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가 육사 교정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의 근거로 빨치산 경력을 문제 삼고 있다. 국방부는 빨치산이 무언지 모르는 것이다. 빨치산 하면 육이오 전쟁 중 김일성 체제하의 빨치산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빨치산의 사전적 의미는 비정규군이다. 군사적 열세에 있는 저항군이 게릴라 작전을 감행하는 무장단체를 Partisan(빨치산)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기초적인 군사용어다.
구약성서에서 가장 잘 알려진 다윗도 빨치산 출신이다. 사울의 박해를 피해 도망 다닐 때 그는 소규모 비정규군과 함께했는데, 그들이 바로 사울 왕의 정규군과 대립한 빨치산 부대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 좌우에 두 강도가 함께 못박혔다. 개정개역성경은 그들을 단순히 ‘강도’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체제에 항거한 열심당원(zealot)으로 게릴라전을 하다 붙잡혀 온 빨치산들일 것으로 보는 성서학자들이 많다.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로부터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는 40여 년 동안 주변국의 정규군에 대항한 것 역시 빨치산부대였다. 정부도 없고 훈련된 군사조직이나 병력이 없는 상태에서 임시방편으로 꾸린 전투요원들은 군사 개념상 빨치산에 속한다. 이와 같이 빨치산은 압제당하는 소수민족이나 집단이 제국, 독재자 등의 정규군에 저항하기 위해 편성된 무장단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제치하의 모든 독립운동은 빨치산 투쟁일 수밖에 없다. 독립운동사는 빨치산 투쟁사다.
그런데 국방부가 군사적 기초 개념인 이 빨치산을 김일성 체제에서 이현상이 이끌던 빨치산에 국한하여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역사를 이념에 기초하여 보기 때문이다. 홍범도 장군이 빨치산 부대로 독립운동을 하던 시기는 김일성이 일곱 살 무렵이었다. 김일성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지도 않았던 때다. 그리고 국방부가 말하는 공산당 경력은 독립운동을 위한 선택이었지 이념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독립군들에게는 이념보다 조국의 독립이 절대적으로 우선하는 가치였고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당시 정국을 장악한 공산당의 지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역사와 인간을 이념의 잣대로 바라볼 때 가장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권력자의 이념적 편향에 따라 역사와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그것으로 처벌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치가 그랬고 스탈린이 그랬고 박정희가 그랬다. 특히 한 나라의 지도자가 이런 이념 편향적인 시각을 갖게 되면 그 나라는 비극을 맞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가장 중요한 것은 이념”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나의 이념에 반하는 자들은 다 처벌할 것’이라는 살벌한 협박이었다.
국가는 특정 이념을 가질 수 있지만 사람은 이념의 화신이 되면 안 된다. 국가는 사람이 만든다. 그러므로 국가는 사람을 위한 체제이며 정부는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대리기관일 뿐이다. 국가의 이념도 여기에 기초할 때만 정당성을 갖는다. 그런데 국가 기관의 수장이 자신의 이념에 맞지 않는 자들을 죽여 버리겠다는 태도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이는 프로크구스테스 침대처럼 침대를 사람에 맞추는 게 아니라 사람을 침대에 맞추기 위해 다리를 잘라내려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장면에서 한 강도(빨치산)가 예수의 죄 없음을 증언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자기의 빨치산 투쟁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넘어섰다. 국가와 이념, 체제의 문제를 넘어 인간이라는 근본적인 이해에 눈이 열린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이념이나 제도, 체제로 운영되는 나라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고유한 특성만 남아 서로가 서로를 인간으로 바라보고 인간이 되고자 하는 나라였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 이해의 기초가 뒤바뀐 나라였다. 예수의 복음은 그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종교적 교리나 이념으로 사람을 보지 말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누가복음에 나오는 회개한 강도 이야기는 탈이념화된 빨치산의 인간 이해였다. 그가 예수를 통해 얻은 것은 이념을 넘어 인간을 보는 시선이었고, 그 인간 이해의 기초 위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 빨치산의 회개는 역사와 인간을 이념의 시선이 아닌,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으로의 전복이었다. 시선의 전복, 아니 인식의 전복에 구원이 있다고 예수는 말한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