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절구
황진숙
달빛이 들어온다. 동그랗게 모아진 빛이 온 우주의 기운을 담은 듯 고아하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수천 년 전부터 사용해 온 기물의 자취가 시간을 물들인다. 달빛에 풍덩 빠진 집게벌레만이 고즈넉한 여운에 잠긴다.
장독대 옆에서 긴 세월을 이고 앉은 돌절구. 포효하며 요동치는 암장의 담금질로 얻은 돌의 단단함 때문인가. 땅속 깊은 어둠 속에서 고행을 통해 얻은 태초의 생명력이어서일까. 과거와 현재를 품고 미래를 이어가는 돌의 영속성이 절구의 침묵을 깨운다.
불어오는 명주바람에 노구의 심장소리가 실린다. 구슬땀을 흘리며 돌을 쪼아대던 이름 모를 석수장이의 숨소리도 들려온다. 억겁의 세월을 새긴 채 잠들어 있던 화강석은 석공의 발자국 소리에 눈을 뜬다. 땅 속에 파묻혀 세상을 떠받치고 있던 무한한 힘의 존재에 석공은 가벼운 떨림을 느꼈으리라. 분출하지 못한 한을 안으로 가뒀던 화강석은 저를 알아본 석공의 손길에 집착을 내려놓고 온전히 결을 내어 준다.
석공의 투박한 손은 원석의 무늬를 가늠하며 먹줄을 긋는다. 칠해진 줄 위로 군데군데 구멍이 뚫리고 쐐기가 박히면 화강석의 뭉친 세월이 허물어진다. 틈으로 물을 흘려보내면 수억 년 간 꿈쩍 않던 자아는 느슨해진다. 해머의 내리침과 지렛대와의 사투를 마지막으로 비로소 돌이 갈라진다. 덩어리로 쪼개진 돌은 혼신의 힘을 다하는 석공의 손에서 절구의 형체로 변해간다. 거대한 돌덩이길 바라는 불변의 아집은 조각조각 쪼개지며 버려진다. 땅 속에서 새겨진 나이테를 고집했던 미련도 산산이 깨진다. 약한 물성에 강하게 맞섰던 교만도 무너진다. 제 안의 틀을 오롯이 벗고 절구로 거듭난다.
탕탕 쩡쩡 저의 몸을 두드리고 깨부수는 천형 같은 망치와 정의 손길을 참아내느라 절구의 몸과 맘은 만신창이가 된다. 나무라면 옹이라도 새기고 사람이라면 굳은살이라도 박이겠지만 아픔조차 에둘러야 했던 시련이 절구의 몸피에 우둘투둘하게 서린다.
상체는 U자형, 몸태는 Y자형으로 굴곡을 이룬다. 일자형의 나무절구가 밋밋하다면 투박한 맵시의 돌절구는 도리암직하다. 귀티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소박하다. 유려함과는 거리가 멀어 토속적이다. 울퉁불퉁하게 감쳐오는 질감은 복성스럽기까지 하다. 육중한 무게에서 나오는 깊이는 직립의 의지를 세운다. 비바람에 파이고 깎일지언정 움츠러들지 않는 기개는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도 꼿꼿이 설 수 있는 힘을 지니게 한다.
우묵한 외형은 석공의 웅숭깊은 내면을 담아낸다. 단 한 번의 잘못된 정질로도 다듬던 절구를 버려야 했기에 석공은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이 되어야 했다. 석굴암 대불에 호흡과 맥박이 살아 있고 피가 돌 듯 절구에는 석공의 치열한 삶의 혼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석공의 부르튼 살갗과 피멍으로 얼룩진 거친 손의 온기는 절구의 체온이 되어 흐른다. 오롯이 쏟아 붓는 석공의 기가 절구의 마음자리가 된다. 석공과 절구가 한 호흡으로 부딪치고 파이며 교감을 이루어낸 물아일체의 경지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절구 속에 깃든 축약어들이 살아난다. 수천수만 개의 소리가 거북이 등껍질에 새겨진 갑골문자처럼 내 마음에 새겨진다. 끓어오르는 마그마의 불길 소리, 고막을 찢을 듯한 돌 깨지는 소리, 곱게 쪼아대는 도드락망치 소리, 득득 갈아내는 순응의 소리, 중생대 시절부터 내려온 수없이 많은 소리가 침묵이 되어 절구의 무늬에 덧씌워진다.
귀천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 기물의 의미를 완성하는 절구, 자신이 지닌 원초적인 힘을 버리고 한 자리를 지켜온 존재. 부딪쳐 깨어지기를 두려워 말라며 무언의 설법을 전하는 듯하다. 나를 데우지 못하면 타오를 수 없는 불꽃처럼 그러안은 시련으로 무아에 도달했음이리라.
온몸으로 감당한 궤적이 내 안으로 내려앉는다. 맞부딪치려 하기보단 옹송그렸다. 뛰어들어 견뎌내기보단 피하려고만 했다. 내 속에 든 나약함으로 스스로를 가둔 시간들이었다. 온전히 고난과 하나가 되어 보지 못했으니 설핏 이는 바람에도 흔들리기 일쑤였다. 펴보지 못하고 져버린 꽃잎처럼 정점에 도달해 보지 못한 어중간함이었다. 살아온 시간만큼 닿지 못하는 심연이 통점으로 일어선다.
봄이면 풀빛으로 겨울이면 흰빛으로 계절의 옷을 입고 지금 이 시간엔 잔잔히 밀려오는 달빛을 가득 담아내는 절구에게서 무르익은 세월의 여운을 느낀다. 은은하게 흐르는 숨결이 질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