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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 시대 통일을 눈앞에 두고 스러진 ‘이단아’
[織田信長]
오다 노부나가원본보기
출생 - 사망 | 1534년 5월 ~ 1582년 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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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센고쿠 시대 - 아즈치 · 모모야마 시대 |
지위 | 우대신(右大臣), 다이묘 |
별칭 | 깃포시(吉法師) 사부로(三郞) 소켄인(摠見院, 법명) |
가문 | 오다(織田) 가문 |
부모 | 부 :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 모 : 도타 고젠(土田御前) |
배우자 | 정실 : 노히메(濃姬) 측실 : 이코마 기쓰노(生駒吉乃), 사카씨(坂氏), 히지카타씨(土方氏) |
오다 노부나가는 1534년 아버지 노부히데와 어머니 도타 고젠 사이에서 태어났다. 노부히데는 오와리 쇼바타 성을 근거지로 삼았는데, 노부나가가 태어난 1534년 나고야에 성을 새로 쌓고 이를 노부나가에게 물려주었다. 노부나가의 어렸을 때 이름은 깃포시이며, 1546년 성인식을 올린 후 오다 사부로 노부나가라고 바꾸었다. 그 후 1551년 노부히데가 죽자 오다 가즈사노스케 노부나가라고 관직명을 붙인 이름을 사용했다.
노부나가는 어렸을 때 보통 사람과 다른 행동을 많이 했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노부나가를 ‘오와리 얼간이’라고 불렀다. 1553년 어린 노부나가의 훈육을 맡아왔던 노신(老臣) 히라테 마사히데가 잘못을 고칠 것을 간언한 후에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남겨질 정도였다. 『신장기(信長記)』에는 노부나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노부나가 님은 16~18세까지 별다른 취미가 없이 말 타는 법을 아침저녁으로 연습하셨다. 또 3월부터 9월까지 강에서 연습하여 수영을 잘하게 되셨다. 이때 대나무 창으로 대련하는 것을 보시고 창이 짧으면 나쁘다고 하면서 3간(5.4m) · 3간 반(6.3m)으로 늘리셨다. 그 무렵 노부나가 님의 모습을 보면 유카타(목욕 후 입는 옷)의 소매를 풀어 젖히고 짧은 하의에 부싯돌 주머니와 그 외 여러 가지를 주렁주렁 다셨다. 머리는 챠센 모양(가루로 된 차를 탈 때 물에 잘 풀리도록 젓는 차기구와 형태가 비슷하여 붙여진 머리형)으로 진분홍색 실 · 연두색 실로 묶어 틀어 올리시고 붉은색으로 칠한 칼집을 차시고 무구(武具)도 모두 붉은색으로 하도록 지시하셨다. 이치가와 다이스케를 불러들여 궁술을 배우시고, 하시모토 잇파를 스승으로 하여 총포술을 배우셨으며, 히라타 삼미를 항상 불러들여 병법을 배우시고 매사냥을 하셨다. 보기 흉한 일도 있었다. 노부나가께서는 마을을 지나가실 때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밤 · 감은 말할 것도 없으며 참외를 덥석 드시고 마을 가운데에 서서 떡을 드셨다. 사람에게 기대어 그의 어깨에 매달려 의지해 걷곤 하셨다. 이 무렵은 세상이 고상함(품위)을 추구하는 때였기 때문에 (노부나가 님을) 바보 멍청이라고 비꼬아 말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러나 장인 사이토 도산
그런데 겉으로 드러난 노부나가의 자질을 의심하고 유순한 모범생 스타일의 동생 노부카쓰를 후계자로 옹립하려는 세력이 오다 가문 내에 존재했다. 하야시 히데사다와 시바타 가쓰이에가 그들이었다. 노부나가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오와리의 유력자 사쿠마 노부모리를 끌어들여 이들을 견제했다. 나아가 스에모리 성에 농성 중인 노부카쓰를 공격했는데, 생모 도타 고젠의 중재를 받아들여 노부카쓰와 가쓰이에를 용서했다.
이후 다른 반대 세력 소탕에 나서 마쓰바 · 후카다에 거주하는 오다 일족을 쳐서 항복시켰다. 이어 1555년 4월에는 오와리 남쪽을 사실상 지배하던 기요스 성의 슈고다이(지방관을 대신해 영지를 다스리던 인물) 오다 노부토모를 멸망시켰다. 당초 노부나가의 아버지인 노부히데는 기요스 성의 유력 가신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주군 가문을 축출했다는 점에서 노부나가의 행동은 명백한 하극상이었다.
1557년에는 다시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든 동생 노부카쓰를 죽였고, 그 후 2년 뒤에는 오다 가문의 종가이자 오와리 북부 이와쿠라 성을 본거지로 하는 오다 노부카타마저 축출했다. 이로써 노부나가는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있던 오와리 국 전체를 통일하게 되었다. 그 직전인 1559년에 노부나가는 약 500명 정도의 군대를 이끌고 상경하여 무로마치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
원래 오와리 국의 지방관인 슈고는 쇼군 아시카가 가문의 일족인 시바 가문이 대대로 맡아 왔고, 이를 대리하는 슈고다이는 오다 가문의 종가가 수행해 왔다. 오다 가문의 서류에 불과한 노부나가가 이 임무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요시테루 알현은 이를 인정받기 위한 행동으로 추측된다.
10년에 걸쳐 오와리를 겨우 통일했을 무렵 밖으로부터 큰 위협이 닥쳤다. 1560년 5월 17일 도카이 지역의 대영주 이마가와 요시모토
그 자리에서 물러난 가신들은 이제 오다 가문이 멸망할 시기라고 읊조리며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튿날인 19일 아침 노부나가는 평소 좋아하던 “인생 오십년, 하천(下天)의 하루에 비교하면 꿈과 같구나.”라는 노(일본의 전통 연극) 아쓰모리를 한 곡조 뽑아 노래한 후 곧바로 출진했다. 얼마나 급히 출진했는지 부하들이 미처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출진 도중에 도검을 수납한 곳으로 유명한 오와리 아쓰타 신사를 잠시 참배하고 모여든 부하들과 함께 바로 이마가와 가문의 본진을 기습하여 오케하자마 인근에서 이동 중인 요시모토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요시모토의 죽음은 사실상 이마가와 가문의 휘하에 편입되어 일개 가신의 역할을 수행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노부나가는 미노를 치기 위해 고마키 산을 거점으로 삼아 성을 쌓았다. 그러나 미노 국은 기소 강과 나가라 강이란 대하천이 겹겹이 감싸 흐르는 천혜의 요충지라 쉽게 공략하지 못했다. 고전하던 노부나가가 스노마타에 임시로 성을 쌓는 데 성공했고, 이를 거점으로 조금씩 세력을 확장하여 마침내 1567년 8월 다쓰오키가 지키던 이노구치 성을 함락했다.
노부나가는 본거지를 이노구치 성으로 옮기고 기후로 이름을 고쳤다. 기후라는 이름은 기산에서 일어나 천하를 차지한 중국 주나라의 고사에서 따왔다고 한다. 또 이즈음부터 천하에 무(武)를 펴겠다는 의미로 ‘천하포무(天下布武)’라는 글자가 새겨진 도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오와리에 이어 미노까지 손에 넣은 노부나가는 교토에 올라가 패권을 잡으려는 의지를 분명히 내비친 것이다. 기후 성은 이후 아즈치 성을 축성하기까지 약 10년간 노부나가가 전국통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 중심지가 되었다.
노부나가의 뛰어난 활약은 천황 가문에도 명성이 전해져 1567년 11월 오기마치 천황은 노부나가를 ‘고금무쌍의 명장’이라고 칭찬하면서 천황 가문의 영지를 회복해 줄 것과 사네히토 친왕
이듬해 1568년 2월 노부나가는 이세 북부로 침공하여 이곳 영주를 굴복시켰다. 그는 자신의 셋째 아들 노부타카를 이세 명문 간베 가문에 양자로 보냈고, 동생 오다 노부카네는 나가노 가문을 계승하도록 했다. 또 1569년에는 둘째 아들 오다 노부카쓰
나날이 높아져 가는 노부나가의 명성은 이곳저곳을 떠돌던 무로마치 쇼군 가문의 아시카가 요시아키아사쿠라 요시카게
1568년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의 요청을 받아들여 교토 상경을 결심했다. 그런데 미노에서 교토로 가기 위해서는 전략적 요충지인 오미 국을 통과해야 했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동생 오이치를 오미 북부의 지배자인 아자이 나가마사
요시아키는 노부나가에게 무로마치 막부의 후쿠쇼군(副將軍)이나 쇼군의 정무를 보좌하던 막부 내의 최고 직책인 간레이에 취임을 할 것을 제안했으나 노부나가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노부나가는 처음부터 무로마치 막부 재건에는 뜻이 없었고 독자적인 ‘천하’를 창출하려 했기에 쇼군의 부하가 되는 길을 거절한 것인지도 몰랐다.
이 때문에 쇼군 요시아키와의 사이에 점차 균열이 발생했다. 1569년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의 권한을 제한하기 위해 ‘전중법규’ 9개 조와 추가로 7개 조를 제정했다. 이를 계기로 양자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아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반격에 나선 요시아키는 아자이, 아사쿠라, 다케다 가문과 혼간지 일향종 세력 등 노부나가에 불만을 품은 자들을 끌어들여 반(反)노부나가 포위망을 형성했다. 적대세력으로 사방이 포위된 노부나가는 큰 곤경에 처했으나 1570년 오미 아네가와 전투에서 아자이 · 아사쿠라 군대에 승리하여 기선을 제압한 후에 전쟁 중지를 촉구하는 오기마치 천황
시간을 번 노부나가는 전열을 재정비해 이듬해인 1571년 먼저 화해 약속을 깨고 행동에 나섰다. 그는 아자이 · 아사쿠라 가문 편을 후원하던 엔랴쿠지(延曆寺)를 공격하여 산 전체를 불태우고 다수의 승려를 살해했다. 이로 인해 아자이 · 아사쿠라 가문은 든든한 유력 배후 세력을 잃게 되었다.
한편, 헤이안 시대 이래 수도 교토를 종교적으로 수호해 왔던 권위를 자랑하던 엔랴쿠지의 파괴는 당대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당시 교토의 귀족 중 한 명인 야마시나 도키쓰구는 『언계경기(言繼卿記)』에 1571년 9월 12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오다 단조노추(노부나가)가 새벽부터 가미사카모토를 공격하고 불을 질렀다. 다음으로 히에 신사를 남김없이 (불태우고), 히에 산의 동탑, 서탑, 무도지(無動寺)를 (건물 한 채) 남김없이 방화했다. 엔랴쿠지 중도를 모두 죽였다고 한다. ······강당 이하 여러 건물에 불을 지르고 승속 남녀 3, 4천 명을 죽이고 가타타 등도 방화했다. 불법의 파멸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왕법(王法)은 어떻게 될 것일까. 대강당, 중당, 골짜기 골짜기의 가람은 한 채도 남김없이 태워졌다고 한다.
신불을 중상하던 당시 일본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노부나가는 괘의치 않고 자행했다. 이러한 대담성은 기성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노부나가 혁명(혁신)성의 근거이며, 한편으로는 보통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이단아로 보게 하는 근거도 된다.1)
1572년에는 쇼군 요시아키의 촉구에 호응하여 노부나가의 최대 라이벌이라 할 가이 국의 다케다 신겐도쿠가와 이에야스
최대 위기에 봉착한 노부나가는 1573년 4월 반(反)노부나가 포위망의 중심인물인 요시아키를 공략하여 항복시켰다. 그런데 바로 이즈음 파죽지세로 상경하던 신겐이 진중에서 돌연 병사하자 수장을 잃은 다케다군은 본국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노부나가는 인생 최대 절체절명의 고비를 운 좋게 벗어날 수 있었다. 7월에는 야마시로 국 마키시마 성에서 다시 거병한 요시아키를 굴복시켰다. 노부나가는 자신을 적대한 요시아키를 죽이지 않고 서쪽으로 추방했다.
이로써 무로마치 막부는 사실상 멸망한 셈이었다. 무로마치 막부의 일부 가신은 요시아키와 동행했지만, 대다수는 교토에 남아 노부나가 휘하로 들어갔다. 노부나가는 연호의 변경을 교토 조정에 주청하여 당초 마음에 들지 않던 겐키를 덴쇼로 바꾸었다. 노부나가의 시대가 열렸음을 대내외에 과시한 것이다.
1573년 8월 노부나가는 아자이 · 아사쿠라 연합군을 공격하여 일거에 아사쿠라 가문을 멸망시키고, 9월에는 오다니 성의 아자이 가문도 멸망시켰다. 상경 이후 오랫동안 노부나가를 괴롭히던 아자이 · 아사쿠라 가문이 멸망하자 교토 인근에서 노부나가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민중을 끌어들인 종교세력 혼간지(本願寺) 정도만 남게 되었다. 같은 해 9월 노부나가는 혼간지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이세 국 나가시마의 일향종 세력을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10월에 철수했다.
1574년 7월에는 다시 이세 나가시마를 치기 위해 수륙 양면으로 완전하게 포위하였으며, 9월에는 노약자를 비롯한 성내의 인물을 남김없이 죽였다.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노인과 아이를 포함하여 여자까지 몰살하는 전투 양태는 이전에는 일찍이 볼 수 없는 현상으로 노부나가의 ‘광기’라 불릴 만하다. 노부나가는 이를 ‘미나고로시(모두 죽이기)’, ‘네고로시(뿌리까지 죽이기)’라고 했다. 가혹한 탄압을 통해 적대세력을 제거한 노부나가는 1575년에 이르러 교토 일대 지배를 확고히 한 후 오다 정권을 수립했다. 그해 5월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와 함께 나가시노에서 막대한 총을 이용하여 다케다 가쓰요리
1575년 11월에는 조정으로부터 관위를 받아 3위 이상의 고위 귀족인 공경의 반열에 올랐다. 11월 4일 권대납언을, 11월 7일 우근위대장을 서임 받았다. 이후 노부나가는 우에사마(上様)라는 존칭으로 불려 무로마치 쇼군을 대신하여 교토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쇼군이 된 것은 아니었다. 11월 28일 노부나가는 장남인 노부타다에게 오다 가문의 가독(후계자) 및 미노와 오와리 국의 지배권을 양도했다. 이는 오다 가문의 영속화를 도모하는 조치였다.
1576년 2월 노부나가는 새로 축성한 아즈치 성으로 이주했으며, 종래 본거지였던 기후 성은 아들인 노부타다에게 넘겨주었다. 아즈치 성은 외관 5층 내부 7층으로 이루어진 천수(天守)를 가진 본격적인 근세 성곽으로서 금은으로 장식되어 매우 호화찬란했다. 아즈치 성은 기존의 센고쿠 다이묘樂市), 라쿠자(樂座) 정책을 실시했다. 이 정책은 도시가 번영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어 많은 상인들이 각지에서 몰려들었다.
1577년 11월 노부나가는 종2위 우대신으로 승진하고 이듬해에는 다시 정2위로 승진했다. 그러나 1578년 4월 노부나가는 돌연 우대신 · 우근위대장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1577년에서 1578년은 노부나가에게 비교적 평온한 시기였지만, 혼간지와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혼간지와 동맹관계였던 모리 가문과의 싸움도 본격화되었다. 노부나가는 오사카의 혼간지를 계속해서 압박하면서 하시바 히데요시를 주고쿠 공략의 총지휘관에 임명하여 모리 가문을 공략하도록 했다.
1580년 4월 이제 더 이상 오다 군의 공격에 견딜 수 없게 된 혼간지는 오기마치 천황
1582년 다케다 가문의 유력 가신이자 다케다 신겐다케다 가쓰요리
같은 해 5월 29일, 노부나가는 모리 가문을 총공격하기 위해 상경하여 혼노지에 머물렀다. 그러나 한때 총애했던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여기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가 즐겨 부르던 “인생 오십년, 하천(下天)의 하루에 비교하면 꿈과 같구나.”라는 아쓰모리처럼 인생 50년(향년 49세)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다 노부나가
첫댓글 와웅 자세해라..............
사실 위키백과 거 베꼈어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