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2주일
언제쯤이나 미장원을 다녀올 수 있을까? 하는 일상적인 일들을 고민하게 되네요^^ 머리는 산발이고 퐁퐁이 제일 먼저 떨어지는? 이상한 상황들을 살고 있는, 아니 견디어 내고 있는 요즘입니다. 다들 조금만 더 건강에 유의하면서 힘내시길 바랍니다.. 누구는 이런말을 하면 신부님 살아보십시오~~ 하시겠지만 요즘은 지지고 볶아도 부인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하게 되네요^^ 옆에 있는 그 누군가의 소중함에도 감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마음으로는 늘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말씀이죠. 신학자 칼라너 역시 ‘말씀과 기도’ 오늘 말씀에
‘신앙이란 하느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생 동안 견뎌 내는 일입니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공감이 갑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을 말할 때 인생길이란 표현을 씁니다. 인생 도로라고 말하지는 않죠.
도로는 우리가 네비게이션을 따라 안내 받듯이 한정되고 모든 것이 명확합니다.. 물론 시작과 끝이 있죠. 그래서 여기에서 저기까지 가기 위해서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길은 다르죠. 길은 명확하지 않기에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하고 자신이 어디쯤에 있는지 알기 어려울 때가 있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닥칠지 또는 예상하지 않던 일들을 겪게 되기도 합니다. 또한 길에는 시작과 끝이 없기에 그 길에서 무엇을 보게 될지 미리 알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인생은 도로보다 길과 더 깊이 관련됩니다.
그 길을 걷는 우리는 근심, 불안과 연결된 많은 물음을 하게 되죠. ‘앞으로의 직업, 자녀들 문제, 어떻게 그것을 이룰 것인가? 노년에는 어떤 일이 일어 날 것이가? 어디에서, 어떻게 죽게 될 것인가? 그리고 죽음 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부활을 직접 겪게 된 여인들도 길에서 그렇게 물었을지 모릅니다. 그들의 물음은 길을 걷는 인간에게 떠오르는 모든 것을 현재화합니다.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무거운 돌을 누가 굴려줄 것인가?”
그들은 이에 대해 서로 논의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걷죠..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 큰돌이 이미 굴려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큰돌!! 우리 공동체 여러분들도 저마다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우리를 억눌렸던것, 억압했던것, 고통을 안겨주었던 것, 불안을 안겨 주었던 저마다의 돌들을 안고 있다는 거죠. 하지만 큰 돌을 앞에 두고 여인들이 체험 했던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을 신뢰하고 계속 전진했을 때 사라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다는 거죠.
성경은 거듭 말씀하죠. 그 돌은 ‘이미’ 굴려져 있어다. 길을 떠나면서 자신을 하느님의 길에 맡기는 사람은 무덤을 막은 돌이 우리 삶을 종결하는 돌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 하느님의 돌보심은 ‘이미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기 때문입니다. 아멘...
이번 한주도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길을 은총으로 만들어 가시길.. 매 미사때마다 여러분을 봉헌합니다...