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CNS 문화유산 답사회의 10월 답사로 안성의 바우덕이 축제를 참관하기 전에 주변의 사찰 한 곳을 둘러 볼 계획을 잡았습니다. 안성에는 청룡사와 석남사 등 유명한 사찰이 여러 곳 있습니다만, 칠장사는 아직 못 가본 곳이어서 답사 코스로 선정을 하였습니다.
칠장사(경기도 문화재 자료 24호) 입구 주차장 바로 아래에는 칠장사 철당간(안성 향토유적 39호)과 칠장사 사적비(안성 향토유적 24호)가 있으며, 칠장사로 오르는 입구에는 근래에 세운 듯한 일주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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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당간과 칠장사 사적비(우측) |
▲ 칠장사 철당간 |
▲ 칠장사 일주문 |
경기도 칠현산(七賢山)에 있는 칠장사는 세운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0세기경에도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 현종
5년(1014)에는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넓혀 세웠는데 ‘칠장사’와 ‘칠현산’이라는 이름도 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7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선하게
만들었다는 설화에서 유래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인조 원년(1623)에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명복을 비는
절로 삼아서 크게 된 곳이기도 하다. 이후 세도가들이 이곳을 장지(葬地)로 쓰기 위해 불태운 것을 초견대사가 다시 세웠으나 숙종
20년(1694) 세도가들이 또 다시 절을 불태웠다. 숙종30년(1704)에 대법당과 대청루를 고쳐 짓고 영조 원년(1725)에 선지대사가
원통전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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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장사 입구 전경 |
▲ 사천왕문 |
▲ 칠장사 소조 사천왕상 |
칠장사 좌측에 있는 사천왕문으로 들어가면 사찰 안으로 들어 서게 됩니다. 사천왕문 좌우로 있는 사천왕상은 칠장사 소조 사천왕상(경기 유형문화재 115호)이란 이름으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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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문 우측에는 종각이 그 앞 우측에는 누각이 있으며, 칠장사 경내에 들어서면 좌측에는 명부전이 있습니다. 대웅전 정면의 경내 마당 중앙에는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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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장사 원통전(좌)과 대웅전(우) 전경 |
칠장사 중앙에는 대웅전(경기 유형문화재 114호)이 있으며, 대웅전 좌측으로는 원통전이, 대웅전 우측에는 봉업사지에서 옮겨 왔다는 보물 983호로 지정된 안성 봉업사 석불 입상이 서 있으며, 그 좌측에는 석좌불도 한 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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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장사 삼층석탑 |
▲ 대웅전 답도 |
▲ 대웅전 안에 있는 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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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봉업사지에 있었던 것을 죽산중학교로 옮기고 그 뒤 다시 선덕여왕 5년(636년)에 자장율사가 세운 경기도 안성의 칠장사(七長寺)로 옮겼다.
불상과 광배(光背)가 같은 돌로 만들어졌으며 불상 높이는 1.57m이고 총 높이는 1.98m이다. 눈·코·입은 심하게 닳았고,
옷은 양 어깨를 감싸 입고 있다.
옷주름은 여러 겹의 둥근 모양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치마가 양다리 사이에서 지그재그
모양을 이루고 있다. 전체적인 신체표현에 있어서는 손이 다소 큰 편이기는 하나 머리, 어깨 너비 등의 신체 비례가 비교적 좋다.
불상의 뒷면에는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가 있는데 주위에 불꽃무늬를 새기고 있다. 당당한 어깨, 발달된 신체표현, U자형의
옷주름, 그 밖의 조각기법 등으로 미루어 이 불상은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이 지방 불상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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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장사의 건물 벽에는 불화 대신에 궁예와 임꺽정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데, 위의 사진은 명부전 뒷편 벽에 임꺽정과 궁예의 어릴때 활 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임꺽정은 칠장사에서 병해대사에게 무술과 글을 배웠으며, 난을 일으켰을 때 관군으로부터 피하던 장소였으며, 궁예는 이곳 칠장사에서 13세까지 활쏘기와 무예를 연마했다고 합니다. 아직도 그 활터가 있다는데 어디에 있는지 확인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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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 좌측 명부전 뒷편에는 영각이, 영각 좌측에는 비석이 2기 서 있으며, 공터 한 켠에는 부도 3기가 서 있습니다. 명부전과 원통전 사이의 계단을 오르면 혜소국사비가 있는 곳으로 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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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장사 뒷편으로 오르는 계단 |
▲ 칠장사 전경 |
▲ 혜소국사비 비각 전경 |
보물 488호인 칠장사 혜소국사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비각 안에 안치되어 있으나 훼손되어서 인지 귀부와 비 그리고 머릿돌이 따로 따로 놓여 있습니다. 비몸은 한 가운데가 대각선으로 잘려져 있어서 붙여 놓은 상태이며, 비몸의 양쪽 측면에는 용이 살아 옴직이는 듯 정교하게 새겨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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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소국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혜소국사는 고려 광종 23년(972)에 안성에서 출생하여, 10세에 출가하였으며 17세에
융천사(融天寺)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국사는 말년을 칠장사에서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다. 현재 비는 비받침인
귀부와 비몸돌·머릿돌이 각각 따로 놓여 있는 상태이다. 흑대리석으로 만든 비몸돌의 양쪽 옆면에는 상하로 길게 두 마리의 용을 새겨
놓았는데 그 솜씨가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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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에는 대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글씨에서는 고려인다운 뛰어난 풍모가 느껴진다.
문종 14년(1060)에 세워진 이 비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의 장수인 가토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어 베었다.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니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을 쳤다 한다. 현재 이 비의 몸돌이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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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각 뒷편에는 산신각이 있으며, 좌측에는 노송 아래 나한전이 있습니다. 나한전 앞은 신자들이 예불을 드리도록 작은 유리 공간을 만들어 놓았으며, 어사 박문수가 이 곳에서 기도를 드린 후, 과거에 급제했다는 전설이 있어서 많은 수험생 부모님들 기도를 드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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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한전 전경 |
▲ 혜소국사 비각 뒤편에 있는 신신각 |
칠장사에는 괘불탱 2점이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만, 괘불은 사찰의 특별한 행사가 있거나 사월 초파일에만 공개를 하므로 일반 관람객들은 평소에 볼 수 없습니다. 괘불탱 사진은 문화재청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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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장사 오불회 괘불탱(五佛會 掛佛幀)은 3단 구도로 도솔천궁을 묘사한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칠장사 괘불은 길이 6.56m, 폭 4.04m 크기로 구름을 이용하여 상·중·하 3단으로 구분되었다.
맨 윗부분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불과 노사나불이 좌우에 모셔진 삼신불을 묘사하고 있고, 중간은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여러 보살들이 있어 삼세불을
표현하였으며, 맨 아래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그려져 수미산 정상의 도솔천궁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3단 배치는 예배자들에게 삼신불과 삼세불의
세계를 통해 진리를 깨우치게 하고,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의 구원으로 도솔천궁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괘불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하겠다.
채색은 녹색을 주로 하고 황색과 황토색을 대비시켜 다소 어두워 보이나, 옷 처리를 붉은색으로 하여 경쾌함을 느낄 수
있다. 이 괘불은 조선 인조 6년(1628)에 법경(法烱)이 그린 것으로 괘불함 없이 종이에 싸서 대웅전에 보관하고 있다. 이
괘불에서 보이는 단아하고 세련된 인물의 형태와 짜임새 있는 구도, 섬세한 필치 등은 당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이 작품은 17세기 전반의
불화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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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축산에서 석가가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영산회상도 이다. 화면 구성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한 하단과 노사나불과 아미타불이 있는
상단으로 구성된다. 사각형의 광배를 한 석가불의 주위를 팔대 보살과 십대제자, 사천왕 등이 에워싸고 있는 형상이다. 대좌 아래에는 사리불이
석가의 설법을 듣고 있다.
상단에는 아미타불과 보살처럼 화려한 보관을 쓴 노사나불이 사래보살에 의해 둘려 쌓여 있다. 아미타불과 노사나불
사이에는 보탑을 두어 화면을 구분하고 있다. 보탑 위로 반원형의 큰 광배 안에 9구의 보살을 중심으로 천상세계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숙종 36년(1710)에 그려진 이 괘불은 석가불이 그려진 하단 단독으로도 영산회상도를 묘사할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을 보여주며,
상단과 합쳐서는 삼신불을 간략하게 표현한 구성을 하고 있다. 이러한 간략화한 구성 방식은 조선 후기에 유행하는 방법으로 이 괘불은 이런 구성을
잘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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