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3 나해 연중28주일
욥기 23:1-9, 16-17 / 히브 4:12-16 / 마르 10:17-31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영국의 첩보액션영화 《킹스맨(Kingsman)》 시리즈에 나오는 명대사 중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th man)”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건달들이 욕설을 지껄이며 무례하게 시비를 걸자, 깔끔한 양복을 입은 영국신사 주인공이 “manners maketh man”이라고 말하고 나서 건달들을 혼내 줍니다. 원래 이 말은 중세시대부터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영국의 일부 오래된 학교의 교훈(校訓)으로도 쓰일 정도로 이 말은 예의와 교양을 갖춰야 한다는 영국귀족교육의 모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서양에선 ‘문명화(civilization)’라는 개념에는 예의와 교양을 갖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너가 있는, 다시 말해 문명화된 사람 혹은 사회는 매너가 없는, 달리 표현하면 야만적이고 무례하고 교양이 없는 자들을 교화해서 사람답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교육은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중세시대 성직자들이 이 말을 처음 사용했을 때,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맹이었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 간에 때론 기분 내키는 대로 싸움도 하고 방탕한 행동들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직자들은 무지몽매한 대중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가르침과 동시에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예절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산업혁명을 거치고 정보화사회를 살고 있는 오늘날은 공교육의 발달로 과거보다는 시민사회 구성원으로 지켜야 할 예의와 매너교육이 많이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과거에 비해 시민의식이 많이 향상되어 지금은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도 예의 바르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문명화된 사회의 시민으로 살기 위해서 예의와 매너를 갖춰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교회 신자들이 ‘문명화’되기 위해선 어떤 가치를 배양해야 할까요? 교회는 이것을 다루는 학문을 수덕신학(修德神學 ascetical theology)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에는 영성신학(spiritual theology)이라고 좀 더 포괄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과거엔 욕망을 억제하고 덕을 닦는 것에 중점을 두는 의미로 수덕신학이라고 하였습니다. 수덕신학이란 하느님 은총의 도움을 받아서 덕을 쌓아 거룩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실천학문입니다. 수덕신학에서는 완전한 덕에 도달하기 위해 7가지 덕을 닦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7가지 덕이란 하느님과 관계된 덕인 동시에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초자연적인 덕목인 믿음, 소망, 사랑인 3가지 덕과 인간이 윤리적 행동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용기, 절제, 지혜, 정의라는 4가지 덕을 말합니다. 이 중 인간이 노력해야 할 4가지 덕목을 ‘사추덕(四樞德)’이라고도 부릅니다. 여기는 추(樞)는 요체이며 근본이라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인들은 7가지 덕을 꾸준히 연마하여 완덕(完德)에 도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부자청년이 예수께 와서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겠습니까? (마르10:17)”하고 묻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한 이 청년은 아마도 수준 높은 교양과 예절을 갖춘 신앙인인 것 같습니다. 십계명의 조항을 다 준수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을 실천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합격할 만한 사람이고 그래서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께 뭐를 더 채워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이 이야기는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고 불리는 마태오, 마르코, 루가 복음에 모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비교해 보면, 마르코 복음만이 “예수께서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하시며(마르10:21)”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마태오와 루가복음에는 이 구절이 없습니다. 아마도 마르코 복음저자는 그러한 수준에 도달한 청년이 참 대단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후에 나오는 대목인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라는 구절 앞에 마태오 복음만이 그러한 행위를 하는 목적인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마태 19:21)”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이유는 그 청년이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함이요,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 제2독서 중,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 4:12)”라는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교양 있고 예의 바른 그 청년의 영혼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그래서 그것만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최후의 집착’을 건드리십니다. 그러자 그는 그동안 채워 놓은 그 많은 것들에도 불구하고 결국 예수님 곁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기 위해 체크리스트를 확인하듯이 율법조문을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그 준수유무를 확인하기 보다는 내 존재가 전적으로 봉헌하길 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여기 제대 위에 있는 초처럼 자신을 태워 빛을 내듯이 말입니다. 여기서 초가 크던 작던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태워, 달리 표현하면 자신을 봉헌하여 어둠을 밝힌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 부자쳥년은 베드로를 비롯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보다 재산도 많았고, 율법을 비롯한 여러 훌륭한 교육을 받은 학식 있고, 교양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설교 서두에서 인용했던 “manners maketh man”이라는 문명화된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때때로 안식일에 손도 씻지 않고 빵을 먹는 ‘야만적인’ 제자들보다 훨씬 뛰어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교양이 떨어지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고, 교양 있는 부자청년은 예수님의 제자되는 길을 포기했습니다.
저는 오늘복음을 가지고 기도할 때, 서품식 때 주님의 제단 앞에 엎드려 기도했던 때를 회상했습니다. 만일 그 때 제가 그 청년처럼 이렇게 저렇게 쌓아 올린 것들만 드린 것이라면, 저는 여전히 제 깊숙한 곳에 있는 마지막 패를 갖고서 예수님의 제자‘처럼’ 살고 있을 것이고, 그 때 저의 마지막 패까지 아니 저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그 모든 것까지도 주님께 드렸다면 저는 ‘온전히’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성경말씀과 설교를 들으면서 완덕(完德)의 길로 나아가고자 오랜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부자청년처럼 망설이고 머뭇거리는 것이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여러분 각자가 깊은 곳에 감추고 싶고 그래서 선뜻 내놓기 힘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십계명을 잘 준수하고 용기, 절제, 지혜, 정의라는 사추덕을 잘 닦아서 교양 있고 예의 바른 신앙인이 되었다고 해도 어쩌면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처럼 뭔가 어수룩한 사람들보다도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에는 뭔가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것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것이란 바로 ‘온전한 봉헌’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도 물론 필요하지만, 하느님의 도우심과 하느님의 은총이 결정적으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연약한 존재라서 하느님의 은총 없이 우리 힘만으로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듯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은총의 옥좌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받아서 필요한 때에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히브 4:16)”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완전한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지금 여기서(hic et nunc)’ 맛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생활은 세속사회에서 말하는 단지 예절과 교양이라는 차원, 그리고 전통적인 교회의 수덕신학이 말하는 덕을 닦는 차원을 초월한 하느님의 은총으로 ‘축성된 생활(vita consecrata)’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축성생활로 변화해야 하는 이유는 온전히 ‘봉헌되신 분(The Consecrated)’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우리가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드리는 이 전례에서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고, 그것들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축성되어 영성체를 통해 내 안으로 들어올 때 우리는 이 축성생활의 신비를 경험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완전해지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신앙인은 이 구원의 신비를 믿고, 소망하고, 흠모합니다.
죄인인 우리를 완전한 사람으로 불러 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