 준왕의 세 아들이 삼한의 왕이 되었고, 그들이 자신의 시조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요양고씨’나 국내 ‘횡성고씨’ 등 고씨의 일부에서는 자신들의 성관이 ‘제주고씨’가 아니라, 고구려의 고씨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역사적으로 고증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신빙성을 부여하기 힘들다.
또 한자식 성씨를 쓴 것은 고구려에서는 장수왕 때,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때이기 때문에 근초고왕의 여씨(余)가 가장 먼저이고, 두 번째가 장수왕의 고(高)씨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런 주장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현재 고구려의 고(高)씨와 백제의 여(余)씨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오래되었다고 할 수가 없다.
다른 한편 김씨라는 성을 쓴 것은 진흥왕 때부터이기 때문에 김해김씨가 가장 오래되었다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즉 가야의 왕족에게 김씨의 성을 함께 쓸 수 있도록 부여한 것은 신라의 왕족이었기 때문에 가장 오래된 성씨는 신라계 김씨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수로왕의 재위기간이 158년이라는 것과 가야국이 신라에 병합된 532년(법흥왕 18년)까지의 왕이 10명에 불과할 수가 없다(평균 한 명의 왕 재위기간이 49년)는 지적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관은 김해김씨가 아니라, 경주김씨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들은 중국사서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추론하는 것이지, 역사적 근거는 없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서 시조로 언급된 수로왕의 탄생연대를 김해김씨의 ‘시작’으로 본다면, 김해김씨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씨라고 할 수밖에 없다.
# 김해김씨의 연혁과 갈래
삼국유사에서는 수로왕의 성씨를 김씨로 한 것에 대해 “수로왕이 금함에서 나왔기 때문에 ‘김씨’ 성을 쓰게 되었다”고 했다. 왕위에 오른 수로왕은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 허황옥(許皇玉)을 왕비로 맞았는데, 수로왕과 왕비 슬하에 10남2녀를 두었다. 그중 태자를 통해 김씨 성을 잇게 하고, 다른 두 왕자에게 허씨 성을 주어 모후의 성을 계승케 했다. 그리고 나머지 7왕자는 출가하여 하동칠불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가야계 성씨는 김해김씨와 김해허씨(許氏), 김해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하양허씨, 양천허씨가 있다. 그리고 당나라로 갔다가 중국 황제로부터 이씨(李氏) 성을 하사받은 고려 현종 때의 상서좌복야 이허겸을 시조로 하는 인천이씨, 양산이씨가 있다. 따라서 김해김씨, 김해허씨, 양천허씨, 하양허씨, 인천이씨, 양산이씨는 수로왕을 시조로 삼는 동조동본(이본)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허황옥 왕비탑
김해김씨는 중시조 김유신 이후 148개 파로 나뉘어졌다. 그중 경파(卿派), 사군파(四君派), 삼현파(三賢派), 그리고 문경공파(文敬公派)가 가장 많다.
경파는 김유신의 직계손인 김목경(金牧卿)이 고려 충정왕 때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지면서 생겨났다. 사군파는 목경의 아우 김익경(金益卿)을 중조로 하는 파로 고려 말에 예의판서, 대제학에 오른 김진문(金振門)과 조선시대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김완(金完)이 유명하다. 그리고 삼현파는 김관(金管)을 중조로 하는 파로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무오사화 때 참수당한 김일손(金馹孫)과 삼현의 한 사람인 김대유(金大有)가 유명하다.
하지만 김해김씨에 대한 논란도 없지 않다. 즉 한자식 성을 쓰지 않았던 가야시대에 김씨(金氏)와 허씨(許氏)를 나누어 쓰게 되었다는 기록을 믿을 수 있는가이다. 또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가 한자식 성명인 허황옥이라는 이름을 썼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다. 그리고 불교 전래가 한참 후의 일인데도 7왕자가 출가를 하여 성불하였다는 주장은 인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김해김씨 일족이 신라와 고려조를 지나면서 일부가 허씨 성을 얻거나 이씨 성으로 변성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역사적 부침(浮沈)이 심했던 김해김씨
김해김씨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부침이 많았던 성씨 중의 하나이다. 가야의 왕족으로 출발해서 신라에 병합된 후 무력, 서현, 유신 3대에 걸쳐 혁혁한 공을 세움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룩한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래서 김유신은 흥무대왕에 추존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통일신라 하대에는 신라계 김씨의 차별에 서러움을 겪어야 했다. 삼국사기 기이편(紀異篇)에는 [혜공왕 15년 4월, 김유신의 무덤에서 갑자기 바람이 일어 미추왕릉으로 불어갔다. 얼마 뒤 무덤이 진동하며 김유신 혼령이 호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신은 삼국을 통일하고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은 변함이 없는데, 지난 경술년 신의 자손들이 죄 없이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군신이 저의 공렬을 잊음이라, 다시는 나라를 위해 애쓰지 않겠습니다”고 말해 미추왕의 혼령이 ‘대의가 더 중요하다’고 설득하자, 김유신 혼령은 다시 회오리바람이 되어 무덤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미추왕은 신라계 김씨를 상징하는 것이고, 김유신은 가야계 김씨를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혜공왕은 김경신(金敬臣)을 김유신의 무덤에 보내 대신 사과하고, 공덕보전을 취선사에 내려 김유신의 명복을 빌게 했다고 한다.
그 후 고려시대에 들어와 김해김씨는 많은 문무명신을 배출했다. 고려시대에만도 정승급 15명과 명신 공신 10여명과 장군 8명, 제학(提學) 11명을 배출하여 위세를 떨쳤다. 그래서 김해김씨는 삼한 갑족의 하나로 명성을 드높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김해김씨 가문은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역대 정승에서도 숙종조의 김우항(金宇抗) 한 사람뿐이었다. 삼한 갑족으로 명성을 떨치던 김해김씨 문중이 조선시대 쇠락을 면치 못한 것은 무오사화 등 많은 정치적 사건에 휘말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근대 이후 인구가 가장 많은 성관답게 수많은 인물들이 배출되고 있다. 특히 조선 말기나 일제 강점기보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정관계는 물론 재계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진 인물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김대건 신부 동상
#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인물들
김해김씨의 인물로는 수로왕을 비롯한 가야의 10왕이 있다. 수로왕-도왕-성왕-덕왕-명왕-신왕-혜왕-장왕-숙왕-양왕(구형왕)이 그들이다. 구형왕의 아들은 3명이 있었는데, 첫째가 세종이고, 둘째가 무득, 셋째가 무력이다. 그중 무력은 신라의 각간을 역임하고 혁혁한 무공을 세웠는데, 그 아들이 서현(舒玄)이고, 손자가 유신이다.
김유신(金庾信)은 김해김씨의 중시조인데, 동생을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에게 시집보내고, 그의 딸(지소부인)을 부인으로 맞았다. 성골에서 왕위를 이을 사람이 없자, 매부인 김춘추를 태종무열왕에 세웠으며, 태종무열왕·문무왕와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했다.
그 후 42대 흥덕왕에 이르러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동생 흠순(흠춘)은 문무왕 대에 백제 부흥군을 격파하였으며,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정벌할 때 대당총관이 되어 큰 공을 세우고 각간이 되어 나라를 평안케 했다.
김일손(金馹孫)은 조선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이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의 사초를 썼다. 하지만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 중이던 이극돈의 비행을 직필하고, 상소하여 원한을 샀다. 그러다가 세조의 왕위찬탈을 규탄하는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실었다가 이극돈·유자광 등 훈구파의 모함을 받았다.
그로 인해 발생한 무오사화로 스승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고, 김일손은 참수(斬首)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어 도승지에 추증되고, 목천의 도동서원과 청도의 자계서원에 배향되었다.
김홍도(金弘道)는 도화서 화원이 된 후 왕세손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정조를 그렸다. 왕명으로 용주사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삽화로 판화를 그렸다. 풍속화를 많이 그렸으며, 조선의 3대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김대건(金大建)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神父)이다. 세례명은 안드레이고, 아버지는 기해사옥 때 순교하였다. 프랑스 신부 모방에게 영세받고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필리핀으로 건너가 매스트르 신부 문하에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했다.
천주교 박해에도 불구하고 귀국하여 교세 확장에 진력하다가 1845년 상하이에 가서 한국인 최초로 신부직을 받았다. 그 후 청나라 선교부와의 통신연락에 필요한 비밀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답사하다가 체포되어 25세 나이로 사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김대중(金大中)은 김해김씨 경파의 한 갈래인 안경공파의 사람으로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이 되었다. 국회의원 장택상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후 1960년 민의원, 6·7·8·13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1971·1987·1991년에는 신민당·평민당·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으나 낙선했다.
1997년에는 김종필 총재가 이끄는 자민련과 후보단일화에 성공하여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집권 후 국가의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남북정상회담,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내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외에도 김해김씨 문중에는 김종필(金種泌) 전 총리(전 자민련 총재)와 김형오(金炯旿) 전 국회의장을 비롯해 김기춘(전 법무부장관), 김성기(전 법무부장관), 김근수(전 국가보훈처장, 전 국회의원), 김상현(전 국회의원), 김성곤(전 국회의원, 쌍용그룹 창업주), 김영배(전 국회의원), 김용갑(전 국회의원), 김무성(국회의원, 전 한나라당 원내총무), 김부겸(국회의원), 김홍신(소설가, 전 국회의원), 김형욱(전 중앙정보부장), 김혁규(전 국회의원, 경남지사), 김중권(전 대통령 비서실장), 김종곤(전 해군참모총장, 전 국회의원), 김정길(전 행자부장관, 전 국회의원) 등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있다.
9. 경주김씨 - 현재 180만 육박… 국내 성씨 중 4번째로 많아
신라계 김씨 본관만 356개 동조이성도 9개 , 성관 역사 길고 복잡… 분파 놓고 법정다툼도 신라왕·김부식 비롯 근·현대 김홍집 등 배출
경주김씨 시조인 김알지 탄생 설화를 소재로 조선시대 조숙이 그린 ‘김알지 금궤도’ 지난 글(김씨의 거짓과 진실 편)에서 이야기했듯이, 한국의 김씨는 가야계(김해김씨)와 사성 김해김씨(시조 김충선)를 제외하면 대부분 신라계 김씨이다. 신라계 김씨는 대보공 김알지를 시조로 하며, 전체 인구는 김씨 인구 1072만명(2010년 인구센서스) 중 630만 정도로 추정된다. 또한 같은 뿌리이면서 다른 성씨를 쓰는 안동권씨, 수성최씨 등 9개 본관의 인구를 더하면 700만명이 넘는다
# 신라계 김씨의 갈래
‘신라김씨 총연합대종원’에 따르면, 신라계 김씨의 본관은 총 356개이며, 다른 성씨를 쓰고 있는 성관은 9개(감천문씨·강릉왕씨·곡산연씨·광주이씨·수성최씨·안동권씨·영양남씨·철원궁씨·태안사씨)이다. 그중 경순왕을 뿌리로 삼는 본관은 총 179개이며, 177개 본관이 대보공 김알지를 뿌리로 삼고 있다.
그 외의 본관에는 내물왕(안성김씨), 태종무열왕(강릉김씨 등 4개), 신무왕(광산김씨 등 9개), 헌안왕(광주이씨 등 4개), 희강왕(성주김씨), 문성왕(선산김씨 등 2)을 시조로 하고 있다.
하지만 신라계 김씨의 분화는 경순왕 이후로 판단된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조차도 자신을 신라계 김씨로 인식하였을 뿐, 본관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이 없다(현재 김부식은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파악되고 있으나, 신라삼성연원보에 따르면 경순왕의 후예라고 주장된다). 즉,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본관은 출신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후대에 내려오면서 본관의식이 생겨나고, 본관별 가계도가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일부 신라계 김씨에서 본관의 뿌리를 대보공 김알지나 무열왕, 신무왕 등으로 삼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후대에 자신의 본관 시조로 삼은 것일 뿐이다.
#경주김씨의 갈래
신라계 김씨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본관은 경주김씨이다. 2000년 통계청 발표 에 의하면 경주김씨는 총 173만6798명으로 김해김씨, 전주이씨, 밀양박씨에 이어 4위를 기록하고 있다.
현재 경주김씨는 경순왕의 셋째아들 김명종(金鳴鍾)을 시조로 하는 영분공파(永芬公派), 넷째아들 김은열(金殷說)을 시조로 하는 대안군파(大安君派), 경순왕의 후예이지만 중간 세계가 실전(失傳)된 김순웅(金順雄)을 시조로 하는 대장군파(大將軍派), 경순왕의 아들 김은열의 후손인 김인관(金仁琯)을 시조로 하는 태사공파(太師公派), 같은 김은열의 후손인 김장유(金將有)를 시조로 하는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등 5개 파가 주종을 이룬다.
이들은 또다시 후세로 내려오면서 수많은 지파가 생겨났다. 영분공파는 강릉공파·검교공파·두계공파·밀직공파·병조판서공파·부사공파·수은공파·시어사공파·옥구참공파·월성부원군파·참찬공파·판삼사사공파·평장사공파·현감공파로, 대안군파는 경파·백촌공파·병판공파·부산파·성천파·시랑공파·시중공파·예조판서공파·익화군파·차호공파·참판공파·청원파·평창파·호정공파로, 대장군공파는 감사공파·계림군파·공호공파·동지이판공파·봉산파·부제학공파·연동파·정수공파·춘고공파·판윤공파·현령공파·만호공파·경재공파·망주헌고파로 분파되었다. 또 태사공파는 전서공파·판관공파·좌랑공파·사승공파·공평공파·우재공파·송재공파로, 판도판서공파는 감사공파·공조판서공파·금제공파·사인공파·식암공파·장암공파·직장공파·진사공파·참교공파·참의공파·충암공파로 분파되었다.
‘삼국사기’
이렇듯 경주김씨는 역사가 오래된 성관으로 대단히 복잡하여 전모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 일례로 같은 경주김씨 분파끼리 법정다툼도 벌어진다.
대장군공파 대동보 편찬위원회가 자신들의 파조(派祖)를 경순왕의 후예로만 알려진 대장군 김순웅이 아니라 경순왕의 첫째아들인 마의태자(김일·金鎰)라고 주장하는 대동보를 제작 배포하자, 경주김씨 계림군파 대종회 측에서 대동보 배포금지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낸 것이다. 이에 마의태자의 후손임을 표방하고 있는 부안김씨와 통천김씨 측도 가세를 했으며, 신라김씨연합대종원 측도 장군공파 대동보 편찬위원회의 대동보가 잘못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즉, 대장군공파 대동보편찬위원회가 근거로 삼고 있는 신라삼성연원보는 1934년에 발행된 것으로 위보(僞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라삼성연원보가 위보임은 ‘경순왕에게 죽방부인 박씨와 낙랑공주 외에 석씨(昔氏) 부인이 있었다는 것’과 ‘경순왕의 아들이 8명이 아닌 14명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 책의 기술에 따르다 보면,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 마의태자의 자손이 된다는 것이다(김부식은 경주 호장 김위영의 증손자로 무열왕 자손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법원에서는 “김순웅과 마의태자 김일의 관계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아니하였지만, 김순웅이 김일의 둘째아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할 것”이라며, 장군공파 대동보 편찬위원회의 대동보 제작 배포중지 신청을 기각했다. 즉 법원에서는 김순웅이 마의태자의 아들인지 아닌지에 대해 판단을 유보한 것이다.
#경주김씨 분파와 연혁
경주김씨 영분공파의 파조인 김명종은 고려에서 경주군(慶州君)에 봉해졌다. 그의 6세손 김예겸(金禮謙)은 삼한벽상공신으로 내중령(內中令)을 지냈고, 그의 손자 김의진(金義珍)은 고려 문종 때 참지정사로 인재 등용에 공헌하여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또 12세손인 김인경(金仁鏡)은 조충과 함께 강동성에서 거란군 평정에 공을 세우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라 이름을 날렸다.
대안군파의 파조인 김은열은 공부시랑을 거쳐 대안군(大安君)에 봉해졌으며, 후손들은 경주김씨뿐 아니라, (구)안동김씨 등 여러 본관으로 나뉘어졌다. 그의 8세손 김봉모(金鳳毛)는 외국어에 능통하여 외국 사신을 접객하는 관반사(館伴使)를 맡아보았으며, 아들 김태서(金台瑞)는 고종 때 한림학사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김약선(공부시랑)·기손(평장사)·경손(추밀원부사) 3형제가 유명하다.
판도판서공파 파조인 김장유는 충북 보은에서 은거하여 생을 마쳤는데, 그 후손으로 김효정(金孝貞·정랑)의 아들인 김정(金淨)은 조광조와 더불어 혁신정치를 시도하다가 기묘사화로 인해 제주도에 귀양을 갔다가 36세에 사사되었다.
태사공파의 파조인 김인관은 예종 때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위위시경으로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에 올랐다. 그의 9세손 김자수(金自粹)는 좌상시(左常侍)로 있다가 고려가 망하자 안동에 은둔하였다. 특히 김자수의 8세손으로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김홍욱 이후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는데, 8명의 정승과 1명의 왕비가 나왔다. 특히 부마가 된 김한신(金漢藎·영조의 딸 화옹옹주의 남편)의 양자로 들어간 김이주의 손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유명하다.
장군공파의 파조 김순웅은 고려 초에 상장군을 거쳐 대장군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그의 선조가 누구인가에 대해선 아직 밝혀지고 있지 않다. 장군공파의 후손으로는 13세손 김균(金菌)이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지면서 계림군파의 중시조가 되었다.
특히 계림군 후손이 번창했는데, 정승 3명과 수많은 판서급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좌의정 김명원(金命元), 판서 김남중(金南重),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의 부친 김주신(金柱臣), 좌의정 김사목(金思穆), 판서 대제학 김창희(金昌熙),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등이 그의 후손이다.
#경주김씨의 인물들
신라에서 김씨는 마지막 56대 경순왕까지 총 38명의 왕을 배출하였다. 그중 첫 김씨 왕이 13대 미추왕이며, 17대 내물왕 이후로 김씨 왕권이 확립되었다. 그 후 52대 효공왕 이후 박씨에서 3명의 왕이 나왔다가, 다시 김씨인 경순왕으로 이어진 후 막을 내렸다.
경주김씨를 논하면서 신라의 38왕에 대해 거론해야 하지만, 신라 38왕은 신라계 김씨 중 어느 한 본관에 속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경주김씨 인물로 거론하긴 힘들다.
김부식은 그의 증조부인 위영(魏英)이 태조에게 귀의하여 경주지방의 호장이 되었다. 아버지 근(覲) 슬하에 4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을 했는데 3형제가 한림직을 맡았다. 그는 유교이념의 실현에 노력한 유학자였다. 이자겸의 난을 평정하고, 서경 천도를 주장하는 묘청의 난을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벼슬은 검교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이부사(檢校太保 守太尉 門下侍中 判吏部事)가 되었으며, 감수국사 상주국 태자태보(監修國事 上柱國 太子太保) 직도 겸하였다. 그 후 왕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집필하였다. 말년엔 관란사를 짓고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갑오개혁을 이끈 김홍집.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 추사 김정희는 조선 정조시대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영조의 부마인 김한진이 후손이 없자, 양자로 들어간 김이주의 손자이다. 실학파 중에서 북학파의 거두였던 박제가 밑에서 수학하였다. 벼슬길에 오른 후 사절단으로 북경 왕래를 하였고, 그 경험이 학문적 맥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 후 9년에 걸쳐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는데, 이때 추사체라고 불리는 글씨는 물론, 세한도로 대표되는 그림과 시와 산문이 완성되었다. 또한 문무왕비문을 해석하는 등 금석학 연구에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김홍집은 개성유수를 지낸 김영작(金永爵) 아들로 태어났다. 천주교도이자 개화사상에 식견을 지닌 부친의 영향을 받았으며, 박규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급진개화파였던 김옥균과 대별되는 온건개화파의 수장으로 유명한 그는 1차에서 4차에 걸쳐 김홍집 내각의 수장이 되어 갑오개혁 등을 이끌었다.
그러나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과 단발령을 거치면서 친러파의 등장으로 내각이 무너지고, 광화문에서 난도들에게 살해당하였다. 그는 항상 조선의 발전을 위해 선진 외국과 제휴하고 교류해야 한다는 것과 점진적 방법으로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문수(金文洙)는 경상북도 영천에서 출생했으며, 국회의원 3선을 거쳐 경기도지사에 재직 중이다. 경북고와 서울대 상대에 다녔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했다.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 등을 이끌면서 NL(민족해방)파에 대별되는 PD(민중민주)파를 대표하기도 했다.
그 후 장기표·이재오 등과 민중당을 결성하여 정계에 입문하였고, 신한국당과 합당하였다. 이후 3번에 걸쳐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거쳐 경기도지사에 재선되었다.
김연아(金姸兒)는 경기도 부천에서 출생했다. 종교는 천주교이고 고려대에 재학 중이며, 세계적인 빙상선수(피겨스케이팅)가 되었다. 그녀는 한국인 최초로 피겨스케이팅 부문 올림픽 챔피언이다. 그녀는 2009 월드 챔피언, 2009 대륙간 챔피언, 2007년에서 10년까지 그랑프리 파이널 챔피언에 올랐으며, 2010년에는 캐나다에서 열린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부문 챔피언에 올랐다. 현재 피겨스케이팅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 그리고 종합부분에서 여자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10. 광산김씨 - 신라왕자 김흥광이 시조… 한국 최고의 명문거족 중 하나
# 광산김씨는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신라계 김씨에서 경주 김씨 다음으로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는 성관이다. 광산김씨의 유래는 신라 왕자의 하나로 알려진 김흥광(金興光)이 광주지역(광주시 서일동과 담양군 평장동)에 자리 잡으면서 ‘광산’이라는 본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우리나라의 주요 문벌 중의 하나로 꼽히며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을 이끌어가는 인재의 산실, 삼한 갑족의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8명의 평장사(平章事)를 배출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5명의 정승과 대제학(大提學) 7명, 청백리 4명, 왕비 1명을 배출하였다. 또한 조선 예학의 태두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과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부자가 동국 18현으로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는 영광을 누렸다.
현재도 본관별 성씨 인구 순위는 김해김씨·전주이씨·밀양박씨·경주김씨·경주이씨·경주최씨·진주강씨 다음으로 8위에 속하며, 인구는 83만7000명이다(2000년 인구센서스, 통계청).
# 광산김씨의 시조와 유래
앞서 거론했듯이 광산김씨는 신라의 왕자 김흥광이 신라 말기 혼란스러운 경주를 피해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시)에 터전을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김흥광이 신라의 왕자 출신이라는 것은 고려 충렬왕 때 제안황대전고(提按黃臺典誥) 벼슬을 지낸 김이(金珥)의 광산현제영시서(光山縣題詠詩序)에 나온다. 그 문건에 의하면 “이 고을은 신라 때 왕자 김흥광이 장차 난리가 있을 것을 미리 알고 왕궁을 버리고 서인이 되어 이 땅 서일동에 와서 사셨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광산김씨의 시조 김흥광에 대해선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그가 신라 45대 신무왕의 셋째 아들이라는 설(정유대동보)과 다른 하나는 49대 헌강왕의 아들(동국만성보, 조선씨족통보)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두 번째 가설은 신빙성이 높지 않다. 왜냐하면 신라 49대 헌강왕 시대에는 한두 건의 반란은 있었지만, 서울인 경주는 기와집에 숯으로 밥을 하는 대단히 화려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토록 화려했던 경주에서 왕자가 혼란을 피해 무주로 숨어들어 은거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흥덕왕 사후, 아버지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희강왕과 다투다 패하여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하였다가, 장보고의 힘을 빌려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45대 신무왕의 이력을 볼 때, ‘광산현제영시서’의 글과 연관성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왕위에 오른 신무왕이 6개월 만에 죽고, 뒤를 이은 문성왕시대에도 친족 간의 왕권다툼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첫 번째 주장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광주에 자리를 잡은 김흥광은 그의 아들 김식(金軾)이 각간에 오르고, 손자 김길(金吉) 때에 고려에 귀의하여 무공을 세움으로써 광산부원군으로 책봉되기에 이른다.
더욱이 고려시대에 대대로 8명의 평장사(중서문하성의 정2품 부총리급)를 배출함으로써 ‘평장동’이라는 별칭까지 얻게 되었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광산을 본으로 삼은 때는 광산부원군으로 책봉된 고려 초기 이후로 판단된다.
하지만, 광산현제영서와 다른 기록도 보인다. 즉, 동지추밀원사를 지낸 김양감(金良鑑)의 아들 김의원(金義元) 묘지명에 쓰여 있는 나주광양현인(羅州光陽縣人)이라는 금석문이 있다.
이로 인해 이수건 교수 등은 광산김씨가 광주의 토성으로 있다가 고려 말에 가문을 일으키고 중앙 정계에 진출한 뒤, 광양김씨 선계에 자신을 이어 붙인 것이라는 가설을 내세운다(고려토성연구 上).
그러나 이 주장은 고려시대 성관의 의미가 확고하지 않았으며 어떤 때는 출생지를, 어떤 때는 본관을 기록하는 경우가 함께 존재했고, 광산김씨가 인구도 많지 않고 뚜렷한 명문가문도 아닌 광양김씨에게 세계를 이어붙일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쉽게 납득되지 않는 가설이다.
김장생은 이율곡의 제자로서 조선 예학의 태두이다. 그의 아들 김집과 함께 동국 18현으로 성균관에 배향되었고, 송시열·윤증 등 기호학맥의 본거지를 형성했다
# 광산김씨의 분파와 갈래
김흥광을 시조로 하는 광산김씨는 세계를 내려오면서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다. 그중 광산김씨 내에서는 양간공파·낭장공파·문숙공파·문정공파·문원공파·사온직장공파 등 6개 파가 생겨났고, 각 파는 또다시 수많은 지파로 나뉘어졌다.
아예 새로운 성이나 본관을 만들어 나간 파도 적지 않다. 그중 하나로 김흥광의 31세 손이면서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친 충장공(忠壯公) 김덕령 장군을 시조로 하는 용안김씨(龍安金氏)가 있다.
용안김씨는 김덕령 장군이 무고로 옥사를 하고 부인도 자결을 하자, 홀로 남은 아들 김광옥(金光沃)이 전북 익산군 용안면에서 은거하다, 외숙인 이인경의 임지인 평안도에 가서 정착한 데서 유래한다. 현재 인구는 50가구 244명(1985년 인구조사)으로 서울과 부산 등에 거주하고 있다.
그 외 은진김씨(恩津金氏)도 있다. 은진김씨의 시조는 김전개(金田槪)이다. 그는 광산김씨 별파인 감찰어공파의 사람으로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판관이 되었다. 국조방목(國朝榜目)에는 그의 본관이 광산이고, 후손들의 분포지는 관서지방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후손들이 은진(논산시)에서 관서로 이주한 것 같다.
이들은 평안북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서울 경기 등에 89가구 532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 시조 김흥광의 14세 손 김경량의 아들인 김수(金須)를 시조로 하는 초계김씨(草溪金氏)가 있다. 문과에 급제한 후 영암부사로 간 그는 삼별초군이 제주에 몰려들자 부하들과 제주를 지키려다 전사했다.
그 후손들이 광산김씨에서 분파한 후 초계를 본관으로 삼았다. 충남과 서울, 부산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이들은 총 189명(1985년 인구조사)으로 파악되었다.
또 다른 분파로 보령김씨(保寧金氏)가 있다. 보령김씨는 중종 때 예조판서를 역임한 김극성(金克成)을 시조로 하는 파와 김극성 후손으로 병조정랑을 지내고 보령에 정착한 김억적(金億積)을 1세조로 하는 파가 있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 보령김씨는 남한에 579가구 24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조선 명종조에 장례원 직장을 지낸 김태진(金泰辰)을 시조로 하는 남해김씨(南海金氏)가 있다. 김태진은 광산김씨 문숙공하 판도판서공파인 김극신의 증손인데, 연산군의 혼정을 탄핵했다가 관직에서 물러난 인물이다.
이후 어찌된 연유인지 몰라도 남해에 정착하게 되었다. 후손들은 경기 김포와 서울 성동구 일원에서 살고 있다. 남해김씨의 인구는 총 539명(1985년 인구조사)이며, 주로 서울과 경기도에 거주하고 있다.
이외에도 청거김씨(淸渠金氏)가 있다. 청거김씨의 시조 김승진은 김흥광의 16세손으로 화평군에 봉해진 충숙공 김심의 아들이다. 그는 공민왕 때 상호군을 지내고 광산부원군에 봉해졌는데, 후손들이 광산김씨에서 분적하여 본관을 청거(진안군 속면)로 정한 것 같다.
그외에도 김남우(金南雨)을 시조로 하는 무주김씨(茂州金氏), 김천리(金天利)를 시조로 하는 무풍김씨(茂豊金氏) 등도 광산김씨와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구체적인 분적 기록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광산김씨에서 아예 성씨를 바꾼 성관도 존재한다. 사씨(舍氏)가 그들이다. 사씨는 원래 광산김씨였는데, 10대조 김극윤(金克胤)이 사씨로 개성하였다고 전한다.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등장한 사씨는 1985년 조사 때는 23가구 8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천주교 개혁에 헌신했으며, 민주화운동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커다란 족적을 남긴 故김수환 추기경
# 광산김씨의 연혁과 인물
광산김씨는 김흥광의 10세 손인 김체의 아들 김위(金位)와 김주영(金珠永)의 형제 대에서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져 김광세(金光世)와 김광존(金光存)의 양대산맥을 이룬다.
김광세의 후손으로는 삼별초의 난에 순절한 대장군 김경량이 있고, 세조 때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한 김성원이 있으며, 손자인 김구(金絿)는 조광조와 함께 혁신정치를 도모하다 사사된 기묘명현(己卯名賢)에 속한다. 특히 김구는 필법과 문장에 뛰어났다. 그로 인해 그가 살던 인수방 마을 이름을 딴 인수체(仁壽體)라는 필체가 생길 정도였다.
김광존의 후손을 보면, 그의 고손자 김진이 대제학에 올랐고, 김정의 아들 김약채(金若采) 이후 광산김씨의 화려한 명맥이 이어졌다. 김정은 추성보리공신에 책록되고, 벼슬은 중대광(重大匡, 종1품)에 이르렀고, 광성군에 봉군되었으며, 김약채·김약항·김약시 등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특히 김약채는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논산시 연산면 일대에 자리를 잡아 훗날 기호학맥의 본거를 형성하는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 등을 배출하였다. 김장생에서 시작된 기호학파는 영남학파와 견주며, 조선 학맥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사계 김장생의 단일 후손에서는 7명의 대제학이 배출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가례집람(家禮集覽) 3권, 경서변의(經書辯疑) 8권 등 총 21권의 저서를 남긴 김장생은 조선 예학의 최고봉을 이룬다. 이러한 그의 학문은 아들인 김집과 송시열, 송준길, 윤증으로 전승되어 조선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으며, 본인은 아들과 함께 동국 18현으로 성균관에 배향되었으며, 안성의 도기서원과 연산의 돈암서원 등 10여개 사원에 제향되었다.
숙종조에 들어와서 인경왕후(숙종의 비)의 아버지인 김만기와 서포 김만중(金萬重)은 형제가 모두 대제학에 올라 명성을 드높였는데, 그중 김만중은 효심이 지극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지은 구운몽(九雲夢)도 귀양살이로 인해 어머니 곁을 떠나 있게 된 상황에서 어머니의 시름을 달래주려는 의도에서 지은 순 한글 소설이다. 그외 그의 저작으로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서포만필(西浦漫筆), 서포집(西浦集) 등이 전해진다.
이렇듯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수많은 인물을 배출한 광산김씨는 한국사회에서 최고의 명문거족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조선시대 광산김씨에서 배출된 인물만 하더라도 정승 5명, 대제학 7명, 왕비 1명(인경왕후)이 있고, 조선시대에 문과 269명, 무과 7명, 사마시(생원 진사를 뽑는 과거) 275명, 역과(번역관) 15명, 의과 4명, 음양과(천문 지리)에 1명, 율과(잡과 중 하나)에 1명, 주학에 19명 등 584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했다(김진우, 한국인의 역사).
현재도 수많은 인물이 광산김씨에서 배출되고 있다. 최근 작고한 김수환(金壽煥) 가톨릭 추기경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김 추기경은 1922년 대구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출생하여 1951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다. 세례명은 스테파노이며, 추기경으로 재직하면서 한국 천주교의 개혁에 헌신하고 민주화 운동과 서민을 돌보는 데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외에도 꽃을 노래한 시인으로 유명한 김춘수씨,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김황식 총리 등이 있으며, 김숙희(전 교육부 장관), 김하중(전 보건복지부 장관), 김장수(전 국방부 장관) 등과 김대중(조선일보 전 주필), 김용옥(철학과 교수), 김희수(김안과 병원장, 건양대 초대 총장), 김택수(전 국가대표 탁구선수), 김용건·김아중(영화배우) 등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고 있다.
11. 금녕김씨 -성관 금녕은 김해의 옛이름… ‘後 김’으로 불리기도
금녕김씨(金寧金氏)는 경순왕의 8세손인 김시흥(金時興·시호 문열 文烈)을 시조로 하는 성관이다. 2000년 인구센서스에서 금녕김씨는 대사성공지파(大司成公智派)·도순찰사공문제파(都巡察使公文齊派)·만은공길상파(晩隱公吉祥派)·상서공문희파(尙書公文熙派)·송암공질파(松菴公秩派)·영돈영공존파(領敦寧公尊派)·진주목사공형파(晉州牧使公炯派)·충경공경세파(忠敬公景世派)·충의공문기파(忠毅公文起派)·충정공문영파(忠貞公俊榮派) 등이 있다
# 금녕김씨는
인구는 총 51만3000명으로 파악되고 있지만 금녕김씨라는 성관을 쓰고 있는 인구뿐 아니라 금녕김씨이면서 김인찬을 시조로 하는 양근김씨(또는 김해김씨 북청파, 경주김씨 익화군파), 계유정난을 피해 황해도 풍천에 숨어 들어가 세거지를 삼은 김해군수 김춘(金春)를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 법흥파(金海金氏 法興派)가 있으며, 계유정난으로 멸문의 화를 당했던 백촌 김문기(金文起·사육신의 한 사람, 시호는 충의공·忠毅公)를 시조로 하는 경주김씨와 김해김씨의 백촌공파(白村公派)도 있다. 또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진 김준영(金俊榮)을 시조로 하는 분성김씨가 있고, 그 외 결성김씨도 같은 갈래의 성관으로 파악된다.
그중에서 김해김씨 법흥파와 백촌공파는 인구조사에서 김충선을 시조로 하는 사성 김해김씨와 구분되지 않아 김해김씨로 함께 파악되고 있으며, 2000년 인구센서스에서는 20만명 정도로 파악되었다. 따라서 금녕김씨의 성관에 속해 있는 인구는 51만3000+20만(=70만) 정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내 김녕김씨 조형물. #금녕김씨의 유래와 역사
금녕김씨는 경순왕의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넷째 아들인 김렴(金濂)을 시조로 하고, 인종 때 병부시랑으로 묘청의 난을 평정하여 광록대부를 거쳐 평장사에 올라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진 김시흥(시호 文烈)을 중시조로 하는 성관이다.
김렴의 후손으로는 첫째 품언(稟言)을 시조로 하는 수원김씨(水原金氏)가 있으며, 둘째 심언(審言)을 시조로 하는 영광김씨(靈光金氏)가 있다. 그 중 김품언이 거란의 침공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수성군(水城君)에 봉해졌는데, 그 후손 중에서 수원김씨, 인동김씨(仁同金氏), 용성김씨(龍城金氏), 용담김씨(龍潭金氏), 서흥김씨(瑞興金氏), 한남김씨(漢南金氏), 용궁김씨(龍宮金氏), 풍산김씨(豊山金氏), 김녕김씨, 김해김씨(법흥파) 등이 생겨났다.
그중 김녕김씨의 관조 김시흥은 대안군 김은열의 6세손이며, 김품언의 4세손인 김봉기의 넷째 아들로 지금의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는데, 병부시랑으로 있으면서 묘청의 난과 조위총의 난을 연거푸 평정하여 금주군(金州君·지금의 김해)에 봉해졌다.
이렇게 생겨난 금녕김씨는 갈래를 파악하기가 대단히 복잡한데,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중 하나는 금녕(김해의 옛 지명)의 지명 때문이다. 김해는 신라에 병합되면서는 금관군으로 되었다가 문무왕 때는 금관소경, 경덕왕 때는 김해소경으로 불렸다. 하지만 고려에 들어오면서 김해부(金海府) 또는 금주(金州)라고 불렸고, 다시 금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그 후 1895년이 되어서 김해군으로 개칭되었다.
이렇게 관향의 지명에 따라 김해김씨(후김)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가야계의 김해김씨(선김)와 구분이 모호하여 혼란을 주었다. 결국 금녕김씨는 고종 때 이르러 왕에게 상소한 다음 자신의 성관을 김녕김씨로 쓰게 되었다. 하지만 교통과 소식이 원활하지 못했던 당시의 상황 때문에 일부는 그대로 김해김씨를 성관으로 쓰고 있다(김해김씨 법흥파, 북청파).
또,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던 세력을 숙청한 계유정난으로 김문기와 그의 아들 현석(玄錫)이 참수를 당하고 멸문의 화를 입게 되자, 가문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도 계기가 되었다. 다시 말해 김문기(이조판서 김관의 아들)가 역적으로 몰린 뒤 김해김씨(후김)라는 이유만으로 수난을 당하게 되자, 성관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그 후 200년이 지난 영조와 정조 시대에 들어와 복권되고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지자 다시 모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갈라진 역사가 오래된 만큼 통합되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다른 성관으로 살아왔고(경주김씨 백촌공파), 일부는 김해김씨라는 성관 명칭을 고집하고 있기도 하다(김해김씨 법흥파, 백촌공파, 북청파). 또한 같은 계통의 일부는 다른 성관으로 바꾸어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경주김씨 익화군파, 양근김씨, 분성김씨 등).
실제 김문기를 관조로 하는 파도 경주김씨(백촌공파)·김해김씨(백촌공파)·김녕김씨(충의공파)로 나뉘어 있으며, 익화군(益和君) 김인찬(金仁贊)을 관조로 하는 파도 김해김씨(북청파)·경주김씨(익화군파)·양근김씨(楊根金氏)로 갈라져 있고, 분성군(盆城君) 김준영(金俊榮)을 관조로 하는 파도 금녕김씨(분성군파)와 분성김씨(盆城金氏)로 갈라져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서로 적통을 주장하며, 법률적 공방을 벌이기도 한다. 1990년 김녕김씨 충의공파가 경주김씨 백촌공파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이 그것이다. 경주김씨가 족보를 편찬하면서 김문기의 손자인 충립(忠立) 등의 후손을 누락하고, 적통 시비를 족보에 기록하여 김녕김씨 충의공파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또 1985년에는 경주김씨 백촌공파의 후손이 김녕김씨 충의공파 대종회를 상대로 김문기의 조부 김순(金順)의 묘지관할권 확인소송도 있었다. 하지만 법원에서는 어느 파가 진짜 적통인지 진실을 파악할 수 없다는 정도로 마감했다.
이렇듯 김녕김씨는 조선시대까지 가야계의 김해김씨(선김)와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다 보니 자신의 성관을 뚜렷이 정립할 수 없었다. 또한 충의공 김문기가 계유정난(단종복위사건)으로 인해 역적으로 몰리고 멸문의 화를 입게 되어 그 후손들은 성관마저 속이며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 후 고종 때에 김해김씨의 성관을 김녕김씨로 바꾸었으나, 일부 후손은 여전히 김해김씨를 고집하기도 하고, 다른 일부는 전혀 다른 성관을 주장하기도 하고, 일부는 성관을 분리해 독립해 있기도 한다.
백촌 김문기
# 또 다른 김녕김씨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김녕김씨는 대단히 복잡한 세계도를 지니고 있다. 같은 시조의 후손임에도 다른 본관을 쓰는 경우도 있고, 본관 명칭을 김녕김씨로 바꾼 이후에도 다른 성관을 이어오고 있는 혈족도 없지 않다.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렴계의 김해김씨 법흥파와 김춘계의 김해김씨 법흥파가 있다. 김렴계 김해김씨는 경순왕 아들인 대안군 김은열의 아들 김렴을 시조로 하는 법흥파이며, 김춘계 김해김씨 법흥파는 백촌 김문기의 8촌 동생인 김춘(김해군수)이 계유정난을 피해 황해도에 숨어살다, 그 후손들이 평안도 법흥동으로 이주한 뒤 붙여진 이름이다.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도운 김인찬을 시조로 하는 양근김씨(익화김씨)와 김해김씨 북청파, 경주김씨 익화군파가 있다. 익화는 경기도 양근(양평군, 양근과 지평군을 통합하여 양평군이 되었음)의 옛 지명으로 김인찬이 익화군에 봉해지면서 관향을 삼았다.
하지만 그의 아들 검룡(儉龍)이 훈련도감으로 제주도에 입도하여 제주에서 경주김씨 익화군파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넷째 종남(從南·영의정 추증, 금성군)의 아들들이 함경북도와 남도에 거주하게 되면서 김해김씨 북청파가 형성되었다.
김문기의 후손을 자처하는 가문으로는 김녕김씨의 충의공파, 경주김씨 백촌공파, 김해김씨 백촌공파 등이 있다. 김녕김씨 충의공파는 김문기의 손자로 충립 등 6명으로 기록하고 그 후손임을 자처하고 있으며, 경주김씨 백촌공파는 김문기의 손자를 계훈(繼勳)으로 파악하고 그 후손임을 자처하고 있으며, 김해김씨 백촌공파는 김문기의 아들 현석의 이름을 흠(欽)으로 파악하고 그 후손을 자처하고 있다.
또 김준영(金俊榮)은 김시흥(金時興)의 13세손인데,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녹훈되고 분성군(盆城君·김해 옛 지명)에 봉해졌다. 그 후손들이 김녕김씨 분성군파를 형성하고 있으며, 다른 후손들은 아예 분성김씨로 분적하기도 했다.
이외에 결성김씨(結城金氏·결성과 홍주가 통합되어 홍성군이 됨)가 있는데, 결성김씨에는 김예철(金禮哲)을 시조로 하는 상주파와 이조판서 김달손(金達孫)을 시조로 하는 위원파가 있다. 김예철은 김녕김씨 시조 김시흥의 11세손이다.
# 김녕김씨의 인물들
김시흥은 김녕김씨의 시조이다. 묘청의 난과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였다. 시호는 문열공으로 금주군(지금의 김해)에 봉군되어 김녕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인찬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도와 조선 개국 일등공신이 되고, 익화군(익화는 지금의 양평)에 봉해졌다. 그의 후손들이 경주김씨 익화군파, 김해김씨 북청파, 양근김씨 등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의 아들 종남은 예조전서를 역임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문기의 호는 백촌이며, 시호는 충의공이다. 시조 김시흥의 9세손이며, 이조판서 김관의 아들로 충북 옥천에서 출생했다. 호조참판과 함길도절제사를 지냈고, 둔전법을 실시하여 큰 성과를 거뒀다. 세조 때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로 있으면서 계유정난 때 군대를 동원하는 역할을 맡았다가 실패하고,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사육신). 이때 영월군수로 재직하고 있던 아들 현석도 함께 순절했으며 부인과 딸, 며느리 등은 세조 공신들의 노비로 넘겨졌다. 정조에 의해 복권되고 시호로 충의공이 하사되었다.
김홍일(金弘壹·김해김씨 법흥파)은 평북 용천에서 출생했으며,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귀주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조선의용군 사령관을 거쳐 광복군총사령부 참모장이 되었다. 6·25전쟁 때는 제1군단장으로 참전하였고, 5·16군사정변 후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고문을 거쳐 1962년 외무장관에 취임하였다. 1967년부터 정계에 투신하여 신민당에 입당해 1971년 신민당 총재가 되었으나 이듬해 사임하였다.
김영삼(金永三·김녕김씨 충정공파)은 경남 거제에서 출생했으며,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26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9선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또한 야당 총재를 3번이나 역임하고, 김대중(제15대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창립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헌신하였다. 1990년 노태우(대한민국 13대 대통령), 김종필 등과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했으며, 1992년에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군사독재를 종식하고 문민정부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을 합의한 김일성의 갑작스런 죽음과 경기침체로 인한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사태 등 국정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 외에도 국무총리를 역임한 김석수(분성김씨에서 후에 김녕김씨로 변경),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김재규, 김법린 전 문교장관 등이 유명하며, 음악가이자 지휘자인 금난새씨도 김녕김씨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12. 선(구)·후(신)안동김씨 - 신라종성 분파 뿌리 달라 …선안동김씨, 경순왕 손자 김숙승이 시조
#안동김씨는
현재 안동김씨(安東金氏)에는 뿌리가 다른 두 개의 성관이 존재한다. 선(先, 또는 구)안동김씨와 후(後, 또는 신)안동김씨가 그것이다. 이는 금녕김씨가 김해김씨에서 금녕김씨로 바꾸기 전 김수로왕계의 김해김씨(선김)와 알지계의 김해김씨(후김)가 있었던 것과 같다.
선(구)안동김씨는 경순왕의 손자인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고, 삼별초의 난과 왜구를 토평하여 상락군 개국공신에 봉해진 김방경(金方慶)을 중시조로 하는 성관이다. 반면 후(신)안동김씨는 안동의 성주로서 견훤의 후백제군을 물리치고 태조 왕건에게 귀부하여 개국공신 삼광태사에 오른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성관이다.
선(구)안동김씨의 중시조 김방경의 아들과 손자들이 고려 말에 크게 이름을 떨쳤으며, 조선 전기에는 김영후(金永煦)의 후손들이 크게 세력을 떨쳤다. 현재 15개 파가 존재한다. 그 중 김익달(金益達)의 제학공파, 김사렴(金士廉)의 안렴사공파, 김사형(金士衡)의 익원공파가 60∼70%를 차지한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전국에 42만5264명으로 조사되었다.
후(신)안동김씨는 조선 중기 김극효(金克孝)의 아들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형제가 정승이 되면서 가문이 크게 번성했다. 이후 김조순(金祖淳)의 딸이 순조비가 되면서 후(신)안동김씨의 막강한 세도정치가 펼쳐졌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4만770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안동김씨의 시조 출생연대나 안동을 본관으로 삼은 시기를 보면 김선평을 시조로 하는 후(신)안동김씨가 앞서 있다. 그런데 시기가 앞선 김선평계의 안동김씨를 후(신)안동김씨로 쓰고, 뒤에 안동을 본관을 정한 김숙승계의 안동김씨를 선(구)안동김씨로 쓰고 있다. 이는 선(구)안동김씨가 고려 말과 조선 전기·중기에 세력을 떨쳤고, 후(신)안동김씨가 조선 중기·후기에 세력을 떨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선(구)안동김씨의 연혁과 인물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선(구)안동김씨는 경순왕의 손자인 김숙승을 시조로 하고, 삼별초의 난과 왜구를 평정한 상락군 김방경(충열공·忠烈公)을 중시조로 하는 성관이다. 중시조 김방경 이후 다섯 아들과 손자들이 모두 고려와 조선의 명신록(名臣錄)에 오를 정도로 이름을 떨쳐 명문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장남 선은 전법판서를 거쳐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고, 차남 흔은 삼중대광 도첨의사사, 셋째 순(恂)은 삼중대광 상락군, 넷째 논은 천호위 상장군이 되었다.
그중 순의 아들 중에서는 조적의 난을 평정한 후 좌정승으로 상락부원군이 된 영돈(永敦)과 우정승인 영후(永煦)가 유명했다. 영돈의 손자 대에서 직제학지공조사사에 오른 김익달에서 제학공파가, 영후의 손자로 안렴사에 오른 김사렴에서 안렴사공파가,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이 된 김사형에서 익원공파가 생겨났다. 이들을 제·안·익 3파라고 하며, 그 외에도 도평의공파나 문온공파 등 총 15개 파가 있다.
그중에서 형제지간으로 다른 길을 걸은 김사렴과 김사형에 얽힌 일화가 많다. 김사렴은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더불어 고려말 충신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신돈의 전횡을 탄핵하였으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좌사간(左司諫) 제수를 마다하고 청주근방(청원)에 은거하였다.
반면 동생인 익원공 김사형은 조선 개국에 적극 가담하여 일등공신이 되었다. 일등공신이 된 후 좌의정에 오른 김사형이 형의 좌사간 벼슬 제수를 전하려 청주에 도착했으나 만나지 않고, 더 깊은 도산(지금의 안동)에 은거하였다.
그 결과 조선 전기 세력을 떨친 선(구)안동김씨의 인물들은 주로 김사형(익원공)의 후손에서 나왔다. 후손 김질은 세조 때 우의정에 올랐고, 김수동(金壽童)은 중종 때 영의정에, 동생 수경은 정국삼등공신 영양군에 봉해졌다. 그외에도 공조판서에 오른 김질의 아우 김무, 이조판서에 오른 김질의 손자 김찬이 있다.
또한 선(구)안동김씨에서는 무인(武人)이 많이 배출되었다. 9명의 역대 충무공(이순신 등) 중 2명이 나왔으며, 삼도수군통제사만도 10명이나 배출되었다. 2명의 충무공 중 하나가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을 이끈 김시민(金時敏) 장군이며, 다른 한 명은 광해군 때 훈련대장으로 강홍립과 함께 후금(청) 정벌에 나섰다가 전사한 김응하(金應河) 장군이다. 그 외 원주목사로 원주성을 사수하다 전사한 김제갑이 있으며, 병자호란 때 성천부사로 있다가 순절한 김언(金言)도 있다.
이처럼 조선 전기와 중기에 승승장구하던 선(구)안동김씨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인조 때에 김자점(金自點)이 역모죄로 처형되면서부터이다. 김자점은 인조반정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후 영의정에까지 오르고, 인조의 딸 효명공주를 며느리로 맞는 등 권세를 휘둘렀으나,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탄핵을 받고 처형되었다. 이로 인해 선(구)안동김씨의 위세는 크게 위축되었다.
근대 이후 선(구)안동김씨의 인물로는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있다. 김구는 15세에 한학을 배웠고, 동학에 들어가 접주가 되어 동학혁명을 지휘했다. 그 후 일본군 장교를 살해하여 사형이 언도되었다. 하지만,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으며, 1898년 탈옥했다. 탈옥 후 공주 마곡사에 은신했다가 봉양학교를 세우고 교편을 잡았다.
1909년 안중근 의사 의거에 관련된 혐의로 다시 투옥되었다. 출옥 후 1910년엔 황해도 대표로 신민회에 참가했으며, 105인 사건으로 또다시 투옥되어 종신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1914년에 출옥했다.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내무총장, 국무령을 거쳐 임시정부 주석이 되었다.
임시정부 주석으로 있으면서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지휘했으며, 광복군 총사령부를 조직했다. 해방 후 귀국했으나, 단독정부 수립을 놓고 이승만과 대립하며 남북협상에 임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의 아들 김신(金信)은 공군참모총장이 되었고, 손자 김양은 국가보훈처장을 역임했다.
그외 선(구)안동김씨의 인물로는 충남도지사를 역임한 김학응, 전두환 정권의 경제정책 입안에 공을 세운 김재익 경제수석, 서예가 김사달 박사, 동원그룹의 김재철 회장 등이 있다.
#선(구)안동김씨의 또 다른 혈족들
해주김씨(海州金氏)에는 계통이 다른 세 혈족이 있다. 그중 하나가 김문동(金文東)계인데, 김문동은 김사렴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해주김씨 김문동계는 시조를 김사렴으로 삼고 있으며, 전라도사 김문동을 1세조로 삼고 있다. 김사렴의 후손들이 어떻게 해서 해주에서 세거하고, 해주김씨로 분적하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외에도 해주김씨에는 병조판서 김헌의 후손인 김맹(金孟)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으며, 나주김씨 김세(金世)의 후손인 김우한(金佑漢)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다. 해주김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총 5864명으로 조사되었다.
철원김씨(鐵原金氏)는 후금정벌에 나섰다가 전사한 충무공 김응하 장군을 시조로 하는 혈족이다. 김응하가 철원 출생이었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안동김씨에서 철원김씨로 분적한 것으로 보인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총 392명으로 조사되었다.
후안동김씨인 김옥균.
#후(신)안동김씨의 연혁과 인물
후(신)안동김씨는 고창(안동)의 성주였던 김선평이 후백제군을 물리치고 고려에 귀부함으로써 생겨난 성관이다. 이때 함께 공을 세웠던 김행(후에 권행)은 안동권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장정필은 안동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후(신)안동김씨는 조선 중기 이후 김상용과 김상헌 대에서 크게 일어났는데, 그중 청음 김상헌의 후손들이 조선 후기에 세도정치로 위세를 떨쳤다. 후(신)안동김씨를 가리켜 “후(신)안동김씨의 곳간엔 금관자(金貫子, 관자는 갓끈을 고정하는 도구로 금관자라는 것은 높은 벼슬을 가리키는 말)가 서 말”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이다. 곳간은 6명의 창(昌)자 돌림을 창고에 빗댄 말이다.
첫째 김창집(金昌集)의 후손에서는 왕비 3명·영의정 4명·좌의정 3명·판서 13명이 배출되었으며, 둘째 김창협(金昌協)의 집안에서는 부자(父子) 대제학이 나왔다. 그 후손들이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조판 서 김수근의 두 아들(김병학·김병국)은 모두 영의정이 되었다. 셋째 김창흡의 집안에서는 뛰어난 문장가들이 나왔으며, 벼슬은 우의정(김달순)과 공조판서(김선근)가 나왔다. 넷째 김창업의 집안에서는 진경산수화가 김윤겸, 형조참판 김양행, 병조판서 김이익 등이 나왔다. 다섯째 또 다른 김창집의 집안이다. 김창집은 왕자의 사부가 되었으며, 공조판서 김용겸이 나왔다. 여섯째 김창립의 집안에서는 공조, 이조판서 김학순, 공조참판 김연근, 공주의 부마이며 창녕위로 봉해진 김병 주, 형조판서 김석진 등이 나왔다.
이렇듯 후(신)안동김씨의 김상헌 후손에서는 수많은 벼슬이 쏟아져 나왔는데, 특히 김상헌의 후손인 김조순의 딸이 순조비(순원숙황후)가 되면서부터다. 그 후 60여년 동안 정승과 판서를 독차지하면서 세도정치를 펼쳤다. 그리하여 정승이 15명(영의정 8명·좌의정 4명·우의정 3명), 판서가 50명 이상이나 나왔다.
그외 후(신)안동김씨의 주요 인물을 보면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金炳淵),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金玉均),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있으며, 독립운동가인 김가진(金嘉鎭·충청도 관찰사,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 김학규(金學奎·광복군 제3지대장), 김복한(金福漢·파리강화회의 독립청원, 옥사) 등이 있다.
그중 김옥균(고균·古筠)은 충남 공주에서 출생했으나 당숙인 김병기(金炳基)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에 임명되었다. 박규수에게서 개화사상을 배우고 관리들과 청년들을 모아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일본이 영국과 같이 되는 것을 보고 조선은 프랑스와 같이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기 위해 정권을 장악한 다음 ‘위로부터의 개혁’을 단행할 것을 생각하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후 다시 상하이로 망명했으나,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김좌진은 충남 홍성에서 출생했다. 1905년 자신의 집에서 부리던 노비 30명을 모아놓고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논밭을 무상으로 나눠주었다. 1907년 호명학교를 세우고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안창호 등과 함께 서북학회를 세운 후, 북간도에 독립군사관학교를 설립하려다 투옥되었다. 이후 만주에 건너가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3300여명을 살상하는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독립운동 노선을 두고 대립적이던 공산주의자 박상실의 총에 맞아 순국했다. 그의 아들로 알려진 국회의원 김두한(金斗漢)은 애첩이었던 기생 김계월의 슬하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 의성김씨 - 경순왕의 아들 김석이 시조…독립유공자 85명 배출한 명문가
#의성김씨는
경북 의성을 본관으로 삼고 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석(金錫)을 시조로 하는 성관이다. 김석은 고려 초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는데, 그 후손들이 의성김씨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의성김씨의 시조 김석에 대해서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의성김씨 족보)이라는 설과 다섯째 아들(조선씨족통보, 신라김씨분파연원보)이라는 설로 나뉘어 있다. 시조 김석에 의해 처음으로 개관된 의성김씨는 8세손 김공우(金公瑀) 대에서 크게 번성했는데, 장자 김용비(金龍庇)는 태자첨사(太子瞻事)를, 차자 김용필(金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 막내 김용주(金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의성김씨는 이들 대에서 5개파로 나뉘어 세계를 이어오고 있는데, 첨사공파·수사공파·충의공파·찬성공파·선락장군공파 등이 그것이다. 의성김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25만330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의성김씨 연혁과 인물
의성김씨는 김석이 성관을 연 이후, 고려와 조선조에 이어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명문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군(君)으로 책봉된 사람이 7명이 나왔고, 시호를 받은 사람도 충의공 용주 외에 용소공 영열(英烈), 문원공 원(源) 등 13명이나 된다.
고려조에서는 김공우 아들 3형제 외에도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김훤(金暄)과 우왕 때 도순문사를 지낸 김광부(金光富)가 유명했고, 삼국사기 발문을 쓴 김거두(金居斗)가 있다. 그리고 추밀원부사를 지낸 김춘(金椿), 좌사부대부를 지낸 김옥(金玉), 평장사를 지낸 김연(金衍) 등이 가문을 빛냈다.
조선조에 들어와 의성김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대제학과 좌찬성을 역임한 김안국(金安國)과 정국(正國) 형제를 들 수 있다. 김안국·정국 형제는 김굉필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천문·주역 등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같은 시대 유명했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組)와 쌍벽을 이루었다. 조광조가 급진적 개혁을 주창했다면, 김안국은 점진적 개혁을 주장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일파로 몰려 파직당하기도 했다.
그는 학문의 입문서로 알려진 ‘동몽선습(童蒙先習)’의 저자이기도 하면서 ‘모재집’ 등을 집필했고, ‘이륜행실’ 등의 편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또한 그의 동생인 김정국은 의서(醫書)에 조예가 깊어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를 남겼다.
그 외에 임진왜란 전에 조선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학봉 김성일(金誠一)이 있다. 동인이었던 그는 일본에 다녀온 후 서인 황윤길이 일본의 조선침략 가능성을 언급하자, 이에 반대하여 침략 가능성을 부인했다. 그로 인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탄핵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같은 동인이었던 유성룡이 변호하여 살아날 수 있었다.
그 후 임진왜란 당시 초유사(招諭使: 난리 시 백성을 초유하는 임시벼슬)로 의병을 모아 진주성을 사수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문하생으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조선후기 영남학파의 학문전통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도 그가 살았던 학봉고택은 의성김씨 종가로 유명한데, 그중 운장각은 학봉의 유품과 의성김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옛 책과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특히 의성김씨는 조선 말기에 들어와 많은 의병운동가, 독립지사, 의사, 열사를 배출한 가문으로 유명하다. ‘안동김씨의 나라’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조선시대는 안동김씨의 권세가 막강하였는데(조선 전·중기는 선 안동김씨가, 후기는 후 안동김씨의 세도가 심했다),
조선 말과 일제 때에는 의성김씨 가문에서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심지어 같은 가문, 집성촌 전체가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 예도 있었다. 그리하여 의성김씨 한 문중에서만 독립운동 유공자가 85명이나 배출되었다.
심산 김창숙 선생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 전국 유림을 대표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서로군정서를 창립하고 참모장을 역임한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전봉준과 함께 갑오농민전쟁을 지휘한 김도삼(金道三), 단발령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김도화(金道和)가 유명하다.
심산 김창숙은 경북 성주 출생으로 어려서 유학을 배우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성토하는 상소문을 올려 투옥되었다. 1909년 성명학교를 창립하여 육영사업을 진행했으며, 3·1운동 이후 망명을 결심하고, 전국 유림을 대표하여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진정서를 가지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된 후 귀국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다가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그 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신채호·박은식 등과 신문을 발간하고,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했다. 또한 이동녕·김구 등과 함께 청년결사대를 국내로 파견하여 일제 통치기관을 폭파하도록 했다.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도 그의 지도하에 이뤄진 것이다.
그는 또다시 일본영사관원에게 체포되어 14년형을 언도받고 대전형무소에 복역하는 중 병세가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이때 받은 고초로 평생 일어서지 못하는 앉은뱅이가 되었다. 해방 후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고,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전국의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설립한 성균관대학의 재단 분규로 총장직을 사임한 뒤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1962년에 별세했다.
일송 김동삼의 본명은 긍식(肯植)으로 경북 안동에서 출생했다. 1907년 고향에서 유인식 등과 함께 협동중학을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종사하다가 1909년 서울의 양기탁 집에서 신민회 결성을 논의하였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이시영·이동녕 등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교포의 안정과 교육 문제에 힘쓰며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이때 설립한 신흥강습소는 후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발전하였다. 1918년에는 서일·김좌진 등 38인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였다. 이것은 다시 상하이임시정부 휘하로 들어가 서로군정서가 되었는데, 그는 서로군정서의 참모장이 되었다. 그 후 만주사변(1931년) 때 하얼빈에서 잡혀 강제 송환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는 중 옥사하였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의성김씨에서는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김재춘(金在春)을 비롯하여 국회의원 김중위·김명윤·김원웅·김화남 등이 있으며, 수많은 정관계·학계·재계 인사들이 있다.
#또 다른 의성김씨-분관 성씨들
의성김씨 후손들은 여러 파로 나뉘었을 뿐 아니라, 많은 성씨가 본관을 분적해 나가기도 했다. 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개성김씨(開城金氏): 개성김씨는 김석의 8세손 김공우의 셋째 아들 김용주를 시조로 삼고 있는 성관이다. 개성으로 성관을 삼은 것은 시조 김용주가 여진정벌에 공을 세우고 추충공신(推忠公臣)으로 책록되고, 개성부사·평장사를 거쳐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짐에 따라 분<
14.후 김해김씨, 사성 김해김씨, 강릉김씨 - '사육신' 김문기 계기로 가문 멸문지화…복권 후 본적 바꿔
# 후 김해김씨는
지난번 필자는 김녕김씨(金寧金氏)를 서술하면서, 조선 말까지 후 김해김씨(後 金海金氏)로 불렸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것은 후 김해김씨의 시조 김렴(金濂·경순왕의 손자)이 고려초에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진 데 따른 것이다.
김녕김씨는 시조 김렴의 후손인 김시흥(金時興·김녕김씨의 중시조) 대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으나, 김시흥의 8대손인 백촌 김문기(金文起·사육신 중 한 명)에 이르러 단종복위 운동으로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또한 가락 수로왕계의 김해김씨(선김)와 구분이 되지 않아, 가문의 뿌리가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그 후 영·정조 시대에 들어와 백촌 김문기가 복권되고 가문을 정비할 상황이 되자, 수로왕계의 김해김씨(선김)와 구분하기 위해 본관을 김해의 옛 지명인 김녕으로 바꾸게 되었다. 하지만,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 사정으로 가문의 모든 지파(枝派)가 정리되지 못했다.
또한 일부에서는 가락 수로왕계보다 자신들이 먼저 김해를 본관으로 삼았는데, 단지 수적으로 열세이기 때문에 본관을 바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여 김해김씨를 고집하고 있다. 따라서 스스로를 김해김씨 법흥파(法興派)·익화파(益和派)·종남파(從南派)·종민파(宗敏派) 등으로 지칭하며 존속하고 있다.
후 김해김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총 20만명 내외(2000년 인구조사 19만9544명, 사성 김해김씨 포함)로 파악되고 있다.
# 김해김씨 법흥파
김해김씨 법흥파는 시조 김렴의 14세 손으로 김해군수였던 김춘(金春)을 파조로 하고 있다. 김춘은 멸문지화를 당한 백촌 김문기의 8촌 동생이었는데, 김문기가 화를 당하자 황해도 풍천으로 피신을 했다. 그 후 성종 2년에 다시 평북 용천군 법흥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로 인해 김해김씨 법흥파를 일명 법흥김씨라고도 한다.
김해김씨 법흥파는 법흥동으로 자리를 옮긴 후 크게 번창했다. 그 후손 중에 문관이 39명, 진사 9명, 무관 20명을 배출하였다. 특히 무관으로 이름을 떨친 후손들이 많았다. 김덕순(金德純)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했고, 정묘호란 때도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또한 김종민(金宗敏)은 정묘호란 때 의병장으로 전공을 세워 벼슬이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근세에 들어서는 광복군 총참모장과 외무장관을 역임한 김홍일 장군이 유명하다. 그는 1918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중국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군 장교로 항일전에 참전하였으며, 광복군 참모장을 지냈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장을 맡았고, 5·16 직후에는 최고회의 의장과 외무장관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의 좌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했다가 귀화하여 본관을 하사받은 김충선 장군의 영정
# 김해김씨 익화파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국한 공로로 좌명일등공신, 의정부 좌찬성에 오른 익화(지금의 양평)군 김인찬(金仁贊)을 파조로 하는 지파이다. 이들은 시조 김인찬이 경기도 양근(양평)을 식읍으로 받았기 때문에 양근김씨(楊根金氏)로 지칭되어 오다, 일부는 김녕김씨로 합보를 했고, 일부는 김해김씨 익화파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제주지역에서 자리를 잡은 익화군파는 경주김씨로 본관을 쓰고 있기도 한다.
하지만, 김인찬의 선계가 뚜렷하지 않다. 양근김씨의 시조 김인찬은 역사적 문헌에 의하면, 북청천호(北靑千戶)였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동북지방의 토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그가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조선 개국 후 중추원사, 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로서 태조의 친병(친위부대)을 통솔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런 공로로 사후에 조선개국일등공신, 익화군에 추증되었다. 그 후손들은 조선시대 대대로 무인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무과 급제자만 10명이 배출되었다.
# 사성 김해김씨는
앞에서 이야기한 김렴계 김해김씨, 그리고 가야계 김해김씨와는 전혀 다른 김해김씨가 있는데, 이들이 바로 사성 김해김씨(賜姓 金海金氏)이다. 사성 김해김씨는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좌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했다가 귀화하여 본관을 하사받은 왜장 사야가(김충선·金忠善)를 시조로 한다.
이때 함께 귀화한 장졸들이 3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은 잇따라 터진 병자호란으로 함경도 등 북방지역 방어에 집중 배치되었으며, 전쟁이 끝나고 함경도에 정착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 후 김충선은 진주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을 아내로 맞아 가창면 우록동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로 인해 사성 김해김씨가 우록김씨로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
사성 김해김씨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일본계 성씨이다. 시조 사야가(沙也可, 金忠善, 호는 모하당·慕夏堂)는 가등청정의 좌선봉장으로 군사 3000명을 이끌고 부산 동래에 상륙하였으나, 조선의 문물을 흠모하여 귀순하기를 청하였다.
귀순 후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晉), 절도사 이덕형(李德馨), 체찰사 정철(鄭澈), 초유사 김성일(金誠一), 통제사 이순신(李舜臣),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와 협의 후 함께 귀화한 일본인 김계수, 김계충과 함께 조총과 도약지법을 가르치게 했다.
그 후 울산과 경주전투에서 적을 대파하게 되자 권율과 한준겸이 주청하여 성명(姓名)이 하사되고, 자헌대부로 승진하였으며 의관제복도 하사받게 되었다. 이때 하사받은 성씨가 김(金)이며, 본관은 김해(金海), 이름은 충선(忠善)이었다.
난이 끝난 후 또다시 북쪽 변방이 시끄러워지자 임무를 자청하여 10년 동안 북방지역 방어를 맡았다. 인조 때에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려고 출전하여 이괄의 부장인 서아지(徐芽之)를 체포하여 참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도 출전을 했으나, 남한산성에 도달하기 전 화의가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구 우록동으로 돌아가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후 후손들이 가창면 우록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게 되어 우록김씨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슬하의 5남이 모두 벼슬을 하고(장남 김경원은 병조참판, 차남 김경신은 공조참판, 삼남 김우상은 상호군, 사남 김계인은 부호군, 오남 김경인은 이조참판에 추증), 손자 김진영이 좌승지 겸 참찬관을 역임하는 등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다.
최근의 인물로는 김치열 전 법무부장관 등이 사성 김해김씨의 후손이다. 현재 김충선은 달성군 녹동서원에 배향되어 있는데, 일본인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아 대구시문화관광코스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귀화한 일본인 장수 김성인(金誠仁)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가 있다. 이들은 후에 본관을 함박김씨로 변경하였다. 김성인의 후손들 역시 무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공적을 세운 김귀성(金貴成), 영조 때 이름을 떨친 김득추(金得秋), 김수태(金守泰) 부자가 있다.
# 강릉김씨는
강릉김씨(江陵金氏)는 김알지의 21세손이며,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5세손인 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을 시조로 하는 성관이다. 김주원은 각간으로 시중 겸 병부령을 지냈다. 선덕왕이 후계가 없이 승하하자 군신회의에서 김주원을 추대했으나, 큰 비가 내려 알천을 건널 수 없게 되자 즉위를 마다하고 어머니의 고향인 강릉(명주)에 내려가 살게 되었다.
이에 왕위를 이은 김경신(원성왕)이 그를 명주군왕에 봉하고, 명주(강릉) 일대를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그 후 김주원은 명주성을 쌓고 명주 일대를 통치했으며, 그 후손들은 강릉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강릉김씨의 지파에는 청풍파·안동파·임경공파·강릉노암공파·양양공파 등 70여개 파가 존재하고 있으며, 2000년 인구조사에서 5만2050가구에 16만5963명으로 파악되었다.
# 강릉김씨의 연혁과 인물
강릉김씨는 김주원이 명주 일대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를 행해오면서 신라 하대에 수많은 왕위계승 싸움에서 지대한 역할을 해왔다.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金憲昌)은 헌덕왕 때 공주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켜 국호를 장안(長安)이라고 칭했으나 실패로 끝나 자결하였으며, 첫째 증손자 김양(金陽)은 민애왕을 제거하고 신무왕을 추대하여 각간시중 겸 병부령을 지냈다. 셋째 김신(金身)은 명주에 근거지를 갖고 나아가지 않았는데, 그로 인해 후손들도 정치적 부침에 화를 입지 않고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후손 김순식(金順式)은 경순왕이 귀부했음에도 끝까지 항거하다, 왕건에게 협력하여 후백제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강릉왕씨(江陵王氏) 성을 하사받아 그 후손들이 번영을 누렸으나 조선시대 들어와 왕씨에 대한 탄압이 진행되자 다시 김씨로 복귀하였다.
강릉김씨는 김주원의 9세손 김상기(金上琦) 때 크게 번성했다. 김상기는 평장사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김인존은 문하평장사 상주국으로 익성공덕공신으로 책록되고, 중요한 국사가 있을 때마다 왕의 자문을 맡았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크게 이름을 떨친 사람은 조선의 신동과 생육신으로 유명한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있다. 그는 세종 17년 서울에서 김일성(金日省)의 아들로 태어났다. 3세 때 한시를 지었으며, 5세에 중용과 대학을 통달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부하던 책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승려가 되었다. 여러 차례 세조의 소명을 거절한 후 금오산실에 은거하며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와 ‘산거백영’을 지었다. 잠시 환속하여 아내를 맞이하기도 했으나, 다시 입산하여 충청도 무량사에서 생을 마쳤다.
그 외 예조판서 김첨경(金添慶), 판서 김시환(金始換)·김시형(金始炯)·김시위·김상성(金尙星), 우참찬 김노진, 영의정 김상철(金尙喆) 등이 있고, 40년간 대사성을 지낸 김반(金泮)의 후손들은 강서김씨(江西金氏)로 분관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강릉김씨는 조선시대 문과급제자만 114명을 배출하였으며, 판서가 8명이 나와 ‘팔판동(八判洞)’이라는 동네가 생기기도 했다.
근대 들어서는 강릉김씨의 인물로는 ‘날개’ ‘오감도’ 등으로 유명한 시인 이상(李箱·본명 金海卿)이 있으며, 김진만 전 국회부의장, 김진선 전 강원지사,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등이 있다. 또 축구선수 김남일, 탤런트 김래원도 강릉김씨로 알려져 있다.
15. 선산김씨, 삼척김씨 등 -김종직 일문 무오사화로 뿔뿔이-최근 국회의원 14명배출
# 선산김씨는
2000년 통계청 조사에서 10만9682명으로 파악된 선산(善山)김씨는 통일신라 문성왕 8세손인 김선궁(金宣弓)을 시조로 하는 계통과 경순왕의 여덟째 김추(金錘)를 시조로 하는 계통, 그리고 김한충(金漢忠)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김한충을 시조로 하는 계통은 남한의 인구조사에서는 파악되지 않고 있어, 김선궁계와 김추계가 선산김씨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시조를 김선궁으로 하는 선산김씨는 일선(一善)김씨로 불렸다. 그 이유는 선산의 옛 지명이 일선군(一善郡)이었고, 또 고려에서 후백제를 멸하는 데 공을 세우고 문하시중에 오른 김선궁의 일족이 일선군(지금의 선산군)에 터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손들은 일선김씨로 명명하여 오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시명이 선산으로 바뀌면서 선산김씨로 본관 명칭을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조선시대 유명한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은 바로 김선궁계의 선산(일선)김씨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계통의 선산김씨가 있다. 경순왕의 8자인 김추를 시조로 하는 선산김씨이다. 이들은 또다시 선산김씨, 삼척(三陟)김씨, 원주(原州)김씨, 진주(晉州)김씨, 온양(溫陽)김씨, 희천(熙川)김씨로 분관되어 나갔다. 따라서 선산·삼척·원주·진주·온양·희천김씨는 본관은 다르지만 혈족은 같은 동성이본동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선산김씨와 계통을 같이하고 있는 인구를 보면, 10만9000명의 선산김씨와 8만명의 삼척김씨, 그 외 원주·진주·온양·희천김씨까지 약 2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물론 진주김씨처럼 김추계와 수로왕계(시조는 김유신의 손자 김원술)가 함께 있는 본관들이 있어, 정확한 인구를 산출하기는 불가능하다.
# 김선궁계 선산김씨의 역사와 인물
김선궁계 선산김씨의 시조 김선궁의 원래 이름은 김선이었다. 경순왕이 문성왕의 후손이었으니, 김선은 경순왕의 먼 친척(종형제)쯤 되는 셈이다. 설화에 의하면, 그가 어렸을 때 부친 체의(體誼)를 상해한 자를 살해했다가 투옥되었는데, 관아에서 그의 효심에 감복하여 풀어줬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효심이 깊었다고 전해진다.
훗날 김선은 왕건에게 귀부하여 공을 세우고, 활을 하사받아 이름을 김선궁으로 바꾸었다. 그 후 후백제를 멸하는 데 공을 세우고 삼한통합 익찬공신(三韓統合 翊贊功臣)에 책록되었다. 그리고 정종 때에 순충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문종대에 이르러 문화시중이 증직되고 일선백(선산백)에 추봉(追封)되어 일선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이렇게 김선이 왕건에게 귀부한 것은 아마도 후백제 견훤의 대야성(합천) 공격 후 일선군(구미·선산 일대)에 침입했을 때, 부친이 견훤 군에게 살해당한 것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의 아들들도 조정에 나아가 크게 이름을 떨쳤다. 첫째 봉술(奉術)은 김선궁의 벼슬을 이어받아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시호는 장절공(壯節公)이다. 둘째 봉문(奉文)은 삼사우윤으로 있다가 고향에 돌아와 선주리(善州吏)가 되었다. 현재 선산김씨는 첫째 봉술 쪽에서 13개의 지파가 나뉘어 존재하고 있으며, 둘째 봉문에서 5개의 지파가 형성되었다.
다만, 점필재 김종직이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인 안동권씨 성화보보다 일찍이 선산김씨 세계보를 정리했으나, 첫째 봉술 이후 6대가 실전(失傳)되어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또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무오사화로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고, 그 일문은 화를 피해 뿔뿔이 흩어지게 되어 많은 기록이 실전되었다.
그래서 고려시대 명문대가로 이름을 떨치던 가문도 조선시대에는 어느 정도 쇠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근현대 들어와 선산김씨는 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명문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국회의원도 14명이나 배출하였으며, 지금도 현역 국회의원으로 김영선(한나라당), 김영환(민주당), 김태환(한나라당) 등이 있다. 작고한 김윤환 의원은 민정당과 민자당, 신한국당과 한나라당, 민국당 등을 거치며 정치의 주요 흐름을 바꾸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설가 김동리 선생은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조선청년문학가협회장·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우익 민족문학론의 입장을 옹호한 대표적 문학가이다. 저서로는 ‘등신불’ ‘무녀도’ ‘황토기’ 등이 있다. #김추계 선산김씨의 유래와 역사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선산김씨에는 김선궁계와 다른 선산김씨가 존재한다. 그들은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 김추를 시조로 하는 선산김씨이다. 이들 김선궁계와 김추계는 현재까지도 선산김씨의 정통성을 놓고 족보의 위작 등을 거론하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김선궁계 선산김씨 측에서는 김추계에서 근거로 삼고 있는 1898년 족보는 조선 개국 초 왕자의 난에 동참하였다가 피신하여 함북 단천(김추계 단천파)에서 살던 김성부의 후손들이 작성한 위보라는 주장이다.
즉, 김추계 선산김씨의 원 시조는 원성왕의 9세손인 김한충이며, 그 후 김추계 선산김씨 단천파에서 시조로 삼고 있는 김기(金起)의 후손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김기의 5세손인 구암 김취문(久庵 金就文 강원관찰사·대사간)이 기록한 구암집(우문간공구암소저)에도 원조고는 김한충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추를 시조로 하는 씨족으로는 김추계 선산김씨뿐 아니라 삼척김씨, 원주김씨, 진주김씨, 온양김씨, 희천김씨 등이 있다.
김추계 선산김씨는 고려 말에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을 지낸 김문(金文)의 슬하에서 4형제가 나와 4계파를 형성하고 있다. 첫째 김성원(金成元)은 서운관정과 중서령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김기(金起)는 광주목사를 지내고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졌으나, 조선의 개국으로 선산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둘째 아들 김성부는 조선개국 원종공신에 책봉되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태조가 함흥에 이거할 때 호종한 뒤 복귀하지 않고 함경도 길주 등지에 정착하였다. 셋째 아들 김성룡도 조선개국 원종공신에 책봉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화의부원군에 봉해졌다고 전한다.
그의 아들 이탁은 병조참의를 지냈으며, 그 후손들은 이천 등지에 산거하고 있다. 넷째 아들 김성여(金成呂)는 고려말에 별장동정이라는 벼슬을 했고 그 자손들은 평안도에 세거하였다고 전하나, 남북관계의 단절로 행적기록은 유실되었다.
이들 김추계 선산김씨의 인물로는 을사조약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한 김정묵이 있으며, 정·관계 인물로는 김성조·김명자 국회의원, 그리고 김관용 경북도지사가 있다. 그리고 재계에서는 김병진 대림그룹 회장이 김추계 선산김씨로 알려져 있다.
# 또 다른 선산김씨들-삼척김씨 외
삼척김씨의 시조 김위옹(金渭翁)은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 일선군 김추(일선군 혹은 삼척군 또는 진주군)의 둘째 아들로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되어 실직군(悉直君)으로 삼고 선산김씨에서 분적하였다.
삼척김씨 시조 김위옹의 장남 김자영(金自英)은 배융교위를, 차남 김자남(金自男)은 삼중대광 태사를 지냈다. 그 후손들도 복영이 관찰사를, 승련은 사공을 지냈고, 각종 부사와 대부·대장군·상장군 등을 역임하였다. 또 11세손 김인궤(金仁軌)는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경산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또, 김병충(金秉忠)은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과 논의하여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에 들었다.
그리고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李成桂)는 삼척에 거주하였던 고조부(高祖父) 이안사(李安社)와 비(妃)를 목조대왕(穆祖大王)과 효공왕후(孝恭王后)로 추존하면서 삼척을 부(府)로 승격하고, 효공왕후(孝恭王后)의 진외조부였던 김인궤를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으로 추봉하였다.
또한 태조는 자신이 사용하던 관복대인 홍서대(紅犀帶)를 삼척부사에게 하사하고 제(祭)를 대신하게 했는데, 이를 영조가 삼척김씨 종중(宗中)에 하사하였다. 그 홍서대는 지금도 삼척김씨 보본단(報本壇)에 소장되어 있다.
원주김씨의 시조는 김거공(金巨公)이다. 그는 일선군 김추의 8세손으로 고려 의종 때 지문하성사를 거쳐 호부상서에 이르러 원성(원주)백에 봉해졌다. 그 이후 후손들이 원주지방에 세거하며 김거공을 1세조로 하고 관향을 원주로 삼았다.
원주김씨 중 11손 김연지(金連枝)는 세종 때 대사헌을 지냈으며, 그의 딸이 정종의 아들 복생과 혼인하여 왕가와 사돈 간을 형성했다. 김응남(金應南)은 선조 때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원성부원군에 추봉되었다. 김덕원(金德遠)은 숙종 때 우의정에 올랐으며, 아들 몽양(夢陽)은 대사간을 지냈고, 후손인 몽서(夢瑞)는 목사를, 조윤(曺潤)과 화제(華濟)는 군수를 역임하였다. 2000년 통계청에 의하면 원주김씨는 1만97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진주김씨는 연원을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하나는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인 김추를 시조로 모시는 신라계가 있고, 다른 하나는 김유신의 둘째 아들인 원술(元述)을 시조로 하는 가야계가 있다.
김추를 시조로 하는 선산김씨와 맥을 같이하는 신라계 진주김씨는 김추의 10세손인 김충신(金忠信)의 후손들이다. 그중 김무진(金茂珍)은 고려 충혜왕 때 집현전 태학사를 역임하고 진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태(台)는 좌찬성에 올랐다.
그 외 조선조에서 호조참의를 지낸 김중국(金重國)과 호조참판 김귀민(金貴敏)이 유명하다. 2000년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진주김씨는 1만9795명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진주김씨는 연원을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하나는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인 김추를 시조로 모시는 신라계가 있고, 다른 하나는 김유신의 둘째 아들인 원술(元述)을 시조로 하는 가야계가 있다.
김추를 시조로 하는 선산김씨와 맥을 같이하는 신라계 진주김씨는 김추의 10세손인 김충신(金忠信)의 후손들이다. 그중 김무진(金茂珍)은 고려 충혜왕 때 집현전 태학사를 역임하고 진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태(台)는 좌찬성에 올랐다. 그 외 조선조에서 호조참의를 지낸 김중국(金重國)과 호조참판 김귀민(金貴敏)이 유명하다. 2000년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진주김씨는 1만9795명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온양김씨 또는 희천김씨는 일선군 김추의 셋째 아들 김우(金佑)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고려 강종 때 문하시중으로 나라에 공을 세우고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에 올라 온양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관향을 온양으로 하였다.
그 후 13세손 김우(金宇)가 조선조에서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희천군에 봉군되었으므로 그를 중조(中祖)로 하고 본관을 희천으로 개관하였다. 2000년 통계청에 의하면 희천김씨는 2512명이 살고 있다.
경산김씨(慶山金氏)의 시조는 김인궤이다. 그는 일선군 김추의 10세손이며, 고려 때에서 대장군을 지낸 김윤성(金允成)의 아들이다. 그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을 지냈다. 그 후 후손인 김육화(金育和)가 이부상서·좌복야(左僕射)·상장군 등을 역임하고 나라에 공을 세워 경산군에 봉해졌다.
그 후손들이 김인궤를 시조로, 김육화를 세조로 삼고, 삼척김씨에서 분적하여 경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2000년 통계청에 의하면 경산김씨는 7550명이 살고 있다. [출처] 김성회 :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